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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1. 평생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by 【고동엽】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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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113쪽에 있는 글입니다.

 

 

41. 평생 갚을 수 없는 사랑의 빚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행치 아니하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로마서 13장 8-10절

 

 

 

 

설교 제목을 보고 '또 사랑 이야기를 하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분이 계실지 모르겠습니다. 이미 로마서 후반부에 들어와서 사랑에 관한 이야기를 한두 번 말씀드렸기 때문입니다. 그렇지만 사랑 이야기는 해도 해도 끝이 없다고 생각합니다. 값없이 은혜로 구원받은 우리에게 하나님이 원하시는 삶은 산 제사요, 거룩한 예배가 될 만큼 수준 높은 것입니다. 그 가운데 특별히 사랑을 실천하는 문제에 있어서는 하나님께서 온전함을 요구하고 계십니다.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마 5:48).

 

 그렇다면 우리가 사랑에 대한 설교를 한두 번 들어서 되겠습니까? 백 번 천 번이라도 지킬 때까지 들어야 하고 배워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가르침의 목적은 실천하는 데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설교를 하는 목적도 말씀대로 살도록 하는 데 있는 것입니다. 만약에 말씀을 매번 듣고 잊어버리는 것으로만 끝나버린다면 그것은 설교가 아니요 허공을 치는 소리가 될 것입니다.

 우리는 1년에 주일 낮만 해도 52개나 되는 주제의 설교를 듣습니다. 수요예배 때 듣는 말씀을 합하면 100번이 넘는 말씀을 듣는 셈입니다. 거기다가 금요일에 다락방에서 배우는 말씀, 철야기도 때 와서 듣는 말씀을 합하면 200번 이상의 설교를 듣게 됩니다. 그런데 말씀을 듣기만 하면 무엇 합니까? 배운 말씀대로 얼마나 순종하며 사느냐 하는 것이 큰 과제입니다. 설교자는 가급적 동일한 주제를 짧은 기간 안에 반복해서 설교하는 것을 피하려고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이것은 저의 경우도 마찬가지입니다. 평생을 두고 설교를 해도 다 가르칠 수 없을 만큼 하나님의 말씀은 너무도 광대하고 풍성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다보니 꼭 반복해서 가르쳐야 할 필요성이 있는 말씀도 너무 오랜 기간 묻어 두는 경우가 생깁니다. 이것이 설교자가 느끼는 애로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습니다.

 남미에서 지금 막강한 영향력을 끼치고 있는 오르티즈라는 목사님이 있습니다. 그의 저서를 보았더니 공감이 가는 이야기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가 매주마다 다른 주제를 가지고 설교를 했더니 배운 말씀을 기억하고 그대로 실천하는 성도가 별로 없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는 설교 방침을 바꾸었습니다. 한 가지 제목을 놓고 교인들이 실천할 때까지 설교하기로 한 것입니다. 1년에 네 가지 정도의 메시지만 전한다고 합니다. 예를 들어 사랑을 주제로 다룬다면 사랑에 대해 3개월쯤 설교하는 것입니다. 동시에 성도들이 그 말씀대로 살고 있는지를 확인하기까지 한다고 합니다. 만일 그들이 들은 대로 순종하지 못한다고 생각되면 다음 주에 다시 같은 말씀을 가지고 설교합니다. 참 놀라운 이야기가 아닐 수 없습니다. 설교자의 입장에서는 그렇게 실천하기가 결코 쉽지 않기 때문입니다.

 저도 가끔 그렇게 해 볼까 하는 생각을 할 때가 있습니다. 그만큼 배운 대로 실천한다는 것은 어렵고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 시간, 우리 스스로 자신을 향해 질문해 봅시다. '이웃을 사랑하라는 설교를 더 듣지 않아도 될 만큼 내가 이웃을 사랑하고 있는가?' 만약 이 질문에 대해 당신의 신앙 양심이 부정적인 대답을 한다면 '하나님 말씀하옵소서. 순종할 때까지 듣겠나이다' 하는 자세를 가져야 할 것입니다.

 

 사랑은 율법을 완성한다

 

 먼저,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룬다는 말씀부터 생각해 봅시다. 본문에 세 번이나 반복해서 그 말씀이 나옵니다. 8절 중간부터 보시기 바랍니다.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8절).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9절).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10절).

 

 표현이 다를 뿐이지 내용은 전부 똑같은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율법은 하나님이 자기 자녀 된 우리에게 거룩하게 살라고 주신 규범입니다. 율법의 핵심은 십계명입니다. 십계명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지켜야 할 법이 네 가지, 이웃에 대해 지켜야 할 법이 여섯 가지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은 이 십계명을 하나님 사랑, 이웃 사랑이라는 두 계명으로 압축해서 말씀하셨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고 이웃을 사랑하면 십계명을 다 지킨 것과 같다는 것입니다. 마음을 다하고 뜻을 다하고 성품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여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에게는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 우상을 만들지 말라는 계명이 필요 없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가 그런 짓을 할 리가 만무하기 때문입니다.

 본문에서는 하나님의 사랑에 대해서 언급하고 있지 않습니다. 이 말씀의 목적이 이웃 사랑에 있기 때문입니다. 이웃을 자신처럼 사랑하는 자라면 계명에서 금하는 죄를 범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이웃을 사랑하는 사람은 자기 부모를 거역할 리가 없고 간음할 리가 없는 것입니다. 사랑하면 이런 법이 필요 없게 됩니다. 사랑하면 이런 법을 다 지키며 사는 것과 같다는 말입니다. 다시 말해서 사랑에 성공하면 계명대로 산 사람이 되고, 사랑에 실패하면 계명을 다 범한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 성적으로 타락한다

 

 사랑과 계명의 관계가 얼마만큼 밀접한가를 예를 들어서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본문에는 네 가지 계명을 예로 들고 있지만 그 가운데 두 가지만 설명을 드리고자 합니다. 먼저 간음하지 말라는 제7계명을 예로 들어 봅시다. 간음이 무엇입니까? 마음으로 부정한 음욕을 품는 데서부터 시작하여 남녀 간에 허용되지 아니한 성관계를 하는 것까지 모든 행위를 다 포함해서 간음이라고 합니다. 지금 우리 사회는 성도덕이 문란하고 퇴폐 풍조가 만연합니다. 지금은 이 문제를 가지고 새삼스럽게 설명을 한다는 것이 우습게 보일 정도로 성적 타락이 생활 구석구석을 더럽히고 있습니다.

 우리 사회는 이미 막가는 세상이 되어버렸습니다. 무엇을 보고 그렇게 진단할 수 있습니까? 인류 문명의 변천사를 보면 지금까지 여든여덟 개의 문명이 생기고, 번성하고, 쇠퇴하고, 몰락하는 과정을 거쳐 오늘에 이르렀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흥망성쇠의 과정을 연구 분석한 역사학자들의 말에 의하면 어느 문명이든지 쇠퇴기에 접어들면 비슷한 현상이 나타난다고 합니다. 가장 먼저 가정생활이 붕괴된다고 합니다. 자연히 이혼이 다반사가 되고, 성 개방으로 인해 도덕적으로 몹시 문란한 사회가 된다고 합니다. 이것이 인류 역사상 여든여덟 개의 문명이 몰락할 때 공통적으로 나타난 말기 현상이었습니다. 오늘날 현대 문명도 과거에 몰락한 여든여덟 개의 문명이 걸어왔던 길을 그대로 답습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지금 우리나라도 마찬가지입니다. 성 문란과 퇴폐 풍조로 인해 날이 갈수록 성 범죄가 증가되고 있습니다.

 언젠가 저는 급한 용무로 부산행 비행기를 타게 되었습니다. 공항에 도착해서 잠깐 화장실을 이용했습니다. 저는 화장실에 들어가면서 자세히 살펴보는 버릇이 있습니다. 국내 화장실이든 외국 화장실이든 낙서가 있는지, 깨끗한지, 변기 상태는 어떤지, 화장지는 어떤 것을 쓰는지 살펴봅니다. 화장실은 그 나라 문명의 거울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날 제가 들어간 화장실에는 어떤 표어가 붙어 있었습니다. 공항 당국에서 붙인 스티커였습니다.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에이즈를 추방하기 위해서 ○○을 사용합시다." 저는 깜짝 놀랐습니다. '우리나라가 여기까지 왔구나' 하고 마음속으로 한탄했습니다. 왜 그런고 하면 에이즈라는 병에 걸리지 않기만 한다면 어떤 도구를 사용해서 무슨 짓을 해도 좋다는 간접적인 시사가 그 말 속에 들어있기 때문입니다. 우리나라가 어쩌다 이 지경이 되었습니까?

 "인간 본능 속에 숨어 있는 성적 충동은 화약과 같다"는 표현을 본 일이 있습니다. 잘 쓰면 유용하지만 잘못 쓰면 대단히 위험하다는 의미가 아닌가 합니다. 너무 위험하기 때문에 하나님은 성을 결혼이라는 탄피 속에다 넣어서 뚜껑을 봉해 놓으신 것입니다. 그러나 일부 현대인들은 그 뚜껑을 뜯어서 폭발시켜야 속이 시원하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적지 않은 사람들이 자기의 성적 욕망을 통제할 수 있는 능력을 점점 잃어가고 있습니다. 또한 사랑에 대한 개념조차 자꾸 변질되어 가고 있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가정에서, 아내는 주부로서 남편은 가장으로서 각자의 책임을 다하고 자녀를 키우며 고된 삶을 서로 위로해 가면서 사는 것이 사랑이라고 생각지 않습니다. '어떻게 하면 황홀하게 즐길까' 하는 생각에 붙들려서 사랑을 추구하려고 하는 일부 젊은이들을 봅니다.

 이런 사회적 풍조를 보고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 그것은 전에는 결코 느껴 본 일이 없는 느낌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 느끼는 느낌이다." 도대체 무슨 소리인지 이해가 되지 않지요? 이렇게 황홀하게 상상되는 어떤 느낌을 사랑으로 생각하고 그 극대화된 느낌을 충족시키는 수단으로 성을 이용하려고 합니다. 다른 사람의 성을 자기 만족의 도구로 이용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이웃 사랑입니까?

 그러나 이것보다도 더 무서운 것은 자기의 울분, 고통, 원한을 푸는 수단으로 성을 악용하는 자들이 있다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오늘 현대 사회에 자꾸만 늘어나고 있습니다. 성적 범죄는 한 사람의 인격을 파괴할 뿐만 아니라 그 사람의 가족에게도 말할 수 없는 상처와 고통을 안겨 주는 것입니다. 이웃을 자기처럼 사랑한다면 도저히 간음을 할 수 없을 것입니다. 정말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상대방을 성의 희롱거리로 보지 않습니다. 우리 중에 특히 젊은 형제들에게 말씀드립니다. 가끔 마음이 공허해지고 무엇인가 자극적인 것을 찾고 싶은 유혹이 생길 때가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주의하십시오. 사회에 아무리 성적 범죄가 만연해 있다 할지라도 나만은 그런 사람이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을 가지고 이 세상을 살아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이웃 사랑의 자세입니다.

 

 사랑이 없으면 - 형제를 살인한다

 

 다음으로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을 한 번 생각해 봅시다. 살인하지 말라는 계명이 이웃 사랑과 무슨 관계가 있습니까? 살인은 인간의 가장 귀중한 재산인 생명을 앗아가는 행위입니다.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손해를 입히는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의 형상을 파손하는 행위입니다. 살인은 마음으로 미워하는 데서부터 생명을 해하려는 음모, 그리고 죽이는 행위까지 다 포함합니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형제에게 노하는 자마다 심판을 받게 되고 형제를 대하여 라가라 하는 자는 공회에 잡히게 되고 미련한 놈이라 하는 자는 지옥 불에 들어가게 되리라"(마 5:22).

 

 왜 이런 말씀을 하십니까? 형제를 마음으로 살인했기 때문입니다. '노하다'는 말은 헬라어로 '오르게'인데 이것은 뿌리깊은 분노를 가슴에 품고 있는 것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오르게'는 마음의 살인이 됩니다. '라가'는 형제를 깔보고 멸시하는 욕설입니다. 즉 인격을 모독하는 것입니다. '미련한 놈'은 원어로 '모레'라고 하는데 영어의 'moron'과 통하는 말입니다. 이것은 성인이 되었지만 지능이 불과 열몇 살 정도밖에 되지 않는 사람을 보고 멸시하면서 내뱉는 말입니다. 무슨 말로 욕을 하든지 형제를 인격적으로 모독하고 깔보면 벌써 마음으로 그 형제를 죽이는 것과 같습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자는 형제에게 모욕적인 말을 할 수 없습니다. 형제를 모욕하는 것은 마음으로 살인하는 것이 됩니다.

 요즈음 세상에서 가슴에 아무리 분노를 가득 담고 있어도 자기 자신을 살인자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남의 인격을 모독하는 욕을 했다고 해서 자기 스스로 살인죄를 범했다는 생각을 하면 신경쇠약증에 걸린 사람으로 취급될지 모릅니다. 우리 주변에는 분노의 감정을 풀지 못해 마음에 칼을 품고 다니는 자들이 예상 외로 많다고 합니다. 그들은 단지 행동에 옮길 만한 용기가 없고 여건이 안 되어서 사고를 내지 않고 있을 뿐입니다. 악한 감정을 끝까지 풀지 않으면 언젠가는 마음의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는 날이 올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지상에서 참 가슴 아픈 사건 기사를 보았습니다. 경기도 구리시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17세인 배 모군이 밤중에 주택가에서 소란을 피웠습니다. 친구들과 시끄럽게 떠드니까 동네 주민이 나와서 "이 밤중에 웬 소동이냐? 잠 좀 자게 빨리 다른 곳으로 가라" 하고 충고를 했습니다. 그 말이 어디 잘못입니까? 그런데 배군은 칼을 꺼내서 순식간에 그를 찔러 죽였습니다. 경찰에 끌려간 배군의 대답이 너무 충격적입니다. 밤에 여자친구와 같이 있기로 했는데 그 여자가 나타나지 않아 술을 먹고 홧김에 사람을 찔렀다는 것입니다. 얼마나 이기적이고 잔인한 행동입니까? 그가 생명을 그처럼 경시하는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그의 혈관에 이웃을 사랑하는 피가 한 방울이라도 들어 있었다면 그와 같이 무참한 짓은 하지 않았을 것입니다. 그 소년만 살인을 한 것이 아닙니다. 그에게 술을 판 사람도 간접 살인을 한 셈입니다. 그를 낳아 책임 없이 내버려둔 부모도 공범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오늘 우리가 사는 이 세상에는 도저히 있을 수 없는 끔찍한 일들이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습니다. 어느 특정인만이 범죄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도 자칫 잘못하면 얼마든지 무서운 일을 저지를 가능성이 있습니다. 이웃을 아끼고 사랑하는 마음이 부족하다면 언제 어디서 사람을 해칠지 아무도 모르는 일입니다.

 난폭 운전을 예로 들어 봅시다. 남편들은 아침에 일어날 때 피곤을 느낄 때가 자주 있습니다. 밤늦게까지 일하고 집에 돌아와서 잠자리에 들고 또 아침에 일어나 나가야 하니 피곤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럴 때 부인은 남편의 눈치를 봐서 잘해 주어야 합니다. 그런데 열 번 잘하다가도 어쩌다 한 번 정도는 바가지를 긁는 것이 부인들의 기질인 것 같습니다. 출근 길에 아내가 던진 불쾌한 말 한마디 때문에 남편이 몹시 언짢은 얼굴로 현관문을 나섭니다. 스트레스를 받습니다. 자기도 모르게 난폭 운전하게 됩니다. 비록 사고를 내지는 않았다 할지라도 남의 생명을 위협하는 간접적인 살인 방조 행위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부인은 남편 출근 길에 기분이 상하지 않도록 조심해야겠고, 남편은 아무리 기분이 나쁘더라도 이웃에게 피해를 주어서는 안 된다는 의무감을 가지고 핸들을 잡아야 할 것입니다. 술을 마시고 운전대에 앉습니까? 간접 살인자가 된 것입니다. 자연을 함부로 훼손합니까? 이것도 다른 사람을 간접적으로 죽이는 살인행위입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난폭 운전을 하지 않고 빈 깡통 하나라도 함부로 던지지 않습니다.

 오늘날 우리는 비인간화의 거센 물결에 밀려서 사람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는 현실에 살고 있습니다. 이제 한두 사람이 죽는 것은 별로 뉴스거리가 되지 않는 세상입니다. 생명에 대한 경외감이 점점 사라지고 있습니다. 생명의 존엄성에 대한 관심이 없어지고 있습니다. 생명 경시 풍조가 우리로 하여금 이웃을 쌀쌀한 눈초리로 쳐다보게 만들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비추어 보세요. 정말 이웃을 내 자신처럼 사랑한다면 생명을 이처럼 천시할 수 없습니다. 참으로 이웃을 사랑한다면 계명을 지키게 되고 계명을 지키려고 하는 사람은 이웃을 사랑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사랑의 빚 외에는 어떤 빚도 지지 말라

 

 이제 진짜 중요한 말씀이 나옵니다. 사랑은 평생 갚지 못할 빚과 같은 것이라고 합니다.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8절).

 

 이 말씀이 무슨 뜻인지 우리는 이미 잘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의 빚이 우리에게 있다는 것을 교훈하기 위해서 부수적으로 빚을 지는 문제를 거론하고 있습니다. "아무에게나 빚지지 말라"는 말씀은 돈을 빌리는 것이 무조건 죄가 된다는 말이 아닙니다. 빌릴 수는 있지만 일단 돈을 빌리면 반드시 갚으라는 교훈이 이 말씀 속에 담겨 있다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가끔 보면 교인들끼리 돈 거래를 합니다. 그런데 개중에는 빌린 돈을 갚지 않는 사례가 있나 봅니다. 형편이 좋아졌음에도 안 갚는 것입니다. 그 돈 없어도 잘사는데 꼭 갚아야 할 이유가 뭐냐는 식으로 행동한다고 합니다. 결국 빌려 준 사람 처지에서는 사람 잃고 돈 잃는 격이 되고 맙니다. 주님께서는 이웃끼리 이런 짓을 하지 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다음과 같은 영국 속담이 있습니다. "꾸어갈 때는 천사요 갚을 때는 악마라." 이것은 요즘 세태에 잘 어울리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1986년 부산에서 있었던 사건입니다. 우리 모두 잊어버렸지만 실제로 있었던 사건입니다. 하 모 여인이 경찰에 구속되었습니다. 그가 구속된 이유를 보면 기가 막힙니다. 그는 친구에게 385만 원을 빌렸습니다. 그런데 돈을 갚지 않았습니다. 약속한 날짜가 훨씬 지났는데도 갚을 생각을 안 하니까 돈을 빌려 준 친구가 찾아와서 따졌습니다. 하 여인은 언제 돈을 빌렸느냐고 오리발을 내밀었습니다. 빌려 주었으면 증거를 내놓으라며 도리어 큰소리를 쳤습니다. 아마 기간이 꽤 지났던 것 같습니다. 돈을 빌려 준 친구가 얼마나 어이가 없었겠습니까? 그는 오랫동안 보관해 주었던 차용증서를 내놓았습니다. 그 순간 하 여인은 그것을 빼앗아 갈기갈기 찢어 입에 넣고 꿀꺽 삼켜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무슨 증거를 가지고 독촉을 하느냐고 소리를 질렀습니다. 그래서 그 여인이 구속되었던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인들은 하나님의 말씀대로 살아야 합니다. 우리는 사랑의 빚 외에는 빚을 지지 말아야 합니다. 다시 말해서 갚지 않은 빚을 지고 살아서는 안 됩니다. 돈을 빌려 준 사람이 잘산다는 것이 안 갚아도 되는 이유가 될 수 없습니다. 빌려 간 사람이 못산다는 것이 안 갚아도 되는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우리는 이 점을 기억해야 합니다.

 빚 가운데 가장 큰 빚은 사랑이라고 합니다. 사랑을 빚이라고 하니까 사랑의 행위를 의무적으로만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왜 사랑을 가지고 빚을 진다고 말합니까? 이는 우리가 이미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하고 말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세상에 태어날 때부터 다른 사람의 신세를 지고 태어납니다. 한평생 살면서 독불장군은 없습니다. 인간은 다른 사람의 도움이 없이는 살 수 없는 존재입니다.

 우리는 죽을 때에도 많은 빚을 지고 갑니다. 성도 한 사람이 죽으면 많은 사람들이 그를 위해 밤잠을 설쳐가며 사랑의 봉사를 합니다. 어느 누구도 무덤에 가는 날까지 사랑을 받은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 중에는 사랑을 받은 일도 없고, 사랑을 해 줄 필요도 없다는 식으로 행세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얼마나 빡빡하고 피곤한 인생입니까? 우리가 얼마나 많은 사람으로부터 사랑의 빚을 지고 있는가를 우리는 잊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이웃에게만 사랑의 빚을 졌습니까? 더 큰 것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또 얼마나 많이 받았습니까?

 

 "보라 아버지께서 어떠한 사랑을 우리에게 주사 하나님의 자녀라 일컬음을 얻게 하셨는고, 우리가 그러하도다"(요일 3:1).

 

 우리는 사랑으로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하늘을 두루마리 삼고 바다를 먹물 삼아서 하나님의 사랑을 기록한다 해도 그 한량없는 사랑을 다 표현할 수 없다고 노래한 시인이 있습니다. 그만큼 하나님의 사랑에 빚을 지고 있기 때문에 자연히 다른 사람을 사랑해야 될 빚도 지게 된 것입니다.

 저는 빚을 져 본 일이 별로 없어서 빚진 사람의 심정을 실감나게 느끼지는 못합니다. 과거에 조금 빌려 본 적은 있지만 그것은 아주 적은 액수였습니다. 큰 부채를 안고 사는 사람이 밤낮없이 빚 걱정하는 것을 보면 보통 괴롭지 않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빚을 많이 진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니까 눈만 뜨면 언제 갚을까 하는 생각에 사로잡히고, 눈만 감으면 빚쟁이에게 쫓겨 다니는 꿈을 꾼다고 합니다.

 우리 모두는 사랑의 채무자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떤 생각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까? 눈만 뜨면 "사랑해야 해. 어떻게 사랑할까?" 하고, 눈만 감으면 사랑하지 못한 사람들의 얼굴이 눈앞에 아른거려야 합니다. 밤낮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떠나면 안 된다는 말입니다. 설혹 어떤 사람이 나에게 섭섭한 일을 해도 '내가 사랑을 덜 해서 그렇구나. 더 사랑했더라면 저렇게 안할 텐데' 하고 늘 빚진 사람의 심정으로 이웃을 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이 사랑의 빚입니다.

 

 하나님이 명(命)하시는 사랑

 

 하나님이 명하시는 사랑은 아가페입니다. 이것은 감정의 사랑이 아니라 의지의 사랑입니다. 우리의 이웃은 좁게 말하면 가족들이지만 범위를 넓혀서 말하면 주변에 사는 모든 사람들을 가리킵니다. 주변의 이웃은 가끔 만나는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대개 나와 가까운 사이가 아닐 수 있습니다. 기껏해야 서로를 필요로 할 때 만나는 정도의 사람들도 많습니다. 그들에게 사랑의 감정이 생긴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한마디로, 사랑하고픈 느낌을 일으키기에는 너무나 멀리 있는 사람들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향해서 "너희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이유가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이 명령하시는 사랑은 감정적인 사랑이라기보다 오히려 의지적인 사랑이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사랑은 감정적인 것이기 전에 의지적인 것이라야 합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사랑하라고 명령하시는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우리는 느낌이 없어도 사랑해야 합니다. 느낌이 안 생기지만 사랑해야 한다는 생각을 항상 품고 살아야 합니다. 이런 생각은 우리의 태도를 바꿀 수 있습니다. 태도는 행동으로 옮겨지게 됩니다. 사랑해야겠다는 마음의 태도가 사랑하는 행동으로 이어지는 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랑이란 돌과 같이 한 곳에 가만히 있는 것이 아니다. 빵과 같이 항상 만들고 또 만들며 새로이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옳은 말입니다. '사랑해야지' 하는 생각을 반죽해서 태도를 만들고 그것이 행동이라는 빵을 구워내야 하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좋은 감정, 사랑하는 느낌이 따라올 수 있는 것입니다. 칸트가 꼭 적합한 말을 한 것이 있습니다. "너는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꼭 해야 하니까." 옳습니다. 우리는 생명 걸고 하는 일은 꼭 해내고야 맙니다.

 이웃을 내 몸처럼 사랑하라는 것은 하나님의 자녀라면 반드시 실천해야 될 의무입니다.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이웃을 사랑해야 돼. 내가 진 빚이야. 꼭 사랑해야 돼' 하고 결심하면 그것이 사랑하는 태도를 낳습니다. 그러면 반드시 사랑하게 됩니다. 감정이 문제가 아닙니다. 꼭 해야겠다는 의지가 필요합니다. 이것이 빚진 자의 태도입니다. 빚을 반드시 갚겠다고 결단하기만 하면 평생을 두고 얼마를 갚아도 갚을 수 있습니다. 사랑을 꼭 갚아야 할 빚으로 여기는 사람은 반드시 이웃을 사랑할 수 있게 됩니다.

 임용의 교수가 쓴 글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그는 현재 혜성병원 원장이요, 연세대 의대 외래 교수입니다. 그가 일본에서 4년 동안 의학 공부를 마치고 돌아온 지 1년도 채 되지 않은 1979년의 일입니다. 그는 당시 월급쟁이 의사로 혜성병원에서 근무하고 있었습니다. 무더운 여름날, 그는 퇴근 시간을 30여 분 남겨 놓고 병원 복도 의자에 앉아 커피를 마시고 있었습니다. 그때 난데없이 일흔 살쯤 되어 보이는 남루한 노파가 30대 초반의 여자를 들쳐 업고 허겁지겁 들어오는 것이었습니다. 수납계 간호원이 "무슨 환자죠?" 하고 소리쳤습니다. "폐병 말기인데 제 딸입니다" 하고 노파가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간호원이 딱딱하게 말했습니다."주민등록증이 없으면 환자를 받을 수 없어요." 그 이야기를 듣는 순간 임 교수는 곧 귀찮은 일이 벌어질 것 같아 자리를 피하려고 일어났다고 합니다. 의사실로 들어가려고 하는데 할머니가 달려와 다짜고짜 그의 가운을 잡고 늘어지면서 "선생님, 우리는 난지도 주민들인데...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어요. 내 딸이 죽어 가요. 제발 살려 주세요" 하고 애원을 했습니다. 그는 노파의 손을 뿌리치면서 "돌아가세요"라고 냉정하게 말했습니다. 그리고 막 자리를 떠나려고 하는데 그의 마음속에 할머니의 얼굴과 예수님의 얼굴이 겹쳐지면서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하시는 주님의 음성이 들렸다고 합니다. 그 순간 그는 마음을 고쳐 먹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환자를 정성껏 돌봐 주었습니다. 그 일이 계기가 되어 지난 10년 동안 그는 난지도 주민들을 위해서 일해 왔습니다. 지금은 시간이 날 때마다 방글라데시에 가서 의료 선교 활동을 한다고 합니다.

 그가 그 환자에게 무슨 정이 있어서 사랑을 실천했겠습니까?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때문에 사랑을 실천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오늘 우리에게도 이와 같은 의지적인 결단이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우리 모두 사랑에 빚진 심정을 다시 회복합시다. "내 탓이야. 내가 사랑하지 못한 탓이야"라고 자신을 먼저 탓하는 빚쟁이가 됩시다. 그러면 우리는 계명에서 자유할 수 있습니다. 사랑한다는 것은 곧 자유한다는 말입니다. 사랑의 노예는 가장 큰 자유를 누리는 자유인이 됩니다. 사랑하는 사람은 승자입니다. 이웃을 사랑하는 것은 우리의 본성으로는 잘할 수 없습니다. 성령의 능력을 의지해야 합니다. 이 시간에 성령께서 우리에게 큰 사랑의 능력을 허락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말씀 앞에 무조건 무릎 꿇는 사람이 되게 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누가 이 병들고 비틀어진 사회를 고칠 수 있습니까? 누가 이 음탕하고 잔인한 사회를 고칠 수 있습니까? 바로 예수 믿는 우리들입니다. 사랑에 빚진 심정으로 안 믿는 이웃을 찾아갑시다. 말씀의 등불을 들고 찾아가서 하나님의 사랑을 전해 줍시다. 그리하여 삭막하게 얼어붙은 그들의 마음을 따뜻하게 녹여 줍시다.

 당신의 마음속에 아직도 미워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아직도 사랑하지 못하는 사람이 있습니까? 먼저 사랑에 빚진 심정을 회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이웃을 향해서 밤낮없이 사랑해야 한다는 결단을 새롭게 하기를 바랍니다. 우리 이웃의 마음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녹이고, 이 세상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제자로 만드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반드시 해야 할 일입니다. 우리 모두 이웃 사랑에 실패하는 사람이 되지 않도록 주께서 우리에게 축복해 주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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