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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냥 사는 사람들. (요 14:6)

by 【고동엽】 2022. 9. 3.

 그냥 사는 사람들.   (요 14:6)

저희 교회 전도 축제에 초청을 받아 오늘 처음으로 저희 교회에 나오신 여러분들을 주님의 이름으로 환영합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저희 교회에 오셔서 저희들과 함께 예배드리는 이 시간이 여러분의 평생에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과 소원이 있으십니다. 그것은 우리가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데살로니가 전서 5장 16절 이하에 보면 ‘항상 기뻐하라, 쉬지 말고 기도하라, 범사에 감사하라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은 우리가 항상 기뻐하며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에게 관심이 없으시고 언제나 우리에게만 있으십니다. 우리가 기뻐해야 하나님도 기뻐하시고 우리가 행복해야 하나님도 행복해 하십니다. 이유는 간단합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기 때문입니다.

   우리의 뜻과 소원도 행복하게 잘 사는 것입니다.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하여 우리 인간들이 수고하고 애쓰는 것을 보면 엄청납니다. 행복하게 잘 살려고 돈을 벌고, 공부를 하고,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늦게 눕는 수고를 마다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말 잘 사는 사람은 세상에 그다지 많지 않습니다.

   지나가는 100사람에게 물었습니다.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 많았을까요? 일등, ‘그럭저럭 삽니다.’ 이등, ‘마지못해 삽니다.’ 삼등은 뭘까요?  네, 아마 ‘죽지 못해 삽니다.’일겁니다. 여러분들은 요즘 어떻게 사십니까?!.......

   왜 사람들은 행복하게 잘 살기 위하여 평생을 치열하게 살아가는데 정작 그렇게 밖에는 살지 못하는 것일까요? 거기에는 매우 중요한 이유가 있습니다. 그것은 행복과 잘 사는 것에 대한 착각 때문입니다. 무엇이 과연 행복이고 무엇이 과연 잘 사는 것인가에 대한 정의와 정리가 잘못 되었기 때문입니다.

   제 큰 아이가 초등학교 일 학년 때 친구 집엘 다녀오더니 호들갑을 떨며 말했습니다. ‘아빠, 아빠 우리 친구 집엘 다녀왔는데요, 되게 잘 살아요.’ 저는 그 말을 듣는 즉시 제가 우리 아이에게 아주 중요한 말을 잘못 가르쳤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우리 아이가 제게 해야 할 정확한 말은 ‘되게 부자에요’라는 말이었는데 우리 아이는 그것을 그냥 ‘되게 잘 살아요’라고 말한 것이었습니다. 우리는 부자와 잘 사는 사람을 같은 뜻으로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우리는 가난한 사람과 못 사는 사람을 동의어로 사용하며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잘 살려면 돈 많이 벌어 부자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만 가지고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 생각이 잘못된 것입니다. 보통 잘 못된 것이 아니라 치명적으로 잘못된 것입니다. 단언할 수 있습니다.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을 혼돈하여 말하고 생각하고 산다면 그는 절대로 잘 사는 사람이 될 수 없습니다. 부자가 되는 것은 좋은 일이지만 부자가 되는 것이 곧 잘 사는 사람이 되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복음 중의 복음은 앞에서도 말씀을 드린바와 같이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들을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사랑에는 사랑 받는 사람을 존귀하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저는 제 아이들을 사랑합니다. 때문에 저는 제 아이들이 귀합니다. 천하보다 귀하고 제 생명보다 귀합니다.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기 때문에 하나님이 저와 여러분을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습니다. 하나님 당신의 생명보다 귀하게 여기십니다. 그 마음이 십자가에 잘 나타나 있습니다. 여러분이 아시든 모르시든 상관없이 여러분들은 천하보다 크고 귀한 존재들이십니다. 때문에 천하를 다 얻는다 하여도, 그만큼 큰 부자가 된다고 하여도 여러분의 삶은 채워지지 않습니다. 여러분의 삶에 만족은 없습니다.

   성경에 나오는 사람으로 세상적인 부귀와 영광을 가장 많이 누린 사람은 솔로몬입니다. 우리의 생각과 기준대로라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삶을 살아야만 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이 기록한 전도서에서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고,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모든 강물을 연하여 바다로 흐르되 바다를 채우지 못하는도다.’

   세상의 모든 부귀와 영화가 쉬지 않고 솔로몬에게 흘러 들어왔지만 솔로몬은 그것 때문에 만족할 수 없었습니다. 행복할 수 없었습니다. 그것은 복음 때문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솔로몬을 사랑하셔서 솔로몬을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만드셨기 때문에 천하를 다 얻었지만 만족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행복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잘 살 수 없었던 것입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행복하게 잘 사는 것과 부자로 사는 것은 전혀 다른 이야기입니다.

   여러분 세계에 우리나라만큼 이렇게 짧은 시간에 이렇게 큰 경제성장을 가져온 나라는 별로 많지 않습니다. 어렸을 때 학교에서 해마다 작성하던 생활환경조사서라는 것 생각나십니까? 거기에 어떤 설문들이 있었는지 기억나십니까? ‘라디오 있냐? 선풍기 있냐? 전화 있냐? 텔레비전 있냐? 냉장고 있냐? 피아노 있냐?’는 것들이었습니다. 당시에는 그런 것만 있어도 큰 부자였습니다. 정말 당시 에는 집에 전화 있으면 부자였습니다. 청색전화, 백색전화 생각나십니까? 사고 팔 수 있는 전화와 사고 팔 수 없는 전화였는데 사고 팔 수 있는 전화의 가격이 거의 집 한 채 값이었다는 것도 기억하십니까?


   그때와 비교하면 우리는 정말 재벌이 다 되었습니다. 그래서 행복하십니까? 그래서 만족하십니까? 그렇지 않지 않습니까? 왜 그런지 아십니까? 하나님이 여러분을 사랑하셔서 여러분들을 천하보다 크고 귀하게 창조하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그것을 알지 못하고 아직도 경제에만 매달려 있습니다. 국민소득이 2만 불이 넘고 3만 불이 되면 행복해 질 것이라고, 잘 살게 될 것이라고 착각하며 거기에만 매달리고 있습니다. 저도 국민소득이 높아지는 것이 좋습니다. 그것이 잘못되었다는 것이 아니라, 제가 말하고 싶은 것은 그것이 달성되어도 행복해 지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를 우리가 생각하고 바라는 것과 같이 우리를 잘 살게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것입니다.

   1992년 올림픽이 끝 난지 얼마 되지 않아서 미국에서 목회를 하시는 선배목사님이 한국엘 나오셨습니다. 함께 식사를 하게 되었는데 목사님이 호텔에서 텔레비전에서 당시 우리 한국 아이들이 10만 원이 넘는 고가의 운동화들을 신고 다닌다는 말에 아마 놀라셨던 것 같습니다. 저에게 ‘김 목사, 정말 한국의 아이들이 그렇게 비싼 운동화들을 신고 다녀?’라고 물으셨습니다.


   집에 돌아와 당시 중학교와 초등학교에 다니던 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세상에 그렇게 비싼 운동화가 다 있냐?’ 아이들이 무슨 표 농구화가 10만 원이 넘는다고 답해 주었습니다. 제가 다시 아이들에게 물었습니다. ‘너희 학교에도 그런 신발 신고 다니는 놈들이 있냐?’ 아이들이 ‘우리만 빼놓고 다 신어요.’라고 대답해 주었습니다. ‘그런데 너희들은 왜 사달라고 하지 않았냐?’고 묻자 아이들은 ‘사달라고 해보았자 안 사 주셨을텐데요 뭐’라고 대답하였습니다.


   아이들에게 편지를 썼습니다. 그렇게 비싼 운동화 사달라고 조르지 않아서 고맙다는 편지를 아이들에게 썼습니다. 그 편지를 쓰면서 아이들에게 왜 그런 신발을 신으면 안 되는지를 설명해 주었습니다. 답은 아주 간단하였습니다. 그것은 ‘쓸 데 없다’였습니다. 당시 황영조 선수가 올림픽 마라톤에서 금메달을 땄었습니다. 그런데 그가 속해 있던 회사에서 황영조 선수에게 일억 원을 투자하여 마라톤화를 만들어 주었었습니다. 저는 황영조 선수의 일억 원짜리 운동화를 이야기하면서 그것은 괜찮다고 말해 주었습니다. 이유는 ‘쓸 데 있다’였습니다. 저는 필요하면 일억 원 짜리도 신을 수 있지만 그렇지 않다면 10만 원짜리도 신을 필요가 없다는 말을 해 주고 싶었습니다.


   편지 중에 아이들에게 썼습니다. ‘너희들이 십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는 이유가 무엇이냐? 국위를 선양하기 위함이냐 아니면 기록을 단축하기 위함이냐? 그런 것이 아니라 그냥 신발 자랑하려고 하는 것이 아니냐? 내 신발은 십만 원짜리다, 나는 십만 원짜리 운동화를 신는 사람이다 라는 것을 자랑하려고 그러는 것이 아니냐? 그러나 애들아 조금만 깊이 생각해 보아라 그것은 자랑스러운 것이 아니라 부끄러운 것이란다. 사람이 얼마나 못났으면 자기 자신을 자랑하지 못하고 신발을 자랑하려 하겠느냐? 자기가 10만 원짜리 신발만 못하니까 자기를 자랑하지 못하고 신발을 자랑하는 것이 아니겠니? 너희는 신발을 자랑하는 사람이 되지 말고 너희의 사람됨을 자랑하며 사는 사람이 되거라.’

사람들은 잘 사는 것이 소유 가치에 있는 것으로 착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습니다. 잘 사는 것이 소유 가치에 있는 것이 아니라 존재가치에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존재가치를 높이는 데에 예수를 믿는 목적도 있습니다.

   여러분 혹 아시는지 모르겠으나 예수를 믿는다고 다 부자가 되지는 않습니다. 예수를 안 믿는다고 다 가난해 지지도 않습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를 믿는다고 소유 가치가 높아지지는 않는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예수를 믿지 않고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법은 없습니다. 그것은 논리적으로 불가능합니다.

   모든 존재의 가치는 존재 목적으로부터 발생합니다. 모든 존재에는 목적이 있습니다. 세상에 목적 없이 존재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습니다. 목적을 상실하면 가치를 상실합니다. 모든 존재는 목적대로 존재 할 때만 존재가치 발생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은 사람도 예외가 아닙니다. 소유 가치를 위해서는 돈만 벌면 됩니다. 그러나 부자가 되는 것이 아니라 정말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돈만 가지고는 안 됩니다. 정말 행복하게 잘 사는 사람이 되려면 자신의 존재 목적이 무엇인가를 생각해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 존재목적대로 살도록 노력해서 목적과 자신의 삶이 일치하게 해야만 합니다.

   모든 존재의 목적은 존재에서부터 말미암지 않습니다. 존재케 한 이로부터 말미암습니다. 스스로 목적을 가지고 존재하는 존재는 세상에 하나님 한 분밖에는 없습니다. 하나님외에는 모든 존재가 다 피조물입니다. 피조물이라는 뜻이 무엇입니까? 그것은 스스로가 존재의 원인과 목적이 되지 못한다는 뜻입니다.

우리의 존재목적은 우리가 결정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것입니다. 잘 산다는 것은 우리 뜻대로, 우리 욕심대로 사는 것이 아닙니다. 잘 사는 것은 우리를 창조하신 하나님의 뜻대로 사는 것입니다. 우리의 삶과 하나님의 뜻이 일치 할 때에만 우리의 존재가치가 높아지는 것입니다.
동양의 선조들은 도를 닦았습니다. 사람답게 사는 길이 있다고 저들은 믿었고 그것을 찾았습니다. 길을 알면 아무리 멀어도 갈 수 있습니다. 그러나 길을 모르면 아무리 가까워도 갈 수 없습니다. 서양의 선조들은 철학을 하였습니다. 철학의 궁극적인 관심은 진리였습니다. 진리가 삶의 이치와 식을 의미합니다. 식을 알면 문제가 아무리 복잡하고 어려워도 풀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치와 식을 모르면 아무리 쉬운 문제도 풀 수 없습니다.




   길이 있고 식이 있습니다. 예수님은 오늘 본문을 통하여 우리들에게 말씀하십니다. 내가 바로 그 길이요 진리라고 말씀하십니다. 하나님이 길 맞습니다. 삶의 길은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입니다. 세상과 삶의 이치는 우리가 만든 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만드신 것이고 만드시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님이 길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하나님이 진리 즉 삶의 이치와 식이시라는 것을 믿는 것입니다. 처음에는 누구나 다 모르는 길을 갑니다. 길을 가르쳐 준 사람을 믿고 갑니다. 처음 가는 길을 알고 가는 사람은 없습니다. 처음 가는 길은 알고 가는 것이 아니라 믿고 가는 것입니다. 믿고 가 보았는데 틀리면 안 믿으면 됩니다. 다시는 그 사람이 가르쳐 준 길로 가지 않으면 됩니다. 그러나 가보지 않고는 그 길이 맞는지 틀리는지 알 수 없습니다.

가르쳐 주는 길을 믿지 않고 그냥 자기가 알아서 찾아보겠다면 그것은 불가능합니다. 길은 찾는 것이 아니라 묻는 것입니다. 옛날에 도를 닦던 우리 선조들의 문제는 길을 내신 이에게 묻지 않고 스스로 찾으려고 하였던 것입니다.

제 차에는 네비게이션이 있습니다. 저는 네비게이션을 믿고 네비게이션이 지시하는대로 운전을 합니다. 참 기가 막힙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네비게이션입니다. 네비게이션과 비교할 수 없는 탁월하신 네비게이션이십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묻지도 않고 그냥 아무렇게나 운전해서 길을 찾을 확률은 거의 제로입니다. 우리의 인생은 더 말할 것이 없습니다.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알지도 못하는 인생의 길을 그냥 제 마음대로 운전해 살아가고 있습니다. 인생의 방황은 그 때문에 생기는 것입니다. 인생의 실패는 그 때문에 오는 것입니다. 알지 못하는 길을 묻지도 않고 제 고집대로, 제 마음대로 가는 사람이 어떻게 길을 찾을 수 있고 성공할 수 있고, 행복할 수 있고 잘 살 수 있겠습니까?


사랑하는 여러분, 세상을 창조하신 하나님이 계십니다. 그것은 그냥 세상을 보면 압니다. 자세히 생각하며 보면 그 하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저와 여러분을 사랑하시는 분이심을 알 수 있습니다. 그 하나님을 믿으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하나님이 말씀 하시는 대로 한번 살아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하나님으로 길을 삼고 하나님으로 삶의 식을 삼아 한번 살아 보실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냥 사시겠습니까? 아니면 네비게이션을 다시겠습니까?

출처/김동호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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