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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속의 우상 (수7:22-26)

by 【고동엽】 2022. 9. 20.

마음속의 우상   (수7:22-26)

'우상' 은 하나님을 섬기는 이스라엘 백성들이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늘 넘어지게 하는 올무요 빠뜨리게 되는 함정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항상 하나님을 슬프게 하고 그래서 징벌을 받게 될때면 그 이유가 '우상숭배'가 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에게 신앙 생활에서 가장 힘들고 중요한 싸움이 '우상'임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우상이 무엇일까요?
그것은 실제하는 어떤 힘이요 존재가 아닙니다.
오직 마음을 빼앗아가는 허상의 힘입니다.
믿음의 좌소는 우리의 마음입니다. 그런데 그 마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또 점차 그 영역을 넓혀가는 힘이되니까 무서운 존재가 실제로 되고 마는 것입니다.
그리고 우상에는 어떤 특별한 성질이 있습니다.
오직 자기 자신만을 위해 존재하는 어떤 힘이라는 사실입니다. 우상을 두고 사는 사람은 그 우상을 오직 자기 자신의 영광과 이익만을 위해 사용합니다. 우상에는 '더불어'라는 개념이 없습니다.
야곱이 하란에서 떠날때에 그의 아내 라헬이 자기 집에 있는 소종한 물품인 드라빔을 훔쳐 나옵니다.
이 사실을 나중에 알게된 라반이 군사들을 이끌고 뒤쫓아와서 드라빔을 내놓으라고 실랑이 하는 장면에서 라헬은 거짓말로 속이는데 그 라헬이 가지고 온 드라빔은 가문의 축복을 부르는 우상이었던 것으로 고고학적 발견을 통해 확인된 바가 있습니다.
하나님만을 바라보며 살아야 할 신앙인의 마음에 눈에 보이는 작은 물건이나 형상을 우상으로 품고 그것을 의존하려는 어리석은 생각이 마음을 지배하는 모습입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을 의존하고 하나님 아닌 다른것으로 내것을 삼으려는 태도는 그래서 우상숭배로 취급됩니다. 탐심이 곧 우상숭배인 이유입니다.
겉으로 보이는 형상으로서의 우상보다 더 중요한 것이 마음을 지배하는 힘으로써의 우상인 것입니다.
본문에 나오는 아간의 범죄는 그래서 탐심으로서의 우상을 숭배한 대표적인 범죄가 됩니다.

<더렵혀진 이름>
여리고와의 가나안 첫번째 전쟁에서 하나님이 우려하신 것이 있습니다.
'물질'이었습니다.
전쟁의 승리가 가져올 결과는 기쁨만이 아닙니다. 강하고 부유한 성읍이 함락되는데 거져 얻어질 물질인 전리품은 얼마나 많을 것입니까!
전쟁에서 죽이는 것은 살인이 아니고 전쟁에서 취한 것은 도둑질이 아닙니다. 때문에 '견물생심' 이라고 보면 갖고 싶은 본능이 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 여리고성 싸움에서 싸움의 성격을 분명히 했고 원칙을 세우셨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이 싸우시는 전쟁입니다.
그들이 칼과 창과 활로 나가 싸우는 것이 아니라 일곱바퀴를 돌고 함성을 지르다가 성이 무너지게 함으로 이기도록 하셨습니다.
둘째는 긍휼없는 싸움입니다.
정탐군을 도와주었던 라합의 가족 외에는 모든 사람을 진멸토록 했습니다. 하나님만을 섬기는 선민 이스라엘의 나라가 되어야 했기 때문입니다.
셋째는 전리품을 개인이 취하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옷한벌 금가락지 하나도 자기 것으로 취해서는 안되었습니다.
거룩한 하나님의 백성으로 살아가야 할 이스라엘 민족에게 하나님은 그들에게 필요한 은혜를 공평하게 준비하시고 베푸시기를 원했습니다.
그런데 자기만의 이익을 위해 물질을 취한다면 결국 믿음의 공동체가 세워질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세라의 아들 '아간'이라는 인물이 여기에 범죄자로 나타나게 됩니다.
모두가 다 잘 지켰는데 이 한 사람이 그것을 지키지 않았습니다.
그는 몰래 50세겔의 금덩어리 200세겔의 은 그리고 고급 외투 한 벌을 자신의 장막안에 숨겨놓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그 다음의 전쟁인 아이성의 전투에서 작은 성임에도 불구하고 패하게 하심으로 이스라엘로 하여금 한 사람의 범죄를 캐내도록 했습니다.
하나님은 항상 공동체를 통하여 역사하십니다.
한 사람의 범죄 역시 방관하지 않으십니다.
좋은 공동체일수록 좋은 나라일수록 한 사람의 중요성이 큰 법입니다. 이스라엘은 가나안 안에 그런 나라를 세워야 했기에 아간 한 사람의 범죄를 묵과하지 않으신 것입니다.
성경에는 '아간'이라는 불의한 이름 하나만을 적고 있지 않습니다. 그의 아버지 세라까지 기록되고 있습니다.
의로운 사람들이 나올때에도 항상 그 아버지의 이름 심지어 할어버지의 이름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게 됩니다.
자녀의 영광이 아버지의 영광이 되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자녀의 불의가 아버지의 이름까지 먹칠하게 됩니다.
우리나라도 자식이 범죄할대 아버지의 이름이 나왔으면 좋겠다고 생각을 해 봅니다. 한 사람이 영광을 얻을때 꼭 그 어머니와 어버지의 이름이 실렸으면 좋겠습니다.
가까운 일본이라는 나라는 범죄자가 적기로 유명합니다.
10만명당 감옥에 가 있는 사람의 수는 미국이 519명인데 반해 일본은 37명이라 합니다.
우리나라는 몇명인지 정확한 통계를 모르겠습니다.
왜 그렇게 범죄자가 적을 수 있는 것인지 이유는 있습니다.
한 살인자가 감옥에 갇혔습니다.
그러나 15년의 감옥 생활동안 그를 면회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습니다.
그가 옥에서 나올때 부인과 아들이 왔지만 절대로 자기가 사는 동네에 오지 말라고 단절을 하기 위해 왔을 뿐입니다. 그 사이에 결혼한 세딸들은 그를 상대하지를 않으며 손주들은 얼굴을 모릅니다.
범죄한 자가 철저하게 사회로부터 심지어 가족 공동체로부터 단절될수 밖에 없는 무서운 체면문화의 풍토 속에서 범죄를 저지른다는건 쉬운 일이 아닐 것입니다.
그들도 동양적 체면문화가 존재하고 우리에게도 존재하는데 그들은 '확실한 체면'을 지키고 우리는 '형식적 체면'만을 유지하는 차이의 결과라 생각됩니다.

<모든것을 빼앗아간 재물>
아간은 불의한 물질의 우상을 자기 천막안에 땅을 파고 묻어두었습니다.
마음속에 탐욕의 우상을 품은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아셨습니다.
하나님은 다른것은 몰라도 하나님의 마음으로 채워져야할 성령의 집에 우상이 한부분을 차지하고 있는 것을 용납하지 아니하십니다(고후6:15). 그것은 드러내고야 마십니다.
드러내기만 하지 않습니다. 그에따른 엄청난 손실을 함께 경험하게 하십니다.
이 일로 인한 최대의 피해자는 먼저는 자기 자신이었습니다.
그는 파멸되고 말았습니다. 그 다음의 피해자는 가족과 기타 재산이었습니다.
상황의 심각성때문이었는지 가산이 다 불태워졌으며 가족들도 죽임을 당했을 가능성이 있어 보입니다.
그 다음의 피해자는 민족과 나라 전체였습니다. 자기 이익만을 추구한 탐욕의 우상숭배는 가장 사랑해야할자로부터 차례차례 손실을 입혀간것입니다.
아마도 아간이 얼른 자신의 죄를 고백하지 못하고 오랫동안 숨긴것이 이렇게 용서없는 무서운 형벌로 나타났는지 모릅니다.
200만이 넘는 민족 공동체 안에서 한 사람의 범죄자를 찾느라 제비뽑아가는 과정이 쉽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시간이 적게 걸리지도 않았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그 화살이 자신을 피해갈 것을 기대하며 오래 버텼습니다.
오늘 우리는 아간의 경우를 보며 충분히 그럴 수 있는 나의 성향을 거울로 보게 됩니다.
물질적인 어떤것이 하나님보다 더 소중하여 도둑질하듯 내것으로 삼고 그 욕심의 소산을 내 안에 깊이 감추어 둘 뿐 아니라 무사히 그 화살이 지나갈때까지 피해가기를 기대하며 있는 모습인 것입니다.
그러면서 많은 시간과 날들을 보냅니다. 그러는 사이 처음 가졌던 십자가복음의 열정도 사라지고 은혜도 없어지며 속에 간직되어야 할 알맹이는 다 썩혀 없애버리고 겨우 습관적인 껍질의 신앙만을 둘러쓰고 살아가게 되는 위험인 것입니다.
마음안에 우상은 무섭습니다.
한부분을 차지하고 들어오면 곰팡이가 번식되듯 암세포와도 같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내 온 몸을 점령해 가는 것입니다.

<아골골짝의 돌무더기>
신앙생활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과 봉사와 헌신으로 자라가는 것입니다. 지식은 솟구쳐 나오는 샘물과 같습니다.
새로 채워지는 것이 없이 건강한 신앙생활을 한다는건 불가능합니다.
믿음이 들음에서 난다(롬10:17)는 말씀은, 계속 들려져야 할 새로운 지식의 깨달음이 필요함을 이야기 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계속되어져야 하는 변화를 의미하기도 합니다.
젊은 세대와 기성세대가 차이가 나는 이유가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젊은 세대들은 새로운 지식의 습득이 강하게 이루어지지만 기성세대는 과거의 것으로 기존있는 그것을 그대로 유지만 하는 세대라는 점입니다.
그래서 기성세대는 보수적 경향이 강하고 젊은이는 진보적 경향이 있는 것입니다. 기성세대는 변하지 않으려 하며 젊은 세대는 변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은 마르지 않는 샘물입니다. 진리의 무한한 보고 입니다. 우리는 하나님앞에 서는 그날까지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내 마음을 건간하게 채워야 합니다.
그래서 늘 새로운 마음으로 바른 봉사와 헌신이 되게 하여야 합니다.
여러분은 처음 신앙의 때처럼 늘 새로운 진리의 말씀으로 채워가고 있습니까!
육체는 생명을 다하면 쇠잔하지만 영혼은 그래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나이가 들수록 더욱 생기 발랄한 건강함을 유지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오늘 묵상하는 아간의 이야기는 신앙의 한 실패자의 이야기입니다.
마음을 건강하게 유지하지 못하여 결국은 사단의 밥이 되는 인생의 본보기인 것입니다.
한 사람의 신앙의 실패는 그 사람 하나로 끝나지지지 않습니다.
신앙은 결코 개인적이지가 않습니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네가 어찌하여 우리를 괴롭게 하였느뇨 여호와께서 오늘날 너를 괴롭게 하시리라"
때문에 내가 어떤 공동체에 속하느냐는 대단히 중요한 일입니다. 어떤 공동체느냐에 따라 그런 사람을 만들어내기도 하고 없게 하기도 하는 것입니다.
아간은 죽임을 당했습니다.
그 곳엔 커다란 돌무더기가 생겼습니다.
'아골 골짜기의 돌무덤'이 무엇을 가르쳐 주고 있습니까!
그것은 상징물이 되었습니다.
소돔성에서 도망가던 롯과 그 두 딸과 아내가 그 가던 길에서 하나님의 명령을 어기고 마음 한쪽에 크게 자리잡은 물질의 우상을 떨어내지 못하여 뒤돌아봄으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아내의 형상과도 같습니다.
창세기 1장에서 요한계시록 22장까지를 역사를 따라 발걸음을 옮겨가다보면 곳곳에 상징물들이 세워져 있음을 보게 됩니다.
오는 세대에 교훈을 주기 위해 남겨놓은 것들입니다. 거기
엔 거룩한 기념비적 상징물도 있으며 부끄러운 아간의 돌무덤도 있습니다.
한우리공동체는 그 역사가 짧아서 아직 내놓을만한 상징물이 없습니다.
그래도 아간의 돌무덤 같은 부끄러운 상징물이 없음을 감사합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계심으로 인하여 그런 상징물들이 없게 되기를 바랍니다.
여러분이 여기에 계심으로 인하여 앞으로 영광의 상징물들이 세워지는 좋은 교회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임종학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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