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으로 살리라 (히11:1-12)
옛날에 한 청년이 한양으로 과거를 보러 갔다가 한양에서 과거 대신 외국 선교사를 만나 예수님을 영접하여 기독교인이 되어서 돌아왔습니다.
보라는 과거는 안보고 예수쟁이가 되어 돌아온 아들을 부모님이 예수 믿지 말라고 핍박을 합니다.
매도 많이 맞았습니다.
아들에게 예수 귀신 붙었다고 무당을 데려다가 굿을 하고 난리가 났습니다.
부모님의 핍박을 견디다 못한 청년은 벙어리가 되고 말았습니다.
멀쩡한 아들 예수 믿는다고 핍박하다가 벙어리 만들어 놓았으니 부모의 마음이 얼마나 아팠겠습니까?
그래서 아버지는 아들에게 “네가 말만하면 네 소원 다 들어줄 테니 말만하라”고 사정을 하게되었습니다.
이렇게 한 3년이 지난 어느 날 그 청년이 입을 열었습니다.
그 한마디가“아버님! 어머님! 예수 믿으세요!”그랬다고 합니다.
이 청년은 벙어리가 된 것이 아니라 3년 동안 벙어리 행세를 한 것입니다.
그 청년의 아버지는 “도대체 예수가 누구길래 그토록 네 마음을 빼앗아 갔는지 어디 나도 한번 믿어보자”라고 하면서 예수를 믿기 시작했는데 마침내 온 가족이 예수 믿고 구원받았다고 합니다.
이 청년이 바로 누군가 하면 바로 여러분이 잘 알고 있는 신바람 박사, 아멘 박사의 주인공 황수관 박사님의 할아버지입니다.
황수관 박사는 자신의 가문을 자랑하면서 나의 할아버지는 아브라함처럼 우리 집안의 복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에 그 결과 내가 3대째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는 특권을 누리고 이렇게 축복을 많이 받게 되었다고 자랑했습니다.
그리고 하는 말이 내가 받은 가장 귀한 축복은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나서 어릴 때부터 예수를 믿게 되었다는 것입니다.
다시 말하면 자신이 믿음의 가문 예수님의 가문에 태어난 것이 가장 귀한 축복이라는 것입니다.
저와 여러분도 예수 믿고 아브라함의 자손이 되어 예수님의 족보에 오르게 된 것이 가장 귀한 축복 중에 축복인 줄 믿으시기 바랍니다.
성경에는 특별히 어느 장에서 무엇을 강조하는지를 기록한 것이 여러 곳 발견할 수가 있습니다. 예를 들면 고린도전서 13장은 사랑을 강조했고 15장은 부활을 강조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런가 하면 본문 히브리서 11장은 믿음을 강조하는 장입니다.
그래서 처음부터 끝까지 믿음 소리를 빼면 11장은 없어진다 할 정도로 믿음에 대한 이야기가 많습니다.
이 말씀을 보게 되면 우리도 믿음으로 살아야겠구나 하는 것을 믿음의 여러 조상들에게서 배우게 됩니다.
여러분!
시골에서 누에를 쳐 본 사람들은 잘 아실 겁니다.
누에를 치려면 뽕나무를 기르고 뽕잎을 따서 먹어야 합니다.
누에는 그 뽕잎을 먹고 자라서 곧 실을 만듭니다.
이 누에에게 '너는 뭘 먹고사느냐?' 고 물어 본다고 가정해 봅시다.
그러면 누에는 무어라 대답하겠습니까? 그 답은 당연히 '나는 뽕잎을 먹고살아요' 할 것입니다.
누에는 뽕잎 외에는 꿀을 갖다 줘도, 사람이 잘 먹는 불갈비를 갖다 주어도 거들떠보지 않을 것입니다.
오로지 뽕잎으로만 산다고 하는 것입니다.
또 송충이도 마찬가지로 솔잎만 먹고삽니다.
이와 같이 우리 그리스도를 따르는 신자들은 믿음으로 삽니다.
본문에 보게 되면 우리 믿음의 조상들의 믿음이 조금씩 다릅니다.
그 다른 믿음을 하나하나 살펴보면서 우리가 다 가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해봅니다.
그러면 우리는 어떠한 믿음을 소유해야 할까요?
오늘 본문을 통해 그 답을 찾아보면서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첫째로, 예배하는 믿음입니다.(4절)
본문 4절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더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림으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으니 하나님이 그 예물에 대하여 증거 하심이라 저가 죽었으나 그 믿음으로써 오히려 말하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옛날 우리 인간의 시조인 아담에게는 아들 형제가 있었는데 형은 가인이요, 동생은 아벨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아들 형제가 제법 다 커서 어른이 된 다음에 하나님께 형제가 한 날에 제사를 드렸습니다.
동생 아벨은 양을 치는 자인고로 양 중에서 제일 좋은 첫 새끼를 잘 키워 하나님 앞에 제물로 드렸습니다.
그리고 형은 농사를 짓기 때문에 농사지은 곡식 중에서 얼마를 취해 그것으로 떡을 만들어 떡 제사를 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이것이 오늘날 우리가 쓰는 말로 표현하게 되면 동생 아벨은 양의 첫 새끼를 가지고 드렸기 때문에 [번제]라고 하는 제사를 드렸고, 그리고 형은 농사지어 곡식으로 떡을 만들어 드렸기 때문에 [소제]라고 하는 제사를 드린 것입니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동생 아벨이 드린 번제는 받으시고 형의 제사는 받지 않으셨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에 노여움을 품은 형이 그만 동생을 돌로 쳐죽였습니다.
본문에 보면 "믿음으로 아벨은 가인보다 나은 제사를 하나님께 드리므로 의로운 자라 하는 증거를 얻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아벨의 제물에는 믿음이 있고 형의 제물에는 믿음이 없더라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믿음이 없는 제사를 받지 않으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믿음이 있고 없음을 제물을 보고 압니까? 하고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실 것입니다.
따져보면 형의 제사는 하나님 앞에 소홀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 이유는 떡 제사를 드릴 때 곡식을 빻아 가루를 만들고 기름으로 떡을 구워야 합니다.
기름이 빠지면 안 됩니다.
그 기름은 성령을 의미합니다.
기름뿐 아니라 향을 넣어서 향기롭게 한 후 반죽을 해서 구워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형 가인은 곡식을 빻아서 가루를 드리기는 드렸지만 거기에 기름을 치지 않았습니다.
향이 없습니다.
있어야 할 것은 다 빼고 적당히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이 제사의 교훈은 하나님 앞에 헌금하고 물질을 바칠 때 기름을 섞어라, 즉 성령의 감동하는 대로 바치라는 것입니다.
그 다음 향을 섞는데 그 향은 성도의 기도를 의미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 앞에 무엇을 바칠 때에는 반드시 기도하고 기도하는 마음으로 드려야 합니다.
그래서 가인의 믿음 없는 제사를 하나님께서 받지 않으셨던 것입니다.
그러나 아벨의 제사를 보게 되면 양떼 중에서 제물로 바칠 것을 일년 전부터 고르고 골라 잘 키웁니다.
반드시 새끼 중에 제일 첫 새끼를 선별하여 일년 뒤에 바칩니다.
그것도 기름진 첫 새끼, 그러니까 하나님이 다하라는 대로해서 드린 제물입니다.
제물을 보니까 믿음으로 드렸다는 것입니다.
오늘날의 제사는 예배를 가리킵니다.
여러분이 이렇게 나와 앉은 것도 제단을 쌓아 놓고 그 위에 제물을 올려놓는 것처럼 바로 이 제단에 내 몸을 불태운다 라는 의미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 봉사의 기본은 예배의 출석에서부터 시작된다는 것입니다.
항상 아벨처럼 정성을 다하여 믿음으로 드리는 예배를 하나님께서 받으시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알아야 할 믿음인줄로 믿습니다.[할렐루야]
두 번째로,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5-6절)
기뻐하는 믿음의 주인공이 누구입니까? 바로 에녹입니다.
에녹에 대한 창세기의 기록은 에녹이 60세에 하나님과 동행하며 자녀를 낳고 300년을 하나님과 동행한 후 하나님이 데려 가시므로 이 땅위에 있지 아니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동행이라는 말의 뜻은 하나님이 일 하시는 곳에는 반드시 에녹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하시는 일에 에녹이 참여했다는 말입니다.
여러분도 하나님의 일에 앞장서서 발벗고 나서서 일하시는 것, 이것이 바로 하나님과 동행하는 것임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또 에녹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믿음은 하나님께서 항상 옆에 계심을 믿었던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이 여러 사람 앞에서는 말조심하고 행동을 조심하니까 저 사람 예수 잘 믿고 거룩해서 저런다고 하지만 사람들이 없을 때가 문제입니다.
단둘이 있을 때는 할 말 못할 말 다하고 할 짓 못할 짓 다 하게 되지 않습니까?
그럴 때 여러분 옆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생각해 보십시오.
그 사실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인데 이것이 바로 에녹의 믿음이었습니다.
또 하나님을 찾는 자에게 상주시는 것을 믿는 믿음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믿음입니다.
왜냐하면 예를 들어서 내가 적당히 고등학교나 졸업하고, 혹은 대학교나 졸업하고 간판이나 따겠다고 하는 사람들은 학교 생활을 아주 등한히 하게 됩니다.
저게 학생인지 건달인지 분간이 안됩니다.
그러나 나는 졸업장이 문제가 아니라 일등상을 바라본다고 할 때에는 전혀 달라집니다.
상을 바라보는 사람과 전혀 바라지 않는 사람은 다르다는 말입니다.
에녹은 상주시는 것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천당 가는 것이 문제가 아니라 천당에서도 제일 가는 상을 받겠다는 믿음이니 그의 삶이 얼마나 아름답고 충성스러웠겠는가 하는 것을 생각해 보십시오.
그 결과 매사에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하나님 일에는 항상 동참하므로 기쁘시게 하고,
하나님께서 옆에 계신다는 것을 생각하며 살다 보니까 하나님이 기뻐하는 일만 하고, 그 다음에 하나님의 상 주심을 바라보기 때문에 온갖 충성은 다하고 그래서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고 하면 먼저 하나님을 기뻐해야 하고 하나님을 귀히 여길 줄 알아야 합니다.
예들 들어서 여러분들이 남편을 귀히 여기고 남편 자신이 기쁠 때에는 그 남편이 기뻐하는 일만 골라서 합니다.
그러면 그 남편을 기쁘게 하는 결과가 됩니다.
그러나 남편이 싫어지면 남편이 싫어하는 일만 골라서 하게 됩니다.
우리 하나님께도 마찬가지입니다.
하나님을 생각만 해도 너무 좋다고 생각될 때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만 하게 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도 그 믿음 가지시고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을 살아가시기를 바랍니다.
세 번째로, 경외하는 믿음입니다.(7절)
7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노아는 아직 보지 못하는 일에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함으로 방주를 예비하여 그 집을 구원하였으니 이로 말미암아 세상을 정죄하고 믿음을 좇는 의의 후사가 되었느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노아가 세 번째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게 되는데 하나님께서 그에게 경고하셨습니다.
앞으로 120년 후에 하나님께서 홍수를 내려서 세상을 물바다, 물 천지로 만들어 심판하겠다는 것입니다.
그러시면서 홍수 심판을 대비하여 큰배를 지으라는 겁니다.
1년 후도 아니고,
12년 후도 아니고,
120년 후에 일어날 홍수를 대비하여 방주를 짓기 시작해서 식구들을 구원했다는 것은 경고하심을 받아 경외하였기 때문인데,
이렇게 경외하는 자가 순종하는 법입니다.
여러분!
그 때 배를 짓는 장면을 상상해 보십시오.
나무 찍는 도끼가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톱이 제대로 있었겠습니까? 그런데도 어떻게 배를 지었는지 생각해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 엄청난 배를 120년 동안 지을 때 사람들은 손가락질하고 미쳤다고 하였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바닷가에다 배를 짓는 것이 아니라 산꼭대기에 지었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누가 미쳤다고 해도 또 아무리 내가 힘들어도, 아무리 시간이 많이 걸려도 하나님이 하라고 하시니까 나도 한다." 이렇게 마음먹고, 그래서 120년을 들여서 배를 다 만들어 놓았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하늘에서는 홍수가 나기 시작하고 땅에서는 샘이 터져서 삽시간에 이 세상을 물바다로 만들어 버렸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을 경외하는 노아의 가정은 모두 방주에 들어갔기 때문에 안전하게 보호받았던 것입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중요합니다.
제가 우리학교 연구원에서 공부할 때, 아주 훌륭하신 모 교수님께서 강의를 하시면서 이런 말씀을 하셨습니다.
교수님이 대학교 다닐 때 교회에 다닌 것은 믿음이 있어서 다닌 것이 아니라 어머니가 가자고 하니까 마지못해서 따라 다녔다는 겁니다.
그런데 어머니가 새벽기도회에 가셔서 기도를 너무 오래하고 오시니 까 매일 아침마다 학교에 가기 위해서 쩔쩔매곤 하였답니다.
그래서 한번은 "어머니 기도 좀 짧게 하고 오시면 이렇게 바삐 서두르지 않아도 될텐데요" 하고 불평을 하자 어머니가 하시는 말씀이 "얘야! 무슨 소리를 하는 거냐? 그래도 시간이 모자라는데!" 하시더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나중에 대학을 졸업하고 미국으로 유학을 가게 되었는데,
그때는 미국에 유학 가기가 하늘의 별 따기처럼 어려웠던 때라 웬만한 사람은 다 떨어졌다고 합니다.
하여튼 유학을 떠나서 미국의 공항에 내렸는데 안내방송도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고 합니다.
한국에서는 영어 제법 한다고 했는데 전혀 들리지를 않더라는 겁니다.
이때부터 고생이 시작되었는데 하도 힘들어서 보따리를 쌌다가는 "얘야! 그래도 시간이 모자란다" 하시면서 자기를 위해서 지금도 새벽마다 기도하시고 계실 어머니를 생각하면 용기를 얻어서 다시 풀어놓고 하기를 여러 번 되풀이하고, 이럴 때마다 어머니의 기도하시는 음성이 쟁쟁하더라는 것입니다.
결국 열심히 공부를 해서 소정의 학위를 마치고 국내 여러 신학교 교수를 거쳐 지금까지 우리 신학교 후배들을 가르치고 계십니다.
그러시면서 하시는 말씀이 자기 어머니는 많이 배우지는 못하셨지만 지금 생각해 보아도 어머니의 믿음은 정말 진짜였다는 것입니다.
만약에 어머니의 믿음이 가짜였다면 믿지 않았을 텐데 어머니의 믿음이 진짜였다는 것을 깨달았기에 어머니의 믿음을 이어 받았다는 것입니다.
아마 그분이 누구 신지는 여러분 중에서도 아시는 분이 있을 겁니다. 아주 훌륭하신 목사님이시고 교수님이십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노아를 보세요.
120년 후에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경고를 듣고 하나님께 대해서 충성하고 경외함으로 그 모든 준비를 해 나가는 것을 볼 때 그 자식들이 힘들고 고달팠지만 내 아버지의 믿음이 진짜였기 때문에 아버지를 도와 가면서 서로 협력하였고 가족이 모두 구원을 얻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이렇게 경외하는 믿음은 가족들에게 유산이 되고 그 다음에는 온 가족을 구원을 얻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네 번째로, 멀리 보는 믿음입니다.(8-10절)
8절에서 10절까지의 말씀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아브라함은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순종하여 장래 기업으로 받을 땅에 나갈 새 갈 바를 알지 못하고 나갔으며 믿음으로 저가 외방에 있는 것같이 약속하신 땅에 우거하여 동일한 약속을 유업으로 함께 받은 이삭과 야곱으로 더불어 장막에 거하였으니 이는 하나님이 경영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랐음이니라." 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무슨 뜻입니까?
아브라함이 큰 부자가 되어서 집을 잘 짓고 살수도 있었지만 늘 장막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지으실 터가 있는 성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달리 말하면 아브라함이 저 멀리 있는 천성을 바라보았던 믿음을 말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 조상들이 수백 년, 수천 년을 살아오면서 우리들에게 속담은 아니지만 속담 비슷한 가르침을 주는 말이 있습니다.
즉 "1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농사를 짓고, 10년 앞을 내다보는 사람은 나무를 심고 100년 앞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을 키운다." 는 말이 있습니다.
인재양성은 멀리 볼 수 있는 사람만 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늘이 아니라 10년, 100년 앞을 미리 볼 수 있는 것이 바로 믿음입니다.
10년, 100년 앞을 보는 사람은 인재를 키웁니다.
사람을 키우려면 100년을 투자하고 기다려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 교회도 우리 신학교도 먼 장래를 보고 사람을 키우고 양육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만 우리 교회와 우리 신학교에 미래가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100년이 아니라 수 천년, 아니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있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보고 고향 땅을 떠나라고 하셨을 때 순종하고 출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이 고향을 떠날 때의 나이가 75세입니다.
이것은 모험 신앙이라는 말로 표현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 때문에 다망해도 좋다라는 믿음이라고 해야 옳을 것입니다.
이제껏 이루어 놓은 자기의 기반을 나이 들어서 떠난다는 것은 거의 불가능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머나먼 세계를 바라보며 꿈을 꾸는 사람만 할 수 있는 엄청난 일입니다.
아브라함은 전혀 새로운 세상으로 이사를 했습니다.
그리고는 조상 대대로 해오던 우상을 만들어 팔던 자기의 직업을 바꾸고 양을 치는 목축을 하게 되었습니다.
믿음을 위해서 직업을 바꾸었다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많은 재산을 모았지만 아브라함은 항상 천막 속에서 살았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성경은 말하기를 아브라함이 본향을 바라보았기 때문에 이곳에서의 삶을 나그네의 삶으로 살았다고 했습니다.
나그네!
이 나그네는 지금 사는 여기에 정을 붙이고 살수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돌아가야 할 고향이 있기 때문입니다.
아브라함은 이렇게 세상에 정을 붙이고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나라인 본향을 그리며 살았고 본향을 위해서 투자했습니다.
이렇게 먼 곳을 바라보는 사람,
미래를 바라보는 사람은 오늘의 일 때문에 울거나 웃지를 않습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애굽에서 나와서 약속의 땅인 가나안을 향해서 갈 때에 가나안 땅을 바라다 본 사람은 오직 한 사람 모세뿐이었습니다. 모세는 온갖 불편, 고생, 불평, 원망들이 밀물 같이 닥쳐와도 다 이겨낼 수 있었는데 그는 멀리 있는 가나안 땅을 볼 수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백성들은 지금의 변화에만 신경 썼기 때문에 좋으면 웃었다가 불편하면 하나님과 모세를 원망하면서 지낼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그러기에 우리는 아브라함처럼 멀리, 저 멀리 바라보면서 살아가야 하겠습니다.
그래서 이 세상뿐만 아니라 영원한 세계를 바라보는 눈을 가질 때에 우리는 오늘보다 더 진실 되고 뜻 있게 살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멀리 바라보는 믿음, 이 믿음이 우리를 크게 하는 것이며, 이 믿음이 우리를 성공하게 하는 것입니다.
멀리 10년, 100년 앞을 바라보는 사람을 어떻게 당해낼 수 있겠습니까?
우리 인생도 멀리 볼수록 큰 사람이 되고 승리하게 된다고 하는 사실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능력 있는 믿음입니다.(11-12절)
11절과 12절을 보겠습니다. "믿음으로 사라 자신도 나이 늙어 단산하였으나 잉태하는 힘을 얻었으니 이는 약속하신 이를 미쁘신 줄 앎이라 이러므로 죽은 자와 방불한 한 사람으로 말미암아 하늘에 허다한 별과 또 해변의 무수한 모래와 같이 많이 생육하였느니라" 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 말씀의 뜻이 무엇입니까?
이번에는 [사라]의 경우인데 아브라함의 아내입니다.
나이는 90세나 되었고 출산을 할 수 없게 된지 오래되었습니다.
그렇지만 사라는 소망을 잃지 않고 믿음으로 아이를 해산하는 능력을 얻었습니다.
사라가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이 약해지지 않았을 때 출산의 능력을 얻으므로 사람의 생각과 경험으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 일어난 것입니다.
여러분!
사라는 비록 단산했었지만 하나님의 능력으로 이삭을 낳았고 이삭으로 말미암아 한 민족을 이루게 되었으며, 그래서 [사라]는 열국의 어미가 된 것입니다.
우리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사람이 실력을 잃어버리면 인생은 끝이 납니다.
즉 일할 능력을 잃어버리면 그 인생은 끝이 나고 마는 것입니다.
그렇지만 우리도 우리의 희망을 잃지 않고 믿음을 지키면 하나님께서 능력과 승리를 주실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소망이 없던 [사라]에게 출산의 능력을 회복해 주셨듯이 잃어버린 우리의 능력을 회복해 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이 믿음은 운동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혹시 여러분께서는 예수 믿으면서 신령한 능력을 잃어버린 분은 안 계십니까?
이 신령한 능력을 잃어버렸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생명은 끝난 것이나 마찬가지입니다.
그렇지만 이 시간 하나님께 기도함으로 그 능력을 다시 회복하셔서 [사라]가 민족의 어머니가 되었듯이 여러분의 인생과 가정에 이 회복의 은총이 생활 속에서 분명히 나타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리스도를 따르는 성도는 반듯이 능력 있는 믿음만이 성공을 합니다.
무능한 믿음은 성공하는 법이 없습니다.
결론지어 말씀드리면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 고 하였는데,
예배하는 믿음,/ 기쁘시게 하는 믿음,/ 경외하는 믿음,/ 멀리 보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 이 믿음이 오늘 여기 오신 여러분의 믿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생의 죄를 용서받고 의롭다함을 얻은 자들입니다.
이제 여러분의 삶이
믿음의 주요, 온전케 하시는 예수님을 바라보고,
예수님께서 십자가에서 몸 찢고 피 흘려 우리 죄의 대속물이 되셨음을 믿고 감사하면서,
주님이 십자가의 보혈을 통하여 우리에게 용서와 의의 땅을 마련해 놓은 것에 감사하면서, 굳센 믿음을 가지고 살아가시는 여러분들이 다 되시기를 바랍니다. - 기도하겠습니다.
[기도]
사랑의 아버지 하나님!
오늘도 주님의 귀한 말씀을 통하여 은혜 받게 하심을 감사합니다.
우리가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못한다는 것을 알았습니다.
우리의 믿음이 예배하는 믿음, 기쁘시게 하는 믿음, 경외하는 믿음,
멀리 보는 믿음, 능력 있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게 도와 주옵소서.
그러므로 말미암아 우리들의 삶이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삶이 되도록 도와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아멘-
출처/이대희 강도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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