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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 (창세기 2:16~17)

by 【고동엽】 2022. 9. 2.

선악을 알게 하는 실과  (창세기 2:16~17)  

중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가뭄이 들어서 물이 몹시 귀한 때에 농촌에서는 물싸움을 할 때였습니다. 한 성도가 밤새도록 수고해서 논에 물을 대어놓고 밤늦게 집에 들어가 잤습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았더니 이웃 논임자가 논둑을 터서 물을 다 자기 논으로 빼앗아갔습니다. 당장 달려가서 그 사람의 멱살을 붙잡고 싸우고 싶었지만 예수님 믿는 사람이기 때문에 꾹 참고 다시 밤을 새워서 논에다 물을 대고 들어와 잤습니다. 이튿날 아침 일찍 일어나 논을 살펴보았더니 그 이웃 논임자가 또 논둑을 터서 물을 훔쳐갔습니다. 그 사람은 몹시 화가 나서 당장 달려가 죽이고 싶었습니다. 그렇지만 꾹 참고 목사님에게 달려가서 자기의 억울함을 호소했습니다. 그랬더니 목사님이 잠시 생각하시더니 “당신은 누가 옳고 그르냐를 따지지 말고 어느 것이 서로 사는 길인가를 생각하십시오. 이번에는 물을 한 번 더 빼앗긴 셈 치고 그 사람의 논에 물을 대어주고 당신 논에 물을 대십시오”라고 말씀해주었습니다. 그 신자는 거기까지는 미처 생각을 못했는데 이번에는 그 원수 같은 사람의 논에 몰을 대주고 자기 논에 물을 대어놓고 집에 와 잤습니다. 그랬더니 아침 일찍이 그 고약한 사람이 눈물을 흘리며 찾아와서 “예수님 믿으면 그렇게 착한 사람이 됩니까? 나는 당신이 달려와서 싸우자고 할 줄 알았는데 제 논에 물을 대주다니요. 저도 예수님 믿고 좋은 사람이 되겠습니다”라고 하더랍니다. 결국 그의 선행으로 귀한 영혼을 그리스도께 인도할 수가 있었습니다.

  1. 선악과를 먹는 생활

  선악과란 “선악을 알게 하는 과실”(The fruit of knowledge of good and evil)이란 뜻입니다. 선악과를 먹는 생활이란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느냐?”(Who is wrong, Who is right?)를 따지는 생활입니다. 눈이 밝아져서 남의 잘못만 따지는 사람은 자기도 죽고 남도 죽이는 생활입니다.
  열왕기상 3장에 보면 두 창기가 한집에 살며 3일 간격으로 아들을 각각 낳았습니다. 그런데 한 여자가 얼마나 잠버릇이 나빴던지 밤에 잠을 자다가 아들을 깔아죽이고 말았습니다. 그리고는 다른 여자의 산 아들과 자기의 죽은 아들을 밤에 바꿔치기하고는 산 아들이 자기 아들이라고 우겨대는 것입니다. 혈액검사도 없는 때이라 판결을 못 내리고 결국 솔로몬 왕에게까지 올라왔습니다. 서로 산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우기는 것을 보다가 지혜로운 솔로몬은 칼을 가져오라고 명을 내렸습니다. 그리고 “두 여자가 서로 산 아기가 자기 아기라고 하니 이 칼로 산 아기를 둘로 쪼개어 공평하게 나누어주겠다”라고 했습니다. 산 아기의 엄마는 마음이 불붙는 것 같아서 “왕이여, 그 아기를 죽이지 마십시오. 저는 아기를 안가져도 좋사오니 부디 죽이지 말고 저 여자에게 주십시오”라고 애원하는데 죽은 아기의 엄마는 “내 아기도 되게 말고 저 여자의 아이도 되게 말고 공평하게 나누어주십시오” 할 때 왕은 누가 산 아기의 엄마인지를 알고 그 여자에게 아기를 주었습니다.
  이 산 아기의 엄마는 공평하지 못해도 좋고 올바르지 못해도 좋으니 그 아기를 살려달라고 애원했던 것입니다. 만일 옳고 그른 것만 따져서 행동했더라면 귀한 어린 생명은 죽었을 것입니다.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느냐?”(Who is wrong, who is right?)만을 따지는 생활은 선악과를 먹는 생활이요, 피차 죽는 생활입니다. 우리는 생명과(fruit of life)를 먹는 생활, 즉 너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을 찾아가는 생활을 해야합니다. 그렇다고 공평(justice)과 정의(righteousness)가 필요없다는 말이 아닙니다. 사랑은 공평과 정의를 넘어서는 것입니다. 요사이 유행하는 말로 “윈윈”(win, win)의 길 즉 “너도 좋고 나도 좋은 것”이라고 표현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서울 어느 교회에서 예배당을 건축하다가 중단이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건축회사가 부도가 났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런데 한국 법에는 중단한 건축회사의 허락이 없이는 다른 회사가 건축을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부도 난 회사가 돈 몇 억만 주면 건축을 넘겨주겠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장로님들이 두 패로 갈렸습니다. 사리에 밝고 옳고 그른 것만 잘 따지는 교수님이나 지식인들은 부당하게 돈을 더 줄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사업을 크게 하는 장로님이나 통이 큰 장로님들은 돈 몇 억을 손해 보더라도 성전 건축을 완성해야 된다는 것입니다. 두 틈에서 목사님은 신경을 쓰다가 병원에 입원을 했고 건축은 중단된 채 철근과 빔이 녹이 나 부식되어가는 형편이었습니다. 옳고 그름만 따지니까 결국 성전 건축은 못하게 된 것입니다.
  2. 생명과를 먹는 생활
  
  ① 음행에 대하여
  어느 목사님이 외국에 유학을 간 동안에 그 사모님이 바람이 났습니다. 그런데 목사님이 공부를 마치고 귀국할 날이 다가오자 그 사모님은 외국으로 도망가려고 하니 시집에서 만류했습니다. 남편이 돌아와 그 사실을 알고 몹시 고민하다가 이혼할 마음까지 먹었으나 그렇게 되면 아이들은 불행해지고 가정은 파탄이 되고, 또 한국 사회에서 이혼하고 재혼한 목사는 목회하기도 어려운 형편이 될 것을 알고 “나도 죄인인데 용서받았으니 나도 용서해주고 함께 살자”라고 생각했습니다. 결국 문제가 해결되고 부부 금슬도 좋아지고 아이들은 훌륭하게 성장하여 성공적인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음행한 연고 외에 이혼하지 말라” 하신 것은 음행하면 다 이혼하라는 뜻이 아닙니다. 누가 묻기를 “그리하면 어찌하여 모세는 이혼 증서를 주어서 내어버리라 명하였나이까?” 할 때에 주님은 “모세가 너희 완악함을 인하여 아내 내어버림을 허락하였거니와 본래는 그렇지 아니하니라”(At the beginning it was not so)(마19:8)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마태복음 19장 4~6절에 “사람을 지으신 이가 본래 저희를 남자와 여자로 만드시고 말씀하시기를 이러므로 사람이 그 부모를 떠나서 아내에게 합하여 그 둘이 한 몸이 될지니라 하신 것을 읽지 못하였느냐”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이사야 43장 18~19절에 “너희는 이전 일을 기억하지 말며 옛적 일을 생각하지 말라 보라 내가 새 일을 행하리니…”라고 했습니다.

  ② 산상수훈과 생명의 길
  “…눈은 눈으로, 이는 이로 갚으라 하였다는 것을 너희가 들었으나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악한 자를 대적지 말라…”(마5:38-39)라고 하셨습니다. 눈을 뽑으면 눈을 뽑고, 이를 부러뜨리면 같이 이를 부러뜨리라는 것이 구약 율법인데 이것은 인류 사회의 기본법으로 존재할 필요는 있지만 우리 크리스천들은 그 차원을 넘어서 “그도 살고 나도 사는 길이 무엇인가”를 알아서 생명의 길을 택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 속옷을 달라면 겉옷까지 주라
  옷 한 벌 때문에 수치를 당치 말고 한 벌도 더 줄 수 있는 마음의 여유를 가지라는 것입니다. 옷 한 벌 더 양보한다고 그 사람이 못 살게 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수도세 몇 푼, 전기세 몇 푼 때문에 싸우다가 하나님의 영광을 가리지 말고 양보하라는 것입니다.

  ㈁ 오른뺨 치는 자에게 왼뺨도
  누가 오른뺨을 때릴 때 “왜 때려” 하면서 격분하지 말고 “왼뺨”도 맞아줄 수 있는 여유 있는 마음을 가지라는 것입니다. 또 “더 때려, 더 때려!” 하며 덤벼들라는 말은 더욱 아닙니다. 선악과를 먹는 것은 죽는 길입니다.

  ㈂ 5리를 가자는 자에게 10리를
  6.25 때 인민군이 후퇴하면서 예수님 믿는 사람을 잡아서 무거운 짐을 지우며 한 30리 되는 목적지에 가자고 큰소리쳤습니다. 그런데 그 신자는 찌는 듯한 더위에서도 목적지에 가서 짐을 내려놓지 않고 웃으면서 “괜찮습니다. 더 갈 수 있습니다” 하고 한 10리를 더 갔습니다. 그랬더니 인민군이 부드러운 목소리로 “됐습니다. 이제는 내려놓으시오. 사실은 30리 되는 목적지에 가서는 당신을 총살하려고 했는데 당신이 친절하게 더 져다주어서 그냥 살려 줍니다”라고 했습니다. 의무 이상의 친절을 베풀었더니 결국 자기 생명을 구원한 것입니다.
  마지못해 의무만 하려고 하지 말고 옳고 그른 것만 따지지 말고 그 이상의 아량을 베풀 때 남도 살고 나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어느 가정의 부부가 살았는데 성격이 서로 달라서 작은 일 가지고 다투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치약을 쓸 때도 여자는 대범해서 치약의 한가운데를 꽉 쥐어짜고는 아무데나 픽 던지곤 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꼼꼼해서 꼬랑지부터 똘똘 말아가며 치약을 사용했습니다. 그러니까 아내에게 늘 잔소리를 했고, 부인은 뭐 그런 것까지 남자가 잔소리를 하느냐고 불평하다 결국은 치약 하나 때문에 이혼하고 말았습니다. 치약 하나가 뭐기에 가정을 파괴합니까? 누가 옳고 누가 틀렸느냐만 따졌기 때문입니다. 선악을 알게 하는 열매를 먹었기 때문입니다.

  3. 십자가의 사랑과 영생

  우리는 율법에 의해서 옳고 그름을 따진다면 세상 사람은 모두 죄의 심판을 받고 멸망할 수밖에 없었는데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이 우리 죄를 대속하시기 위하여 십자가에서 죄 없는 깨끗한 피를 쏟아 “다 이루었다”라고 부르짖고 운명하셨습니다. 그리고 죽은 지 3일 만에 사망권세를 이기시고 부활하셔서 누구든지 저를 믿기만 하면 죄를 묻지 않으시고 영원한 생명을 주시고 천국을 주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을 믿는 것이 생명과를 먹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3장 16절에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저를 믿는 자마다 멸망치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니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처음 나오신 분들도 혹시 말 못할 죄가 있어도 아무리 죄가 많은 분도 예수님만 믿으면 오늘 즉시 영생을 얻고 천국 백성이 되는 것입니다.
  이 하나님의 아들 예수님을 믿는 길 외에는 구원받는 길이 없습니다. 그 분만이 우리 죄를 용서하실 수 있고 그 분만이 영생을 주시는 것입니다. 요한복음 14장 6절에 “…내가 곧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니 나로 말미암지 않고는 아버지께로 올 자가 없느니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죄를 회개하며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영접하기만  하면 누구든지 죄 용서를 받고 즉시 영생을 얻습니다. 죄는 하나님과 원수가 되게 했는데 예수님이 화목 제물이 되어 죽어주셨기 때문에 예수님을 통하여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는 것입니다. 로마서 5장 10~11절에 “곧 우리가 원수 되었을 때에 그 아들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목되었은즉 화목된 자로서는 더욱 그의 살으심을 인하여 구원을 얻을 것이니라 이뿐 아니라 이제 우리로 화목을 얻게 하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 안에서 또한 즐거워하느니라”고 했습니다. 고린도후서 5장 19절에 “이는 하나님께서 그리스도 안에 계시사 세상을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며…화목하게 하는 말씀을 우리에게 부탁하셨느니라”
  선악을 알게 하는 나무의 열매를 먹어서 “정녕 죽으리라”고 하신 말씀대로 우리는 다 정죄받고 멸망을 받게 되었으나 생명과가 되신 예수님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영생을 얻고 구원을 받게 됩니다.
  요한복음 6장 32~33절에 “예수께서 이르시되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하늘에서 내린 떡은 모세가 준 것이 아니라 오직 내 아버지가 하늘에서 내린 참 떡을 너희에게 주시나니 하나님의 떡은 하늘에서 내려 세상에게 생명을 주는 것이니라”고 했습니다. 즉 우리 조상이 선악과를 먹으므로 영혼이 죽었고 따라서 육신도 죽게 되었는데 예수님이 생명의 떡으로 오셔서 믿음으로 생명의 양식을 삼는 사람은 영생을 얻고 천국에 들어갑니다.


출처/김홍도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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