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붙잡아야 할 비젼 (요21:15-19)
인생을 망친 것은 실패가 아니라 그것은 꿈을 잃어버리는 것, 비젼의 상실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1965년 7월에 영국 웨일스의 시골에서 태어나 엑세터 라는 대학 불문과를 졸업한 여인이 있었습니다. 그녀의 나이가 25세가 되든 해에 그러니까 1990년이죠? 그때 두 가지 일을 이 여자가 당하게 됩니다. 하나는 어머니가 돌아가신 일이고 또 하나는 자기가 일하든 그 직장에 임시직으로 있었는데 해고를 당한 것입니다. 그래서 이 여인은 영어강사를 하기위해서 포르투칼로 떠납니다. 거기서 한 저널리스트 기자를 만나서 사랑에 빠져 그녀는 1992년에 결혼을 합니다. 그리고 다음해 제시카 라는 이름을 가진 예쁜 딸을 낳았습니다. 그러나 이 결혼생활은 3년이 못되어서 파경에 도달하게 됩니다. 별수없이 생후 4개월 된, 생후 4개월된 딸을 안고 이 여인은 다시 조국인 영국으로 돌아옵니다. 자기 여동생이 살고있든 에든버러로 돌아와서 단 방 한칸짜리의 아파트에 전세를 얻어서 거기서 정착하게 됩니다. 때로는 이 딸에 대한 보육비가 없어서 3년 동안 주당69파운드의 정부생활비 보조비를 받고 있었는데 때로는 이 보조비 마져도 끊어져 아기에게 우유를 먹일 수 없어서 맹물을 먹여야 하는 그런 비참한 생활의 나락으로 떨어졌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지경에서도 이 여인이 포기하지 않은 것이 꼭 하나 있었어요. 그것은 뭐냐 하면 작가의 꿈을 버리지 않았습니다. 할일 없이 아이를 유모차에 태워 가지고 공원을 돌아다니든 어느날 갑자기 이 여인의 머리 속에서 이야기 하나가 펼쳐져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 마자 아기를 한쪽에 뉘어놓고 고물 타지기를 끌어내어서 그것으로 이야기를 쓰기 시작했습니다.
1996년, 한 4년 전이죠? 6월에 원고 한 뭉텅이를 들고 이 여인은 어떤 출판사를 찾아갑니다. 그러나 출판사는 보기 좋게 거절을 했습니다. 또 다른 출판사 블룸스웰 이라는 출판사에 가져갔더니 한번 출판해 보죠. 그래서 그 이야기가 출판되었습니다. 그것은 연속 지나간 3년동안 영국이라는 경계선을 넘어서 미국 구라파의 전역, 세계40개국 한국을 포함해서 베스트셀러에 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이 소위 전세계 해리 포터의, 해리 포터의 신드룸 을 일으키고 있는 마법사이야기의 주인공인 '조앤롤링' 이라는 여인의 이야기 입니다. 이것은 상상력에 근거한 꿈, 버릴 수 없는 이 꿈에 대한 집념,이 희망의 제기의 한 드라마를 보여주고 있는 단면입니다.
오늘 우리가 함께 읽었든 본문에는 예수님의 제자였든 베드로의 제기의 드라마가 펼쳐지고 있습니다.예수님을 세번씩이나 부인하고 저주하고 떠나갔든 그는 어떤 의미에서는 실패자였습니다. 그러나 실패보다 더 불행한 것은 꿈을 잃어버린 것, 비젼을 상실해 버린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포함되어있는 요한복음 21장3절에 보시면 베드로는 이렇게 푸념하고 독백하고 있습니다. 나는 물고기나 잡으러 가겠다. 베드로가 가로되 '나는 물고기 잡으러 가노라'
여러분 예수님이 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으로 베드로를 만나주셨을 때 그리고 베드로를 제자로 부르셨을 때 주님은 이렇게 말씀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그러면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고, 사람을 낚아요? 그렇다 사람을 낚아야 한다. 너는 사람들에게 복음은 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변화 시키는 일을 해야 한다. 그래서 베드로는 그물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쫓아갔습니다.그것은 비젼이였습니다. '사람을 낚는 어부' 하나님의 사람들을 만들어 하나님의 나라를 위해서 살아야 한다. 그는 예수님을 부인하고 배신하고 떠나갔든 제자 베드로는 지금 이렇게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는 다시 물고기나 잡겠다. 옛날처럼 물고기를 잡겠다 베드로의 시간은 꺼꾸로,과거로 돌아가고 있었든 것 이였습니다.그러나 이것이 베드로의 이야기의 끝일가요? 아닙니다. 요한복음의 마지막장인 이 장은 베드로의 좌절과 절망을 그리고 있는 것이 아니라 베드로의 제기를 그리고 있습니다. 어떻게 베드로가 제기할 수가 있었을까요? 베드로는 스스로를 포기했어요. 그러나 스스로를 포기한 베드로를 포기하지 못한 분이 계셨습니다. 그분이 바로 베드로의 주님이 였든 예수그리스도 셨습니다. 주님께서 베드로를 제기시켜 주신 것입니다. 그러자 베드로는 다시 환상을 붙잡습니다. 비젼을 붙잡고 일어섭니다.
오늘 여러분 가운데 지나간 한해에 내 꿈을 잃어버렸고 내 삶이 좌절에 빠졌다면 오늘 우리는 베드로의 제기의 드라마에서 배워야 합니다. 우리는 어떻게 다시 한번 우리의 비젼을 회복하고 다시 일어설 수가 있을까요?
첫째로 할 일이 있어요. 그것은 '주님의 사랑을 확신 하십시요'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사랑을 확신 하십시요. 실패한 사람에게 있어서 제기의 의욕을 빼앗는 가장 무서운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 주변 사람들의 냉소적 시선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혹은 무관심입니다. 사람들이 더 이상 나에게 관심을 갖지 않습니다. 더러는 관심을 갖지만 그것은 싸늘한 조롱과 냉소의 시선일 때 우리는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제기의 의욕을 잃어버립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실패했지만 아무리 좌절했지만 내 곁에 나를 붙드는 따뜻한 사랑의 시선이 있다면 이 사람은 얼마든지 다시 일어설 수가 있는 것 입니다.
우리가 아~금년 이 첫째 달에 추천하는 책 가운데 하나가 이 강영우 박사가 쓴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라는 이 책자입니다. 이 책자는 맹인으로서 한국 최초의 박사였든 강영우 박사의 그런 일종의 글입니다. 자서전 적인 글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이 글에 보면은 자기의 차남 둘째 아들이었든 진영이의 이야기가 기록되고 있습니다. 둘째 아들 이 진영이가 아~ 중학교 일학년에 들어갔을 때 숙제 하나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 서슴지 않고 진영 이는 내가 가장 존경하는 사람으로 '마이클 죠단' 이라는 이 스포츠의 천재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그가 이 스포츠의 천재를 좋아하는 이유를 쭉 썼습니다. 그것이 중학교 들어가서 쓴 숙제에요. 그런데 조금 더 철이 들고 중학교를 졸업하는 중학교 3학년 때 공교롭게 꼭 같은 숙제를 봤습니다. 내가 존경하는 사람, 그때 진영이는 존경하는 사람을 바꾸었어요. 더 이상 마이클죠단 이 아니라 내 아버지라고 썼습니다. 맹인의 핸디캡을 디디고 일어나서 미국에 가장 존경 받는 사람 50사람 중에 한 사람으로 끼여서 수많은 어두운 사람들에게 빛을 전하고 있는 그의 아버지가 얼마나 자랑스러운지, 자기의 아버지를 가장 존중하는 사람이라고 썼습니다. 그런데 이야기는 거기서 끝나지 안습니다. 좀더 시간이 흐른 후에 진영이는 이렇게 쓰고 있습니다. 나에게 만약 다시 한번 똑같은 제목으로 글을 쓸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존경하는 사람이 또 바뀔 것 같다. 이번에는 틀림없이 나의 어머니가 될 것 같다. 내가 좀더 철이 들면서 생각해 보니까 우리 아버지가 그 어두움의 시간을 그 곤고한 시련의 시간을 견디고 일어설수 있었든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가만히 관찰해 보니까 그것은 엄마의 사랑이였다. 아빠를 변함없이 사랑해주고 격려해주고 그 곁에 머물러서 아빠의 눈이 되고 아빠의 손이 되고 아빠의 발이 되었든 우리 엄마, 그러면서 우리 자식들을 훌륭하게 키워준 우리 어머니의 사랑 때문에 우리 아버지는 아버지가 될수가 있었기 때문이다.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해리포터 의 이 마법사의 이야기의 저자인 조앤롤링의 이야기도 비슷한 것입니다. 결혼의 실패 후에 그는 죽어버리고 싶었습니다. 다시 일어날수 있는 힘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다행히 그 곁에 몇몇 친구들의 우정이 그를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었다고 그는 말합니다. 그를 여전히 믿어주었고 희망을 주었고 격려 할 수 있었든 친구들의 우정과 사랑이 아니였다면 그녀는 다시 일어설 수가 없었다고 말합니다. 그래서 이 마법사의 이야기를 전개하면서 주인공인 헤리의 단짝 친구인 론을 통해서 친구의 우정을 부분적이나마 투사 할려고 했다 라고 그는 말하고 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그렇습니다. 사랑이 있다면 우리는 일어설 수가 있습니다. 그러나 가장 사랑하는 친구에게 조차 가족에게 조차 버림을 받는다면 우리는 어디로 가야할 까요?
베드로에게 있어서 자기의 최대의 사랑은 이제 주님이였습니다. 그러나 베드로는 그 실패의 원인이 자기 자신에게 있었든 것은 사실이지만 아마도 주님 마져도 자신을 버렸을 것이라고 생각했을 가능성이 많습니다. 자기의 죄책감 때문 이였을 것입니다. 나 같은 제자를 우리 주님은 더 이상 상대하시지 않으실꺼야, 주님은 나 같은 사람을 더 이상 사랑하지는 않으실꺼야 이렇게 생각 했었을것입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21장의 이 마지막 장을 읽어보면은 어떤 사건이 베드로에게 일어납니까? 세가지 사건이 일어납니다.
첫째로 주님이 찾아오셔요. 베드로가 주님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주님이 도망치고 있는 베드로를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둘째로 베드로를 향해서 변화없는 사랑을 증명해 주셨습니다. 말로 한 것이 아니라 행동으로 하셨습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과 베드로의, 이 베드로의 타락이후, 배신 이후에 최초의 만남의 장면이 어떻게 이루어집니까? 주님은 바닷가에서 생선요리를 만들어놓고 이 제자를 기다리고 있었어요.생선요리의 향연을 준비하고 제자를 기다리셨습니다. 그리고 첫마디 음성이 뭔줄 아세요? 내가 만약 예수님의 입장이 였다면 나를 배신한 제자를 만났을 때 나는 무슨 얘기를 할까 저는 아마도 이런 얘기를 했을것 같아요. '네 죄를 네가 알렸다' 그렇지 않다면 '야!너 무슨 연유로 나를 배신했니?' 이렇게 한 마디는 따져 볼 것 같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제 일성이 뭔 줄 아세요? 베드로를 향한 제일성이 다른 소리는 없었어요. '조반 먹어라' 성경에 보면은 '조반 먹어라' 춥지? 배고프지? 식사해, 그리고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되는데요? '조반 후에' 15절에 저희가 조반 먹은 후에 대화가 시작됩니다. 식사가 끝나기 전에 '너 좀 얘기하자!' 이랬으면 소화불량 걸렸을 꺼에요.하하~ 그런데 주님은 기다리셨어요. 조반 먹은 후에 예수께서 시몬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네가 나를 아직도 사랑하느냐?' 나를 아직도 사랑하니? 이 말속에는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그 밑바탕에는 내가 너를 사랑한 것은 물론이고 내가 너와 더불어 확인하고 싶은 것이 있는데 그것은 네가 아직도 나를 사랑하느냐는 말이다. 자, 몇 번 물어셨습니까?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를? 세 번, 베드로는 세자리 숫자 알레지의 알레르기를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왜 그랬어요? 세 번 주님을 부인했으니까,그런데 세번씩 사랑을 확인하시는 이 주님과 대화를 하면서 베드로의 얼어붙은 가슴은 녹아 내리고 있었을 것 입니다. 한가지 결론 앞에 도달했을 거에요. '아!주님은 나를 아직도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주님은 아직도 나를 사랑하고 계시는구나, 이것이 베드로가 일어날수 있었든, 제기 할수 있었든 동기였습니다. 세상이 나를 버려도, 사람이 나를 버려도 그래요. 나의 주님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그리스도, 내 인생의 주인 되시는 예수님, 그리고 하나님이 나를,우리를 버리지 않는다면 사랑하시는 여러분 우리는 제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그러므로 이 하나님의 사랑 앞에 서 보십시요. 그 사랑을 다시 확인해 보십시요. 만져 보십시요. 그리고 그 사랑을 확신 하십시요.그러면 여러분은,나는,우리는 제기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다시 한번 환상을 붙들고 비젼을 보고 일어서기를 원하십니까? 둘째로 해야 할 일이 있어요.그것은 주님의 기대를 확인 하십시요 라는 것입니다. 주님의 기대를 확인 하십시요. 매우 일상적인 상식으로 말하자면 한번 내 기대를 져버린 내 제자,나를 배신하고 떠나간 제자에게 더 이상 기대를 거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다르셨습니다. 제자 베드로에게 찾아와 변화 없는 사랑을 확신 시켜 주셨을 뿐만 아니라 변화 없는 기대를 확인시켜 주십니다. 자,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세 번씩 물어신 후에 주님은 새로운 과제를 부여하셨습니다. 무어라고 말씀하십니까? 네 어린양을 먹이라고,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자,예수님이 제자 베드로를 처음 만나셨을 때 주셨든 과제는 테스크(task)는 어떤 의무였습니까? 나를 따라오라고, 내가 너를 사람을 낚는 어부가 되게 하겠다. '사람 낚는 어부' 이것을 기독교적인 개념으로 말하자면 전도자의 사명 이에요.사람을 낚는다,이것은 전도자의 사명입니다.그러나 내 어린양을 먹여달라고 키워달라고 양육시켜달라고, 이것은 목자의 사명이라고 할 수가 있습니다. 자, 여러분 전도자의 사명과 목자의 사명 중에 어느것이 더 힘들까요? 어느것이 더 어려울까요? 해보았어야 알죠?하하~
전도 해 보셨습니까? 전도한 사람을 키우고 양육해 보셨습니까? 그러면 쉽게 이렇게 얘기를 바꾸어 말하겠습니다. 자매들이 대답하시면 좋을 것 같아요. 아이를 낳는 것이 어렸습니까? 키우는 것이 어렵습니까? 네, 키우는 것이 어렵다고 훨씬 더 많이 여러분들이 얘기를 해주셨습니다. 저는 경험이 없지만 자매들 얘기를 종종 들어보면은 속에 집어넣고 다닐 때가 더 좋았다고, 그래요 키우는 것이 훨씬 어려울 거에요. 그런데 더 훨씬 더 어려운 과제, 이제 내 어린양을 먹이고 키워가는 일, 양육의 사명 목자의 사명을 주시고 있는 것이에요. 처음 그를 부르셨을 때 보다도 훨씬 더 엎그래이드 된 새로운 사명, 더 높은 차원의 사명을 주시고 있는 이 모습을 보십시요. 여기 중요한 메세지가 있습니다. 주님은 우리의 실패 때문에 우리에게서 기대를 철회 하지는 않으신다는 사실입니다. 어떤 신학자는 그래서 하나님을 가리켜 하나님은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God offer second chance, 두 번째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한번의 실패로 '나는 너하고 일 없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아니라 또 기회를 주시고 다시 기회를 주시고 또 기회를 주시는 하나님, 빌게이츠의 책에 보면은 '미래로 가는 길' 이라는 책에서 빌게이츠는 이런 말을 합니다. 내가 우리회사에서 사람들을 고용할 때 이제는 되도록 실패의 경험이 있는 사람을 많이 쓰겠다.뭐 실패가 위대해서가 아니에요. 그러나 실패했다는 사실만으로 고용하지는 않겠다. 나는 반드시 실패했든 사람들에게 이렇게 물을 것이다. 실패를 통해서 당신은 무엇을 배웠느냐? 실패를 통해서 레슨을 배운 사람, 교훈을 배운 사람에게 있어서 그 실패는 결코 실패가 아닙니다.그것은 성숙의 새로운 기회였든 것입니다. 주님은 제자 베드로가 실패를 통해서 훌륭한 교훈을 배웠다고 판단 하셨을 것입니다. 그래서 이제는 그에게 더 높은 과제와 더 높은 소명을 부여하십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을 위해서 주님이 실패했다고 우리를 버리시는 주님이 아니고 더 높은 계획을 더 높은 소명을 더 높은 비젼을 준비 하셨다면 이제 그 주님 앞에 서셔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새해의 길에 있어서 그 주님의 기대를 확인하시는 저와 여러분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세번째는 주님의 명령을 순종하십시요.우리의 꿈이 우리의 비젼이 회복되었다는 사실만으로 우리의 보람찬 미래가 저절로 보장되는 것은 아닙니다. 이제 우리가 붙잡게 될 그 비젼을 가지고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 중요한 질문이죠?
자,오늘 본문에 보시면 베드로에게 마지막 중요한 명령이 주어집니다. 자,19절의 마지막 부분에 보시면 주님이 베드로에게 어떻게 말씀하세요? 베드로에게 이르시되 어떻게요? '나를 따르라!' 사실 나를 따르라는 이 명령은 예수님이 갈릴리 바다에서 처음 베드로와 안드레 형제를 만났을 때 그때 주셨던 명령이죠? 나를 따라오라고, 베드로를 회복시켜 주시면서 다시 제기 시켜주시면서 다시 새로운 비젼을 보게 하시면서 또 다시 명령을 주십니다.
나를 따라오라고,그러나 따라갈 때 아마 주님은 다른 각오를 아마 부탁하셨을 것입니다. 사실 나를 따라오라는 것은 주님이 처음에만, 그리고 마지막에만 하신 말씀이 아니에요. 시시때때로 주님은 이 말씀을 또 하셨습니다. 나를 따라오라고, 우리가 흔들릴 때 마다 그 말씀을 지금도 주님은 우리에게 주시고 계십니다.
베드로의 타락직전에, 실패직전에도 주님은 단단히 각오하고 기도하면서 따라오라고, 나를 따라오라고, 기도하지 않으면 사탄에게 넘어진다고 그때 베드로가 어떤 반응을 보였는지를 여러분 기억하시죠? 어떤 반응을 했습니까? 베드로의 반응이? '주님 염려 붙들어 매세요 저는 주님을 위해서 옥에도 가고요. 죽을 준비도 다 되어있습니다' 아주 자신 만만하게 당당하게 대답을 했어요. 그러나 자신 만만하게 베드로는 잠시 후에 넘어졌습니다. 철없든 베드로, 아직도 자기의 연약함을 알지 못하는 베드로 였습니다.그러나 주님은 이제 달라진 베드로의 모습을 보고 있습니다.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라고 물었을 때 아마 타락이전에 실패이전에 베드로라면 어떻게 대답을 했을까요?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할 때, '주님 그걸 질문이라고 하십니까?' 아마 타락 이전이라면 베드로가 그렇게 대답했을 거에요. 그러나 베드로가 어떻게 대답합니까?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것을 어떤 톤으로 말했을까요? 제가 주님을 사랑하는 줄 '주께서 아시나이다!' 이렇게 대답했을까요? 아니면 나오지 않는 목소리로 기어들어가는 목소리로 쩔쩔 매면서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주님 아시잖아요' 이렇게 말했을까요? 아마 틀림없이 후자였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더 이상 자신할 수 없었어요. 그러나 자신 할수 없기 때문에 그는 겸손히 무릎 끓고 주님을 의지 할 수밖에 없는 베드로 였습니다. 이것이 중요해요.
자, 그러자 주님은 베드로에게 그의 생애에 마지막에 펼쳐질 광경을 보여주십니다. 18절에 보시면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가리라' 중요한 두 가지 대조적인 단어가 있어요. '젊어서는' 그 다음에 어떤 단어입니까? '늙어서는' 젊어서는 네가 네 마음대로 다녔다 네 충동대로, 네 본능대로, 네 느낌대로 네 마음대로 살았지, 마음대로 살다가 마음대로 넘어지고 그러나 늙어서는 네 마음대로 살수 없도록 내가 네 인생 속에 들어가 너를 꽉 붙잡으마 내가 억지로라도 붙잡으마,그리고 네 인생의 마지막이 승리가 되도록 간섭할 것이다.
19절에 보시면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아시고 베드로의 마지막이 영광이기 위하여 그 마지막이 승리이기 위하여 처음도 중요하고 과정도 중요하지만, 중요한 것은 여러분과 저가 인생을 끝내는 순간 그 마지막이 결산이 영광이고 승리가 되기 위하여 내가 이제부터 강권적으로 간섭하마, 너 그런 나에게 순종을 결단하고 나를 따라 올 수 있니? 바로 이런 뜻이에요. 이런 각오로 나를 따라올 수가 있느냐?
그렇습니다. 우리가 이 비젼을 이루기 위해서는 새로운 각오, 어떤 대가를 지불하고서라도 기꺼히 겸손히 주님의 능력을 의뢰하면서 따라가겠다는 이 각오와 결단이 필요한 시점입니다.
오늘 우리 민족은 중요한 딜레마에 빠져 있습니다. 제 2의 IMF가 오지않을까? 우려들이 우리 가운데 팽배해 있습니다. 우리 민족이 조금 경제적으로 물질을 가졌을 때 우리는 지나치게 교만했습니다. 사치했습니다.방탕했습니다. 저는 그런 의미에서 IMF가 이 민족을 향한 하나님의 채찍이였고 징계였다고 생각을 해요. 우리 민족이 정말 겸손할 수 있다면 하나님을 새롭게 다시 의지 할 수 있다면 저는 이 위기를 극복할 수 있다고 믿습니다.
한국 교회도 마찬가지 입니다. 한국 교회가 조금 부흥되니까 세계에서 가장 놀랍게 부흥된 한국 교회를 우리는 자랑했습니다. 부흥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부흥하고도 오늘 사회 속에 지탄을 받고 있는, 오히려 자랑할 수 없는 무력한 교회가 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교만 때문인지 모릅니다. 우리의 소명을 망각한 때문이였는지도 모릅니다. 저는 여기서 우리 교회가 또한 배워야 할 레슨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지나간 7년동안 하나님이 우리교회를 놀랍게 축복하시고 부흥케 하셨습니다. 그러나 저는 이것이 자랑 꺼리가 되어서는 안된다고 생각합니다. 그렇게 제 자신에게도 다짐 합니다. 사람이 많이 모였다는 사실만으로 전혀 자랑일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오히려 이것은 엄숙한 책임을 우리에게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제부터 우리가 어떻게 하느냐가 중요한 것입니다. 정말 우리교회의 21세기의 비젼처럼 민족을 치유하고 세상을 변화 시키는 교회가 되기 위하여 사람들을 하나님의 사람으로 만들어 정말 사회의 각 곳에 다시 그들을 보내어 사회 각 곳에서 우리교회 사랑하는 지체들을 통해서 이 땅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할 수가 있느냐? 그것을 위해서 우리 자신을 드릴 준비가 되어있느냐? 이런 책임을 우리가 확인해야 하는 오늘이라고 생각합니다.
베드로는 달라졌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를 다시 쓰셨습니다. 놀랍게 쓰셨습니다. 잠시 후 오순절에 부흥운동이 폭발했을 때 이 부흥운동의 한복판에 서있었든 주역이 하나님이 쓰신 사람이 바로 베드로 였습니다. 이제는 피상적인 자신감을 가지고 베드로가 일한 것이 아니라 자기의 연약을 알았기에 엎드려 성령의 능력을 힘입고 하나님의 도우심을 의지하면서 그는 세상을 변화 시키는 사도로서 살아갈 수가 있었든 것입니다.
강영우 박사의 '우리가 오르지 못할 산은 없다' 이책의 서론에 보니까 아기 독수리 이야기가 나와요. 로버트슐러 목사가 본래 했든 얘기인데 그분이 인용했습니다. 아빠 독수리가 나를 부르셨습니다. 절벽 끝으로 더 가까이 오라고 하셔서 다가섰습니다. 그랬더니 그는 나를 절벽 밑으로 떨어트리는 것이 였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때까지 내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몰랐습니다. 아빠 독수리가 아기독수리를 절벽 밑으로 밀어 내리는 순간 그것은 고난이였습니다. 어쩌면 불안이 없고 절망 이였을지 모릅니다. 나는 죽었다. 그러나 처음으로 필사적으로 살기위해서 날개 짓을 하는 순간 이 아기독수리는 자기가 날 수 있다는 사실을 발견합니다. 그 순간부터 그에게는 무한한 하늘의 공간이 비젼의 공간으로 변화되기 시작한 것입니다. 물론 아빠 독수리의 훈련은 계속 되었을 것 입니다. 이 아기 독수리가 아주 땅에 떨어질려고 하면 지체없이 아빠독수리는 내려와 그 날개를 펴고 아기 독수리를 안았을 것 입니다. 성경에 재미나는 것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광야생활을 하다가 시내산 산정에 왔을 때 하나님이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을 보고 이렇게 말씀하셔요. 내가 독수리 날개로 너희들을 업어서 여기까지 왔다. 그러나 그 독수리와 같은 하나님은 우리를 또 절벽아래로 밀어뜨리는 일을 할지 모릅니다. 그냥 내버려두는 것은 아니에요. 계속 내 곁에 다가오시면서 너는 날 수가 있다고, 날아야 한다고, 그리고 걱정하지 말라고 내가 너를 도와준다고, 이 하나님의 도우심을 하나님의 능력을 하나님의 사랑을 의지하면서 우리가 우리의 날개짓을 새롭게 할 수가 있다면 금년 안에 우리의 가정 교회 우리 민족의 미래는 새로운 가능성의 공간이 위대한 도전의 공간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습니다. 날개를 펴십시요. 하나님을 찬양하며 힘차게 오르십시요. 비젼의 새해가 우리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기도 하십시다.
일어나시겠습니다.
우리 아까 불렀든 복음성가 가사의 뜻을 기도하는 마음으로 부르시겠습니다.
주께 가오니 날 새롭게 하시고 주의 은혜를 부어주소서
내 안에 발견한 나의 연약함 모두 벗어지리라 주의 사랑으로
주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나의 눈 열어 주를 보게 하시고 주의 사랑을 알게 하소서
매일 나의 삶에 주뜻 이루어지도록 새롭게 하소서 주의 사랑으로
주사랑 나를 붙드시고 주 곁에 날 이끄소서
독수리 날개 쳐 올라가듯 나 주님과 함께 일어나 걸으리 주의 사랑 안에
손을 들었습니다. 그 손을 붙잡아 주시옵소서 우리 연약한 손 때로는 힘겨워 하는 이 손길들을 붙잡아 주시고 한해동안 사랑하는 주님이 인도해 주시옵소서 주님의 사랑을 믿고 주님의 능력을 믿고 겸손히 진지하게 주님을 따르겠습니다.
하나님 우리의 마음속에 부서졌든 꿈 흔들려야 했든 우리의 꿈들을 회복시켜 주옵소서 가정의 꿈을 교회의 꿈을 민족의 꿈을 회복시켜 주시옵소서 그래서 이 한 해 주님 때문에 우리의 비젼이 회복되고 우리의 비젼이 실현되는 영광스러운 한해가 되게 해 주옵소서
이제는 우리 주 예수그리스도의 은혜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 하심으로 성령의 교통케 하심을 오늘 말씀을 받고 또 눈 오는 이 빙판길을 왔다가 다시 가야할 성도들 안전하게 지켜주시고 운전대를 잡고 있는 손마다 핸들마다 주님 안전하게 축복하셔서 우리가 이 말씀을 받은 그 감격과 축복을 안고 따뜻한 한해를 향하여 나아갈 수 있도록 가정마다 사업마다 직장마다 축복해 주시기를 간절히 축원 하옵나이다.
아멘.
출처/이동원목사 설교 중에서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한 여인이 살린 조국 (엡4:13-17) (0) | 2022.09.13 |
---|---|
잊을 것을 잊게 하소서! (빌립보서 3:12-14) (0) | 2022.09.13 |
인정하심을 받은 후에 (약1:12) (0) | 2022.09.13 |
오병이어의 기적 (요한복음 6:1-13절) (0) | 2022.09.13 |
생명으로 충만한 아름다운 세상 (요11:25-26) (0) | 2022.09.13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