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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라 (신 10:12-15,고전 15:47-49)

by 【고동엽】 2022. 9. 20.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라   (신 10:12-15,고전 15:47-49)


지난 번 제가 가 있던 수도원의 수도사의 모습은 한결같이 온화하고, 부드럽고, 밝았습니다. 그들은 잘 먹지 못하고, 잘 자지 못하고, 잘 입지 못하지만 늘 부요했습니다. 그들의 내면에 그리스도가 계시고 그리스도를 위해 모두 버린 흔적을 가지고 있는 분들이었습니다. 그들이야 말로 하늘에 속한 자입니다. 이 땅에 살지만 이들의 삶은 이 땅의 삶이 아닙니다. 이 땅과는 이미 이별하였습니다. 아미엘은 “어린 아이들 틈에서만, 우리는 이 지상에서 천국의 그림자를 엿볼 수 있다. 어린 아이들의 생활은 고스란히 하늘에 속한다”고 하였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세상에 속하지 아니한 자입니다. 세상에 살지만 세상의 것을 버리고 추구하지 않고 하늘을 추구하는 자입니다. 세상의 형상을 닮아가는 것이 아니라 하늘의 형상을 닮아갑니다. 사람은 어디엔가 소속이 있어야 합니다. 소속감이란 연대의식을 가지게 합니다.

우리 민족은 연대의식이 강합니다. 우선 우리는 “우리”란 말을 많이 씁니다. 나와 조금만 연관이 있어도 금방 가까워집니다. 어떤 외국인은 한국사람은 아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너그럽고, 모르는 사람에게는 말할 수 없이 인색하다고 했습니다. 이런 우리의 연대의식은 동질적인 모임을 많이 만들게 합니다. 초등학교 동창회를 비롯해서 대학 동창회까지, 종친회와 동향회, 군대 안갔다온 사람은 얼만 안되지만 재향군인회, 한번 해병은 영원한 해병이다, 해병대, 이런 모임들이 굉장히 많습니다. 사람에게는 매임병(stuckititis)이 있다고 합니다. 이 병은 아주 흔한 질병입니다. 사람들은 어디엔가 매여 있어야 편함을 느낍니다. 이런 소속감이 없으면 외롭고 살 수가 없습니다. 집에서도 부부가 서로 매여 있어야 좋은 겁니다. 서로 매여 있는 것이 자유롭고 편해야 합니다. 그런데 자꾸 이런 매임이 불편하고 부자유하게 느껴지니 이게 문제입니다. 매임에서 빠져나갈려고 하니 복잡하고, 힘이 듭니다.

오늘 성경의 본문에는 흙에 속한 자와 하늘에 속한 자를 구별합니다. 성경은 첫째 사람은 흙에 속한 자이고 둘째 사람은 하늘에 속한 자라고 합니다. 특별히 사도 바울은 로마서 5장에서 첫째 사람 때문에 세상에 죄가 들어왔고, 둘째 사람 때문에 죄에서 해방되었다고 합니다. 땅에 속한 자는 죄를 가지고 옵니다. 하늘에 속한 자는 죄를 해방시킵니다. 땅을 바라보면 두려움과 절망이 있습니다. 하늘을 바라보면 희망과 용기가 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바라볼 때는 물 위를 걸었습니다. 그러나 물을 바라볼 때에 물에 빠졌습니다. 우리가 눈을 어디에 두고 무엇을 추구하는가 하는 것은 중요한 삶입니다. 우리의 삶을 좌우하고 우리의 생명을 죽이기고 하고 살리기도 합니다. 땅에서 출세하고, 잘 되는 것 보다 하늘에서 잘 될 수 있도록 노력하십시오. 땅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지 말고 하늘의 형상을 닮으려고 애쓰십시오.

첫째,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이 있습니다.

흙에 속한 자는 첫째 사람 아담입니다. 첫째 사람으로 말미암아 죄가 세상에 들어왔습니다.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은 결국 죄인의 형상입니다. 성경에 나오는 첫번째 살인자인 가인의 모습을 보세요. 자기 아우를 쳐 죽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동생이 어디 있느냐고 물으시는데 “내가 내 아우를 지키는 자입니까?”라고 대드는 악한 모습입니다. 노아 시대의 모습을 보세요. “여호와께서 사람의 죄악이 세상에 관영함과 그 마음의 생각의 모든 계획이 항상 악할 뿐임을 보시고”(창 6:5)라고 하십니다. 세상에 죄가 꽉 찼습니다. 사람들의 모든 생각이 항상 악합니다. 예쁜데가 없는 사람들입니다. 이것이 땅에 속한 자의 형상입니다. 로마서 1:28-31에 기록한 땅의 사람의 형상을 보세요.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배약하는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라”. 세상에 악한 모습은 죄다 열거하고 있습니다. 못된 것만 골라 가지고 있는 사람들입니다.

또 바울이 디모데후서 3장에 열거한 말씀을 보세요. “말세에 고통하는 때가 이르리니”라고 합니다. 말세의 모습입니다. “자기를 사랑하며, 돈을 사랑하며, 자긍하며, 부모를 거역하며” 등입니다. 이 것이 이 땅의 형상입니다. 요즘 우리 주위의 사건들을 보세요. 사람이 사는 모습이 아니예요. 술김에 어머니를 칼로 난자해서 죽이고, 홧김에 길에 지나가는 사람을 마구 때려 주고, 온갖 술수로 다른 사람을 모함하여 명예를 훼손하고, 대낮에 모텔이 만원인 나라입니다. 어디 하나 맑은 물이 흐르는 것같지 않은 시궁창같은 세상입니다. 시궁창같은 청계천이 복원되어 고기가 노는 개천을 만들면 정말 사람들의 마음에 맑은 물이 흘렀으면 좋겠습니다.

사람이 사람답게 살지 못하면 동물보다 훨씬 못해요. 사람과 동물이 다른 점이 무엇입니까? 동물은 땅을 향해 살고, 사람은 하늘을 향해 삽니다. 동물은 먹기 위해 존재하기 때문에 입이 제일 앞에 나와 있습니다. 사람은 생각하는 존재이기 때문에 머리가 제일 위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영으로 살아야 합니다. 땅에 속한 자의 형상은 영이 없습니다. 그래서 땅에 속한 사람들은 동물적으로 삽니다. 지난 번 인도네시아에 갔을 때에 사파리 공원에 가 보았습니다. 맹수들을 방사하고 있는 곳입니다. 이 곳에 가서 표범을 안고 사진 찍었어요. 조련사가 표범을 제 무릎에 앉혀주고 한쪽 앞 다리를 제 어깨에 걸쳐 주는 거예요. 조련사는 자신 있게 해주지만 저는 왠지 겁이 났습니다. 발자국 소리도 내지 않고 살그머니 뒤돌아 나왔지요. 아무리 사나운 동물이라도 사람들의 머리에 꼼짝 못해요. 윌리엄 힌슨이란 분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동물 조련사가 사자가 머무는 동굴에 들어갈 때에 왜 의자를 들고 들어가는지를 설명합니다. 조련사는 회초리와 권총도 있습니다. 그런데 조련사는 의자의 네 다리를 사자를 향하여 들고 들어갑니다. 사자는 의자 네 다리에 동시에 초점을 맞추려고 하기 때문에 일종의 무기력증에 사로잡힙니다. 결국 집중력이 분산되고 온순하고 유약한 사자가 됩니다. 땅의 삶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다초점의 삶입니다.

요즘에 다초점 안경이 있니다. 세상에서의 다초점은 잘못하면 무초점이 됩니다. 이 때 무기력증에 사로잡히고, 용기를 잃어버리게 되는 것입니다. 다니엘이 보았던 느부갓네살 왕의 신상을 보세요. 이 신상의 머리는 정금, 가슴과 팔은 은, 배와 넙적다리는 놋, 종아리는 철, 발은 얼마는 철 얼마는 흙이었습니다. 이 신상은 이 세상을 의미합니다. 머리는 바벨론입니다. 가슴과 팔은 바사입니다. 배와 넙적다리는 헬라입니다. 종아리는 로마입니다. 발은 동서 로마제국의 분리를 의미합니다. 아무리 강한 나라가 있다고 하더라고 인간의 역사는 영원하지 못합니다. 강대국도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집니다. 아무리 강한 사람이라도 진흙으로 된 발에 의지하여 서 있고 보면 결국 조만 간에 무너지고 말 것입니다. 결국 세상의 형상은 그 발이 흙입니다. 금방 무너지고 마는 것입니다.


둘째, 그리스도는 하늘의 형상을 입으셨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본체이십니다.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지고 사람처럼 되셨습니다(빌 2:6-7). 그리스도는 사람의 몸을 입으셨지만 하늘의 형상입니다. 예수님의 제자 빌립은 실증주의자였습니다. 예수님께 “아버지를 보여주소서”라고 하였습니다. 이 때 예수님은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라고 하셨습니다(요 14:8-9). 예수님의 모습에는 하늘의 형상이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어떤 모습입니까? 예수님께서 친히 말씀하신대로 온유, 겸손입니다. 털깎는 자 앞에서 잠잠한 어린 양의 형상입니다. 아마 예수님의 형상을 생각하면 제일 먼저 생각나는 것이 이런 형상일 것입니다. 온유한 사람이 복이 있습니다. 왜냐하면 온유한 것은 그리스도의 형상이기 때문입니다. 사나우면 손해입니다. 왜냐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제가 아는 목사님은 교회 구내의 사택에 사십니다. 사택 마당에는 개가 여러 마리가 있습니다. 제가 이 교회 사택은 개판이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그 중에 한 마리 개가 어찌나 사나운지 제가 여러 날을 들낙거리는데도 들어가고 나갈 때마다 하얀 이빨을 드러내고 으르렁댑니다. 그러니 아예 그 개는 우리 안에 가두고 개고리로 꽉 묶어 두었습니다. 온순한 개들은 풀어놓지만 사나운 개들은 묶어 놓습니다. 사나우면 자기 손해입니다. 사나우면 자신의 자유도 구속받습니다.

히브리어의 ‘아나브’라는 말은 온유와 가난을 동시에 의미합니다. 온유한 자는 마음이 가난한 자입니다. 예수님은 온유하십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온유하실 수 있습니다. 헬라어의 온유라는 말은 ‘프라오스’입니다. 이 말은 사람에 대한 선의와 하나님을 높이는 태도를 의미합니다. 온유란 하나님께 대한 태도입니다. 하나님을 높이지 못하는 사람은 성경격 온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칼빈은 온유는 부드러운 태도에 살며, 오해에 쉽사리 노하지 않으며, 보복코자 하지 않으며, 자기에 대한 악의에 대하여 길이 참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온유에 대한 정의는 참 재미 있습니다. “적당한 경우에, 적당한 사람에게, 적당한 순간에, 적당한 기간동안 화를 낼 수 있는 사람이 온유한 사람이다”라고 합니다. 요한복음에는 예수님께서 “나는 ...이다”라고 하신 말씀이 많이 있습니다. 이 말씀은 헬라어로 “에고 에이미”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예수님께서 하나님이심을 증명하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이름 ‘야훼’는 “나는 존재한다”는 의미의 ‘하야’라는 동사에서 나온 말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자신의 이름을 “나는 스스로 있는 자이다”라고 모세에게 일러주셨습니다. 예수님은 나는 생명의 떡(6:35), 세상의 빛(8:12), 양의 문(10:7, 9), 선한 목자(10:11, 14), 부활(11:15), 생명, 길, 진리, 생명(14:6), 참 포도나무(15:1, 5)라고 하십니다. 예수님의 자신에 대한 말씀은 예수님의 형상을 의미합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우리는 그리스도의 형상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한결같이 부드럽고 온화합니다. 사납지 않습니다. 나는 태풍이요, 나는 집채만한 바위요, 나는 해일이요, 나는 우뢰와 폭풍이요 라고 말씀하지 않습니다. 한결같은 그리스도의 형상은 온유, 겸손, 털깎는 자 앞의 어린 양같은 여린 모습입니다. 고린도후서 4:4에는 “그리스도는 하나님 형상이니라”고 합니다. 골로새서 1:15에는 “그는 보이지 아니하시는 하나님 형상이요”라고 합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을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를 알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을 볼 수 있습니다. 하나님을 보았습니까? 그리스도를 본 자는 하나님을 보았습니다. 그리스도를 보았습니까? 말씀 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우리가 눈으로 보는 것은 희미하지만 마음으로 확실하게 볼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하늘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그리스도의 삶입니다. 그리스도의 삶은 그 자체가 하늘의 형상입니다. 변화산에서의 그리스도의 모습을 기억하십니까? 그 모습이 희어져 눈이 부셨습니다. 그리스도의 순결한 모습입니다. 그리스도가 아니면 될 수 없는 모습입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우리의 삶은 그리스도가 계시는 삶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삶에서 하늘의 모습이 나타나야 합니다.


셋째, 하늘에 속한 자의 형상을 입으십시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을 회복해야 합니다. 땅의 형상을 벗고 하늘의 형상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의 옷을 벗고 하늘의 옷을 입어야 합니다. 세상의 형상을 벗어야 하늘의 형상을 입습니다. 회개라는 말의 히브리어인 ‘테슈바’와 헬라어인 ‘메타노이아’는 똑같이 세상으로부터 돌아서서 하나님께 향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유진 피터슨은 회개란 하나님께는 ‘예’하고 세상에 대하여는 ‘아니오’라 말하는 것이라고 하였습니다. 창세기 6:9에는 “노아의 사적은 이러하니라. 노아는 의인이요 당세에 완전한 자라 그가 하나님과 동행하였으며”라고 노아의 치적을 설명합니다. 노아는 성경이 감히 의인이라고 할 만큼 하늘의 형상을 입은 사람이었습니다. 세상이 인정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늘이 인정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욥기 1:8에는 “여호와께서 사단에게 이르시되 네가 내 종 욥을 유의하여 보았느냐 그와 같이 순전하고 정직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며 악에서 떠난 자가 세상에 없느니라”라고 합니다. 욥은 하나님이 인정하는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입니다. 1:1에도 욥에 대한 같은 평가가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들이 욥을 보는 것과 하나님이 보시는 것이 동일하였습니다. 사람의 눈에만 순전하고 정직한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눈에 인정되는 의인이었습니다. 부럽지 않습니까? 하나님이 인정하는 하나님의 형상을 가진 사람입니다. 우리도 이렇게 하나님이 인정하는 의인이 되어야 합니다.

바울은 “내가 그리스도의 흔적을 가졌노라”고 하였습니다. 우리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흔적이 있어야 합니다. 누가 봐도 그리스도인으로 알 수 있어야 합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나이 40세가 되면 자기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우리는 하늘의 사람으로서 하늘의 형상이 얼굴에 나타나야 합니다. 직장의 동료가 나를 예수 믿는 줄을 모른다면 문제가 있습니다. “아니, 아무개도 교회 나간데”라고 한다면 우리에게 하늘의 형상이 없다는 말이나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의 모습이 하늘의 형상으로 변해가야 합니다.

제자란 주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받아 그분의 형상을 이루는 신자를 말합니다. 처음부터 그리스도의 형상을 가지는 것이 아니라 서서히 형상이 이루어져야 합니다. 사막의 교부들의 경우에 그들이 사막으로 피하는 것이야말로 세상에 동화되지 않는 길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세상에 동화되지 않고 하늘의 형상을 입기 위해 세상과 접촉하지 않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구체적으로 하늘의 형상이 무엇입니까?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4:19에서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하는 수고를 하노니”라고 합니다. 갈라디아의 성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바울은 해산의 수고를 합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이 그냥 쉽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니다. 그리스도의 형상은 해산하는 수고를 동반합니다. 각고의 노력으로 형상을 얻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자녀가 이 땅에 태어나기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 것처럼 자녀들에게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같은 해산의 수고를 해야 합니다. 여러분이 전도한 분들이 그리스도의 형상을 이루기 위하여 전도하신 여러분이 해산의 수고를 하셔야 합니다.

스티브 챈들러의 ‘꿈을 이루게 해주는 특별한 거짓말’이란 책이 있습니다. 저자는 어느 잡지의 기자였습니다. 이 책에는 저자가 1976년 아리조나 투산의 한 모텔에서 아놀드 슈왈츠제네거라는 무명 배우와 만나 점심식사를 하면서 인터뷰한 이야기를 적고 있습니다. 저자는 슈왈츠제네거에게 “보디빌딩을 그만 두셨다는데 뭘 할 생각입니까?”라고 물었습니다. 그는 “나는 헐리우드의 최고의 스타가 될 것입니다”라고 하였습니다. 저자는 아무리 봐도 오스트리아식 영어를 하고, 근육도 별로 매력이 없는 그가 대스타가 될 것이라고 상상이 되지 않았습니다. “무슨 수로 헐리우드 최고의 배우가 되겠습니까?”라고 물었을 때에 그는 “원하는 모습을 상상하면서 이미 다 이룬 것처럼 사는 거지요”라고 하였습니다. 아마 지금쯤 그는 캘리포니아 주 지사가 된 모습을 상상하고 있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의 모습을 상상하고 늘 모방하면 그리스도의 형상이 나타납니다. 상상은 중요한 형상입니다. 우리의 형상은 늘 상상하는 바로 그것입니다.

결론

하늘의 형상은 구체적으로 그리스도의 형상입니다. 그리스도를 닮는 생활을 통하여 그형상을 배울 수 있습니다. 토마스 아켐피스(1380-1471)는 독일의 가난한 직공의 아들로 태어났습니다. 그는 19세에 아우구스티누스 수도원에 들어갔습니다. 얼마 후 그는 종신 수도사가 되기로 서약을 합니다. 그가 1471년에 세상을 떠나고 다음해인 1472년에 ‘그리스도를 본받아’라는 책이 발간되었습니다. 이 책은 근 500년 이상 그리스도인들에게 성경 다음으로 많은 영향을 끼친 책입니다. 그는 이 책에서 그리스도의 생애를 묵상하고 본받으려고 애쓰라고 합니다. 이 책의 원래 제목은 ‘그리스도의 모방’(Imitation of Christ)입니다. 우리의 삶에서 그리스도를 모방하십시오. 예수님이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관심을 가지십시오.

유명 연예인을 닮으려고 애쓰고 모창을 하는 야간업소 가수가 있습니다. 너훈아라는 분도 있고, 조용팔이라는 분도 있어요. 그런데 이런 분들의 얘기를 들어보니 자신과 자신이 모방하는 그 연예인을 혼돈한다고 합니다. 늘 모방하면 내가 그리스도의 형상이 됩니다. 예수님이라면 어떤 식사를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오늘 어떤 옷을 입으실까? 예수님이라면 이럴 때 어떤 말을 하실까? 예수님이라면 어떤 일을 하실까? 우리의 매일매일 삶이 그리스도를 상상하고 그리스도의 형상이 지배하는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하늘의 형상대로 살면 하나님이 이렇게 말씀하실 것입니다. “보기에 심히 좋다”.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은 삶은 하늘의 형상을 닮은 삶입니다. 이런 삶을 사는 사람에게 하나님은 욥에게처럼 “내 종 아무개를 유의하여 보았느냐?” 하나님이 세상에게 자랑하고 싶어 어쩔줄 몰라 하실 것입니다. 이런 하늘의 형상으로 사는 또 한 주간의 삶이 되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성희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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