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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행22:30-23.30)

by 【고동엽】 2022. 9. 3.
나의 일을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행22:30-23.30)

'The Untouchable'이라는 유명한 영화에 보면 정말 증인 한 명이 얼마나 소중한지를 재삼 느낄 수 있습니다.
  이 영화는 옛날 미국 시카고에서 소위 '밤의 대통령'이란 별명으로 악명을 떨쳤던 마피아 두목 알 카포네를, 연방정부에서 파견된 특별 수사관들이 천신만고 끝에 체포하여 감옥에 집어넣었던 실화를 토대로 만든 것입니다.
  그 영화에 보면, 그 네 명의 수사관들은 알 카포네를 기소하는데 필요한 증인 한 명을 확보하기 위하여 얼마나 애를 쓰는지 모릅니다.
  겨우 얻은 증인 한 명의 신변을 경호하다가 수사관 한 명이 그 증인과 함께 암살을 당하는가 하면, 다른 수사관 한 명은 알 카포네의 경리계의 소재를 찾은 직후에 총격을 당하고 죽어 가면서도 자기 동료 수사관들에게 그 정보를 알려 줍니다.
  천신만고 끝에 그 경리계를 증인으로 확보함으로써 알 카포네에게 유죄 평결을 내리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그 증언 한 마디를 재판정에서 듣기 위하여 특별 수사관들은 두 명의 동료를 잃었던 것입니다.
  그들에게 있어서 증인 하나란 그처럼 자기 목숨과도 바꿀 정도로 귀한, 그야말로 금싸라기 같은 존재였던 것입니다.
  증인의 가치는 비단 세상 법정에서만 높은 것은 아닙니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당신의 증인들을 지극히 높이고 아끼시는 정도는, 법정의 검사나 변호사가 자기네들의 증인들을 소중히 여기는 정도와는 비길 수 없을 정도로 지극하십니다.
  본문 23장 11절에 "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 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고 기록했습니다.
  이것은 사도 바울이 예루살렘에서 전도하면서 고난을 당하고 있을 때 주님께서 친히 그를 격려해 주신 말씀으로서, 예수님께서 당신의 증인들을 얼마나 아끼시는지를 극명하게 보여 줍니다.

  오늘은 우리 교단 산하의 모든 교회들이 총회선교주일로 지키는 날입니다.
  이 시간 저와 여러분은 세계 선교의 총재이신 우리 주님께서 과연 어떤 전도자를 지극히 소중히 여기시고 보호해 주시는지를 함께 상고함으로써 '가든지 아니면 보내든지' 하는 이 지상(至上)의 사명을 다시 한 번 각자의 삶 속에 새기고자 합니다.

  1. '복음에 대한 정확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을 주님께서는 귀중히 여기십니다.

  우리 주님께서 사도 바울을 그토록 아끼신 이유는 그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자였기 때문이었습니다.
  22장 30절로부터 23장 10절까지에 기록하기를 "30이튿날 천부장이 무슨 일로 유대인들이 그를 송사하는지 실상을 알고자 하여 그 결박을 풀고 명하여 제사장들과 온 공회를 모으고 바울을 데리고 내려가서 저희 앞에 세우니라 1바울이 공회를 주목하여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오늘날까지 내가 범사에 양심을 따라 하나님을 섬겼노라 하거늘 2대제사장 아나니아가 바울 곁에 섰는 사람들에게 그 입을 치라 명하니 3바울이 가로되 회칠한 담이여 하나님이 너를 치시리로다 네가 나를 율법대로 판단한다고 앉아서 율법을 어기고 나를 치라 하느냐 하니 4곁에 선 사람들이 말하되 하나님의 대제사장을 네가 욕하느냐 5바울이 가로되 형제들아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 줄 알지 못하였노라 기록하였으되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 하였느니라 하더라 6바울이 그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인 줄 알고 공회에서 외쳐 가로되 여러분 형제들아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 7그 말을 한즉 바리새인과 사두개인 사이에 다툼이 생겨 무리가 나누이니 8이는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 하고 바리새인은 다 있다 함이라 9크게 훤화가 일어날새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이 일어나 다투어 가로되 우리가 이 사람을 보매 악한 것이 없도다 혹 영이나 혹 천사가 저더러 말하였으면 어찌 하겠느뇨 하여 10큰 분쟁이 생기니 천부장이 바울이 저희에게 찢겨질까 하여 군사를 명하여 내려가 무리 가운데서 빼앗아 가지고 영문으로 들어가라 하니라"고 했습니다.

  로마 군대 천부장은 유대인들이 무슨 죄목으로 바울을 잡아 죽이려 하는지 그 진상을 정확히 알아보고자 했습니다.
  바울이 나타나기만 하면 흥분하고 달려드는 군중들로부터는 도무지 공명정대한 고발 이유를 알아 낼 수 없다고 판단한 그는 그 다음날 바울을 "제사장들과 온 공회"가 모인 자리, 즉 '산헤드린 공회'로 데리고 갔습니다.
  천부장 생각에는, 그래도 그것이 명실 공히 유대인의 최고 의결기관이니 무언가 분명하고도 합법적인 고발 이유를 밝혀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했기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그 위풍당당한 산헤드린 공회 앞에 서게 되었던 사도 바울의 제일성은 '나는 오늘날까지 모든 일에 대하여 하나님 앞에서 바른 양심을 따라 살아왔다.'는 선언이었습니다.
  다시 말하자면 지금 자기가 유대인들로부터 송사당하고 있기는 하지만, 스스로 하나님 앞에서 양심적으로 판단해 볼 때 이 공회 앞에 서게 될 잘못은 없다는 뜻입니다.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파하는 것이 지금 그가 그런 자리에 서게 된 제일의 죄목이었습니다.
  하지만 남들이 아무리 비난하고 욕을 해도,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시며 구세주이심을 증거하는 것은 바울의 가장 솔직한 양심으로 도무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었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그런 양심선언을 듣자마자 그 공회의 의장인 대제사장 아나니아는 바울의 입을 치라고 명령을 내렸습니다.
  아나니아는 대제사장이면서도 '불경스럽고 욕심 많고 성질 사나운' 인간으로 이미 정평이 나 있던 인물이었습니다.
  3절에서 사도 바울이 응수하는 말대로 그는 그야말로 "회칠한 담" 같은 사람이었으며, 자기는 "율법을 어기면서" 다른 사람은 "율법대로 판단하는" 이중인격자였던 것입니다.
  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그가 바로 대제사장이라고 일러 주자 바울은 "나는 그가 대제사장인줄 몰랐다"고 변명하면서, "너의 백성의 관원을 비방치 말라"라는 출애굽기 22장 28절의 말씀을 인용하면서 아무리 못난 인간이라 하더라도 그 직분 자체는 자기도 존중한다고 밝혔습니다.

  그런 후에 사도 바울은 그 공회의 구성원이 "한 부분은 사두개인이요 한 부분은 바리새인"임을 파악하고는 자신의 전략을 바꾸었습니다.
  자기가 양심적으로 복음 전파하며 하나님을 섬겼다고 선언하는 수동적 자기변호에서 떠나, 이제는 그 산헤드린 공회의 신학적 오류를 정면으로 비판하는 말, 즉 "죽은 자의 소망 곧 부활을 인하여 내가 심문을 받노라"는 말로써 적극 공세에 나섰던 것이었습니다.
  물론 이것은 그가 예수님의 육체 부활과 또한 성도의 부활 영생을 전파해 왔음을 선언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의 이 한 마디 말 때문에 완전히 두 쪽이 나게 됩니다.
  그 공회에서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있던 "사두개인은 부활도 없고 천사도 없고 영도 없다"고 주장했던, 오늘날로 치자면 바로 자유주의 신학자들이었고, 반면에 소수이기는 하지만 유력한 발언권을 행사하던 "바리새인은 다 있다"고 주장하고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이 앞에서 "나는 바리새인이요 또 바리새인의 아들이라"고 자기소개를 했던 이유도 바로 그런 바리새인 공회원들을 의식한 것이었습니다.

  이런 사도 바울의 작전은 적중하여 "바리새인 편에서 몇 서기관"들이 오히려 바울을 옹호하고 나서게 되었고, 자연히 산헤드린 공회는 바울을 정죄하기는커녕 그 자리에서 "큰 분쟁" 즉 자중지란을 일으키고 말았습니다.
  이 사태를 본 천부장은 이 공회 역시 바울에 대한 고발 이유를 확정해 줄 수 없다고 판단하고, 그를 급히 로마군 병영 안으로 다시 대피시켰던 것입니다.

  대부분의 동포들이 끝까지 거부해도 오로지 자신의 양심을 따라 끝까지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했던, 자기 민족 중에서 최고 권력자, 최고 신학자, 최고 상류 인사들이 둘러싸고 있는 자리에서 그들의 절대다수가 믿지 않는 그리스도의 부활을 소리 높여 외쳐 증거했던 증인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증거하는 증인,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죄인 대속을 위한 죽음이라고, 누구든지 그 주님을 믿기만 하면 영생 부활이란 소망이 있다고 누구 앞에서든지 기꺼이 증거하며 어떤 상황에서도 거침없이 증거하는 증인이었습니다.
  사도 바울은 바로 이와 같이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이었던 것입니다.

  그러니 예수님께서 그런 바울을 얼마나 아끼시겠습니까?
  당신을 십자가에 못 박았던 산헤드린 공회 한 가운데에서, 여전히 당신의 복음을 멸시하는 대적들이 들끓던 그 예루살렘에서, 오직 홀로 당신 편에 서서 증거해 줄 수 있는 증인 한 명이 바로 사도 바울이었으니 우리 주님께서 보시기에 그 얼마나 소중한 존재였겠습니까?

  성도가 주님께로부터 귀히 여김 받는 존재가 될 수 있는 길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그것은 곧 우리 자신이 복음에 대하여 정확한 증거를 소유하는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하여 성경 말씀이 가르쳐 주는 대로, 그리고 성령께서 감동시켜 주시는 양심을 따라서 증거할 줄 아는 전도자가 되는 것입니다.

  아무리 기독교인이라고 해도 사람들 앞에서 예수님의 이름을 떳떳이 자랑하지 못하는 교인은 예수님께서도 귀중히 여기실 리가 없습니다.
  아니 그런 사람은 우리 주님께서도 "그 사람을 부끄러워하리라"고 하지 않으셨습니까?
  이름은 목사라 해도 복음에 약속된 천당 구원을 설교하지 않는 목사, 신학교수라 해도 성경 증거의 무오성부터 의심하는 신학자를 우리 주님께서 아끼실 이유가 전혀 없습니다.
  '다른 예수, 다른 복음, 다른 영'을 전하는 그 오직 저주 받아 마땅한 이단들을 우리 주님께서 귀히 여기신다는 것이 어디 말이나 될 일입니까?

  법정에서 소중한 증인은 실제로 벌어진 일을 정확하게, 그대로 증언해 줄 사람일 뿐입니다.
  그러지 아니하고 사실과는 다르게 거짓 증언하는 사람, 예수 그리스도를 오히려 불리하고 해롭게 만드는 증인, 기독교를 전파한답시고 오히려 '금송아지 종교'를 만드는 이단은 우리 주님 편에서 볼 때에는 오히려 원수들보다도 훨씬 더 나쁜 배교자들인 뿐인 것입니다.
  오직 그 심령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목격담과 체험을 뚜렷이 새겨 놓고, 아무리 불안한 상황이고 위협적인 분위기에 둘러싸인다 해도 그 '보고 들은 바'를 담대히 외치지 않을 수 없는 전도자 - 바로 이런 증인만이 우리 주님께 있어서 그야말로 소중하기 짝이 없는 금싸라기 같은 존재가 아니겠습니까?
  '예수님의 일을 증거하는 자' 특히 원수들이 사방을 에워싸고 있는 가운데서도 이 증거를 위하여 목숨을 내어 놓는 증인, 우리 경향교회가 바로 이런 선교사를 파송하고 우리 경향의 성도 한 사람 한 사람이 이처럼 주님께서 소중히 여기실 수밖에 없는 증인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2. '증언해야 할 장소가 아직 남아 있는 사명인'을 주님께서는 끝까지 지켜 주십니다.

  사도 바울 역시 주님께서 보실 때 단지 예루살렘에서 뿐만 아니라 반드시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전도자였습니다.
  11절부터 21절까지의 말씀에 "11그날 밤에 주께서 바울 곁에 서서 이르시되 담대하라 네가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것같이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하리라 하시니라 12날이 새매 유대인들이 당을 지어 맹세하되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아니하고 마시지도 아니하겠다 하고 13이같이 동맹한 자가 사십 여명이더라 14대제사장들과 장로들에게 가서 말하되 우리가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아무 것도 먹지 않기로 굳게 맹세하였으니 15이제 너희는 그의 사실을 더 자세히 알아볼 양으로 공회와 함께 천부장에게 청하여 바울을 너희에게로 데리고 내려오게 하라 우리는 그가 가까이 오기 전에 죽이기로 준비하였노라 하더니 16바울의 생질이 그들이 매복하여 있다 함을 듣고 와서 영문에 들어가 바울에게 고한지라 17바울이 한 백부장을 청하여 가로되 이 청년을 천부장에게로 인도하라 그에게 무슨 할 말이 있다 하니 18천부장에게로 데리고 가서 가로되 죄수 바울이 나를 불러 이 청년이 당신께 할 말이 있다 하여 데리고 가기를 청하더이다 하매 19천부장이 그 손을 잡고 물러가서 종용히 묻되 내게 할 말이 무엇이냐 20대답하되 유대인들이 공모하기를 저희들이 바울에 대하여 더 자세한 것을 묻기 위함이라 하고 내일 그를 데리고 공회로 내려오기를 당신께 청하자 하였으니 21당신은 저희 청함을 좇지 마옵소서 저희 중에서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않고 마시지도 않기로 맹세한 자 사십 여명이 그를 죽이려고 숨어서 지금 다 준비하고 당신의 허락만 기다리나이다 하매"라고 기록했습니다.

  산헤드린 공회 앞에 바울을 세워 놓고도 스스로 자중지란에 빠졌던 그 공회원들은 하루가 지나자 제정신이 들었습니다.
  자기네들이 도리어 바울에게 당한 것을 깨달은 그들은 수치심과 분노가 갑절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그들 중 "사십여 명"이 "바울을 죽이기 전에는 먹지도 마시지도 않기로" 다시 말해서 '바울을 죽이든지 아니면 자기들이 단식으로 죽든지 둘 중에 하나를 택하기로' 결사동맹을 맺었던 것입니다.
  물론 자기네들이 굻어 죽을 생각은 꿈에도 없었던 까닭에, 어찌하든지 바울을 죽이기 위하여 머리를 짜내었습니다.

  그 결과 그들은 실로 교묘한 계책을 세웠는데, 그것은 곧 로마 천부장에게 바울을 한번만 더 산헤드린 공회의 청문회에 보내어 주기를 요청하는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로마 군대의 병영 안에서 보호 조치를 받고 있는 한에는 어떻게 손쓸 길이 없으니, 그런 구실을 붙여서 일단 그로 하여금 병영 밖으로 나오도록 만들어 놓고 길에서 암살하려는 것이 그들의 획책하는 바였습니다.
  그야말로 무슨 사극에서 흔히 등장하는 음모가 실제로 연출되고 있었던 것입니다.

  사태는 급박해져 갔으며 사도 바울의 신변은 지극히 위태로워지고 있었습니만 하나님께서는 그 모든 상황을 완전히 장악, 통제, 주장하고 계셨습니다.
  "바울의 생질" 즉 그의 조카가 어떤 경로를 통해서였는지 그 정보를 입수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당시 로마군은 죄수들의 가족 면회를 허용하고 있었던 까닭에, 그 "청년" 조카는 바울을 만나 그 소식을 전했고 바울은 그 사실을 바로 그 조카의 입으로 직접 천부장에게 알려 주게 했던 것입니다.

  자초지종을 들은 천부장은 그날 밤에 당장 대책을 세웠습니다.
  22절 이하 30절에 기록하기를 "22이에 천부장이 청년을 보내며 경계하되 이 일을 내게 고하였다고 아무에게도 이르지 말라 하고 23백부장 둘을 불러 이르되 밤 제 삼시에 가이사랴까지 갈 보병 이백 명과 마병 칠십 명과 창군 이백 명을 준비하라 하고 24또 바울을 태워 총독 벨릭스에게로 무사히 보내기 위하여 짐승을 준비하라 명하며 25또 이 아래와 같이 편지하니 일렀으되 26글라우디오 루시아는 총독 벨릭스 각하에게 문안하노이다 27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 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여다가 28유대인들이 무슨 일로 그를 송사하는지 알고자 하여 저희 공회로 데리고 내려갔더니 29송사하는 것이 저희 율법 문제에 관한 것 뿐이요 한 가지도 죽이거나 결박할 사건이 없음을 발견하였나이다 30그러나 이 사람을 해하려는 간계가 있다고 누가 내게 알게 하기로 곧 당신께로 보내며 또 송사하는 사람들도 당신 앞에서 그를 대하여 말하라 하였나이다 하였더라"고 했습니다.

  간단히 말해서, 그 천부장은 사도 바울을 당시 유대를 다스리던 로마 총독이 있던 가이사랴로 호송해 보냄으로써 그 상부에서 직접 이 문제를 해결하도록 하려 했습니다.
  그것은 바울을 위한 마음에서 했다기보다는, 자기 호신책이었습니다.
  이미 로마 시민을 함부로 체포 결박했던 실수를 저질렀던 그인지라 이제 그 바울에게 어떤 해가 닥치면 정말 책임을 면할 길이 없을 것이었습니다.
  천부장의 그런 심정은 그가 자기 상관인 "벨릭스" 총독에게 보낸 편지 내용 중에 "이 사람이 유대인들에게 잡혀 죽게 된 것을 내가 로마 사람인줄 들어 알고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구원하였다"라고 말한 것에서도 나타납니다.
  바울이 로마 사람인 줄도 모르고 채찍질까지 하려 했다가 바울이 스스로 로마 시민이라고 밝히는 바람에 알게 된 것이 진상인데, 그는 마치 자기가 그 사실을 먼저 알고서 바울을 적극적으로 구출한 것처럼 미화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하여튼 그 덕택에 사도 바울은 "보병 이백 명, 마병 칠십 명, 창군 이백 명" 등 철저한 호위를 받으며 안전하기 이를 데 없이, 또한 "짐승"까지 타고서 편안하기 그지없이 가이사랴로 가게 됩니다.
  그리고 이년 후에 바로 그 가이사랴에서 또 로마군의 호위를 받으며 공짜로 배타고 로마에까지 가게 되는 것입니다.

  그야말로 한편의 드라마와 같이 아슬아슬한 스릴이 넘치는 장면이 전개되었습니다.
  하지만 이것은 결코 우연도 픽션도 아니었고, 오직 하나님께서 완벽하게 짜놓으신 각본 그대로 이루어진 실화였습니다.
  바울을 죽이려고 결사 모의했던 시도는 오히려 바울에게 로마 전도의 길이 절로 활짝 열리도록 만들어 버렸던 것입니다.
  실로 절묘하신 하나님의 섭리라 아니할 수 없는 일이었습니다.

  왜 그렇게 되어졌겠습니까?
  그것은 하나님의 계획에 따르면 사도 바울은 절대로 예루살렘에서 죽으려야 죽을 수가 없는 존재였기 때문이었습니다.
  바울을 죽이겠다고 금식까지 하면서 맹세했던 그 몇 십 명의 각오가 지극히 대단하고 그 모의가 제법 교묘했지만, 바울이 지금 그들 손에 걸려 죽기에는 아직 해야 할 더 큰 일이 가득 남아 있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그가 '로마에서도 증거하여야 할' 사명이었습니다.
  주님께서는 아직도 당신을 위하여 증거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증인을, 그 장소에 세우시기 전에 죽어 버리도록 결코 내버려 둘 수가 없으셨던 것입니다.

  왜 주님께서 아직도 우리를 살려 주고 계시겠습니까?
  왜 주님께서 올해에도 여전히 우리를 먹여 주시고 입혀 주시며, 이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이 평화시대에 살게 해 주시는 것이겠습니까?
  그 역시 단 한 가지 이유, 저와 여러분 각자에게도 아직도 증거해야 할 법정들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로마제국 산하에서는 수많은 노예들이 있었지만, 노예보다도 더 못한 노예가 있었는데 바로 로마 군선의 노를 젓는 죄수들이었습니다.
  그들은 법적으로는 이미 '사형선고'를 받는 자들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살려 두는 이유는 단 한 가지, 군선의 노를 젓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의 탄 배가 침몰하지 않는 한, 그 배를 저어야 할 사명이 남아 있는 한, 이미 사형선고를 받은 그 죄수들이라 할지라도 목숨은 부지되었던 것입니다.
  로마제국이 사형선고를 내린 죄수조차도 일 시킬 것이 있으면 그렇게 살려 두었는데, 하물며 우리 주님께서 당신의 피로 값 주고 구원해 주셨을 뿐 아니라 이제 당신의 이름을 세상에 전파하는 이 가장 고귀하고도 절대적인 사명을 위해 사용하고자 하시는 전도자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우리에게 아직도 복음 전파의 사명,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선포해야 할 사명이 남아 있으면 절대로 일찍 죽지 않습니다.
  아직도 우리가 전도해야 할 혈육들과 세상 친구들이 남아 있고 우리가 그 영혼들을 구하기 위해 매일 기도하고 전도하면 아무리 온 가문이 다 일어나서 구박하고 사장과 상사들과 동료직원들 전부가 핍박해 온다 하더라도 절대로 지지 않습니다.
  아직도 세계만방에 선교해야 할 나라와 민족이 남아 있고 우리가 '가는 자'와 '보내는 자'가 밀접하게 협력하여 합동작전을 수행해 나가는 한, 교회와 성도는 우상종교나 무신론정권 정도는 두말할 것도 없고 아예 '세상이 감당치 못할' 무적의 존재가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계 선교를 총지휘하고 계시는 우리 주님께서 그런 당신의 요긴한 장교들과 병사들, 실로 특수 임무를 띠고 있는 당신의 사명인들을 정말 아무도 '건드리지 못하도록'(untouchable) 철저하게 보호해 주시기 때문입니다.
  아직도 복음 증거해야 할 법정이 남아 있는 증인들은 그 사명을 완전히 마치기까지는 그 어떤 위험과 핍박 속에서도 끝까지 지키시며 인도해 주신다는 사실을 믿고 의지함으로써 땅끝까지 선교사들을 파송하며 이들을 위해 기도와 헌금으로써 지원하는 성도들 되시기를 바랍니다.

  성도님 여러분, 예수 그리스도의 증인 노릇하다가 죽을 위험을 겪고 떨고 있던 사도 바울에게 주님께서는 친히 찾아 오셔서 '담대하라'고 격려해 주셨습니다.
  그리고는 '예루살렘에서 나의 일을 증거'한 그를 얼마나 귀중히 여겨 주시는지를 일깨워 주시고, 또한 '로마에서도 증거하도록' 하시기 위하여 철저히 안전보장해 주시겠다고 약속해 주셨습니다.
  그러니 사도 바울은 조금도 걱정하거나 불안해 할 필요가 없는 것이었습니다.
  그가 '예수 그리스도의 일을 증거'하는 증인인 이상 그의 입이 다물어지도록 내버려두시는 일은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는 예루살렘에서만 증거하고 더 크고 중대한 증거의 무대에 나서지 못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실로 훌륭한 증인이었기 때문이었습니다.

  미국의 검찰이나 연방정보국 등에서는 소위 '증인 신변 보호 프로그램'(witness protection program)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법정에서 마피아 두목 같은 용의자의 유죄를 밝히는 증언을 하게 될 때 그 증인이 나중에 자기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될까 두려워서 증언을 거부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럴 때 그 증인을 재판 후에 '신원 변경'(ID change)에다가 '거주이동'(relocation)까지 시키면서, 즉 아무도 주소나 전화번호를 알 수 없는 곳으로 완전히 이사를 시켜서 절대 안전을 보장해 줌으로써 그 증인의 증거를 확보하자는 제도입니다.
  증인 확보와 증인 보호는 이처럼 밀접한 관계에 있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역시 당신을 증거할 수 있는 증인을 확보하려 하십니다.
  복음 전파의 성공 여부가 바로 여기에 달려 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은 지금 이 땅에 계시지 않습니다.
  예수님의 생애를 증거하며, 그 이름을 전파할 증인은 현실적으로는 바로 우리 신자들뿐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 얼마나 높임을 받을 것인가, 당신의 죽으신 뜻이 얼마나 바로 알려질 것인가 하는 문제가 바로 우리 같은 증인들에 전적으로 달려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주님께서 그런 증인을 얼마나 귀중히 여겨 주시겠습니까?

  아무리 별 볼 일 없던 사람이라 해도, 중대한 사건의 증인이 되면 그 사람의 존재 가치는 갑자기 치솟게 됩니다.
  마찬가지로 신자의 가치도 그 속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가 가득 차게 될 때 비로소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주님 보시기에 '나의 일을 증거할 것'이 바로 우리 자신에게 꼭 있어야만 합니다.
  그리스도에 대한 증거를 간직하고 있지 않으면 우리는 그야말로 아무 쓸모없는 존재이며, 평생 살아도 예수님 이름 한번 전도하지 못하는 교인이란 완전히 무용지물 그 자체인 것입니다.

  또한 아무리 증거할 사실은 알고 있다 해도 더 이상은 말할 수 없다고 증언을 거부하면 그 역시 증인으로서의 가치는 끝나고 맙니다.
  우리가 주님 앞에서 더 이상 증인으로 쓰일 일이 없어질 때면, 그 때가 바로 우리 생명이 끝나는 때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증인의 사명을 그만 두어도 되겠다는 때란 있을 수 없습니다.
  계속 전도하는 것만이 우리의 남은 전 인생을 통하여 주님의 전폭적인 보호와 인도와 도우심을 완전히 보장받는, 그야말로 주님의 '증인 보호 프로그램' 속에서 살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것입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에 대하여 확실한 증거를 가지고 있는 증인, 이웃과 사회와 조국과 세계 만국에 이르기까지 증언해야 할 사명지에서 끝까지 증거하는 증인 - '가는 증인'이든지 '보내는 증인'이든지 바로 이와 같은 귀중하고도 담대한 증인으로 살아가는 성도들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아멘.

출처/석기현목사 설교자료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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