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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2. 단정하게 생활하라

by 【고동엽】 2022. 9.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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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131쪽에 있는 글입니다.

 

 

42. 단정하게 생활하라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로마서 13장 11-14절

 

 

 

 

성령을 모신 사람은 2,000년 전에 살던 사람이나 오늘에 사는 우리들이나 닮은 것이 하나 있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이 오실 날이 멀지 않았다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산다는 것입니다. 좀 다른 표현을 빌린다면 위기의식을 갖는다는 말입니다. 성령은 어느 시대를 막론하고 성도들의 마음에 '마지막이 가까웠구나. 준비해야겠구나' 하는 위기의식을 갖게 합니다.

 본문 말씀은 1,900여 년 전에 바울 사도에 의해 쓰여진 말씀입니다. 이 말씀을 보면 바울도 독특한 위기의식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 자다가 깰 때가 벌써 되었으니 이는 이제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절).

 

 그가 얼마나 긴박한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았는가 하는 것을 쉽게 발견할 수 있습니다. 사도 바울뿐만 아닙니다. 지난 수십 세기 동안 성령을 모시고 산 사람들은 하나도 예외없이 자기의 시대를 종말로 생각하면서 세상을 살았습니다.

 바울이 이처럼 세상 종말을 경고하며 살았지만 그의 세대에 주님은 오시지 않았습니다. 그가 떠난 후 이미 1,900여 년의 세월이 흘렀습니다. 그러나 지금도 언제 주님이 오실지 그 날과 그 시를 정확하게 알지 못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이 마지막을 의식하며 살아야 한다는 것은 논리적으로 모순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물론 우리의 논리대로 따지면 모순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처음이요 나중이신 하나님,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신 하나님의 세계에서는 결코 모순이 아닙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님이 마지막 때로 정해 놓으신 시간이 있다는 것입니다. 마지막 때가 일단 정해지면 그 순간부터 그 다음의 모든 역사의 과정은 종말의 성격을 띠게 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여기저기서 말세를 자주 언급하고 있습니다.

 예를 들면, 여러 가정에 대학 입시를 준비하는 아들 딸들이 있을 것입니다. 입시를 앞두고 교육부에서는 올해 대학입시가 12월 ○일이라고 발표를 합니다. 그러면 발표가 나자마자 입시생과 그 가족들은 위기의식에 사로잡힙니다. 대입 때까지 그 기간이 얼마가 남았든지 상관이 없습니다. 입시 날짜가 정해지는 그 자체가 입시생에게는 일종의 위기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매일 밤잠을 줄여 가며 공부를 합니다. 자녀가 고생하는 것을 보고 딱해서 "얘야, 1년이나 남았는데 벌써부터 왜 이러냐? 한 달 정도 남겨 놓고 공부해라" 하고 말리는 부모가 있나요? 논리적으로 따지면 그 부모의 말이 합당하게 들릴지 모릅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남아 있는 12개월을 마치 2, 3일처럼 여기고 열심히 준비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역사의 종말을 정해 놓고 계십니다. 그것은 자명종 시계에 맞추어 놓은 시간과 같습니다. 그 시간을 정해 놓으셨다는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성령의 사람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그 사실을 깨달을 수 있습니다. 그리고 종말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는 순간부터 위기의식을 갖습니다. 그러므로 성령받은 사람은 1세기에 살았든 20세기에 살고 있든 늘 종말 의식을 가지고 신앙생활을 하게 됩니다. 본문 말씀을 자세히 보세요. 우리가 종말 의식을 갖는 것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또한 너희가 이 시기를 알거니와"(11절).

 

 마지막 때가 가까웠다는 것을 이미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고 죄사함을 받은 성도로서 성령을 모시고 있다면 이 세상이 현재 어느 시점에 와 있는가를 설명하지 않아도 다 알고 있다는 말입니다.

 따라서 우리가 성령의 사람이냐, 아니냐를 테스트할 수 있는 방법이 있습니다. 다음 질문에 정직하게 대답해 보시기 바랍니다. "당신은 늘 오늘이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종말 의식을 가지고 경건하게 살려고 노력합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받은 사람입니다. "당신은 아무 걱정 없이 세월이 흐르는 대로 마냥 즐기며 살고 있습니까?" 그렇다면 당신은 성령받은 사람이 아닙니다. 교회 마당이 닳도록 드나들어도 성령받은 사람이 아닌 것입니다.

 집에 화재가 날 조짐이 보이면 집 안에 있는 쥐들이 먼저 소란을 피우며 빠져나간다고 합니다. 집에 불이 붙는데도 꼼짝도 안 하는 쥐라면 쥐가 아닙니다. 태풍이 불어와서 배가 침몰할 위기에 처하면 배 안의 쥐들이 먼저 알고 소란을 피운다고 합니다. 배가 가라앉는데도 먹기만 하고 움직일 생각을 안 하는 쥐라면 쥐가 아닙니다. 위기 본능이 예민해야 진짜 쥐라는 말입니다. 쥐에 빗대어서 말하는 것이 죄송합니다만 위기의식이 예민한 사람만이 진짜 성령받은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비교할 때 분명히 위기를 눈이 다르고 느낌이 다릅니다. 오늘 이 시간에 자신을 성령의 사람이라고 확신할 수 있는지 이 문제에 비추어서 각자를 돌아볼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항상 깨어 있으라

 

 사도 바울이 오래 전부터 그렇게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았다면 오늘날 우리는 말해 무엇 하겠습니까? 다시 한 번 11절을 보기 바랍니다.

 

 "우리의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11절).

 

 지금으로부터 1,900여 년 전에 살았던 바울이 이처럼 긴장하고 살았다면 우리는 어떤 자세로 살아야겠습니까? 우리는 초대 교회 성도들이 예수님을 처음 믿었을 때보다 더 정신을 바짝 차리고 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때에 비해 세월이 굉장히 많이 흘렀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바울보다 훨씬 강도 높은 종말 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은 우리에게 이와 같은 의식을 깨우쳐 줍니다. 그러므로 바울이 알고 있던 그 사실을 약 2,000년이 흐른 지금에 와서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성령을 모신 신자라고 할 수 없습니다.

 11절에 '구원'이라는 말이 나옵니다.

 

 "구원이 처음 믿을 때보다 가까웠음이니라."

 

 여기서 말하는 구원은 주님 재림과 함께 우리 모두가 체험하게 될 최후의 영화를 가리킵니다. 이것은 로마서 8장 30절에서 말하는 영화와 같은 것입니다.

 

 "의롭다 하신 그들을 또한 영화롭게 하셨느니라."

 

 예수님과 함께 영원히 살 새 몸을 입고, 천군 천사들의 호위를 받으며 영원토록 하나님을 찬송하면서 살게 될 그 영화를 가리킵니다. 이 영화가 우리 앞에 약속되어 있습니다. 예수님의 재림과 우리가 영화롭게 되는 것, 이 둘을 같이 놓고 구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언제 재림하실까요? 하나님이 자기의 절대 주권을 가지고 정해 놓으신 바로 그 시간에 다시 오실 것입니다.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에 있는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막 13:32). 하나님이 정해 놓으신 절대적인 시간이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이 자기 권한을 가지고 정해 놓으신 시간입니다. 아무도 앞당길 수 없고 아무도 늦출 수 없는 시간입니다. 그것은 자명종 시계에 맞추어 놓은 시간과 같습니다. 비록 그 시간이 정해져 있지만 그때가 언제인지 정확하게 알려 주시지는 않았습니다. 이것은 우리의 죽음과 흡사하다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 죽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하신 것이요"(히 9:27).

 

 우리 각자에게는 죽음이 약속되어 있습니다. 한 번 죽는 것은 모든 사람에게 확정된 운명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언제 죽을지 그 정확한 일시는 아무도 모릅니다. 그 때는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옥 목사가 언제 죽을까요? 아무도 모릅니다. 오직 하나님만이 아십니다. 그러므로 미지의 약속된 사건인 죽음은 언제든지 닥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요, 현재의 위기라고 할 수 있습니다.

 더구나 요즘 같은 세상을 산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예측 불허의 위기가 항상 우리를 위협합니다. 아침에 나간 사람이 저녁에 시체가 되어 돌아오는 일들이 적지 않습니다. 날마다 위기의식을 가지고 준비하며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님의 재림도 마찬가지입니다. 반드시 그 때는 정해져 있지만 그 일시를 하나님이 가르쳐 주시지 않았기 때문에 우리는 항상 '오늘이 아닐까? 내일이 아닐까?' 하는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언제든지 일어날 수 있는 현재의 사건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마지막 때에 깨어 있어야 한다는 교훈을 자주 하셨습니다. 그분이 가르쳐 주신 말씀을 엄밀히 연구해 보면, 종말을 경고하는 말씀의 강조점을 때가 얼마 남지 않았다는 데 두기보다는 그 마지막 순간의 때와 시를 알지 못한다는 데에 더 많이 두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 24장 14절에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전 세계에 전파되어 모든 민족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될 때 주님이 재림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세계 역사의 종말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예수님이 이 말씀을 하실 당시는 세계 복음화가 시작되지도 않은 때입니다. 아직 성령충만한 사람들이 나오지도 아니한 때입니다. 복음이 땅 끝까지 전파되기까지 그 기간이 얼마나 걸릴지 모르는 깜깜한 시점에서 주님은 이 말씀을 하셨던 것입니다.

 

 "깨어 있으라 어느 날에 너희 주가 임할는지 너희가 알지 못함이니라"(마 24:42).

 

 "그런즉 깨어 있으라 너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지 못하느니라"(마 25:13).

 

 세계 복음화가 다 되어야 비로소 마지막 때가 온다고 가르치시고는 금방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시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상하게 생각되지 않습니까? 그러나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우리 인간의 입장에서 보면 아직 수천 년의 세월이 남아 있지만 그 마지막 일시를 모르기 때문에 하루하루가 깨어 있는 사람처럼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다시 말해서 위기의식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정확한 일시를 모를 때 거기에 대처하는 방법은 항상 준비하고 기다리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것이 실수하지 않는 비결입니다.

 제가 미국에 처음 유학 갔을 때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빠듯한 장학금을 가지고 공부하는 처지라 처음 4, 5개월 동안은 승용차가 없어서 고생을 많이 했습니다. 제가 다니던 학교와 숙소와의 거리는 제법 멀었습니다. 그런데 자가용이 없으니 천상 시내버스를 타야 했습니다. 미국의 시내버스는 대개가 극빈자나 노약자들을 위해서 시 당국이 적자를 감수하면서 운행하는 것이어서 젊은 사람이 이용하기에는 퍽 불편한 교통수단입니다. 제가 살던 도시에서는 버스가 30분에 한 대씩 오게 되어 있었습니다. 어디까지나 스케줄 상으로 말입니다. 시간이 잘 지켜진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그러나 그렇지 못했습니다. 어떤 때는 한 시간 만에 오기도 하고 어떤 때는 40분 만에 오기도 하고 종잡을 수가 없습니다. 한번 놓치면 합숙을 하던 저의 경우는 여러 가지로 지장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학교 수업이 끝나기만 하면 곧바로 버스 정류장으로 뛰어가는 것이 습관이 되었습니다.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미리 가서 대기하는 것 외에는 별 도리가 없었습니다. 언제 버스가 올지 모르니까요.

 누가 그런 저를 보고 바보 같은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까? 정확한 때를 모르니까 미리 넉넉하게 시간을 잡고 기다리는 도리밖에 없는 것입니다. 그것이 가장 확실한 안전책이었습니다. 종말을 기다리는 우리가 바로 그런 처지에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날마다 깨어 있으라고 경고하시는 것은 조금도 이상한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겠습니다.

 

 단정하게 생활하라

 

 그러면 지금이 말세임을 자각하는 성령의 사람은 어떻게 살아야 합니까? 어떻게 살아야 말세를 바로 사는 것이 됩니까?

 

 "밤이 깊고 낮이 가까웠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어두움의 일을 벗고 빛의 갑옷을 입자"(12절).

 

 13절에는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라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 가지 말씀이 매우 중요합니다. '빛의 갑옷을 입자', '단정히 행하자',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자.' 이 세 가지는 다 비슷한 내용입니다. 그러나 그 중에 제일 중요한 것은 단정히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이것을 빛의 갑옷, 또는 그리스도의 옷으로 비유해서 말하기도 합니다. 종말을 준비하는 우리는 예수님의 옷을 입은 사람처럼 단정히 행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단정한 생활에 대해 말하기 전에, 먼저 단정치 못한 사람들이 어떻게 사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습니다. 단정하게 살지 못하는 사람들은 밤중에 깨어나지 못하는 사람과 같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쉽게 말해 밤거리를 돌아다니는 건달의 생활과 비슷하다는 것입니다. 성경은 이 세상 역사를 밤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세상 사람들은 침상에서 뒹굴며 잠을 자는 사람으로 비유하고 있습니다. 그들에게는 위기의식이 없습니다.

 평안히 잠들어 있는 사람에게 무슨 위기의식이 있을 수 있습니까? 그러므로 그들의 생활은 매우 난잡합니다. 목적도 없고 의미도 없습니다. 목적이 있다고 해도 영원한 목적이 되지 못합니다. 영원한 진리도 되지 못합니다. 나름대로 무엇인가 가지고 있는 것 같지만 사실은 허무한 것이요, 결국은 자기 스스로 포기할 수밖에 없는 무가치한 것들을 쥐고 씨름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밤의 역사를 사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단정치 못한 사람들의 생활에 대해 구체적으로 살펴볼까요? 13절을 보면, 그들은 '방탕하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밤중에 골목을 쏘다니면서 소란을 피우는 건달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그들에게 무슨 목적이 있나요? 의미가 있나요? 그들은 기분 내키는 대로 고래고래 소리치면서 먹고 마시고 즐기며 돌아다니는 사람들입니다. 오늘날 많은 세상 사람들이 그렇게 살고 있는 것을 봅니다.

 또 그들은 '술 취한다'고 했습니다. 먹고 마시고 취하는 것으로 낙을 삼고 삽니다. 아예 세상 재미에 푹 빠진 사람을 일컬어서 술 취했다고 합니다. 우리 가운데 술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까? 예수님보다 술을 더 좋아하는 분이 있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당신은 잠자는 사람입니다.

 또 그들은 '음란하다'고 했습니다. 음란을 원어로 '코이테'라고  하는데 이것은 침대를 말합니다. 침대와 음란이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금지된 침상을 향한 그릇된 욕망이 무슨 짓이든 개의치 않고 악을 저지르게 하는 것입니다. 서로 눈만 맞으면 "좋다. 무슨 짓이든지 하자"는 식이 되게 합니다. 이것이 음란입니다. 오늘날 현대인들이 쉽게 빠져들어 가는 무서운 악입니다.

 또 그들은 '호색한다'고 했습니다. 호색은 얼굴에 철판을 깐 파렴치를 말합니다. 아무리 고약한 짓을 해도 부끄러워할 줄 모릅니다. 자기의 잘못을 감추려 하지도 않습니다. 죄를 지어도 보란 듯이 짓습니다. 이것이 호색입니다. 제가 알고 있는 어떤 사람은 자기 가정을 파탄지경으로 만들어 놓고는 다른 여자와 보란 듯이 살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가끔 본부인에게 전화를 걸어 부아를 지르는 소리를 한다고 합니다. 그야말로 철면피 같은 인간입니다.

 또 그들은 '쟁투한다'고 했습니다. 이것은 악한 경쟁심을 가지고 언제나 자기만을 내세우는 이기주의를 말합니다. 남을 짓밟고서라도 자기만 잘살겠다고 하는 무서운 욕망이 쟁투입니다.

 또 그들은 '시기한다'고 했습니다. 자기한테 없는 것이면 무엇이나 탐하고 비판하는 고약한 마음이 시기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종말 의식이 없는 사람들의 삶에 대해 살펴보았습니다. 그들은 자신의 삶에 분명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되는 대로 살아갑니다. 골목길을 마음대로 쏘다니는 건달패처럼 아무렇게나 사는 것이 오늘날 종말 의식이 없는 세상 사람들의 삶입니다. 생명을 걸고 추구할 만한 어떤 삶의 의미도, 목적도, 진리도 갖지 못한 자의 생활인 것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사는 것이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삶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하나님 나라의 역사는 낮과 같습니다. 낮이 가까이 오면 밤은 점점 물러가게 되어 있습니다. 우리 앞에 하나님 나라가 가까워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스스로 졸지 않도록 자기 자신을 흔들어 깨워야 합니다. 성령을 모시고 사는 사람의 영적 상태는 낮이요, 깨어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말은 '단정히 행한다'는 것입니다. '단정'이 뭡니까? 이 말의 사전적인 뜻은 '얌전하고 바른 것'입니다. 품행이 단정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그러면 벌써 무슨 뜻인지 감이 오지 않습니까? 단정히 앉아 있다는 말도 있지요. 흐트러짐이 없는 자세를 말합니다. 그리고 좀 더 우리 자신에게 와닿는 표현을 붙인다면 '-답다'는 말을 쓸 수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답다. 주님 오실 날을 기다리는 사람답다." 바로 이것이 단정하게 사는 사람의 모습입니다. 다시 말해서, 말세를 의식하고 사는 성령의 사람은 주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사람답게 살아야 한다는 말입니다.

 세상 사람들은 자기의 정욕을 채우기 위해 육신이 원하는 대로 살아갑니다. 그들은 육신을 앞세우지만 우리는 영혼을 앞세웁니다. 그들은 항상 세상을 의식하고 살지만 우리는 다시 오실 주님을 바라보고 삽니다. 그들은 모든 것을 다 놓고 떠날 사람처럼 삽니다. 그들은 자기를 기쁘게 하는 것이 최상의 목표이지만 우리는 이 세상에 오실 예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을 최상의 목표로 삼고 살아갑니다. 그들과 우리는 색깔이 확연히 다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그들과 분명히 구별되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이와 같이 단정히 사는 사람을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서 있는 하인"(눅 12:35)으로 비유하셨습니다. 주인이 언제 오실지 몰라서 허리에 띠를 띠고 등불을 켜고 문 옆에 서 있는 하인의 태도가 바로 우리들의 자세가 되어야 합니다. 하인이 할 수 있는 최선의 방법은 주인을 기쁘게 영접하기 위해서 등불을 켜고 흐트러지지 않는 모습으로 문 옆에 서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정히 생활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세상 사람처럼 방탕할 수 없습니다. 음란할 수 없습니다. 호색할 수 없습니다. 시기와 쟁투를 해서도 안 됩니다.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주님을 만나는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다. 이런 사람을 일컬어서 'Made in Kingdom of GOD'이라는 표를 달고 있는 사람의 생활이라고 말한 사람이 있습니다. 그렇습니다. 단정히 행하는 사람은 'Made in  천국' 도장이 찍혀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은 뭐라고 써있나요? 'Made in 세상'입니다. 둘은 서로 다를 수밖에 없습니다.

 

 세상에서 도피하지 말라

 

 한 가지 주의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말세를 대비하여 살아야 한다는 것을 일상생활을 다 포기하고 현실을 도피하고 살아야 하는 것으로 잘못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다는 것입니다. 우리 주변에서 이런 사례를 흔하게 볼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오시는 날을 정확하게 안다고 떠드는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포기하는 행동을 많이 합니다. 그들은 가정과 직장을 내버리고, 일상적인 생활마저 다 포기합니다. 그리고 더 나아가서 세상을 도피하려고 합니다. 어느 은밀한 곳에 모여 기도하며 정신없이 그 날만을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단정히 행하는 삶입니까? 아닙니다. 그것은 대단히 잘못된 행동입니다.

 어느 부인이 자기 남편을 구해 달라고 하소연을 했습니다. 그 남편은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서 직장에 사표를 내고 그 집단을 따라갔습니다. 미리 받은 퇴직금도 몽땅 그것에 바쳐버렸습니다. 그 집단에서는 죄를 사하기 위해서 24시간 기도해야 한다고 가르칩니다. 그래서 그는 산 속에서 하루 종일 기도만 하고 앉아 있는 것입니다. 그 사람은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이요, 세상을 완전히 도피한 사람입니다. 인간이 정한 말세의 때에 속아 그렇게 잘못되어버린 것입니다.

 솔직히 말해, 마지막 때를 정해 놓으시고도 그 일시를 정확하게 알려 주시지 않은 하나님이 얼마나 감사한지 모릅니다. 이것은 틀림없이 자비로우신 하나님의 지혜요, 은혜입니다. 만약에 주님이 우리에게 죽는 시기를 알려 주신다면 우리가 성실하게 살려고 하겠습니까? 남은 날까지 '어떻게 하면 편안하게 살다가 갈까?' 그 궁리만 하고 있겠지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죽음의 날을 정확하게 알려 주시지 않는 이유가 분명히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예수님이 오시는 날도 정확하게 알려 주시지 않는 분명한 이유가 있는 것입니다. 날마다 한결같이 단정하게 생활하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사람들이 엉터리 일시를 알고 있어도 정신나간 짓거리를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하는데, 진짜 일시를 안다면 어떻게 되겠습니까? 설령 앞으로 10년이 남았다 해도 정상적인 생활을 하기는 어려울 것입니다. 우리는 그 날과 그 시를 알려 주시지 않는 하나님께 깊이 감사드려야 합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사는 것이 재림을 준비하는 사람답게 사는 것입니까? 대답은 간단합니다. 단정히 생활하는 것입니다. 단정한 생활은 세상을 포기하는 것이 아닙니다. 도피하는 것도 아닙니다. 오히려 더 충실하게 살려고 노력하는 것을 말합니다. 주님이 언제 오실지 모르지만 그분을 만났을 때 부끄럽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자기 일에 충실하게 사는 것이 단정한 삶입니다.

 우리 가운데 사업을 하는 분이 있습니까? 더욱 자신의 일에 충실해야 합니다. 주님 오시는 그날까지 열심히 일해야 합니다. 우리 중에 주부가 많이 있지요? 자녀 교육시키느라고 밤낮없이 신경을 써야 합니다. 물론 공부 못하는 자식을 생각할 때는 입시 하루 전날 주님이 오셨으면 좋겠지만 그렇게는 안 될 거예요. 머리가 나쁜 아이라도 마지막까지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자신의 건강을 위해서 테니스를 칩니까? 수영을 합니까? 좋아요. 얼마든지 하세요. 수영을 하다가 펜티 바람으로 주님을 맞이해도 괜찮습니다. 우리가 항상 마음으로 오늘이라도 주님이 오실 수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하루 일에 성실히 임한다면 그 삶 자체가 주님을 만나는 생활입니다. 그것이 단정하게 사는 것입니다.

 이렇게 단정하게 생활하는 분들이 교회 안에는 참 많습니다. 호주머니에 성구 카드를 넣고 다니면서 외우는 사람을 보고 잔다고 할 수 있겠습니까? 그 바쁜 중에도 수요 찬양 예배에 나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이 자는 사람입니까? 밤늦은 시간에 다락방에서 진지하게 말씀을 공부하며 다른 형제의 문제를 놓고 기도해 주는 사람이 어떻게 잠자는 사람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저는 늘 그분들을 기쁘게, 자랑스럽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만에 하나라도 우리 중에 위기의식이 없이 사는 분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Made in 천국'이라는 표가 없이, 세상 사람과 별 차이가 없는 하루하루를 사는 분이 있다면 얼마나 불행한 일입니까? 저는 그런 분들을 돕고 싶습니다. 아마 그런 분들에게는 먹고 즐기는 것이 최고라고 생각하는 방탕 기질이 아직 남아 있는지 모릅니다. 교회는 다니지만 은밀하게 즐기는 성적인 죄가 있을지 모릅니다. 교회를 다니지만 아직도 생각이 영적이라기보다 세상적이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분들이 있을지 모릅니다.

 

 옛 정욕을 떨쳐버리려면

 

 한때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주장한 시한부 종말론은 우리 사회를 극도로 어지럽게 만들었습니다. 그는 많은 추종자들로 하여금 가정을 파괴하게 만들고 직장에서 쫓겨나게 하고, 사회에서 더 이상 적응할 수 없는 정신병자로 만들기도 한 장본인입니다. 그런데 그 자신은 휴거를 믿지 않았습니다. 그러니까 몇 억이나 되는 집을 짓고 살았지요. 왜 자기가 예언한 마지막 날짜보다 훨씬 지난 환매채를 사서 돈을 모을 생각을 했겠습니까? 왜 침대 밑에 달러를 숨겨 놓고 살았겠습니까? 다른 사람에게는 몇 년 몇 월 몇 일에 예수님 오신다고 떠벌려 놓고 자기는 그것을 믿지 않고 돈 벌 생각만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 같은 이단이 등장하는 것을 보면 말세가 바짝 다가온 것은 사실인 것 같습니다. 

 한편 이장림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 하나 있습니다. 우리도 잘못하면 그 사람처럼 되기 쉽다는 사실입니다. 예수님 재림하신다고 날마다 입으로 떠들면 뭐합니까? 실제적으로 그에 합당한 생활을 하지 않으면 침대 밑에 달러를 숨겨 놓고 살았던 그 사람과 별로 다를 바가 없는 것입니다. 우리 중에 그런 사람이 있을까 저는 두렵습니다. 혹시나 그런 분이 있다면 이 시간 성령께서 새로운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바랍니다. 손에 등불을 들고 허리띠를 띠고 문 옆에서 기다리는 하인처럼 단정한 생활을 하루 빨리 찾기를 바랍니다.

 마음으로는 "정신차려야지. 이래서는 안 돼" 하면서도 실제로는 자고 있는 사람처럼 살고 있는 분들을 위해서 제가 예화 하나를 소개하겠습니다. 어거스틴의 이야기입니다. 방탕아 어거스틴을 성 어거스틴으로 바꾸어 놓은 결정적인 말씀이 바로 이 본문이기 때문입니다.

 어거스틴은 예수 믿는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그 생활이 방탕했습니다. 배운 것은 많았지만 돌아다니면서 못된 짓을 일삼는 유식한 방탕아였습니다. 그는 20년 동안을 그렇게 살았습니다. 그의 어머니는 자나깨나 그를 위해 눈물로 기도했습니다. 마침내 그는 어머니의 기도 덕분에 회개하고 돌아왔습니다. 교회도 다니고, 성경도 읽고, 바르게 살려고 노력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수년 동안 과거의 잘못된 습관에 익숙해져버린 정신 상태에서 헤어나지 못했습니다. 그는 고민했습니다. 고통했습니다. 그는 그때의 갈등을 그의 저서, <참회록>에 이렇게 기록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나의 낡은 옛사람에 속한 습관의 밧줄을 당장 끊어 주시지 않았습니다. 나는 내 속으로 '지금 당장 끊어버려야지. 지금이야말로 이 줄을 벗어버릴 때입니다'라고 외쳤습니다. 그러나 죄의 뿌리를 뽑지 못한 나는 아직까지도 굳게 옛자리를 숨가쁘게 지키려 하고 있었습니다. 저는 다시 한 번 옛사람을 벗어나기 위해서 발버둥을 쳤습니다. 지금까지의 악을 포기하며 옛날의 내 자신을 포기하고 새로운 자신을 향하여 달려가려 하면 할수록 더 큰 불안과 공포가 엄습하여 나를 떨게 했습니다. 어리석고 어리석으며 헛되고 헛되며 아무런 가치도 없고 허무하기 짝이 없는 나의 옛 시절의 여자들이 나를 붙잡고 놓아 주지 않았습니다. 내 옷을 벗기고 부드러운 침상에 누이고 내게 달콤한 음성으로 속삭였습니다. '당신이 우리를 버리고 갈 수 있나요? 당신이 없다면 우리가 얼마나 외롭게 지낸다는 것을 모르세요? 정든 우리를 버리고 어떻게 떠날 수 있어요?' 이렇게 그들은 과거의 나의 모습을 하나 둘 들추어냈습니다."

 얼마나 고민하고 갈등하는 사람입니까? 예수를 믿어도 어두움의 일을 벗어버리지 못해 몸부림치는 어거스틴을 보게 됩니다. 드디어 그의 갈등과 고민은 극에 달했습니다. 그때 그는 이런 말을 했습니다. "내 영혼 깊숙이 숨겨져 있는 내 인생의 비참함이 그대로 내 눈앞에 드러났고 강한 폭풍이 내 영혼을 흔들더니 내 눈에서는 눈물이 폭우처럼 쏟아지기 시작했습니다. 나는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홀로 조용히 통곡하고 싶었습니다. 그래서 내 친구 알리피우스 곁을 떠나 좀더 호젓한 곳으로 갔고 그곳에서 아무 방해도 받지 않은 채 통곡했습니다. 나는 알지도 못하는 사이에 무화과나무 아래 땅에 엎드렸고 내 눈에는 눈물이 폭포처럼 흘렀으니, 나는 진실로 그 죄악 때문에 괴로움과 고통 중에서 부르짖었습니다. '오, 주님, 언제까지 내일 내일 할 것입니까? 왜 지금은 안 됩니까? 왜 나의 더러운 생활을 이 순간에 깨끗이 끝내지 못합니까?' 하고 부르짖었습니다."

 이와 같이 갈등하고 고통하는 어거스틴에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의 고통을 어루만지시는 하나님의 손길이었습니다. 그 순간을 그는 이렇게 기록했습니다. "그때 갑자기 이웃집에서 한 음성이 내 귀에 들려왔습니다. 소년의 음성인지 소녀의 음성인지 구분할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반복되는 노래 가사와 같았습니다. '집어 들고 읽어라. 집어 들고 읽어라.' 그 순간 나의 얼굴은 변했고 나는 그 노래가 어린 아이들이 흔히 부르는 노래인가를 조심스럽게 생각해 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노래는 전에 내가 결코 들어 본 적이 없는 노래였습니다. 그래서 나는 급히 친구가 앉아 있던 장소로 돌아가서 거기에 있던 사도 바울의 서신을 펴들고 제일 먼저 내 눈길이 닿는 부분을 읽었습니다. 거기에는 이런 말이 기록되어 있었습니다.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고 방탕과 술 취하지 말며 음란과 호색하지 말며 쟁투와 시기하지 말고 오직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말라." 나는 더 읽지 않았습니다. 더 읽을 필요가 없었습니다. 이 말씀은 광명한 확신의 빛으로 내 마음을 비추어 내 속에 있는 모든 의심의 어두움을 물리쳐 주었기 때문입니다. 이제 나의 얼굴은 완전히 평온을 되찾았습니다." 드디어 속물 어거스틴이 성 어거스틴으로 바뀌는 순간이었습니다.

 어거스틴처럼 예수를 믿어도, 아직도 꿈틀거리는 옛날의 정욕에 사로잡혀 있는 분이 있습니까? 당장 오실 예수님을 만나겠다는 단정한 자세보다도 세상을 즐기면서 살아 보고 싶다는 바람기와 방탕기가 남아 있습니까? 그렇다면 어거스틴처럼 고민하십시오. 어거스틴처럼 주님 앞에 매달리십시오. 부르짖으십시오. 도와 달라고 하십시오. 그러면 성령께서는 은혜의 빛을 잠자는 당신의 심령에 환하게 비추어 주시고 낮에와 같이 단정히 행하도록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옷 입고, 정욕을 위하여 육신의 일을 도모하지 아니하는 경건한 사람으로 만들어 주실 것입니다.

 성령의 사람은 세상 사람과 분명히 달라야 합니다.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고 단정하게 행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우리 모두를, 마지막 때를 준비하는 사람답게 생활하는 사람으로 만들어 주시기를 기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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