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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자료실 종합모음

이삭과 입다의 딸 (창22장1-10 삿11장29-40절)

by 【고동엽】 2022. 9. 3.

 이삭과 입다의 딸  (창22장1-10 삿11장29-40절)

심청전에 보면, 그 어린 소년 심청이 홀아비에다가 눈까지 먼 자기 아버지 심봉사를 정성껏 효성으로 섬기다가 우여곡절 끝에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해 드리고 싶어서 자기 몸을 뱃사람들의 제물로 팔기까지 합니다.
  마침내 그녀는 풍랑이 이는 뱃전에 서서 마지막까지도 아버지를 위해 기원하며 바다에 뛰어드는데, 이 대목에 가면 그 누구라도 눈시울이 뜨겁게 될 수밖에 없는 감명 깊은 이야기입니다.
  하지만 '내가 죽더라도 아버지께서 눈을 뜨시고, 먹고 사실 쌀과 돈만 마련되어 있으면 아버지는 행복하게 사시겠지.'라는 심청의 생각과 행동은 사실에 있어서는 큰 오해요, 냉정하게 심 봉사의 입장에서 판단해 보면 결코 기쁠 리 없는 일이었습니다.
  물론 심청전에서는 용왕님이 심청을 갸륵히 여겨 해피엔딩으로 끝나게 되었으니 망정이지, 자기 딸을 잃고 망연자실하여 대성통곡하는 심 봉사의 모습을 통해서도 알 수 있듯이, 만약 현실 세계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더라면 오히려 불효에 가깝다고도 할 수 있는 일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이야기가 우리의 기억에 그처럼 큰 감동으로 남아 있는 것은, 단 한 가지 사실, 즉 자기 목숨을 바쳐서라도 아버지를 잘 봉양해야 하겠다는 그 애틋한 마음가짐 하나가 예나 지금이나 모든 사람의 심금을 울리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그런 이야기를 우리나라 고유의 판소리에서나 찾을 수 있는 것으로 여기고 있지만, 그처럼 부모를 위해 자기 생명과 자기의 전 인생을 기꺼이 바치려고 했던 이야기가 소설이 아닌 실화로 남아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성경 말씀에 기록된 무녀독남 이삭과 무남독녀 입다의 딸이 남긴 이야기입니다.
  이 두 사람이야말로 정말 자기네들의 모든 것을 바쳐서라도 부모를 바로 모시려 했던 대표적인 인물이며 실제로 역사상 존재했던 자녀들이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들의 이야기는 심청전에서 나타나는 것과 큰 차이가 있는데, 그 중에 하나가 그처럼 자기 생명까지 바치려 했던 동기였습니다.
  심청은 아버지 눈을 뜨게 하기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어 놓았지만, 이삭이 자기의 생명을, 입다의 딸이 자기의 전 인생을 내어 놓고 부모 앞에 효도하고자 했을 때 그들의 동기란 것은 세상 사람들로서는 결코 이해할 수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것들이 무엇이었습니까?
  오늘 어버이 주일을 맞이하여 저와 여러분들은 예수 믿는 신자 된 자녀들이 부모님을 모실 때 정말 자신의 전 인생을 바쳐서라도 꼭 이루어야 할 진짜 효도가 무엇인지를 이 시간 상고해 보고자 합니다.

  1. 부모의 예배 생활을 최선을 다해 돕는 것이 자식의 효도입니다.

  바로 이것이 이삭이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 앞에서 나타내었던 효성이기도 했습니다.
  창세기 22장 1-10절에 "1그 일 후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시험하시려고 그를 부르시되 아브라함아 하시니 그가 가로되 내가 여기 있나이다 2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네 아들 네 사랑하는 독자 이삭을 데리고 모리아 땅으로 가서 내가 네게 지시하는 한 산 거기서 그를 번제로 드리라 3아브라함이 아침에 일찌기 일어나 나귀에 안장을 지우고 두 사환과 그 아들 이삭을 데리고 번제에 쓸 나무를 쪼개어 가지고 떠나 하나님의 자기에게 지시하시는 곳으로 가더니 4제 삼일에 아브라함이 눈을 들어 그곳을 멀리 바라본지라 5이에 아브라함이 사환에게 이르되 너희는 나귀와 함께 여기서 기다리라 내가 아이와 함께 저기 가서 경배하고 너희에게로 돌아오리라 하고 6아브라함이 이에 번제 나무를 취하여 그 아들 이삭에게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을 손에 들고 두 사람이 동행하더니 7이삭이 그 아비 아브라함에게 말하여 가로되 내 아버지여 하니 그가 가로되 내 아들아 내가 여기 있노라 이삭이 가로되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 8아브라함이 가로되 아들아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 하고 두 사람이 함께 나아가서 9하나님이 그에게 지시하신 곳에 이른지라 이에 아브라함이 그곳에 단을 쌓고 나무를 벌여놓고 그 아들 이삭을 결박하여 단 나무위에 놓고 10손을 내밀어 칼을 잡고 그 아들을 잡으려 하더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자기 자식을 바쳐서라도 하나님을 순종했다는 것은 우리에게 잘 알려진 유명한 사건이지만, 오늘은 각도를 조금 바꾸어서 이삭의 입장에서 이 사건을 살펴보고자 합니다.
  먼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은 이삭이 이때쯤 이미 상당히 장성한 연령에 도달했다는 사실입니다.
  본문 6절에 보면 아브라함이 이삭에게 "번제에 쓸 나무"를 지우고 자기는 "불과 칼"만 손에 들었다고 했습니다.
  아브라함이 손에 든 불과 칼은 상대적으로 매우 가벼운 짐입니다.
  하지만 이삭이 등에 진 나무는 짐승 한 마리를 완전히 태울 수 있는 양의 분량이었으니 상당히 무거운 짐이었습니다.
  그러므로 이삭은 이미 아버지보다 육체적인 힘으로는 더 강한 상태에 있었음에 틀림이 없고 아마도 거의 청년이었다고 보아도 무방할 것입니다.

  바로 그런 이삭을 아브라함이 결박했고 제단 나무 위에 올리고 칼을 들어 죽이려고까지 했습니다.
  이것은 이삭이 아버지 아브라함이 자기에게 하는 대로 순순히 응했음을 시사해 주는 것입니다.
  만약 이삭이 아브라함에게 저항했더라면 비록 그가 십대 청소년 정도의 나이만 되었다 하더라도 아브라함에게는 어려운 일이 되었을 것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본문의 말씀 속에서는 이삭의 반항에 관한 그 어떤 언급은 물론이거니와 그것을 암시할만한 내용조차도 발견되어지지 않고 있는 것은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실로 의미심장한 사실을 증거해 주는 것입니다.
  즉 이삭은 죽기까지도 자기 아버지에게 순종했던 것입니다.

  그렇다면 과연 어떤 동기에서, 어떤 마음이 이삭으로 하여금 그 같은 순종을 가능케 해 주었겠습니까?
  그것은 단 한 가지, 자기 아버지 아브라함이 지금 하나님께 제물을 바쳐 예배드리고 있다는 그 한 가지 명백한 사실에 대한 인식 때문이었습니다.
  본문은 이삭이 이미 자기 아버지가 평소에 어떻게 하나님께 제단을 쌓는지에 대하여 익히 알고 있었음을 잘 보여 주고 있습니다.
  그것은 제단 쌓기 위한 모든 준비를 부자가 함께 하는 가운데 이삭이 결정적인 것 한 가지가 결핍된 것을 알아차리고 "불과 나무는 있거니와 번제할 어린 양은 어디 있나이까"라고 아브라함에게 물었던 것을 보아서도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아버지가 "번제할 어린 양은 하나님이 자기를 위하여 친히 준비하시리라"고 대답해 주었을 때 그 말도 그대로 받아들였습니다.

  그러다가 마지막에 아버지가 자기를 결박하려 했을 때에 이삭은 그 "번제할 어린 양"이 다름 아닌 바로 자기 자신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아차리게 되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에도 이삭은 아버지에게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았습니다.
  아버지가 왜 그처럼 하시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아버지 아브라함이 하나님께 제사 드리고자 하는 일에 대하여서는 자기 목숨까지 내어 놓고라도 순종할 각오가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자녀가 부모의 예배생활을 위하여 최선을 다하여 돕고 모시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효성입니다.
  이것은 세상의 불신 자녀들은 전혀 모르는 효도이지만 신자 된 자녀들이라면 부모에서 꼭 실천해야 할 필수적인 것입니다.
  불신 자녀들은 효도를 생각할 때 그저 부모님을 맛난 음식이나 좋은 옷이나 편안한 잠자리나 두둑한 용돈으로 모시는 것만을 생각할 것입니다.
  하지만 신자 된 자녀들은 그런 것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는 기본에 불과하며 더 나아가서 부모님의 영혼의 강건을 위하여 효도할 줄 아는 자식이 되어야 마땅합니다.

  그렇다면 그런 영혼 건강을 위하여 그 무엇보다도 선행되어야 할 것은 부모님의 예배 생활입니다.
  자식이 주일날 무슨 바쁘다는 일이나 다른 놀러갈 일 때문에 자기 부모를 주일예배에 모시고 자기 않는 것은 엄청난 불효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부모는 수요일 밤이나 금요일 밤에, 혹은 부흥회에 가고 싶어 하시는데 자기가 피곤하다고 드러누워 버리고 그 부모를 교회에 모시지 않는 것은 그 어떤 변명으로도 핑계치 못할 불효막심한 짓인 것입니다.
  자기 부모를 다른 형제의 집 방문이나 나들이에 모시고 나가지 않는 것도 두말할 여지없는 불효임이 분명하다면, 자기 부모와 하나님 사이의 교통을 갈라놓는 것은 얼마나 큰 불효가 되겠습니까?
  그러니 주일에 부모님 모신다고 해서 함께 예배를 빠뜨리고 가족여행을 떠나는 것은 결코 효도가 아니라 실로 불효막심한 행위인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진짜 효성스러운 자녀는 결코 그렇지 아니합니다.
  '경향 어린이 선교원'이나 '어린이 새소식반'을 통해 경향교회 나오게 된 어린이들 중에서 자기 부모를 전도해서 주일에 교회로 데려나오는 어린이들을 제가 새신자 환영 시간에 자주 만나게 됩니다.
  형제들이 다 귀찮게만 여기는 병약한 시부모님을 일부러 자청해서 모시고 살면서 그 대신에 주일마다 휠체어에 태워서 예배에 참석하시도록 하고 결국 신앙고백하고 세례까지 받게 만드는 며느리들도 많이 있습니다.
  자기 부모를 예수 믿게 만들고 하나님께 예배드리게 만드는 자녀, 이미 세상에서 최고의 효자요 효녀가 아니겠습니까?

  우리 주일학교 학생 중에 자기 아버지로 하여금 조상제사를 지내지 못하도록 만든 어린이도 있습니다.
  예수 믿는 아내가 그랬으면 어림도 없는 일이고 오히려 핍박만 더 심하게 했겠지만, 어린 아들이 아버지에게 "아빠, 교회에 가니까 조상제사는 우상숭배라서 하면 안 된대요."라고 당당하게 항의하니까 꼼짝 못하고 아버지가 질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자기 부모로 하여금 우상 앞에 절하지 못하게 만들고 오직 하나님께만 예배하게 만드는 아들딸들, 세상에서 제 아무리 좋은 옷, 맛있는 음식, 두둑한 용돈을 드려서 하는 효도라 해도 이런 진짜 효도와 어디 비교의 대상이나 될 수 있겠습니까?

  이삭은 자기 목숨 바쳐서라도 자기 아버지가 하나님께 예배드리는 일을 도우려고 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부모님의 예배생활을 도우는 것이 어렵다고 해봐야 실제로 얼마나 어려운 것이겠습니까?
  목숨까지는 필요 없고 그저 약간의 시간만 내면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겠습니까?
  그 무엇보다도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까이 동행하시도록 하는 예배생활을 위하여 자식이 할 수 있는 일이라면 무엇이든지 다 바칠 줄 아는 신앙의 효자효녀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부모가 하나님 앞에 맺은 서원을 존중해 드리는 것이 자식의 도리입니다.

  이 흔치 않은 효도는 바로 사사 입다의 딸이 보여 주고 있는 특별한 것입니다.
  사사기 11장 29절로 40절에 "29이에 여호와의 신이 입다에게 임하시니 입다가 길르앗과 므낫세를 지나서 길르앗 미스베에 이르고 길르앗 미스베에서부터 암몬 자손에게로 나아갈 때에 30그가 여호와께 서원하여 가로되 주께서 과연 암몬 자손을 내 손에 붙이시면 31내가 암몬 자손에게서 평안히 돌아올 때에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그는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 내가 그를 번제로 드리겠나이다 하니라 32이에 입다가 암몬 자손에게 이르러 그들과 싸우더니 여호와께서 그들을 그 손에 붙이시매 33아로엘에서부터 민닛에 이르기까지 이십 성읍을 치고 또 아벨 그라밈까지 크게 도륙하니 이에 암몬 자손이 이스라엘 자손 앞에 항복하였더라 34입다가 미스바에 돌아와 자기 집에 이를 때에 그 딸이 소고를 잡고 춤추며 나와서 영접하니 이는 그의 무남독녀라 35입다가 이를 보고 자기 옷을 찢으며 가로되 슬프다 내 딸이여 너는 나로 참담케 하는 자요 너는 나를 괴롭게 하는 자 중의 하나이로다 내가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열었으니 능히 돌이키지 못하리로다 36딸이 그에게 이르되 나의 아버지여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 37아비에게 또 이르되 이 일만 내게 허락하사 나를 두 달만 용납하소서 내가 나의 동무들과 함께 산에 올라가서 나의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 하겠나이다 38이르되 가라하고 두달 위한하고 보내니 그가 그 동무들과 함께 가서 산 위에서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애곡하고 39두달만에 그 아비에게로 돌아온지라 아비가 그 서원한 대로 딸에게 행하니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 이로부터 이스라엘 가운데 규례가 되어 40이스라엘 여자들이 해마다 가서 길르앗 사람 입다의 딸을 위하여 나흘씩 애곡하더라"고 기록했습니다.

  암몬과의 일대 결전을 앞두고 사사 입다는 성급한 서원을 하고 말았습니다.
  그것은 자기가 승리하고 돌아오게 되면 자기 집에서 자기를 제일 먼저 맞으러 나오는 자를 하나님께 돌리겠다고 서원한 것이었습니다.
  먼저 알아야 할 것은 입다의 이 서원이 결코 사람을 산 채로 불에 태워 제물로 바치겠다고 한 것은 아니라는 점입니다.
  물론 31절에 "번제"로 드리겠다는 말이 있지만 이것은 그 사람의 전 인생을 통틀어서 하나님께 드리겠다는 뜻의 비유로 보는 것이 타당합니다.
  "여호와께 돌릴 것이니"라는 말도 그 사람의 남은 평생토록 전적으로 하나님만을 섬기는 직분에 봉사하도록 바치겠다는 뜻으로 자주 쓰이는 표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도 인신 제사는 성경 말씀이 기록되기 시작할 때부터 하나님께서 누누이 구체적으로 엄금하신 죄악이었고 적어도 사사된 입다가 그것을 몰랐을 리가 없습니다.
  "누구든지 내 집 문에서 나와서 나를 영접하는" 사람을 바치겠다고 했는데, 만약 그것이 산 사람을 불에 태워 죽이는 제사를 의미한 것이었다면 비단 자기 외동딸뿐 아니라 자기 가족 중 그 어느 누구라 할지라도 입다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 틀림없는 것 아니었겠습니까?
  또 이 사건 후에도 입다는 사사로서 6년을 더 사역했는데, 만약 그가 진짜로 인신제사를 드렸다면 하나님께서 레위기 20장 2절부터 5절에서 천명하셨듯이 당장 그를 저주하고 사형에 처하도록 하셨지 그렇게 이스라엘의 사사로 남겨 두실 리가 만무한 것입니다.

  그뿐 아니라 본문 37절과 38절에 "처녀로 죽음을 인하여" 라고 번역된 구절의 원문에는 원래 '죽음'이라는 단어는 없다는 사실을 유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이 구절은 그냥 "처녀 됨을 인하여 애곡했다"라고 번역해야 하고, 39절의 "딸이 남자를 알지 못하고 죽으니라"라고 번역되어 있는 곳에도 원문에는 '죽으니라'는 말은 없으므로 그냥 "남자를 알지 못했다"라고까지만 번역해야 정확합니다.
  즉 본문 어디에서 입다의 딸이 제물로 '죽임'을 당했다는 구절은 단 한 군데도 없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기서 말하는 내용은 입다의 딸이 그 남은 평생을 회막 봉사와 같이 하나님 섬기는 일에만 전적으로 바쳐지게 됨으로써 끝내 결혼하지 못하고 처녀로 죽게 될 것을 두고 한 말입니다.
  입다는 자기 가족이나 식구 중 아무나 그런 직무를 위해 하나님께 드리기로 서약했는데 하필이면 그 대상이 자기 외동딸이 되는 바람에 그 딸이 결혼해 보지도 못하고 그 생을 마치게 되었고 그것이 부녀가 한탄한 이유였던 것입니다.

  하여튼 입다의 딸은 아버지 때문에 자기가 당하게 된 처지를 알게 되었을 때 실로 비범한 자세로 대처했습니다.
  입다 자신도 자기의 서원을 이제 와서 돌이킬 수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지만, 그녀도 또한 아버지에게 말하기를 "아버지께서 여호와를 향하여 입을 여셨으니 아버지 입에서 낸 말씀대로 내게 행하소서"라고 말했습니다.
  비록 자기 개인 인생으로만 보면 안타깝고 슬픈 일이었지만 아버지가 하나님께 맺은 서원을 지키게 하기 위해서는 자기의 남은 모든 인생을 기꺼이 다 바치겠다고 결단을 내렸던 것입니다.
  특히 그녀는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를 잊지 않도록 아버지에게 상기까지 시키면서 그 서원을 지키도록 했습니다.
  "이는 여호와께서 아버지를 위하여 아버지의 대적 암몬 자손에게 원수를 갚으셨음이니이다"라고, '하나님께서는 아버지를 위하여 큰 은혜를 베풀어 주셨는데 그에 대한 마땅한 감사와 서원을 아버지께서 잊으시면 안 됩니다."라고, 딸이 오히려 아버지에게 일깨워 드렸던 것입니다.

  이것 역시 오늘날의 믿는 자녀들이 부모에게 효도하는 방법 중의 하나가 되어야 합니다.
  부모와 자식 간의 대화나 약속이 중요한 줄 안다면, 그 부모님과 하나님 사이의 서원은 두말할 필요조차 없이 중요한 것이며 어길 수 없다는 것을 자식 편에서도 또한 기억하고 그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시게 해 드리도록 도와드려야 하는 것입니다.

  비록 연로하시고 직접 돈을 벌지는 못하지만 우리 부모님들께서도 스스로 무언가 하나님께 바치고 싶은 마음이 생기실 것이라는 사실을 자식들 편에서 미리 살필 줄 알아야 합니다.
  "에이, 헌금은 우리들이 알아서 부모님 몫까지 다 할 터이니 아버지 어머니께서는 빈손으로 그저 교회에 출석만 하십시오."라고 말하는 자녀들은 한 가지를 망각하고 있는 자들입니다.
  즉 자기들과 꼭 마찬가지로 그 부모님들께서도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은혜와 감사의 제목들이 많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부모님들께서 당신의 마음에 드시는 것으로 옷 한 가지라도 직접 사고 싶어 하시는 것을 막는다든지, 친히 당신의 손으로 손자 손녀에게 선물 사주고 싶어 하시는 것을 못하시게 한다면 그것 또한 변명의 여지없는 불효 아니겠습니까?
  그렇다면 하물며 부모님께서 하나님의 은혜를 스스로 기억하시고 직접 감사드리고 싶어 하시는 것을 막는다면 그 얼마나 나쁜 일이겠습니까?

  비단 헌금과 같은 서원 뿐 아니라, 우리 자식들을 향한 서원을 생각할 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부모님들 가운데는 우리를 낳으시고 우리에게 유아세례 받게 해 주신 정말 고마운 분들이 있습니다.
  그때 우리 부모님들은 우리를 독립된 신앙인으로 스스로 성장할 때까지 말씀과 기도와 교회중심의 경건생활로 양육하겠다고 하나님 앞에서 서원하셨습니다.
  부모님으로 하여금 그 하나님 앞의 서원을 지킬 수 있게 만들어 주는 자식이 되는 길은 단 한 가지밖에 없습니다.
  바로 우리 자신이 그 부모님의 기도와 서원대로 예수님 잘 믿고 잘 섬기는 신자가 되는 이 한 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잘 믿는 부모님 밑에서 자라났으면서도 신앙생활 바로 하지 못하는 자녀는 부모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그 서원을 지키지 못하도록 만드는 실로 심각한 불효자가 되고 마는 것을 깨달아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이 이 세상에서 신용을 잃도록 내버려 두는 자식이 효자일 수가 있겠습니까?
  부모님이 은행 부도가 나도록 내버려 두거나 부모님이 다른 사람과 맺은 약속을 이행하지 못하고 돌아가셨을 때 그 약속을 대신 지켜 드리지 않는 자식이 칭찬받을 수 있겠습니까?
  저는 제 아버지께서 당회장 은퇴하신 후에도 아직까지도 일반헌금은 말할 것도 없고 큰 특별헌금까지도 끝없이 계속 하시는 것을 보면, 아무래도 소천하실 때에는 밀린 작정헌금을 자식들에게 유산(?)으로 남겨 주실 것 같습니다.
  물론 저도 그 부모님의 서원하신 것을 다른 동생들에게 절대로 양보하지 않고 기꺼이 물려받을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갑절로 받게 되어 있는 장자권'을 그럴 때 안 써 먹고 언제 써 먹겠습니까?

  부모님으로 하여금 하나님 앞에서 맺은 서원들을 신실히 지킬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 도우는 것 역시 효도하는 자식의 마땅한 도리입니다.
  그것은 입다의 딸처럼 전 인생을 희생할 필요까지도 없는 일입니다.
  부모님이 하나님 앞에서 감사생활하실 수 있도록 헌금까지 계산해서 넉넉히 용돈을 드리고, 또한 부모님이 자식을 두고 하나님께 드린 서원이 이루어지도록 자신이 예수 잘 믿는 신자가 되기만 하면 되는 일입니다.
  부모님께서 하나님 앞에서 맺은 서원을 존중하고 받드는 효도, 예수 믿는 자녀만 보여 줄 수 있는 이 귀중한 효성을 발휘할 줄 아는 믿음의 자녀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는 실로 범상치 않은 효도의 길을 말씀을 통해 배웠습니다.
  부모의 예배생활과 서원생활을 돕고 받드는 것이 효도이며, 다른 일반적인 효도들보다 훨씬 더 중요하고 고귀한 것임을 배웠습니다.

  그렇다면 이런 차원 높은 효도는 과연 어떤 자녀들이 실제로 행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오로지 '부모님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부모님과 자신과의 관계'보다 더 중요하게 여길 줄 아는 자식에게만 가능합니다.
  이 두 관계는 물론 서로 다른 차원의 것들이며 둘 다 중요한 것임에는 틀림없지만, 그 둘을 놓고 경중을 가려 볼 때에 그 답은 너무나도 명백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아비나 어미를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치 아니하고 아들이나 딸을 나보다 더 사랑하는 자도 내게 합당치 아니하다"(마10:37)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습니까?
  이 말씀을 참 뜻을 모르고 예수님께서 무슨 부자모녀 사이를 갈라놓는 말씀을 하신 것처럼 오해하는 사람들의 부자모녀 관계란 실상 아주 불행한 것임을 깨달아야 합니다.
  그저 자식만 사랑하면 되는 줄 아는 부모나 그저 부모와 자기와의 관계만 원만하면 다 된 줄로 아는 자식이나, 둘 다 모자라도 한참 모자라는 인생이기 때문입니다.
  자식만 애지중지 잘 키워 놓으면 나중에 그 자식이 자기에게 잘 해 줄 것이라고 기대하는 부모들, 부모의 비위만 잘 맞춰 드리면 나중에 유산 한푼이라도 더 받을 것만 생각하는 자녀들, 참으로 비참한 부자모녀 관계가 아니겠습니까?
  이 땅에서야 그 관계가 잘 지속될 줄 모르지만, 죽은 후에는 부자모녀가 함께 영벌 받게 될 지극히 불행한, 아니 저주 받은 관계이기 때문입니다.

  효자는 부모의 육신만 잘 봉양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혼까지도 건강하게 영생하시도록 잘 모실 줄 아는 자녀입니다.
  그러니 정말 부모를 효도하는 자식은 어찌하든지 '부모님께서 하나님을 잘 섬기도록' 모셔야 하는 것입니다.
  부모님의 의식주 정도가 아니라 예배생활과 서원생활까지 정성과 힘을 다하여 잘 받들어 모시는 참된 효자효녀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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