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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이 말하는 예수 (요한복음 20:30-31)

by 【고동엽】 2022. 9. 20.

성경이 말하는 예수   (요한복음 20:30-31)


예수님을 눈으로 직접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보기 전에는 믿지 못하겠다는 도마에게 예수님은 8일만에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도마에게 “네 손가락을 이리 내밀어 내 손을 보고 네 손을 내밀어 내 옆구리에 넣어 보라. 그리고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하셨습니다. 도마는 믿음이 적은 것이 아니라 없는 것입니다. 믿음은 겨자씨만큼만 있어도 산을 옮길 수 있습니다(마 17:20). 그런 의미에서 예수님은 도마에게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 믿음은 어디서 생기는 것일까요?

첫째, 주님을 만나는 체험을 통해서 믿음을 가질 수 있습니다.

비록 이것은 적은 믿음이지만 도마에게 나타나신 주님은 지금도 믿음 없는 사람을 찾아 오셔서 확신 주십니다. 엠마오로 내려가던 두 제자에게도 주님은 나타나셔서 확신을 주셨습니다(눅 24:13-35). 그러나 주님을 만나는 경험은 개인의 환경, 성격, 신앙정도 등에 따라 그 방법이 각각 다릅니다. 어떤 분은 기도 중에 주의 모습을 보기도 합니다. 어떤 분은 성경을 읽다가 주님을 만나고, 교회에서 봉사하다가, 혹은 밤중에 꿈속에서 만나기도 합니다.

둘째, 주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깁니다.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롬 10:17)” 도마는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져보고 믿음이 생긴 것이 아닙니다. 주님이 오셔서 말씀하실 때 그 말씀을 듣고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하고 믿음을 고백한 것입니다. 즉 그는 주님을 만나고 주님의 말씀을 들을 때 믿음이 생겼습니다. 엠마오로 가던 두 제자도 예외는 아닙니다. 여기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과 주님의 음성을 듣는 경험이 결코 서로 다른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더구나 부활 승천하신 이후 우리가 주님을 육체적으로 만날 수는 없습니다. 우리는 말씀 속에서 주님을 만나고 주님 앞에서 말씀을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말씀의 묵상이 없이 꿈이나 환상 속에서 주님을 만나는 경험만 찾고 있다면 신비주의에 빠지고 맙니다.

사도 요한이 예수님의 행적을 다시 기록하게 된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오직 이것을 기록함은 너희로 예수께서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심을 믿게 하려 함이요 또 너희를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예수님을 만나보지 못한 사람들에게, 예수님의 음성을 직접 듣지 못한 사람들에게 이 성경을 읽고 배우는 가운데 주님을 만나고 주의 음성을 들으며 도마와 같이 “나의 주시며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 고백하는 복된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오늘 아침 우리는 성경을 통해 예수님이 누구신가를 분명히 깨닫고 그분을 만나는 시간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1. 예수는 하나님의 아들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그 당시 사람들도 알지 못했습니다. 까닭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사람들이 인자를 누구라 하느냐”하고 물었을 때 “더러는 세례 요한, 더러는 엘리야, 어떤 이는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의 하나라 하나이다”라고 하였습니다(마 16:13-14). 병자를 고치고, 귀신을 내 쫓는 권세를 보고도 오히려 ‘저가 바알세불을 힘입어 귀신을 쫓아낸다’고 비방했습니다. 그들은 예수님이 행하시는 이적을 보고서도 예수님께서 자신을 하나님과 동일시하는 것을 용납하지 못했습니다. 자신을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는 사실 때문에 ‘참람하다’고 하였습니다. 죽이려고 했습니다(요 10:33).

사람들은 결국 예수님을 욕하고 때리고 십자가에 못박았습니다. 수치를 당하게 하려고 여인을 비롯한 많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옷을 벗겼습니다. “네가 하나님의 아들이면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와 보라. 그러면 우리가 믿겠다”고 하며 비웃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하나님의 아들이셨습니다. 십자가에서 내려와 사람들을 깜짝 놀라게 하고 벌벌 떨게 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십자가에 매달게 한 것은 쇠못이 아닙니다. 죄인을 향한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이 아픔을 누군가 당해야 했기 때문입니다. 만약 주님이 당하지 아니하시면 우리 모두가 당해야 했기에 아픔과 비웃음을 참으셨습니다.

그러나 세례 요한은 예수님을 처음 보는 순간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고 증거 했습니다(요 1:34). 예수님께서도 친히 “나와 아버지는 하나이니라”(10:30) 하시면서 아버지를 보여달라는 빌립의 요구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14:9)고 안타까워 하셨습니다. “내가 아버지 안에 있고 아버지께서 내 안에 계심을 믿으라. 그렇지 못하겠거든 행하는 그 일을 인하여 나를 믿으라”(14:11)고 하셨습니다. 다만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분명히 고백한 사람이 있습니다. 예수님의 십자가 처형을 지휘했던 백부장입니다. 그는 이 모든 사실을 목격한 후에 “이는 진실로 하나님의 아들이었도다”(마 27:54) 하고 고백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예수님이 하시는 일을 보면 그 분이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병자를 고치고 죽은 자를 살리시는 일은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귀신을 쫓아내고 바람과 바다를 꾸짖어 잠잠케 하는 일은 하나님만 하실 수 있는 일입니다. 예수님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이런 일을 하심으로 당신이 곧 하나님의 아들이심을 믿게 하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곧 하나님의 아들이요 하나님임을 믿는 것이 곧 신앙입니다. 그러므로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것은 하나님을 믿는 것이요,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것은 하나님을 보는 것이며, 예수 그리스도를 안다는 것은 하나님을 안다는 것입니다.

2. 예수는 그리스도이십니다.

이 말이 얼른 이해가 가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우리는 지금까지 아무 생각 없이 ‘예수 그리스도’란 말을 사용했으니까요. 심지어 어떤 분들은 예수가 성(姓)이고 그리스도는 이름인 줄 아는 분들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예수님의 또 다른 이름입니다. 예수님께서 가이사랴 빌립보 지방에 이르렀을 때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 물으셨습니다. 이 때 시몬 베드로가 대답을 했지요.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마 16:16). 그런데 마가복음에는 이렇게 나왔습니다. “주는 그리스도시니이다”(막 8:29).

그리스도란 말은 ‘기름부음을 받은 자’ 즉 메시야란 뜻입니다. 일반적으로 구약시대에 머리에 기름을 부어 직임을 맡긴 경우는 세 가지가 있었습니다. 왕을 세울 때 기름을 부었고(삼상 10:1, 16:13), 선지자를 세울 때(레 8:12, 시 133:2), 그리고 제사장을 세울 때(왕상 19:6) 기름을 부었습니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그리스도란 말은 이 삼중직을 가지고 계신 분이란 뜻입니다.

처음에 예수님은 선지자의 자격으로 오셨습니다(신 18:15-19). 히브리서 기자는 ‘모든 날 마지막에’ 하나님은 아들로 말씀하셨다고 했습니다(히 1:1,2). 그의 가르침은 당시의 서기관들과는 달랐습니다. 권세가 있었습니다(마 7:28). 과거의 어떤 예언자들보다 더 분명히 아버지 하나님을 세상에 알리셨습니다.

그런데 이 선지자가 십자가로 직행하셨습니다. 그는 친히 세상의 모든 죄를 짊어지셨습니다(요 1:29). 그리고 그는 희생제물의 어린양과 제사장이 되셨습니다(히 9:12,14,25,26). 자기 자신을 통해 죄를 정결케 하셨습니다.

마지막으로 그는 하늘에 오르사 높은 곳에 계신 위엄의 우편에 앉아 계십니다(히 1:3). 잠깐동안이지만 천사들보다 못하게 지음 받은 그가 죽기까지 고난을 참으시더니 이제는 왕으로서 “영광과 존귀로 관씌움 받으신 것입니다(히 2:9). 그는 말씀하셨습니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족속으로 제자를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찌어다 내가 세상 끝날 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마 28:18-20).

그런데 세례 요한은 예수를 친척으로만 알았지 그리스도로 알지 못했습니다. “나도 그를 알지 못하였으나” 라고 한 말이 그런 뜻입니다. 예수님의 아우들도 그저 형님으로만 알았지 하나님의 아들, 구주, 그리스도로는 알지 못했습니다. 예수님께서 십자가에 죽으시고 부활하신 후에야 그리스도로 알고 믿었습니다. 요한은 예수님의 행적을 일일이 다 기록할 수는 없었습니다(요 21:25). 그러나 오직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 그리스도이시며,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 영생이 있음을 믿게 하려고(요 20:30-31) 기록한 것입니다.




3. 예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사도 요한은 그의 복음서 서두에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요 1:4). 예수님도 친히 말씀하시기를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요 14:6). 또 요한일서는 이렇게 시작합니다. “태초부터 있는 생명의 말씀에 관하여는 우리가 들은 바요 눈으로 본 바요 주목하고 우리 손으로 만진 바라. 이 생명이 나타내신 바 된지라 이 영원한 생명을 우리가 보았고 증거하여 너희에게 전하노니 이는 아버지와 함께 계시다가 우리에게 나타내신 바 된 자니라”(요일 1:1-2).

‘생명의 말씀’이란 생명을 주는 말씀입니다. 자신에게 생명이 있을 뿐 아니라 그 생명을 나누어주는 말씀을 말합니다. 창세기 1장에 보면 셋째 날에 “땅은 풀과 씨 맺는 채소와 각기 종류대로 씨 가진 열매맺는 과목을 내라”하시니 생명 없는 땅이 식물을 냈습니다. 어떻게 무생물에서 생물이 나옵니까? 생명 없는 땅에 생명의 말씀이 함께 하시니 생명체인 풀과 나무를 낸 것입니다. 생명 없는 물에 생명의 말씀이 함께 하시니 물에 생명 있는 물고기들로 번성케 된 것입니다. 이처럼 생명의 말씀은 창세기 1장에도 이미 있었고 그 일들을 하고 있었습니다. 이것을 창세기에서는 ‘가라사대’ 즉 ‘말씀하시기를’ 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보이지 않던 생명의 말씀이 눈에 보이게, 느낄 수 없던 생명의 말씀이 느껴지게 우리들에게 나타나신 것입니다. 요한은 이것을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요 1:14)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이처럼 말씀이 육신을 입고 우리에게 보이도록 나타내신 분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은 곧 생명이십니다. 예수님 안에는 생명이 있습니다.

아버지는 자기 속에 있는 생명을 아들에게 주셨습니다. 그 아들 예수님은 생명이시기 때문에 누구든 그와 접촉하기만 하면 살아났습니다. 아니 그 음성만 들어도 살아났습니다. 나인성 과부의 아들(눅 7:14)이 살아났습니다. 회당장 야이로의 딸(막 5:41)이 살아났습니다. 그뿐인가요? “나사로야, 나오너라” 부르시니 그 음성을 듣고 죽은 지 나흘이 되어 썩어있던 나사로가 수족을 베로 동인 채 나왔습니다(요 11:44). 문둥병자, 혈루증, 간질, 중풍, 소경, 앉은뱅이, 귀머거리, 혈기 마른 자, 귀신 들린 자…. 그 누구도 예수님의 음성만 들으면 살아났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의 음성을 들으려 하지 않습니다. 왜냐하면 자신이 죽은 줄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사실 자신이 죽은 줄 알면 그는 산 사람이지 죽은 사람이 아닙니다. 육신이 죽은 사람이나 영적으로 죽은 사람이나 죽은 사람은 자신이 죽은 줄을 알지 못합니다.

또한 영적으로 죽은 사람들은 자신들에게 생명의 주님과 접촉할 수 있는 기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지금은 그냥 이렇게 살다가 죽을 때가 되면 예수를 믿겠다’고 합니다. 그러나 우리가 언제 죽을지 압니까? 주님은 말씀하십니다. “보라 지금은 은혜 받을 만한 때요, 보라 지금은 구원의 날이로다”(고후 6:2). 주님이 열어두신 구원의 날에 주님 앞에 나와 그의 음성 듣기를 거절하면 마지막 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서 그의 음성을 듣게 될 것입니다.

출처/황의봉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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