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넘어지지 않고 주를 따르려면 (누가복음 22:54~62)

by 【고동엽】 2022. 9. 2.

 넘어지지 않고 주를 따르려면   (누가복음 22:54~62)

오늘 본문은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통한의 눈물을 흘려야 했던 뼈아픈 실패담을 우리에게 전하고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버지 하나님께서 그를 이 세상에 보내셔서 이루게 하신 구원사역을 완성하시기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려고 붙잡히셨는데. 그를 삼년간 따라다니며 그토록 사랑한다던 베드로는 그 주님을 모른다며 부인하고 만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께 장담하기를 모두 주님을 버릴지라도 자기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마26:33),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있다고(눅22:33) 한 적이 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내가 가는 곳에 네가 지금은 따라올 수 없지만 후에는 따라올꺼야”(요13:36) 하셨을 때에도 베드로는 “주님, 왜 제가 지금은 따라갈 수 없다는 말씀입니까? 주님을 위하여 제 목숨을 버리겠습니다”(요13:37) 다짐하기도 했습니다. 그 말대로 베드로는 예수님께서 겟세마네 동산에서 붙잡히셔서 대제사장의 집으로 끌려가셨을 때 대부분의 제자들과는 달리 주님을 따라갔습니다. 그런데 따라가기는 했어도 오늘 본문 54절에 의하면 “멀찍이” 따라갔습니다. 누가복음은 그저 “멀찍이” 따라갔다고 간단하게 전하지만 요한복음은 그 정황을 조금 더 자세히 전하고 있습니다. 거기서는 베드로와 또 다른 제자 한 사람이 붙잡혀가시는 예수님을 따라갔는데 이 제자는 대제사장과 아는 사람이어서 예수님께서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가실 때 함께 들어갔고(요18:15) 베드로는 문 밖에 서 있다가 대제사장을 아는 그 다른 제자가 다시 나와서 문 지키는 여자에게 말하고는 베드로를 안으로 데리고 들어간 것이었습니다(요18:16). 어쨌든 여기까지는 따라가기는 따라갔습니다.

   대제사장의 집 뜰에 들어간 베드로는 뜰 가운데 불을 피우고 앉아있던 사람들 가운데 껴서 함께 앉아 있었습니다(본문 55절). 그것은 예수님께서 대제사장과 서기관과 장로들 앞으로 끌려가셔서 일차 신문을 받으신 “그 결말을 보려고”(마26:57~58) 기다리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베드로를 알아본 여종 하나가 와서 말하기를 “이 사람도 그와 함께 있었다”고 하고(본문 56절), 조금 후에 다른 사람이 보고 말하기를 “너도 그 도당이라” 하고(본문 58절), 한 시간쯤 있다가 또 한 사람이 장담하기를 “이는 갈릴리 사람이니 참으로 그와 함께 있었다”고 했습니다(본문 59절). 그런데 그럴 때마다 베드로는 “나는 그를 알지 못한다”(본문 57절), “나는 아니다”(본문 58절), “나는 네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본문 60절)며 끝까지 부인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사건을 전하는 마26:70~74에 따르면 베드로가 처음에는 그저 부인하기만 했고(마26:70), 두 번째는 맹세하고 부인했으며(마26:72), 세 번째는 저주하고 맹세하며 부인했다고(마26:74) 합니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다”고 장담하던 자기에게 예수님께서 “오늘 밤 닭 울기 전에 네가 세 번 나를 부인하리라”(마26:34) 하실 때에도 주님과 함께 죽을지언정 주님을 부인하지 않겠다고 다짐하던(마26:35, 막14:31) 베드로가 한 일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이해하기 힘든 베드로, 참으로 초라해진 베드로를 봅니다. 무슨 대제사장이나 장로나 서기관 같은 자들이 불러다가 묻는 것도 아니고 여종이 지나가며 한 마디 던진 말 가지고 그렇게 화들짝 놀라며 맹세씩이나 하고 저주까지 하며 부인할 게 뭐란 말입니까? 예수님께 주님과 함께 옥에도 가고 죽는 데에도 갈 각오가 되어있다고 큰소리치던 베드로의 모습은 어디 간 것입니까? 사람들이 베드로에게 예수님과 함께 있지 않았었냐고 물은 것은 그저 지나가다가 물은 것이지 그를 어떻게 하겠다는 것이 아니었습니다. 여종이나 그 누구도 베드로를 고소하거나 고발해서 잡아넣을 뜻을 표명한 바 없고 그럴 처지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었습니다. 대제사장이나 장로들이나 서기관들도 오직 예수님을 잡아 죽이는 데 관심이 있었지 예수님의 제자들에게는 손을 댈 필요성을 전혀 느끼지 않고 있었습니다. 오순절 성령강림 전의 제자들은 그 누구에게도 위험한 인물들로 여겨지지 않고 있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함께 불을 쬐던 사람들 가운데는 예수님을 잡으러 겟세마네 동산에 갔다가 베드로가 칼로 내려치는 바람에 오른 편 귀를 잘린 적이 있는 말고라는 사람의 친척으로서 그때 그와 함께 겟세마네 동산에 갔었고 거기서 베드로를 본 사람도 있었습니다(요18:26). 자기 친척의 귀를 벤 베드로였으니 그의 기억은 더욱 뚜렷했을 것입니다. 그런데 그 사람 앞에서조차 베드로는 부인으로 일관했습니다(요18:27). 예수님과 함께 있던 자라는 말을 세 번씩이나 들은 베드로는 마지막에는 저주까지 하며 맹세코 부인했습니다. 베드로에게 말을 던진 사람들은 그로부터 저주를 받을만한 아무런 일을 한 적이 없습니다. 사실대로 알고 있었고 아는 대로 말했을 뿐입니다. 따라서 베드로의 그 저주는 사실상 예수님을 향한 것이 되고 마는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을 부인했을 뿐 아니라 저주까지 한 셈인 것입니다. 베드로는 자신의 겁과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고 만 것입니다. 그 베드로는 더 이상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무너져버린 한 초라한 갈릴리 어부에 불과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자타가 공인하던 예수님의 수제자 베드로가 어떻게 이렇게 어이없이 무력하게 넘어지고 말았는가 하는 물음을 던지게 됩니다. 예수님이 그리스도시고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라는 사실을 알게 하시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받은 사람(마16:16~17), 요나의 아들 시몬이라는 본래의 이름 대신 베드로라는 새 이름을 주님으로부터 받은 제자(마16:18), 예수님께서 “내가 이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 내가 천국 열쇠를 네게 주리니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요 네가 땅에서 무엇이든지 풀면 하늘에서도 풀리리라”(마16:18~19)고까지 약속하신 제자 중의 제자인 그가 어떻게 그렇게 허망하게 주저앉고 만 것인가 하는 의문입니다. 왜 그는 그가 그토록 다짐한대로 주님을 끝까지 따르지 못했는가 하는 질문입니다. 그는 자신의 겁과 두려움에 걸려 넘어지고 말았다고 했지만 어떻게 그가 그런 겁쟁이가 되었으며 왜 그렇게까지 두려워했단 말인가 하는 것입니다.

   그 답을 찾기 위해서 우리는 주님을 따르려는 사람이 먼저 해야 할 것이 무엇인지에 관해 주님께서 하신 말씀으로 돌아가야 하리라 생각합니다. 예수님께서 뭐라 하셨습니까? 눅9:23~24로 거슬러 올라갑니다: “아무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구원하리라.” 여기서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일로 드러나는 것이 무엇입니까? “자기를 부인하는 것”과 “날마다 제 십자가 지는 것”과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 것”입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는 베드로에게 이런 것들이 있었는지를 살펴봐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가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에서 그 유명한 신앙고백을 한 때로부터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 올라가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고 제 삼일에 살아나야 할 것을 제자들에게 말씀하시기 시작하셨습니다(마16:21). 그런데 그때 베드로는 예수님을 붙들고 그렇게 하시면 안 된다고 항변했습니다(마16:22). 그러자 그에게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습니까?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하는도다”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어서 하신 말씀이 바로 “누구든지 나를 따라오려거든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를 것이니라. 누구든지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면 잃을 것이요 누구든지 나를 위하여 제 목숨을 잃으면 찾으리라”는 말씀이었습니다. 여기서 우리는 그 시점에서의 베드로의 제자 됨에 대한 예수님의 냉정하고 정확한 평가를 읽을 수 있습니다. 비록 베드로가 예수님께서 칭찬을 아끼지 않으실 만큼 훌륭한 신앙고백을 했지만 그 한 번의 신앙고백이 그를 예수님을 따르는 완전한 제자로 만든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보아야 합니다. 그는 곧이어 “사탄아 내 뒤로 물러가라. 너는 나를 넘어지게 하는 자로다. 네가 하나님의 일을 생각하지 아니하고 도리어 사람의 일을 생각한다”는 혹평과 질타를 받아야 했습니다. 앞으로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 십자가를 질 수 있어야만 주님을 따를 수 있으리라는 말씀을 들어야 했습니다. 언제까지나 자기 목숨만 구원하고자 한다면 주님을 따르지 못하고 다 잃을 것이라는 경고까지 받았습니다.

   그로부터 한 주일쯤 뒤 베드로는 야고보와 요한과 함께 예수님을 따라 산에 올랐다가 예수님께서 얼굴이 해처럼 빛나게 변화하시고 모세와 엘리야와 더불어 말씀하시는 것을 보았습니다(눅9:28~30). 이때 나누신 말씀의 내용은 장차 예수님께서 예루살렘에서 별세하실 일이었습니다(눅9:31). 그런데 그 때 베드로는 예수님께 말하기를 “주님,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이 좋으니 우리가 초막 셋을 짓되 하나는 주를 위하여, 하나는 모세를 위하여, 하나는 엘리야를 위하여 짓자”고 했습니다(눅9:33). 베드로는 자기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조차 모르고 있었던 것입니다(눅9:33). 예수님께서는 세상에 내려가 십자가에 달려 돌아가심으로써 세상을 구원할 일을 생각하고 계셨는데, 베드로는 주님을 따르는 사람으로서 산 아래에서 해야 할 책임과 그 수행을 위한 고난 같은 것은 안중에 없이 황홀한 삶을 즐길 일에만 생각이 팔려 헛소리를 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이렇듯 베드로에게는 주님을 따르려는 의지와 다짐은 그 어떤 제자보다 늘 앞섰으나 진정 주님께서 하시려는 일을 바로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으며 그의 말과 장담만큼 실천이 뒤따르지 못했습니다. 이것은 그에게 자기를 부인하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며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 등 주님을 따르기 위해 필요한 일들이 아직 하나도 갖춰지지 않고 있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그가 대제사장 집 여종이 지나가며 예수님과 함께 있던 사람이라고 한 몇 차례 말에 맥없이 걸려 넘어지고 주님을 따르는 일이 중단되었던 것은 바로 그 때문이었던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베드로 같이 훌륭하고 열심 있던 제자가 삼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라다니고도 막판에 그를 부인할 만큼 왜 그에게서 “자기를 부인하는 일”과 “날마다 제 십자가 지는 일”과 “제 목숨을 구원하고자 하지 않는 일”이 이루어지지 않았는가 하는 또 한 가지의 질문을 던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마도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승천하시기 직전에 하신 말씀 속에서 찾아야 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오직 성령이 너희에게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예루살렘과 온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리라 하시니라”(행1:8).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결국 예수님의 증인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것은 성령이 우리에게 임하셔서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지 않고는 우리 스스로의 힘으로는 할 수 없는 일이라는 말입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에게 그 어떤 경우에도 주님을 부인하지 않을 수 있는 권능과 온 세상으로 나아가 주님을 증언할 수 있는 권능을 주시기를 기도하는 것밖에 없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십자가가 가까워지고 제자들에게도 각자의 십자가를 져야 할 때가 다가오자 “유혹에 빠지지 않게 기도하라”(눅22:40) 하셨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잠만 자고 있던 제자들에게 돌아오셔서 또 말씀하시기를 “어찌하여 자느냐? 시험에 들지 않게 일어나 기도하라”(눅22:40) 하셨던 것입니다. 주님의 말씀을 따라 기도하기를 힘쓰지 않았던 결과가 별것 아닌 일 앞에서 힘없이 넘어져 주님을 따르지 못하게 된 일이었습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베드로의 연약함과 비겁함과 그로 말미암은 배신과 통곡의 어두운 역사를 보여줍니다. 그러나 그 베드로의 모습이 바로 우리 각자의 모습이 아닌지를 돌아보아야 할 것입니다. 오늘 본문의 이야기는 우리에게 많은 것을 새삼 깨닫게 합니다. 예수님에 관한 지식은 주님을 따르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이지만 완전한 조건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지식은 주님을 따르기 시작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는 것입니다. 중간에 넘어지지 않고 계속해서 주님을 따르기 위해서는 자기부인이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래야 두려움이 없어지고 담대하게 주님을 따를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지 않으면 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베드로 같은 사람도 넘어졌음을 보아야 합니다. 자기부인과 자기 십자가를 짐이 없이는 오히려 사탄의 노리개가 되기 쉽다는 것입니다. 말로는 하나님의 일을 내세우면서도 속으로는 사람의 일만을 생각하며 지내게 된다는 것입니다. 주님을 잘 안다고 하면서 실제로는 주님을 부인하는 일을 반복하며 살게 된다는 것입니다. 날 위해 십자가에서 죽으시고, 날 구원하시고, 나에게 영원한 생명과 복된 삶을 주신 주님인데도 주님을 위해 내 생명 바칠 뜻은 전혀 없는 사람이 된다는 것입니다. 평소에는 큰 신앙의 소유자처럼 소리치며 행세하지만 별것 아닌 일에 본색을 드러내며 무너지고 만다는 것입니다. 곧 통곡할 일을 버젓이 행하며 살기 쉽다는 것입니다. 그런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넘어지지 않고 주님을 따르는 제자들이 되어야 합니다. 그러려면 늘 깨어 기도해야 합니다. 성령께서 임하시고 우리 안에서 역사하셔서 실제로 우리 자신을 부인하고 우리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주님을 따라갈 수 있게 해주시기를 간구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되 오로지 복을 채워 달라, 성공하게 해 달라, 인정받게 해 달라, 평안하게 해 달라, 살려 달라고만 기도할 것이 아닙니다. 그보다는 나 자신을 비울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고, 세상이 실패라고 부르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고통을 피하지 않을 용기를 주시기를 기도하고, 하나님의 의를 위해 죽을 수 있게 해주시기를 기도하며, 내 뜻대로 마시고 하나님의 뜻대로 모든 일이 이루어 주시기를 기도할 수 있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성령의 권능 아래 넘어지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를 끝까지 따라가는 우리 모두가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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