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음다운 믿음 (누가복음 12:4- 9)
오늘은 누가복음 12장 4절에서 9절까지 있는 말씀을 가지고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예수님의 열두 제자는 똑 같이 예수님의 선택을 받았습니다.
때가 되어 부름을 받았고 3년이라는 기간 동안 예수님과 함께 지내면서 떠 먹이듯이 가르쳐 주시는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온갖 기적을 체험했습니다.
그런데도 열두 사람의 믿음이 똑같았느냐 하면 전혀 그렇지 아니했습니다.
[베드로]와 [야고보]와 요한 같은 제자들은 바람직하고 제자다운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가롯유다]는 전혀 그렇지 않았습니다.
전혀 바람직스럽지 못한가 하면 제자답지 못한 제자였습니다.
예루살렘 교회의 그 많은 교인들 중에서 뽑힌 일곱 명의 안수집사들 중에 [스데반] 집사는 순교하기까지 충성을 했습니다.
그런가하면 [빌립] 집사는 전도로 유명합니다.
그러나 제일 마지막에 이름이 등장하는 [니골라] 집사는 집사가 된 다음에 패거리를 만들었습니다.
결국은 뿌리를 내리지 못하고 그 패거리를 데리고 유대교로 입교해 버리는 아름답지 못한 일이 있었습니다.
이렇게 보면 [니골라]라고 하는 집사는 전혀 집사다운 집사가 아니었습니다.
오늘 우리들의 믿음도 다 똑같은 것이 아닙니다.
믿음다운 믿음이 있고, 믿음답지 못한 믿음도 있습니다.
오늘 본문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을 따라 믿음다운 믿음은 어떤 믿음인지 상고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 경외하는 믿음 (4-5)
'하나님을 경외하다'라는 말이 성경에 많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구약 성경은 히브리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외하다'라는 말은 히브리어로 '야레'라고 하는데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경외하다' '두려워하다'라는 뜻입니다.
그런가 하면 신약 성경은 헬라어로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경외하다'라는 말은 헬라어로 '포베어'라고 합니다.
우리말로 번역을 하면 '무서워하다' 또는 '두려워하다'라는 뜻이 됩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아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예수를 믿지 않는 사람들은 하나님 알기를 헌신짝처럼 압니다.
하나님 무서운 줄 모릅니다.
그러나 예수를 제대로 믿고 하나님을 제대로 믿는 사람들은 하나님을 무서워할 줄 압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임에는 틀림이 없지만 다른 면으로 보면 공의의 하나님 즉 심판의 하나님이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을 두려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그렇다고 도둑놈 무서워하듯 하라는 말은 아닙니다.
우리가 세상을 살 때 이것저것 무서운 것이 많아도 '나는 그런 것은 무섭지 않다. 내게 무서운 바가 있다면 하나님 밖에 무서운 바가 없다'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이 말씀하시기 전에는 움직이지 않습니다.
총칼이 문제가 아니요, 금덩어리가 문제가 아닙니다.
이런 사람들은 하나님을 위해서 목숨을 내 놓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들은 나가서 일당 백 일당 천을 할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세상에서 목숨을 내 놓고 사는 사람처럼 무서운 사람이 어디에 있습니까?
예수를 믿되 목숨을 내 놓고 믿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은 참으로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출애굽기 1장을 보면 히브리 산파 중에 [십브라] 그리고 [부아]라고 하는 두 사람의 이름이 등장을 합니다.
그 당시 명령 한마디만 하면 날아가는 새도 떨어뜨린다고 하는 애굽 왕 바로가 불러서 "유대 여자들이 아기를 낳을 때 너희가 부름을 받거든 아들을 낳을 경우 그 자리에서 죽여 버리라"고 하였습니다.
히브리 사람들이 얼마나 번성하는지 감당을 할 수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는 하나님을 경외하였으므로 애굽 왕의 명을 거역하고 남자를 살렸다고 기록이 되어 있습니다.
애굽 왕은 아들을 죽이라 하고 하나님은 살리라는 것입니다.
이럴 때 누가 더 무섭습니까?
애굽 왕이 무서운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더 무섭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기들이 목숨을 잃을지라도 하나님을 경외하므로 애굽 왕의 명령을 거절하고 남자아이를 살릴 수 있었습니다.
이쯤 되면 애굽 왕 바로가 그 사건에 대해서 산파들을 얼마든지 해칠 수 있지 않겠습니까?
그런데도 손가락 하나 건드리지 못했습니다.
그 이유를 성경에서는 하나님이 그 집을 왕성케 했기 때문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아울러 그 가정에 은혜를 크게 베풀더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을 경외하며 목숨을 내 놓고 믿으며 충성하는 사람은 복을 받아도 왕성한 복을 받고, 은혜를 받아도 크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여러분들의 믿음도 이처럼 하나님을 경외하는 믿음이 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4절에서 5절을 보면 '내가 내 친구 너희에게 말하노니 몸을 죽이고 그 후에는 능히 더 못하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라 마땅히 두려워할 자를 내가 너희에게 보이리니 곧 죽인 후에 또한 지옥에 던져 넣는 권세 있는 그를 두려워하라 내가 참으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그를 두려워하라'고 하였습니다.
이 말씀은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입니다. 즉 "권세 잡은 집권자들이 세도를 부리면서 너희들을 붙잡아다가 죽일까 두려워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왜 그렇습니까?" "집권자들이 야단을 해 봐야 너희 육신의 목숨을 죽이는 것 밖에 더 하겠느냐?"는 뜻입니다.
그 사람들이 죽이지 않는다고 한들 우리가 살면 몇 해를 더 살겠습니까?
언제 죽어도 죽는 것이 아닙니까?
그런 의미에서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은 두려워하라는 것입니다.
그 이유는 하나님은 죽이기도 하시고 죽인 다음에 지옥도 보내고 천국에도 보내시는 분이니 얼마나 무서운 분이십니까?
이렇게 하나님을 무서워하는 사람들은 절대로 사람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사람을 무서워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보이지 않기 까닭에 절대로 하나님을 무서워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보이는 것을 바라고 보이는 것을 믿는 것이 아닙니다.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믿고 보이지 않는 하늘나라를 소망으로 하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철저하게 떠 먹이듯이 가르쳐 주시는 말씀은 하나님을 무서워하라는 것입니다.
사람은 몰라도 하나님은 다 아시고, 사람은 못 들어도 하나님은 다 들으시고, 사람은 못 보아도 하나님은 다 보고 계시기 까닭입니다.
얼마나 무서운 존재입니까?
히브리 산파들처럼 그 하나님을 무서워하고 경외함으로 사는 사람들에게 마침내 그 집을 왕성케 하십니다.
복을 주셔도 크게 주십니다.
마침내 그들에게 큰 은혜를 베푸신 것처럼 우리가 은혜를 받아도 크게 받는다는 뜻입니다.
호주 가까운 곳에 [뉴 헤블리지스]라고 하는 30개의 섬으로 무리를 이룬 군도가 있습니다.
그곳에는 '예수'의 '예'자도 모르는 토인들이 살고 있습니다.
영국의 스콧틀랜드 지방에서 선교사들을 그곳으로 보냈습니다.
1839년에 [존윌리암즈]라고 하는 선교사를 보냈더니 파송 된지 얼마 안되어 식인종들에게 잡혀 먹히고 말았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사람을 잡아먹을 때였습니다.
그 소식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에는 내가 가겠오"하고 자원하는 사람이 있어서 다시 보내면 일년도 안되어 맞아 죽든가 잡아 먹혔습니다.
세번째, 네번째 계속해서 지원자가 나타났습니다.
사실상 그 사람들이 살기 위해서 가는 것입니까?
목숨을 내 놓고 죽으려고 가는 것과 같습니다.
마지막 일곱 번째 파송을 받은 선교사님이 [로버트슨] 목사님입니다.
"제가 가겠습니다"라고 자원하여 갔습니다.
먼저 파송 받은 선교사들이 몇 명씩 전도를 해 놓은바가 있었습니다. 그들을 바탕으로 해서 토인들을 감동시켜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용케 살아남아 40년만에 선교를 마치고 돌아왔는데 그의 보고는 서른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그 군도의 토인들이 완전복음화 되었다는 것입니다.
순교자의 피는 교회의 씨앗입니다.
[로버트슨] 목사님이 살기 위해서 간 것입니까?
목숨을 내 놓고 간 것입니다.
목숨을 내 놓은 사람이 무엇이 무섭겠습니까?
누가 그를 당하겠습니까?
마지막에는 토인들이 전부 복음화 되어지고 승리했습니다.
이렇게 하나님을 경외함으로 주의 일에 뛰어든 [로버트슨]은 일당 백을 하고 일당 천을 했습니다.
이런 믿음이 세상을 이기고 승리하는 줄로 믿으시기 바랍니다.
참으로 경외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인줄로 믿습니다.
둘째, 인간존중의 믿음 (6-7)
한번은 예수님께서 안식일에 어느 회당에 가셨습니다.
회당에는 예수님께서 오신다는 예고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식일만 되면 회당에 나오던 사람들이 나왔을 뿐입니다.
그런데 생각밖에 그 회당에 예수님께서 나타나셨습니다.
예수님께서 말씀을 전하기 위해서 앞에 나와 섰었는데 그 한 가운데 한편손 마른 사람이 있었습니다.
그 사람은 얼마나 자격지심이 있었겠습니까?
그러면 안식일 날 회당에 나오지 않을 수도 있지 않겠습니까?
그러나 "누가 뭐라고 하든지 나는 하나님께 예배하리라"는 생각으로 회당에 나온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그 사람을 보셨습니다.
그리고는 한 가운데 일으켜 세우셨습니다.
이 광경을 보고 유대인들 즉 바리새인들이 가만히 있겠습니까?
"안식일에 왜 병을 고치려고 하느냐?"라고 책잡으려 하였습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호통을 치셨습니다.
"너희들은 안식일이라고 해서 너희들의 소나 양이 구덩이에 빠져서 내버려두면 죽을 수밖에 없을 때 오늘은 안식일이니 안돼 라고 내버려두었느냐?
"너희가 끄집어 내지 않았느냐?
"그러면 안식일에 소나 양은 끄집어내도 괜찮고 안식일에 사람이 병마라고 하는 깊은 구덩이에 빠져서 수십년째 저렇게 죽어가고 있는데 내버려두어야만 되겠느냐?
"너희들의 소나 양은 귀하고 저 사람은 너희들의 양 한 마리만도 못한 것이냐?
"저 사람의 생명이 얼마나 귀하냐?"라고 야단을 하신 끝에 네 손을 펴라고 하셨습니다.
천하에 있는 소나 양이 문제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온 천하를 얻고도 네 목숨을 잃으면 무슨 소용이 있느냐? 라는 것입니다.
그렇게 예수님은 한 사람의 생명을 천하보다 더 귀하게 여기셨습니다.
결국 안식일에도 그 사람의 병을 고쳐 주셨습니다.
사람이 귀하기 때문입니다.
사람을 귀히 여길 줄 아는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셔서 며느리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집에 돌아가셔서 시어머니를 귀하게 여기시기 바랍니다.
예수님의 정신은 "사람이 귀하다"는 것입니다.
시집간 내 딸만 귀하게 여기지 마시기 바랍니다.
내 집에 시집와서 평생을 시중 드는 며느리를 못살게 굴지 마십시오. 사람을 귀히 여기라는 것이 기독교 정신이요, 예수님의 정신입니다.
사람을 존중히 여기는 믿음이 귀한 믿음입니다.
화란의 유명한 화가로서 [고흐]라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 사람은 본래 목사의 아들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이 나중에는 정신에 조금 이상이 있었습니다만,
그의 그림은 참으로 유명합니다.
그는 화가가 되기 전에 벨기에라고 하는 나라에 가서 탄광에 들어갔습니다.
광부들과 함께 탄을 캐면서 복음을 전하는 전도사의 일을 했습니다. 그 당시만 해도 옷감이 귀할 때였습니다.
물건을 포장하면 포장한 천에 글자를 쓰지 않습니까?
그런데 어떤 사람이 그것이라도 귀하기에 그것을 빨아서 옷을 지어 입었습니다.
그런데 그 글자가 지워지지 않아서 등에 그대로 남아 있었습니다.
그 글의 내용은 '깨어지기 쉬운 물건이오니 취급할 때 주의하십시오'라는 것이었습니다.
물건을 포장할 때 쓴 글이었지만 그것으로 옷을 해 입었으니 그 사람의 등에 그대로 남아 있으니까 결국은 무엇입니까?
거기에서 고흐는 '사람은 정말 깨지기 쉬운 물건이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남편이 강한 것 같아도 아내가 긁어대면 깨지기 쉽습니다.
남편의 감정도 깨지기 쉽습니다.
남편의 믿음도 깨지기 쉽습니다.
남편의 인격도 깨지기 쉽습니다.
더구나 여자는 연약한 그릇이라고 성경은 말하고 있습니다.
꽉 쥐면 깨지기 쉬운 존재가 여자입니다.
그렇게 연약한 것이 우리 인간입니다.
그래도 성경은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인간이기에 그렇게 귀하다'라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은 집으로 돌아가시면 남편을 귀히 여기시기 바랍니다.
남편이 귀한 줄 알면 평생에 잘 모시기 바랍니다.
잘 모시면 누가 덕을 봅니까?
여자는 연약합니다.
집으로 돌아가시거든 아내를 끔찍이 위하고 사랑해 주시기 바랍니다.
부모가 어떤 분들입니까?
부모를 존중히 여기십시오.
시집간 내 딸이 귀하면 남의 집 딸이 즉 내 집에 시집와서 시중 들고 있는 며느리를 귀하게 여기십시오. 깨지기 쉬운 존재들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내 며느리요,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은 내 아내가 천하보다 귀하다고 주님은 말씀하고 계십니다.
오늘 본문을 통해서 예수님께서 분명히 떠 먹이듯이 가르쳐 주신 말씀은 무엇보다 더 귀한 존재가 사람이라는 것을 가르쳐 주고 계십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믿음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이런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이기 때문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6절에서 7절을 보면 '참새 다섯이 앗사리온 둘에 팔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하나님 앞에는 그 하나라도 잊어버리시는바 되지 아니하는도다 너희에게는 오히려 머리털까지도 다 세신바 되었나니 두려워하지 말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귀하니라'고 하였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많고 많은 참새도 나라고 하는 한 사람보다 귀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 많은 참새보다 나라고 하는 사람이 귀합니다.
내 아내라고 하는 연약한 인간이 그렇게 귀합니다.
내 며느리가 그렇게 귀합니다.
오늘 본문의 내용이 바로 그것입니다.
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믿음의 소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사람을 천히 여기는 믿음은 전혀 써먹지 못합니다.
사람을 귀히 여기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셋째, 고백하는 믿음 (8-9)
사랑은 고백하는 성질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랑하게 되면 반드시 고백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가서 슬그머니 불러내어 아무도 없는 골목으로 데리고 가서 '내가 너를 사랑한다'라고 말로 고백을 합니다.
그런 용기가 없는 사람은 불러내어 선물하나를 건네 줍니다.
이것이 무엇이냐고 물어 보면 집에 가서 풀어 보라고 합니다.
집에 가서 열어 보면 손수건 하나입니다. '내가 가난해서 좋은 선물은 사지 못한다 해도 이 손수건이 언제나 네 땀을 닦아주리라'는 뜻으로 선물한 것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고백이 아닙니까?
이것은 행동으로 고백한 것이요, 생활로 고백하는 것이 아닙니까?
사랑은 반드시 고백하게 되어 있고 고백하지 않는 사랑은 죽은 사랑입니다. 혼자서 짝사랑을 합니다.
그리고 말은 못하고 끙끙거리며 앓고 있다면 그 사랑을 어디에 쓰겠습니까?
그 사랑이 무슨 일을 하겠습니까?
우리의 믿음도 마찬가지입니다.
믿음은 고백하게 되어 있습니다. '내가 주님을 믿습니다' '주님을 믿되 나에게는 예수님이 최고입니다' '죽을 때까지 믿겠습니다'라고 말로 고백을 하든지 행동으로 고백을 하든지 믿음은 고백할 때 귀한 믿음이 되는 것입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입니다.
고백하지 않는 믿음은 써먹을 데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본문으로 돌아가서 8절에서 9절을 보면 '내가 또한 너희에게 말하노니 누구든지 사람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저를 시인할 것이요 사람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자는 하나님의 사자들 앞에서 부인함을 받으리라'고 하였습니다.
"너희가 사람들 앞에서 나는 예수를 믿습니다.
예수가 최고입니다.
예수를 위해서 사는 삶이 최고의 삶입니다.
당신들도 예수 믿으십시오"라고 이렇게 사람 앞에서 고백할 때는 내가 너희들을 인정하시겠다고 주님이 말씀하셨습니다.
그것도 하나님과 천사들 앞에서 시인하고 인정하시겠다는 것입니다.
여러분이 예수님께 인정을 받고 싶으십니까?
사람 앞에서 딱 부러지게 고백하시기를 바랍니다.
고백하는 믿음이 이렇게 귀한 것입니다.
시리아에 [오헬로]라고 하는 사람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은 힘이 장사였습니다. "이 세상에서 최고의 강자를 찾아서 그의 제자가 되리라"고 생각했습니다.
가만히 보니 왕이 최고였습니다.
그래서 왕을 찾아가서 무릎을 꿇고 "무슨 일이든지 시키십시오. 나는 목숨을 걸고 충성을 다 바치는 제자가 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리하여 왕의 제자가 되었습니다.
왕이 최고인줄 알고 따라다녔는데 무슨 소리 한 마디만 들으면 벌벌 떨곤 합니다.
가만히 들어보니 악마라는 말만 들으면 그렇게 무서워하였습니다. "왕보다도 악마가 더 강하구나"라고 생각이 되어 악마를 찾아갔습니다.
그리고는 무릎을 꿇고 "나를 써 주십시오. 내가 목숨을 걸고 충성하겠습니다"라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마귀가 [오헬로]를 제자 삼아 데리고 다니면서 얼마나 못된 일을 다 시켰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최강자의 제자라는 것 때문에 서슴없이 충성을 했습니다.
그런데 이 악마도 무엇인가 보기만 하면 도망을 치곤 합니다.
가만히 살펴보았더니 십자가를 보기만 하면 도망을 합니다.
자세히 알아보니 십자가는 예수님의 죽음 즉 예수님을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찾아 다녔습니다.
예수님이 어디에 있습니까?
만날 재간이 없지 않습니까?
"어디에 계실까?
"사람이 많이 왕래하는 곳에 예수님이 지나가시겠지?"라고 생각하고 큰 나루터를 지키면서 사공 노릇을 했습니다.
예수님이 가시는지 오시는지 만나기를 학수고대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을 만나지 못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비가 억수로 쏟아 졌습니다.
큰 강인데도 강물이 불어났습니다.
밤이 되었습니다.
어느 소년이 문이 부서지게 두드렸습니다.
"왜 그러느냐?"
"내 어머니가 지금 위급하시다는 연락을 받았습니다.
이 시간에 강을 건너야 합니다.
저를 좀 도와 주십시오" 배를 가지고는 그 빠른 물결을 건널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안 된다고 해도 막무가내였습니다.
"그럼 할 수 없지. 내 등에 업혀라"고 하였습니다.
소년을 등에 업고 강을 건너갑니다.
처음에는 가볍더니 강에 깊숙이 들어갈수록 무거워지는데 이제는 한발자국도 옮겨 놓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졌습니다.
그래서 [오헬로]가 "야 이놈아 너는 도대체 무엇을 먹었길래 그렇게 무겁냐?"라고 하였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내가 세상 죄를 모두 걸머져서 그렇노라"고 하였습니다.
그 소년이 누구입니까? 예수님이었습니다.
"그래요"하고 돌아보니 없어졌습니다.
나중에 이 사람 [오헬로]가 죽은 다음에 이름을 바꾸어서 성자라는 칭호를 주면서 [크리스토퍼]라고 하였습니다.
그리스도를 업은 사람이라는 뜻입니다.
그는 이렇게 성자의 칭호를 받았습니다.
이 사건이 주는 교훈이 무엇입니까?
예수가 최고라는 것입니다.
여러분들은 예수가 최고라고 고백하십니까?
그렇게 믿으십니까?
그 소년을 업어 건네주는 봉사 즉 예수님을 위한 봉사가 최고로 아름다운 삶이라는 것입니다.
이 세상의 일 중에 예수님을 위해서 봉사를 하는 일이 가장 귀하다는 뜻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요, 예수님의 위한 봉사가 최고라는 것을 믿고 고백하면서 살고 계십니까?
이런 고백을 딱 부러지게 하는 믿음이 믿음다운 믿음이라는 사실을 명심하시기를 바랍니다. [할렐루야]
결론을 지어 말씀드리겠습니다.
믿음다운 믿음은?
첫째 경외하는 믿음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두려워하여 그 하나님께 목숨을 내 걸고 죽기로 작정하고 충성하는 믿음이 일당 백 일당 천을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인간을 존중히 여기는 믿음입니다.
인간은 아무리 약해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 받았기 때문에 존귀합니다.
셋째 고백하는 믿음입니다.
"예수님이 최고요, 예수님을 위한 삶이 최고의 삶이다"라는 사실을 여러분들의 삶 속에 고백하는 신앙인이 되시기를 간절히 소원합니다.
-기도하겠습니다.-
출처/이희대 강도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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