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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1권 <내가 얻은 황홀한 구원> 247쪽에 있는 글입니다.
13. 아브라함은 이렇게 믿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 이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 하신 말씀대로 많은 민족의 조상이 되게 하려 하심을 인함이라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에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로 의로 여기셨느니라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
로마서 4장 18~25절
아브라함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대표적인 인물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다시 말해서 모든 믿는 자의 조상이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그의 믿음은 우리가 함께 추구해야 할 구원 믿음의 이상형이라 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오늘 본문을 통해서 "네가 구원받기를 원하느냐? 아브라함의 믿음을 가져라"라고 권고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들을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떤 믿음을 가졌기에 그렇게 대단하게 인정을 받는 것일까요? 설교자들이 믿음이라는 주제를 다룰 때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예로 들고 나오지 않는 경우가 거의 없을 정도입니다. 그러므로 아브라함이 구원받은 그의 믿음은 어떤 것이었는가 하는 것은 우리의 흥미를 끌기에 충분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구원은 '단순한 믿음'으로 충분하다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 그러므로 이것을 저에게 의로 여기셨느니라"(21, 22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이 자기에게 약속하신 것을 반드시 지킬 수 있는 능하고 성실하신 분이라고 믿었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아브라함이 자기를 믿어주는 이 믿음을 보고 그를 의로운 자로 인정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이것이 아브라함에게만 해당되는 말씀일까요?
"저에게 의로 여기셨다 기록된 것은 아브라함만 위한 것이 아니요 의로 여기심을 받을 우리도 위함이니"(23, 24절).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을 의롭게 여기신 목적은 똑같은 믿음을 가진 우리 모두를 의롭다고 하시기 위해서였습니다. 동시에 구원받기를 원하면 반드시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을 가르쳐 주는 데도 목적이 있었습니다.
우리는 가끔 구원받는 믿음에 대해 혼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있습니다. 어떤 지도자는 "믿기만 하면 됩니다. 다른 것 필요 없습니다. 오직 믿기만 하십시오." 하고 가르칩니다. 반면에 어떤 지도자는 "단순히 믿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입으로만 고백하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삶의 변화가 있어야 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게 반드시 순종이 따라야 합니다." 하고 가르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우리는 이런 이야기를 들을 때마다 마음이 우왕좌왕하기 쉽습니다. 어떤 때는 믿기만 하면 된다는 말에 마음이 쏠리다가도 또 어떤 때는 순종하고 헌신해야 한다는 말이 더 가슴에 와닿을 때가 있습니다. 이것은 우리가 분명히 짚고 넘어가야 할 중요한 문제임에 틀림없다고 봅니다.
최근 2, 3년 동안 이 문제를 놓고 복음주의 진영에서 성경학자들 사이에 열띤 논쟁이 계속되고 있습니다. 그 대표적인 예로 제인 하지스(Zane C. Hodges)라는 댈러스 신학교 교수를 들 수 있습니다. 그는 요한복음 6장 47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단순한 믿음을 강조합니다.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믿는 자는 영생을 가졌나니." 이 말씀 중에 나오는 '믿는다'는 말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식자 무식자를 막론하고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단순한 믿음'을 가리킬 뿐이라고 그는 주장합니다.
누구나 믿기만 하면 되는 이 '단순한 믿음'을 도리어 복잡하게 설명하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 구원 얻는 진리'를 혼탁하게 만들 위험이 있다고 경고합니다.
그러나 이 주장에 대해 맥아더(John F. MacArthur) 목사는 마태복음 7장 21절 말씀을 인용하면서 반박합니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마 7:21).
그는 이 말씀이 의미하는 바와 같이 구원받는 참 믿음에는 반드시 회개와 순종이 따라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입으로 믿음을 고백한 사람에게는 반드시 주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삶이 따라와야 하는데 그렇지 못하면 그의 믿음은 거짓된 것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누구의 말이 옳다고 할 수 있습니까? 저의 생각에는 어느 편이 옳다, 틀리다 단정지을 문제가 아니라고 봅니다. 성경을 주의해서 읽어 보면 우리가 이 두 가지 견해에 똑같이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해하기 쉽도록 간단한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예수님이 골고다 언덕에서 십자가에 못 박히실 때 주님의 오른편에 강도가 있었습니다. 그 행악자가 죽음을 목전에 두고 "예수여 당신의 나라에 임하실 때에 나를 생각하소서"(눅 23:42)라고 말하자 예수님이 그 믿음을 보시고 "내가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오늘 네가 나와 함께 낙원에 있으리라"(눅 23:43)고 약속하셨습니다. 결국 그 강도는 구원을 받은 것입니다.
그러나 그가 예수 믿은 것은 극히 짧은 시간의 사건이었습니다. 강도는 해가 질 무렵까지 살아 있었으나 안식일이 시작되는 시간을 넘길 수 없어 로마 군병이 그의 다리를 꺾어 죽였습니다. 그러므로 그의 믿음은 고작해야 반나절의 역사를 가질 뿐입니다. 이것은 정말 단순한 믿음이었습니다. 그 믿음이 진짜인지를 확인할 수 있는 열매를 기다릴 여유가 전혀 없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구원받았습니다. 이 같은 강도의 예를 보면 단순히 믿고 구원받는다는 말이 틀린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데마라는 사람을 보면 또 생각이 달라질 수 있습니다. 데마는 십자가 상의 강도와는 너무 대조가 되는 인물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는 예수 믿고 은혜받아서 사도 바울을 따라다니며 섬겼습니다. 나중에는 감옥까지 따라가서 노사도를 시중들던 뜨거운 믿음의 소유자였습니다. 그가 시종일관 믿음을 지켰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런데 불행히도 그는 중도에 타락하고 말았습니다.
바울이 이 사실을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데마는 이 세상을 사랑하여 나를 버리고 데살로니가로 갔고"(딤후 4:10).
데마와 같은 사람은 구원받을 수 없습니다. 예수 믿는다고 입으로 고백만 한다고 해서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진정한 회개와 순종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입니다. 주님께 전적으로 위탁하는 제자의 삶이 따라와야 그 믿음은 구원받을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런 관점에서 볼 때 우리는 믿음을 지나치게 단순화하거나 또는 지나치게 복잡화하는 극단을 피해야 한다는 것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이런 의미에서 구원은 '단순한 믿음'으로 족합니다. 그러나 이 '단순함'의 중요성을 강조하려다가 참 믿음에 뒤따라오는 자연스러운 열매를 필요 없다고 부인하면 절대로 안 될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은 우리에게 구원받는 믿음의 본질이 무엇인가를 깨우쳐 주는 귀한 진리가 됩니다.
이제부터 아브라함의 믿음이 갖는 특성이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의 특성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
첫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아브라함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었으니"(18절).
이 말씀을 좀더 실감나게 바꾼다면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았는데도 믿었다는 의미가 될 것입니다. 좀 인간적인 표현을 한다면 믿어서는 안 될 것을 믿었다는 말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18절과 19절의 배경을 검토해 보면 두 개의 이야기가 같은 시대에 있었던 사건이 아닌 것을 알 수 있습니다.
19절은 아브라함이 100세가 되었을 때의 이야기입니다. 반면에 18절은 그보다 약 20년 정도 거슬러 올라가서 아브라함이 80세 전후가 되었을 때 있었던 사건을 이야기하는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창세기 15장을 보면 자세한 내용을 알 수 있습니다. 당시 아브라함의 처지가 대단히 막막했습니다. 그가 기댈 만한 것이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믿고 가나안으로 들어온 지 5,6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에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천사가 찾아왔습니다. 아브라함을 바깥으로 불러냈습니다. 밤하늘은 은가루를 뿌려 놓은 듯이 반짝이는 별들로 가득했습니다. 이때 하나님은 셀 수 없이 많은 별들을 가리키면서 아브라함에게 말씀하셨습니다.
"하늘을 우러러 뭇별을 셀 수 있나 보라 ... 네 자손이 이와 같으리라"(창 15:5).
이 약속의 말씀을 본문 18절에는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는 말씀으로 간략하게 인용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하셨던 이 약속이 지난 수천 년의 역사를 통하여 얼마나 놀랍게 성취되었는지 도저히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입니다. 하늘에 떠 있는 별들이 무색할 만큼 아브라함의 후손이 번창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자세히 따져 볼까요? 아브라함의 혈통을 받은 유대 민족만 해도 지난 4천 년 동안 이 세상에 얼마나 많이 태어났습니까? 그 숫자는 도저히 감을 잡을 수 없을 정도입니다. 지금도 이스라엘 민족이 약 1천 5백만 내지 2천만명이 살고 있다고 합니다.
그뿐만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은 그의 영적 자손들의 수는 얼마나 됩니까? 상상하기 어려울 정도의 숫자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현재만도 15~16억이나 되는 크리스천들이 세계 도처에 깔려 있습니다. 그리고 앞으로 이 세상에 태어날 유대인과 그리스도인이 얼마나 될지 아무도 예상할 수 없습니다. "모든 민족으로 제자를 삼으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비추어 볼 때 어마어마한 사람들이 아브라함의 후손이 될 것이 틀림없습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께서 하늘의 별을 가리키면서 "네 후손이 이 같으리라"고 하신 약속이 절대 거짓이 아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그러나 당시 밤하늘의 별을 바라보던 아브라함에게는 그 약속이 매우 황당하게 들렸을 것입니다. 놀림을 당하는 것처럼 언짢은 기분이 들었을지도 모릅니다. 하나님의 약속을 희망을 가지고 믿기에는 그의 현실이 너무 암담했습니다. 고령에 접어든 부부의 육체적 조건을 보아도 믿기 어려웠고, 자식 하나 없는 처지를 놓고 보아도 불가능한 이야기로 들렸을 것입니다. 그런데도 놀라운 사실은 아브라함이 이를 믿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아브라함의 믿음이 갖는 위대성이 있습니다.
이렇게 믿을 수 없는 상황에도 불구하고 믿는 이 믿음을 일컬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믿음'이라고 합니다. 말씀하시는 하나님을 빼놓고는 믿을 근거가 전혀 없는데도 믿는 이 믿음을 하나님이 얼마나 귀하게 보셨는지 모릅니다. 이 믿음이 너무 귀했기 때문에 하나님은 아브라함의 죄나 허물을 보시지 않았습니다. 이 믿음 하나로 그를 무조건 의롭다고 인정해버렸습니다. 아브라함이 어떻게 그처럼 조건 없는 믿음을 가질 수 있었을까요? 여기에는 그럴 만한 근거가 있습니다. 그는 하나님에 대해서 분명한 지식을 갖고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의 믿은바 하나님은 죽은 자를 살리시며 없는 것을 있는 것같이 부르시는 이시니라"(17절).
아브라함은 하나님을 전능자, 절대 주권자, 신실하신 분으로 알았기 때문에 아무 조건 없이 믿을 수 있었습니다. 죽은 자를 살리고 무에서 유를 창조하며 한번 하신 약속은 반드시 지키는 신실하신 하나님으로 알고 있었기 때문에 그가 무조건 믿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님이 말씀하셨다는 그 사실 하나가 믿기에 충분한 조건이 되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믿음'입니다.
우리가 구원받기 위해서 필요한 믿음 역시 아브라함의 경우나 전혀 다름이 없습니다. 우리 역시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는 것'이어야 합니다. 우리 입장에서 말하면 믿음의 대상을 우리 눈으로 확인하고 믿는 것이 아닙니다. 또 어떤 증거가 뚜렷이 손에 잡혀서 믿는 것도 아닙니다. 예수님이 과연 믿을 만한 분인가 하고 논리적으로 따져 보고 믿는 것도 아닙니다.
언제 우리가 한 번이라도 예수님을 만난 적이 있나요? 그분이 십자가에 못 박히는 현장에 가보기를 했나요? 그분이 부활하는 것을 목격한 적이 있나요? 전혀 아무것도 없습니다. 그러니까 우리 편에서 볼 때는 믿을 수 없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그러므로 히브리서 저자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니"(히 11:1).
곧 우리가 보지 못하는 것을 바라는 것이 믿음입니다.
"곧 예수 우리 주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를 믿는 자니라"(24절).
이 말씀은 우리 주 예수님을 죽은 사람 가운데서 살리신 하나님을 믿어야 구원받을 수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는 우리 범죄함을 위하여 내어 줌이 되고 또한 우리를 의롭다 하심을 위하여 살아나셨느니라"(25절).
예수님은 우리 죄 때문에 죽임을 당하셨고 우리가 의롭다는 인정을 받게 하시려고 다시 살아나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님이 십자가에서 못 박혀 죽으셨다는 사실을 역사적인 사건으로 긍정할 수 있습니다. 지성인치고 이것을 부인하는 자는 없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이 바로 나의 죄때문이라는 사실을 믿는 것은 불가능합니다. 그리고 죽은 자가 부활하였다는 이야기는 눈으로 직접 확인하기 전에는 믿지 않는 것이 정상이요, 그것은 지혜로운 일로 생각하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하물며 그가 부활하심으로 내가 의롭다 함을 받을 수 있다는 말을 믿을 사람이 어디 있겠습니까? 이런 의미에서 복음의 내용 자체는 인간 편에서 볼 때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것과 다름없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믿어야 합니다. 왜 그렇게 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말씀이니까 믿어야 합니다. 이것이 믿는 이유입니다. 솔직히 우리가 처음 예수 믿을 때 얼마나 알고 믿습니까? 만족할 만큼 알아서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잘 모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셨다고 하니까 믿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다는 것은 대단한 기적입니다. 믿음이라는 것은 크든 작든 엄청난 기적입니다. 이 기적을 일컬어서 하나님의 은혜라고 합니다. 우리가 예수 믿는다는 것은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고 믿은' 아브라함의 기적이 우리에게 일어난 것을 의미합니다. 비록 우리의 믿음이 나약하다 할지라도 그 믿음을 과소평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참 믿음이라면 그것은 최대의 기적입니다.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게 하셨으니 하나님의 선물이요, 은혜가 아닐 수 없습니다.
"너희가 만일 믿음이 한 겨자씨만큼만 있으면 이 산을 명하여 여기서 저기로 옮기라 하여 도 옮길 것이요"(마 17:20).
겨자씨는 육안으로 보기 어려울 정도로 그 크기가 작습니다. 그런데 우리에게 겨자씨 한 알만큼의 믿음만 있어도 못할 일이 없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아무리 작은 믿음이라도 바랄 수 없는 중에 바라는 믿음은 정말 귀한 것이요, 대단한 것입니다. 우리에게 이 기적의 씨앗인 믿음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확신하는 믿음
둘째로 아브라함의 믿음은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는 자리까지 발전하는 것'을 의미했습니다. 이것은 21절의 내용을 그대로 인정하는 말입니다. 아브라함의 믿음을 한마디로 표현하면 '확신하는 자리까지 발전하는 믿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가 백 세나 되어 자기 몸의 죽은 것 같음과 사라의 태의 죽은 것 같음을 알고도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19절).
당시 아브라함의 나이가 백 세라고 했습니다. 정확하게 말하면 99세입니다.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의롭다 함을 받은 지도 20년이란 세월이 흘렀습니다. 아브라함과 사라의 몸은 날이 갈수록 노쇠하는데 자식이 생길 기미는 전혀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 부부가 얼마나 답답한 나날을 보냈겠습니까? 아브라함이 자기 몸을 "죽은 것 같다"고 표현한 것을 보아도 그의 심정을 충분히 읽을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완전 절망 상태를 의미합니다. 당시 그의 입장에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자기 몸을 죽은 고목 같다고 생각하던 그를 염두에 두고 창세기 25장을 한번 읽어 보십시오. 웃음이 절로 나올 것입니다. 거기에 보면 아내 사라가 죽자 아브라함이 재혼을 했습니다. 백 세 때에 자기 몸을 가지고 죽은 것 같다고 말하던 노인이 37년이 지난 그때부터 무려 아들을 6형제나 낳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의 생각만 가지고 죽은 고목이니 가망이 없느니 하고 미리 절망하는 것이 얼마나 가소로운 일인지 다시 한 번 느끼게 해 줍니다. 이것을 보면 하나님의 능력과 지혜는 놀라운 것입니다. 전혀 불가능하게 보였지만 하나님이 하신다고 하면 140세에도 자식을 낳게 하실 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약속을 주시고 나서 왜 20년이 지나도록 자식을 주시지 않았을까요? 몇 년 지나지 않아 자식을 하나 주셨다면 아브라함이 얼마나 좋아했겠습니까? 그의 주변에 있는 가나안 사람들은 하나님을 믿지 않아도 자식을 수두룩하게 잘도 거느리며 살고 있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들을 얼마나 부러워했겠습니까? 그는 자식을 간절히 소원했습니다. 그런데도 하나님은 20년 동안이나 아브라함에게 자식을 허락하지 않으셨습니다. 이런 것을 보면 우리의 얕은 생각으로는 도저히 하나님의 심정을 읽을 수가 없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계획에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오묘한 섭리가 있습니다. 하나님이 아브라함에게 그렇게 하신 데에는 깊은 뜻이 숨어 있었던 것입니다. 아브라함은 모든 믿는 자들의 조상이 되어야 할 막중한 위치에 놓여 있었습니다. 그의 믿음은 모든 사람에게 귀감이 되어야 했습니다. 불순한 것이 하나도 들어 있지 않아야 했습니다. 이러한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하나님이 택하신 수단이 그를 절망 상태까지 가도록 하는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기댈 수 있는 방법이나 여건, 가능성 등이 다 사라질 때까지 기다리기로 한 것입니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습니까? 인간적으로 기댈 만한 무엇이나 손을 쓸 만한 무엇이 하나도 남아 있지 않은 빈손이 되어버렸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결과적으로 아브라함의 믿음이 최고로 좋아졌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절대로 실패하지 않으십니다. 그가 기대하셨던 그대로 되었던 것입니다. 정말 놀라운 일입니다.
"믿음이 약하여지지 아니하고 믿음이 없어 하나님의 약속을 의심치 않고 믿음이 견고하여져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며 약속하신 그것을 또한 능히 이루실 줄을 확신하였으니"(9~21절).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이 하나 있습니다. 믿음이 성장하는 것은 하루 아침에 되지 않는다는 사실입니다. 창세기에 나타나 있는 아브라함의 일대기를 주의 깊게 읽어 보세요. 아브라함의 믿음이 약해질 때가 여러 번 있었다는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입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손이 별처럼 번창하리라는 언약을 받은 지 얼마 지나지 않아서 그는 의심하기 시작했습니다. 1, 2년이 지났는데도 소식이 없자 아브라함 부부는 초조했습니다. 사라의 마음이 더 조급해졌습니다.
어느 날 그는 안달이 나서 남편에게 이렇게 간청을 했습니다. 자기 하녀인 하갈을 취해서 자식을 얻는 것이 어떻겠느냐고 말입니다. 이 제안은 믿음이 흔들리면서 생각해 낸 인간적인 꾀라고 할 수 있습니다. 믿음이 강해지는 것이나 약해지는 것도 가장 가까운 사람의 영향을 받기 쉬운 법입니다. 아브라함이 사라의 믿음 없는 말을 듣고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흔들렸습니다. 결국 그는 첩을 얻어서 아들 이스마엘을 낳았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심했던 흔적을 또 찾아볼 수 있습니다.
"아브람이 가로되 주 여호와여 무엇을 내게 주시려나이까 나는 무자하오니 나의 상속자는 이 다메섹 엘리에셀이니이다 아브람이 또 가로되 주께서 내게 씨를 아니 주셨으니 내 집에서 길리운 자가 나의 후사가 될 것이니이다"(창 15:2, 3).
아브라함이 얼마나 믿음 없는 소리를 했습니까?
"아브라함이 엎드리어 웃으며 심중에 이르되 백 세 된 사람이 어찌 자식을 낳을까 사라는 구십 세니 어찌 생산하리요 하고 아브라함이 이에 하나님께 고하되 이스마엘이나 하나님 앞에 살기를 원하나이다"(창 17:17, 18).
아브라함이 여전히 의심을 하고 있습니다.
"사라가 속으로 웃고 이르되 내가 노쇠하였고 내 주인도 늙었으니 내게 어찌 낙이 있으리요"(창 18:12).
아브라함과 사라가 줄줄이 의심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무엇이라고 합니까? 믿음이 없어 의심치 아니하였고 나중에는 반드시 된다는 확신을 가지는 자리까지 갔다고 합니다.
아브라함에게 있어서 오랜 기다림의 과정은 흔들리고 의심하는 시험과 자주 싸워야 하는 긴장의 나날이었지만 동시에 강한 믿음, 의심하지 않는 순수한 믿음을 만들어 가는 성숙기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도 구원을 받기 원하면 우리의 믿음이 오랜 연단을 통해 확신하는 자리까지 자라야 합니다. 지금 당장 천국이 우리 눈앞에 나타나지 않는 것도 우리의 믿음을 위해서라는 것을 알아야 합니다.
일반적으로 믿음이 좋으면 의심하지 않는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의심하니까 믿음이 없다고 말하는 것 역시 잘못입니다. 이런 생각은 모두가 마귀의 속삭임이요, 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의심하는 것과 믿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믿음은 의심에서 반드시 해방되는 것을 의미하지 않습니다. 로이드 존스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자기의 의심을 극복하고 그 의심에 대답하게 하는 것이 믿음이다."
정말 공감이 가는 말입니다. 똑같은 햇살을 받아도 진흙은 굳어지지만 왁스는 녹아 내립니다. 이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시련을 당하는 과정에서 진짜 믿음은 점점 더 강해지지만 거짓 믿음은 왁스처럼 녹아 없어지는 것입니다. 참 믿음이란 아브라함처럼 믿었다 의심했다 하는 시련을 극복하는 데서 얻을 수 있는 것입니다. 그런 과정을 거치면서 결국은 견고하고 확신에 찬 믿음으로 성장하는 것입니다.
제가 전도사 시절에 겪었던 이야기를 잠깐 할까 합니다. 제가 주일학교를 맡아 지도하고 있을 때였습니다. 교사 중에 참 믿음 좋은 자매가 있었습니다. 그는 모든 면에 있어서 모범이 되는 교사였습니다. 그런데 그 자매가 어느 날 갑자기 저를 찾아왔습니다. 심각한 문제를 안고 상담을 요청해 온 것입니다.
그 자매는 하고 싶지 않은 이야기를 저에게 마지못해 털어놓았습니다. "전도사님, 저에게는 기억하고 싶지 않은 과거가 있어요. 제가 고3때 아버지의 사업이 실패하는 바람에 집안이 완전 거덜났어요. 저는 그때 충격을 이기지 못해 가출을 했어요. 그런데 그만 나쁜 건달에게 붙잡혀서 본의 아니게 동거생활에 들어갔어요. 반년 가까이 그 생활을 하며 고민하다가 예수 믿고 그 생활을 청산할 수 있었습니다. 그것이 벌써 5, 6년 지난 일이에요. 그런데 큰일이 났어요. 맞선을 보자는 남자가 나타났어요. 저는 예수 믿고 내 모든 죄를 용서받았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러나 당장 맞선을 본다고 생각하니 마음이 여간 불안하지 않아요. 제 모든 과거를 완전히 용서받지 못한 것 같아요. 제가 결혼을 해도 되는 걸까요? 전도사님, 저는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그 자매의 말을 듣고 병아리 전도사가 얼마나 난감했는지 모릅니다. 뭐라고 시원한 대답을 해 주어야 하는데 너무 심각한 문제라서 그런지 얼른 대답이 나오지 않았습니다. 예수 믿으면 모든 죄 용서받는다고 강단에서는 자신있게 가르치지만 막상 실제적인 문제에 부딪히고 보니 확신 있는 대답이 쉽게 나오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그 자매에게 대답할 시간을 좀 달라고 해 놓고는 부랴부랴 저의 은사님을 찾아갔습니다. 도저히 저 혼자서 결정을 내릴 수가 없었습니다. 은사님께 자초지종을 말했지만 그분도 금방 답변을 하시지 못했습니다.
우리는 한참 고민을 하다가 결국 기도하는 심정으로 결론을 내렸습니다. 아무리 추악한 과거가 있다 할지라도 하나님께 한 번 그 죄를 용서받았다면 새로운 출발을 해도 된다는 것이었습니다. 그 길로 저는 초조하게 기다리고 있는 자매에게 달려가서 용기를 가지고 새 출발을 하라는 답변을 주었습니다. 그 자매는 마음에 평강을 얻고 새로운 인생을 설계했습니다. 드디어 그는 결혼을 했고 지금은 행복하게 잘 살고 있습니다.
이처럼 믿음을 약하게 하려는 시험은 우리를 항상 따라다닙니다. 그러면 의심하는 것이 잘못된 것입니까? 아닙니다. 용서받을 수 없는 죄인이 용서받았다는 사실이 얼마나 엄청난 은혜입니까?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큰 은혜를 받다 보니 때로는 순간적으로 의심이 들 수도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 의심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이 자란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의심과 싸우다 보면 나중에는 의심과 싸우지 않는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불순한 것이 다 제거되고 완전한 믿음의 자리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자라는 믿음
끝으로 아브라함이 25년간 믿음의 시련을 잘 견디고 확신하는 자리까지 발전할 수 있었던 것은 자기의 노력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아브라함의 생애를 훑어보면 그가 믿음이 약해지거나 의심의 덫에 걸려 고통할 때마다 하나님이 방문하셨다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의심할 때마다 하나님은 찾아오셔서 그에게 언약의 말씀을 재확인해 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 아브라함에게 의심한다고 나무라신 예도 찾아볼 수 없습니다. 왜 후처를 취해 아들을 낳았느냐고 질책하지 않았습니다. 인간이란 원래가 의심하기 쉬운 존재임을 잘 아셨기 때문일까요? 하기야 열두 제자들 역시 3년 동안 "왜 의심하느냐?"는 핀잔만 듣고 살았습니다. 하나님의 은혜가 없이는 참 믿음을 가질 수 없는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의심할 때마다 아브라함을 찾으신 하나님의 방문은 은혜 중의 은혜라 아니할 수 없습니다. 20절과 21절에 "견고하여져서"와 "확신하였으니" 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말은 수동태 동사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의미합니까? 믿음은 우리의 자력으로 자라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가 따라야 자랄 수 있다는 것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믿음은 우리 스스로 강하게 할 수 없습니다. '믿습니다'를 아무리 연달아서 외쳐 보세요. 그렇다고 믿음이 견고해지는 것이 아닙니다.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과 깊이 만나는 은혜를 통해서 믿음이 강해진다는 것을 꼭 명심하시기 바랍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는 천국 문에 들어서는 순간까지 바랄 수 없는 것을 바라는 믿음의 항해를 계속해야 할 것입니다. 우리의 믿음이 확신의 자리까지 가려면 수많은 의심의 파도를 넘어야 가능합니다. 때로는 믿음이 약해지는 항해를 계속해야 할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이 사실을 늘 염두에 두고 신앙생활을 한다면 설령 믿음이 약해질 때에도 쓰러지지 않을 것입니다. 의심이 날 때에도 주저앉지 않게 될 것입니다. 시시때때로 말씀 앞에 앉아서 하나님과 깊이 만나야 합니다. 시시때때로 무릎 꿇고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런 과정을 통해서 우리의 믿음도 아브라함처럼 확신의 자리까지 갈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이 믿음을 통해서 하나님 나라에 당당하게 걸어 들어가는 축복을 누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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