십자가의 흔적 (갈6:14-17)
옛날 노예가 팔리던 시대 사람이 사람으로 인정받지 못하고 물건과 소유물로 취급받던때엔 그 사람이 평생 노예이며 특정한 소유임을 확인시키는 낙인이 있었습니다. 인두로 종의 몸에 문신을 새기는 표시를 '스티조' 라 합니다. 헬라어입니다.
교도소에서 보면 재소자의 상당수가 이상하게도 몸에 문신을 새겨놓고 있습니다.
지울 수 없는 자기만의 특별한 표입니다. 그것을 지우려하면 더욱 흉칙한 흔적을 남겨 버립니다. 육체에 남겨진 어떤 흔적!
지울수 없고 지워져서는 안되는 낙인과도 같은 자기만의 흔적을 가지고 살았던 신앙인이 있습니다. '바울'입니다.
여기서 흔적이라는 말의 의미는 '스티그마'인데 노예들의 낙인인 '스티조'에서 나온 말입니다. 바울이 가진 스티그마는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였습니다.
"내가 내몸에 예수의 흔적을 자졌노라" 하였는데 그 흔적은 육체에 새긴 문신같은 십자가가 아니었습니다. 예수님을 만나고 나서 그의 마음 속에서 한 순간도 사라지지 않고 시간이 갈수록 더욱 선명하게 새겨진 마음판의 십자가 흔적이었습니다.
<육체적 흔적>
사람들은 육체를 가지고 살아가는 동안 어떤 모습이든지 자신안에 남앞에 드러낼 수 있는 어떤 자기만의 흔적을 남기고 싶어합니다. 육체적인 자랑에 속하는 것들입니다.
특히 유대인들에게는 하나님의 선민됨의 표시인 할례가 중요한 육체적 흔적으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것은 지금도 마찬가지입니다. 낳은지 팔일만에 사내 아이들에게 행하는 생식기 끝을 칼로 잘라내는 할례의식이 하나님 백성됨의 표가 되어 있었는데 당시 예수그리스도를 믿은 이방 사람들에게 유대계 그리스도인들은 할례를 행하여 확실한 하나님 자녀됨의 표를 갖도록 요구하였습니다. 그리고 이것은 매우 설득력있게 다가와서 많은 이방 그리스도인들이 할례를 다시 받으려는 어처구니 없는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유대인 그리스도인은 '할례'라는 의식 하나로 자신들의 이력서를 화려하게 장식하고 싶어했습니다. 처음엔 그렇지 않았는데 어느 순간엔가부터 세례이외에 할례가 더욱 거룩한 표로 인정받게 된 것입니다.
내가 어떤 직분을 받았다. 나는 누구에게 세례 받았다 등이 차별됨의 표로 나타나기 시작할때 그 모든 것들은 자기자랑의 표가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기의 구원 이외에 어떤 다른 차별화된 표가 영적 이력서에 등장된다면 그건 다 자기자랑에 빠지는 육체의 표가 됩니다.
바울사도가 예수님을 만나기 이전 그의 육체적 이력서는 화려했습니다. 유대인중의 유대인으로 베냐민 지파에 소속되었고, 팔일만에 할례를 받았으며, 바리새인이며, 로마의 시민권을 가졌으며, 가말리엘의 최고학부 문하생이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을 믿고난 이후의 그의 이력에는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어떤 다른 이력이 없습니다. 구원파가 말하는 것처럼 ○월 ○일의 기록도 없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 다른 기록이 첨가된다면 그건 다 자기자랑일 뿐입니다. 여러분의 영적 이력서에는 '주님의 십자가' 라는 한줄의 문장이외에 그 어떤 이력도 지우시기를 바랍니다. 직분이나 학위나 업적은 그리스도인의 이력이 될 수 없습니다. 이제 처음 믿으시는 분들이나 오래 예수님을 믿는 분들이나 우리의 이력은 다 똑같습니다.
'예수그리스도의 십자가' 입니다.
매우 안타깝게도 아직 여러분의 영적 이력서에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라는 피로 새겨진 붉은 글씨를 채워 넣을 수 없는 분들이 계십니까?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러면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한 형제가 되고 자매가 됩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에서는 형제 자매라는 호칭이 공통적으로 사용됩니다.
누구도 높고 낮음이 없기 때문입니다. 직분은 있어도 직위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직위는 이력이 되어도 직분은 이력이 되지 않습니다. 저의 목사의 섬김직이 직위가 아닙니다. 직분입니다.
분명히 직분은 모두가 갖고 있지 않습니다. 모두가 가질 수 있는 직도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자랑할 수 있는자가 가질 수 있는 섬김의 역할입니다. 그런 점에서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은 어떤 작은 일이 되었든 직분은 있어야 한다고 믿습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기 위하여 나누어진 직분(職分)으로 '나눌분(分)'이기 때문입니다.
<십자가를 자랑하는 자>
바울사도는 십자가를 자랑한다는 이 독특한 영적 의미를 아주 독특하게 설명하고 있습니다.그것은 못박힘 곧 '죽음'입니다.
생명의 원리는 죽음에 있습니다.
생명은 죽음으로만 설명되어집니다.
"한 알의 밀알이 땅에 떨어져 죽지 아니하면 한 알 그대로 있고 죽으면 많은 열매를 맺느니라"(요 12:24)
이 세상에 희생과 헌신없이 저절로 나타나는 생명은 없습니다.
함께 살아가는 부부도 나의 존재과시를 위해서 상대방의 희생만을 요구할 수가 있고 상대방의 존재 인정을 위해 나를 양보하며 죽일수가 있습니다. 그런데 나의 행복을 위한다고 상대방의 자존심을 살려주지 못하고 짓누르면 남도 행복하지 못하고 상대방도 행복하지 못합니다.
얼마전 TV에서 깨어진 가정이 기독교 가정사역 프로그램인 '아버지 학교'를 통하여 회복 되어지는 내용을 소개하는 것을 보았습니다. 적어도 한 가정이 이혼하여 파탄지경까지 갈때에는 그에 따른 서로의 이유가 있을 것입니다. 그런데 회복되어지는 것은 그 원리가 간단합니다. 한편이 어떤 깨우침으로 스스로 자기를 죽일 수 있는 힘을 얻게 된 때문입니다.
이 세상에서 죽음의 힘만큼 강한 것은 없습니다.
나를 학대하여 자포자기로 죽는 죽음만큼 무가치한 것이 없는 것이지만 내가 아닌 상대방을 위하여 또 무언가를 위하여 죽음을 각오하는 건 생명을 변화시키며 역사를 바꾸어 놓습니다. 미워서 원수같았던 아내가 그리고 남편이 불과 며칠 사이에 완전히 뒤바뀌어서 서로 손을 꼬옥 부여잡고 있는 모습은 기적같은 감동이 아닐 수가 없어 보였습니다. '죽음의 힘' 인 것입니다.
바울사도가 기독교 역사의 거대한 흐름을 한세기동안 거의 자신 혼자의 힘으로 움직여 갈 수 있었던 그 힘이 무엇이었을까요. 바로 이 말씀입니다. '자기 죽음의 경험' 인 것입니다.
"그러나 내게는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외에는 결코 자랑할 것이 없으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세상이 나를 대하여 십자가에 못박히고 내가 또한 세상을 대하여 그러하니라"
그는 죽음을 이중적으로 표현하고 있습니다.
첫째는 내앞에 세상을 못박는 것입니다.
개인적 욕망을 펼칠수 있는 현장으로서의 세상을 장사시키는 자기만의 의식을 행한 것입니다. 세상이 존재하지만 자기 자신 앞에서의 세상은 죽여 땅에 장사한 것입니다. 이제 그 앞에 펼쳐진 세상은 로마 시민권을 가진자의 특권을 행사할 수 있는 곳이 아니었습니다. 위대한 학벌로 이룰 출세의 현장도 아니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만을 자랑하고 전할 세상만이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둘째의 죽음은 이제 정반대로 세상앞에 자기를 죽이는 의식이었습니다.
이것은 선언적 의미가 있습니다.
'세상이여 바울은 죽었노라'는 자기선언인 것입니다.
한국 초대 목사였던 김익두 목사님에 대한 일화는 우리에게 많이 들려진 이야기입니다. 그가 평양 깡패였다가 예수를 믿고 나서 자신이 활보하던 지역에 '김익두는 죽었다'는 부고장을 돌린 이야기입니다.
'과거의 나는 죽었소 그리스도안에서의 변화된 미래만이 내게 있을 뿐이오'
우리는 이 아름다운 자기 죽음의 선언자가 되어야 합니다.
여러분이 예수님때문에 못박아야 할 세상이 있습니까?
바울사도에겐 복음의 삶으로 헌신되었기에 그 자신에게 있었던 세상 영광의 수단들이 못박혀야 할 세상에 속한 것이었습니다만 여러분은 다른 것이 있습니다. 좋지않은 습관이라든지 헛된 욕망같은 것입니다.
그러나 무엇보다 더 중요한 죽음은 자기 죽음의 선언입니다. 이 선언이 없다는건 변화가 없다는 것을 말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내 생애속에 들어옴으로 인해 세상을 향하여 말할 수 있는 자기 존재의 선언인 것입니다.
몽테뉴는 자신의 수상록에서 이런말을 했습니다. 인용해 봅니다.
"인간 생애의 목적은 죽음이다 이것은 필연적이고 목적이다
죽음은 가장 평범한 사실이므로 죽음을 멀리하거나 잊어버리는 것은 목적에서 이탈하는 어리석음이다 오히려 우리는 날마다의 생활에서 죽음과 가까이 지내야 한다"
또 그는 이런 표현도 했습니다.
"죽음의 준비는 자유의 준비이다"
육체의 죽음의 의미와 정신적 죽음의 의미가 사실은 별개가 아닙니다.
육체적 죽음의 현장을 비슷하게 경험해본 자가 정신적으로 새로운 인생으로 변화되는 것을 우리는 보게 됩니다.
저는 개인적은 좌우명으로 바울사도가 고린도전서 15:31에서 고백했던 '날마다 죽노라' 는 표현을 삼고 있습니다. 바울사도는 이 표현을 하면서 이런 전제를 달았습니다.
'나의 자랑을 두고 단언하건데' 라고 말입니다.
이것은 그의 행복의 비밀이었습니다.
여러분 보십시오!
하나님은 이 세상을 생명과 죽음이라는 두가지의 신비안에 묶어 두셨습니다. 자연속에 어떤 것도 영원히 존재하지 않습니다. 죽음이 있으며 죽음은 나은 생명을 잉태하는 원리입니다. 파멸에 빠진 인간을 살리는 것도 생명의 어떤 기운이 아니고 죽음의 결과였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그 위대한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온 인류를 죽음과 파멸에서 구원한 것입니다.
여러분이 더 나은 삶을 살기 원하십니까!
첫째는 나를 위한 그의 죽음속에서 소망을 얻는 것이며
둘째는 현재의 삶속에서 내가 죽어져야 할 것이 무엇인가를 날마다 발견하면서 자기죽음을 선언하고 또 감당하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이상한 게임을 하고 있습니다.
문화가 발달할수록 그 게임은 광기를 더해갑니다.
그것은 내가 사는 게임이요, 남을 죽이는 게임이며, 계속 쾌락을 즐겨가는 그리하여 그 안에서 어떤 행복을 찾으려는 게임입니다.
그러나 단언하건데 거기엔 생명도 행복도 완전한 기쁨도 없으며 그런 삶을 고집하는 동안 파멸의 구렁텅이로 한걸음씩 가까이 갈 뿐입니다. 자유인줄 알지만 그것이 곧 구속입니다. 그러나 지혜자는 죽음을 봅니다. 그 죽음의 준비속에서 자유를 경험하는 것입니다.
신앙생활이 무엇입니까?
창조자를 위한 인생이요 이웃을 위한 인생으로 사는것입니다.
새 생명을 주시려고 십자기 지신 주님의 그 희생적은 삶을 그 십자가의 형상을 내몸에 흔적으로 박고 살아가는 사람들입니다.
주일성수가 무엇입니까? 또 십일조 생활은 무엇입니까?
그것을 법으로 원칙으로 묶어서 요구하려 하면 궁생해 집니다.
안식일 준수나 십일조 생활이 율법적인 의미가 강하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을 섬기기 위해 기본적으로 필요했던 구약시대 율법적 요구들을 복음안에서 자원하여 지킬뿐입니다.
주일 하루도 온전히 쉬면서 하나님께 예배드리지 못하고 신앙인이 될수 있겠습니까?
소득의 십분의 일이 나를 위해 쓰이지 않고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쓰여지게 하지 못한 신앙생활이 제대로 유지될수 있겠습니까?
안되는 것이니까 구약시대에 하나님은 법으로 구속한 것입니다.
시간이야 내가 누구에게 드리든 상관이 없지만 물질은 내가 마음대로 쓰게되면 "오른손이 하는것을 왼손이 모르게 하라"는 말씀앞에 걸리며 그것이 자신에게 유익이 안되니까 공동체인 교회가 관리하는 것입니다.
스티그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흔적을 가집시다.
그 흔적으로 사는 그리스도인이 되십시오.
출처/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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