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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191쪽에 있는 글입니다.
45.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 내가 주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 그러므로 너희의 선한 것이 비방을 받지 않게 하라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 이러므로 우리가 화평의 일과 서로 덕을 세우는 일을 힘쓰나니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 네게 있는 믿음을 하나님 앞에서 스스로 가지고 있으라 자기의 옳다 하는 바로 자기를 책하지 아니하는 자는 복이 있도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라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하는 모든 것이 죄니라.
로마서 14장 13-23절
앞의 설교를 듣고 은혜받았다는 말을 하시는 분들이 많았다고 합니다. 그런데 놀라운 사실은 믿음이 아직 그다지 깊지 못한 형제들이 그런 말을 많이 하더라는 것입니다. 그 설교가 아직 술을 못 끊고 있는 형제에게, 담배를 끊고 싶어도 잘 안 되어 고민하고 있는 형제에게, 주일을 지키지 못해 가책을 받고 있는 형제들에게 큰 위로가 되었나 봅니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그들이 그 설교를 잘못 받아들인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각각 마음에 확정해서 할지라도 그 동기와 목적은 '주를 위하여'에 있어야 한다는 것이 설교의 요지였습니다.
그러나 '주를 위하여'의 동기와 목적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가는 믿음 약한 그들의 가슴에 깊이 와 닿지 못했나 봅니다. 그저 마음에 확정해서 하라는 그 말만 기쁜 소식으로 들렸던 것 같습니다. 그동안 남편의 음주, 담배, 주일 성수 문제를 놓고 자주 다투었던 아내들이 "각자 소신대로 하라고 그랬어" 하는 남편의 말에 기가 꺾였다는 웃지 못할 이야기도 들려오고 있습니다.
이처럼 말씀의 진의를 오해하지 않았나 우려되는 분들에게 꼭 필요한 교훈이 본문 말씀에 나옵니다. 두 번째로 우리가 알고 있어야 할 원칙입니다. 이어서 다음 장에서 한 가지 더 말씀드리게 될 것입니다. 주님께서 바울을 통해서 가르치고 계시는 세 가지 원칙들을 다 배우고 난 뒤에 은혜받았다는 고백을 할 수 있다면 그 사람은 진짜로 은혜받은 하나님의 자녀요, 아주 좋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신자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세상에는 그 자체가 선도 아니고 악도 아닌 중성적인 것들이 많이 있습니다. 죄가 될 수도 있고 죄가 안 될 수도 있는 모호한 행동도 많다고 할 수 있습니다. 고대 스토아 철학자들은 이런 모호한 것을 놓고 '아디아포라' 라는 이름을 붙였습니다. 즉 구별하기가 힘든 것이라는 말입니다. 그들은 이런 것들을 우리가 어떤 손잡이로 잡느냐에 따라 그 가치가 달라지는 것이라고 가르쳤습니다. 쉬운 예를 들어 보겠습니다. 가령 여기에 반라의 여인을 그린 한 폭의 그림이 있다고 합시다. 이 그림을 예술적으로 상당한 안목을 가진 사람이 볼 때는 예술성이 뛰어난 걸작품으로 평가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수준에 미치지 못하는 사람이 볼 때는 하나의 외설적인 저질 상품으로 볼 수도 있는 것입니다. 이와 같이 애매모호한 일들이 세상에는 많습니다.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도 이와 비슷한 경우가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믿음 강한 자가 아무 거리낌없이 할 수 있는 일이라도 믿음이 약한 자에게는 양심의 가책을 불러일으키는 죄가 될 수 있습니다. 로마 교인들에게는 음식 문제가 그러했습니다. 믿음이 약한 자들은 구약의 계율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해 먹을 것, 먹지 못할 것을 까다롭게 가리는 버릇을 고수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믿음이 강한 자들은 어떤 음식을 가지고 먹느냐, 안 먹느냐를 가리는 것은 유치한 짓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들은 14절에 기록된 말씀대로 믿고 있었습니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절).
이는 세상에 있는 것 가운데서 그 자체가 부정한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로마교회의 믿음 좋은 사람들은 이 사실을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습니다. 다음에 20절을 봅시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0절).
어떤 음식은 정하고 어떤 음식은 부정하다고 정해져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입니다. 이와 같은 사실을 확신하고 있는 사람들에게는 먹을 것, 안 먹을 것을 가려 가면서 까다롭게 구는 것이 유치하게 보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로마교회 안에 믿음 좋은 사람과 믿음이 약한 사람들 사이에 견해 차이와 갈등이 있었던 것입니다.
원래 자연은 선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그렇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이 정하게 만드신 것을 사람이 속하게 바꾸어버린 것이 많습니다. 예를 하나 들겠습니다. 포도라는 과일이 있습니다. 그것은 탐스럽고 향기로운 과일입니다. 누구나 먹고 즐길 수 있도록 하나님은 포도를 정하고 아름답게 만드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정한 과일을 가지고 술을 만들었습니다. 술을 잘못 마시면 자기 몸과 정신을 해칠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마저 불행하게 만들 수 있습니다. 순수한 과실인 포도를 놓고 먹을 것이냐, 먹지 않을 것이냐 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없습니다. 그렇지만 술을 놓고 마실 것인가, 마시지 않을 것인가 하고 고민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또 땅에서 재배되는 여러 가지 식물들을 봅시다. 그것들은 우리에게 아주 좋은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그것들을 재배해서 먹고 건강하게 살도록 만들어 놓으셨습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 중에 어떤 식물을 가지고 마약을 만들었습니다. 채소를 가지고 먹을 것이냐, 먹지 아니할 것이냐 하고 걱정하는 사람은 없지만 마약을 놓고는 고민하지 않을 사람이 없을 것입니다.
이와 같이 본래는 선한 것이지만 추후에 바뀐 것들이 많습니다. 성경이 그 하나하나에 대해서 구체적으로 '하라', '하지 말라'는 명령을 하고 있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신앙 양심에 비추어 판단하고 행동해야 할 일들이 적지 않은 것입니다.
우리는 이미 앞에서 주를 위하는 것이면 각자 마음에 확정한 대로 행동할 수 있다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솔직히 말해서 잘못하면 우리는 '주를 위하여' 라는 아름다운 조건을 자기 좋은 대로 해석하는 잘못을 범할 수 있습니다. 남이 뭐라고 하든 내 좋은 대로 하면 된다는 식의 개인주의가 '주를 위하여' 라는 천사의 옷을 입고 나올 수 있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어떤 영향을 미칠지에 대해서는 관심을 두지 않고 혼자 잘난 것처럼 떠드는 독선이 '주를 위하여' 라는 말 속에 자리 잡을 수 있습니다. 우리는 무엇이나 속된 것이 없다고 하는 성경 지식을 내세워 교만할 수 있습니다. 주님이 주신 자유를 속박당하지 않겠다는 고집 때문에 다른 사람에게 큰 피해를 입힐 수도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 모두가 가지고 있는 약점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면 '주를 위하여' 라는 명분을 내세워 우리 마음대로 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인가? 그것이 신앙적인가? 그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는가? 이 문제를 검토해 보아야 하겠습니다. 그 대답은 절대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회는 그리스도의 몸입니다. 교회는 유기체입니다. 우리는 그 몸을 이루는 작은 지체들입니다. 어느 지체나 동등한 입장에서 몸을 섬기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이 몸이라고 하는 본질을 놓고 볼 때 "내가 옳다고 생각하니까 내 마음대로 한다" 라는 생각은 용납될 수 없습니다. 그것은 자기 몸을 파괴하는 것이나 다름 없습니다. 자기가 아무리 옳다고 생각하는 것이라도 옆에 있는 형제에게 해가 될 수 있다면 피차 조심하고 삼가는 것이 한 몸을 이루고 사는 지체의 책임입니다.
교회 안에서는 사실 '나(I)' 라는 일인칭 대명사가 대문자로 쓰여서는 안 된다는 말을 한 사람이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는 항상 '우리' 라는 일인칭 복수 대명사가 쓰여야 합니다. 교회는 몸이기 때문입니다. 13절에도 보면 바울은 "내가"라고 하지 않고 "우리가"라는 말을 씁니다. 영어로 "Let us"입니다. 15장 1절을 보아도 "우리 강한 자가"라고 나옵니다. 그 이유는 교회 안에서는 너나할것없이 우리라고 하는 공동체에 몸을 담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형제와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일은 하나님과의 정상적인 관계를 유지하는 것 못지않게 중요합니다. 어떤 면에서는 내 자신보다도 형제를 앞세우고 처신해야 할 경우가 더 많습니다. 머리 되신 그리스도를 통해 하나님이 주시는 모든 은혜의 선물을 공유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나 혼자 독점할 수 없습니다. 독점을 할래야 할 수도 없습니다. 다른 형제를 모르면 나를 알 수 없고 나를 모르면 다른 형제를 알 수 없는 공존 관계를 유지하는 것이 교회라는 공동체입니다. 내가 다른 형제를 건강하게 세울 수도 있지만 다른 형제를 넘어지게 할 수도 있습니다. 나는 다른 형제에게 영향을 미치고 다른 형제는 나에게 영향을 미칩니다. 이것이 우리 자신의 위치입니다. 이러한 영향권에서 벗어나 유아독존으로 신앙생활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는 서로의 영향권 안에서 살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내 생각이 옳다 해도 다른 형제에게 상처를 주거나 죄를 짓게 할지도 모르는 일이라면 마땅히 재고해야 합니다. 약한 형제를 위해서 나의 자유는 스스로 제재를 받아야 하는 것입니다. 약한 형제를 위해서 내가 알고 있는 지식을 조용히 덮어두는 것이 덕이 될 때가 더 많습니다. 약한 형제 때문에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다 할 수 없는 것이 우리의 처지입니다.
교회는 부부에 비유될 수 있습니다. 남편이나 아내가 각자 자기 하고 싶은 대로 다 하면 함께 살지 못합니다. 부부는 일심동체이기 때문에 서로 얽매일 수밖에 없습니다. 얽매이는 그것이 진정한 부부의 자유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가 한 몸이요 한 지체이기 때문에 나에게 아무리 자유가 있다 해도 그 자유를 마음껏 사용할 수 없습니다. 가령 어린아이들을 양손에 붙잡고 길을 걸어가는 아버지가 있다고 합시다. 그는 자기 마음대로 성큼성큼 걸어갈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그렇게 하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걸음걸이에 조심스럽게 자기 걸음을 맞춥니다. 왜냐하면 아장아장 걷는 아이들이 넘어지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입니다. 그것이 아버지 된 자신과 아이들을 다 같이 위하는 일이 되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교회 안에서 이와 같은 인간관계를 유지해야 합니다.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지 말라
그러므로 바울은 우리가 형제를 판단하지 않는 선에서 머물면 안 된다고 합니다. 형제를 판단하지 않는 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기 때문입니다. 또 마음에 확신이 서는 대로 내 소신껏 하겠다는 원칙만으로는 신앙생활을 할 수 없습니다. 성경은 내 소신껏 하는 것이 모든 복잡한 인간관계를 풀 수 있는 마스터키가 된다고 가르치지 않습니다. 우리는 한걸음 더 나아가야 합니다. 우리의 언동에 영향을 받기 쉬운 형제들을 위해 보다 적극적이고 구체적인 행동 지침을 가지고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읽은 본문 말씀의 교훈입니다.
"그런즉 우리가 다시는 서로 판단하지 말고 도리어 부딪힐 것이나 거칠 것으로 형제 앞에 두지 아니할 것을 주의하라"(13절).
우리가 판단하지 않는 자리에만 머물지 말고 더 나아가자는 말입니다. 여기에서 '거칠 것'은 장애물이나 덫을 가리키는데, 이것에 걸리면 누구라도 넘어지거나 다칩니다. 그러면 '거치다'와 연관되는 말은 무엇입니까? 먼저 15절을 봅시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사랑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절).
'거치다' 라는 말을 다른 말로 바꾸면 형제를 근심하게 만드는 것,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이 됩니다. 형제로 하여금 신앙생활을 포기하게 만들거나 영적으로 망하게 만드는 것이 형제를 거치게 하는 것입니다.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절).
'거리끼게 하지 않는다'는 것은 형제에게 걸림돌이 되지 않게 한다는 말입니다. 형제가 신앙생활을 하는 데 방해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 이는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연고로 믿음으로 좇아 하지 아니한 모든 것이 죄니라"(23절).
신앙 양심상 옳은 일이 아니라고 판단하면서도 그런 행동을 하면 죄가 된다는 말입니다. 확신이 없이 행하는 그 자체가 죄가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거치게 한다'는 말을 바꾸면 형제를 근심하게 하는 것, 형제를 망하게 하는 것, 형제를 거리끼게 하는 것, 형제를 죄 짓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우리가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여기서 말하고 있습니다. 나에게는 아무리 선한 일이라 해도 형제를 그렇게 잘못되게 만들어버린다면 그것은 절대로 선이 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술을 예로 들어 봅시다. 성경에서 술 마시는 것을 죄라고 규정한 데가 있습니까? 구약시대에 나실인 같은 특별한 사람에게 음주는 죄가 되었습니다. 얼마 동안 하나님 앞에 자기 자신을 거룩하게 구별하여 드리겠다고 서약한 사람이 그 서약한 기간 동안에 술을 마시면 죄를 범하는 것이 되었습니다. 그 밖의 경우를 찾는다면 구약성경에서 가급적 술을 멀리하도록 권고하는 말씀을 들 수 있습니다. 이것은 왕의 가문에서 아버지가 아들에게 교훈하는 말씀 속에 가끔 들어 있는 특별한 경우입니다.
그러나 신구약을 통틀어 보아도 특별히 술 마시는 것이 죄라고 단정지어 말씀하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우리나라 선교 초창기 때 유행하던 금주가처럼 "아, 마시지 말라 술. 아, 보지도 말라 술." 이라고 할 정도로 아주 분명하게 술을 금하는 성경 구절은 없습니다. 취하지 않는 범위 안에서 술을 마시는 것은 허용이 되고 있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물어야 할 중대한 질문이 생깁니다. 술 마시는 것이 죄가 안 된다고 해서 어디서나 마음놓고 술을 마실 수 있습니까? 물론 그렇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술을 한두 잔 마셨다고 해서 주님이 천국 문에 천사를 세워 놓고 들여보내지 않는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에게는 분명히 술 마실 수 있는 자유가 있습니다. 그러나 그것은 교회 안에 있는 다른 형제들 때문에 제재받을 수밖에 없는 자유라는 사실을 알아야 합니다.
교회가 술을 금하게 된 두 가지 배경
우리에게 술 마실 자유는 있지만 그 대신 마시지 않는 쪽을 택할 수밖에 없는 두 가지 상황적 배경이 있습니다. 아직도 술을 끊지 못하고 있는 분들은 잘 듣기 바랍니다.
먼저, 교회사적인 상황에 대해 말씀드립니다. 한국 교회에서는 지난 1세기 동안 술에 대한 부정적인 개념이 계속 이어져 내려왔습니다. 곧 음주는 죄라고 하는 시각입니다. 이것 때문에 우리는 술 마실 자유를 포기할 수밖에 없습니다. 믿음 좋은 사람은 반드시 술을 끊는다는 상식이 어디서나 통하는 세계가 바로 한국 교회입니다.
선교사가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복음을 전하던 초창기에는 술담배를 허용했습니다. 당시에 지금의 이화여고가 있는 자리에 장 정승댁이라는 큰 집이 있었습니다. 아마 정승하던 분이 예수를 믿었던 것 같습니다. 그 댁이 굉장히 넓었기 때문에 사랑방을 개방해서 1년에 몇 차례씩 사경회를 했습니다. 성경 공부를 했다는 말입니다. 성경 공부 중간에 휴식 시간이 있었습니다. 하루에 네 번 휴식 시간을 주었는데 틈틈이 술과 담배를 제공했다고 합니다. 그때는 담배를 불겅이, 막초라고 불렀습니다. 담배 잎사귀를 말아서 피우든가 아니면 담뱃대를 허리춤에 꽂고 와서는 성경 공부를 하고, 쉬는 시간이면 모두들 앉아서 담배를 피우느라고 그야말로 은혜가 충만했다고 합니다.
초창기 때는 이와 같이 술이나 담배를 교회 안에서 허용했습니다. 그러나 점점 의식이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술 담배를 해서는 신앙생활을 도무지 건전하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 당시는 우리 민족에게 매우 힘든 시기였습니다. 일제의 악랄한 사슬에 얽매여 신음하고 있을 때니까요. 많은 젊은이들이 좌절하여 술독에 빠지고, 담배 피우고, 도박을 하는 등 온 나라가 멍이 들 대로 들어가는 상황이었습니다.
이런 처지에서 예수 믿는 사람까지도 술 마시고 담배 피우다가는 사회에서 도무지 소금과 빛의 역할을 감당해낼 수 없다고 지도자들이 판단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1901년에 장로교 선교사 공의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신앙생활 지침서를 만들어 금주 금연을 가르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신앙 지침서에는 7대 강령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 당시에는 이것을 반드시 암송하고 그대로 실천하겠다는 서약을 해야만 세례를 주었습니다.
7대 강령은 다음과 같습니다. 오늘날 우리에게도 굉장히 중요한 강령이 될 것입니다. 첫째는 예배 출석을 철저히 할 것, 둘째는 성수 주일 할 것, 셋째는 부모에게 효도할 것, 넷째는 일부일처를 지킬 것, 다섯째는 인가귀도할 것, 즉 자기 가족을 반드시 구원해야 한다는 말입니다. 여섯째는 근면 성실할 것, 일곱째는 금주 금연할 것, 이렇게 일곱 가지입니다. 그리고 몇 년 뒤인 1914년에 조선예수교장로회(현 대한예수교장로회)는 담배를 피우는 자는 절대로 장로로 세우지 않는다는 원칙을 공포했습니다.
이것이 지난 백여 년간 지속되어 온 한국 교회의 풍토입니다. 이것은 우리 조상들이 물려 준 너무나 귀한 유산입니다. 이런 교회 풍토에서 "나는 괜찮아. 성경 어디에 담배 피우지 말라는 말씀이 있어?" 하고는 아무 가책 없이 멋대로 담배를 피울 수 있겠습니까? "성경에 술 마시면 죄라고 했냐? 가서 옥목사한테 물어 봐." 이렇게 말하며 멋대로 술 마실 수 있겠습니까? 그렇다면 그 사람은 신앙생활을 포기하겠다는 사람으로 보아도 틀리지 않을 것입니다. "나에게는 확신이 있어. 술 담배 때문에 천국 갈 사람이 지옥 떨어지는 일은 없어" 하고는 제멋대로 음주와 흡연을 일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교회 안에서 혼자 별난 옷을 걸친 이상한 사람으로 비쳐질 것입니다.
결국 금주, 금연하는 전통을 지키고 있는 한국 교회 풍토가 우리에게 교훈하는 것은 무엇입니까? 술을 마셔도 되지만 잘못하면 그것으로 인해 실족해서 넘어질 수 있는 형제가 교회 안에 너무 많다는 것입니다. 약한 형제든 강한 형제든, 술잔을 기울이고 있는 목사를 보고 시험당하지 않을 사람은 없습니다. 수많은 형제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목사를 죄없다 할 수 있겠습니까?
두 번째로 사회적인 상황을 들 수 있습니다. 우리 사회에서는 술을 악으로 보는 시각이 지배적입니다. 사회에 만연하는 여러 가지 불의, 악행, 부정부패 사건에 술이 끼어들지 않은 예가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술은 우리에게 득보다는 해를 더 많이 끼칩니다. 1985년에 바바라 톰슨이라는 사람이 쓴 <한 잔 술로 죽어 가다>라는 책을 보면, 방화와 익사 사건의 80%가 술 때문에 발생했고, 폭력 사건의 60%가 술 때문에 발생했고, 자살 사건의 30%가 술 때문에 발생했다는 통계가 나와 있습니다. 알코올 의존증이 되면 벌써 그 인격은 파산합니다. 잘못된 음주벽으로 인해 가정이 깨어질 뿐만 아니라 많은 생명이 위협을 당한 사례가 허다합니다.
우리 대한민국은 이미 지난 1981년에 세계 제1위 음주 국가가 되었습니다. 대체 우리 국민이 마신 음주량이 어느 정도인지 아십니까? 한 해에 2홉들이 병으로 39억 5,643만 4,000병을 마셨습니다. 세종로에 있는 정부종합청사를 술통삼아 계산한다면 무려 11통 하고도 5분의 1을 채울 수 있는 양입니다. 돈으로 따지면 2조 원인데 우리나라 1984년 세입 예산의 6분의 1에 해당되는 금액입니다. 그 해에 우리 국민이 마신 술병을 옆으로 뉘어 연결하면 지구와 달을 왕복하고 다시 달까지 갈 수 있는 거리라고 합니다. 얼마나 술을 많이 마시고 있는지 모릅니다. 그래서 양식 있는 지성인들은 기독교와 상관없이 술을 무조건 끊는 것이 좋다고 생각하는 것 같습니다. 이것이 일반적인 경향입니다. 어떤 통계 자료를 보면 53%의 사람들이 술을 끊겠다고 작정하고 있다고 합니다. 그리고 43%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한두 번 술을 끊어 보려고 시도해 본 경험이 있다고 합니다.
'형제'를 위하여 자유를 절제하라
이와 같은 부정적인 시각은 술뿐만이 아니라 담배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도박이나 마약, 노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처해 있는 현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예수 믿는 사람이 술잔을 앞에 놓고 있거나 담배 연기를 뿜고 있는 것을 보면 "아이고, 저 사람 믿음 좋은 줄 알았더니 저러네" 하고 상처를 입을 수 있는 자들이 교회 안에 많다는 것입니다. 이것을 부인할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을 것입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나 하겠습니다. 흔히 비행기를 타면 자기를 알아보는 사람이 없다고 생각하고 자유롭게 행동하는 사람이 많습니다. 그래서 평소에 술을 안 마시는 사람도 비행기를 타고 가면서는 맥주를 마시는 경우가 더러 있다고 합니다. 저도 비행기 안에서 아는 사람이 없으면 가끔 식사하고 나서 포도주를 한두 모금 마실 때가 있었습니다. 특히 비위가 상하면 그렇게 합니다.
그러나 나를 알아 보는 사람이 주위에 있으면 손을 대지 않습니다. 그 형제를 위해서입니다. 지난 주에도 저는 급한 용무로 비행기를 타야 했습니다. 제가 탑승을 하고 앉아 있는데 우리 교회 부목사님이 귀띔을 했는지 사무장이 찾아와서 "옥 목사님이시지요?" 하고 인사를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때 주변에 있는 승객들의 시선이 저에게 쏠리는 것을 느꼈습니다. 그런 일만 없었다면 그날 저는 입가심으로 술을 조금 입에 대었을지 모릅니다. 제가 이런 이야기를 털어놓는 이유를 잘 이해하시기 바랍니다.
믿는 형제 앞에서만 그런 것이 아닙니다. 안 믿는 사람들의 세계에서도 우리의 처신은 다를 바가 없다고 봅니다. 믿는다고 하는 우리가 그들 앞에서 마시고 피운다면 "잘 믿는 것 같아도 별수없네" 하고 그들이 마음에 시험을 받아서 예수 믿을 생각을 안 할지 모릅니다. 따라서 아무리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해도 술과 담배를 하면 우리는 지체없이 양심의 가책을 받게 될 것입니다. 14절을 한번 보십시오.
"내가 주 예수 안에서 알고 확신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스스로 속된 것이 없으되 다만 속되게 여기는 그 사람에게는 속되니라"(14절).
마음에 가책을 받으면서 먹고 마시는 것은 부정한 것이 된다는 말입니다.
"식물을 인하여 하나님의 사업을 무너지게 말라 만물이 다 정하되 거리낌으로 먹는 사람에게는 악하니라"(20절).
"의심하고 먹는 자는 정죄되었나니"(23절).
의심하고 먹으면 벌써 죄를 범하는 것이 된다는 의미입니다. 이와 같은 말씀을 비추어 볼 때, 성경에서 죄라고 꼬집어서 말하지 않는다 할지라도 우리는 형제를 위해서 함부로 마시고 피울 수 없는 것입니다.
삼계탕 전문 식당에 가 본 분들은 더러 경험한 적이 있을 것입니다. 다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제가 가끔 들르는 식당에서는 손님에게 인삼주를 대접해 줍니다. 작은 잔에 담겨 있는 인삼주를 쳐다보면 마시고 싶은 유혹을 받기 쉽습니다. 삼계탕에는 기름기가 많아 가끔 비위 상할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삼주를 마시면 입맛도 깨끗해지고 소화도 잘 되는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저는 보는 사람이 없을 때는 입가심으로 마십니다. 그것 때문에 잘못될 사람이 없으니까요.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저는 손을 못댑니다. 주변에서 음식 먹는 사람들 중에 나 때문에 실망할 사람이 있을지 모르니까요. 왜 이렇게 해야 합니까? 나보다 더 중요한 것은 형제들이기 때문입니다.
뉴욕에 플러싱한인감리교회라는 교회가 있습니다. 제가 잘 아는 목사님이 그 교회에 부임했을 때 35명의 미국인 교인들만 남아 있었다고 합니다. 교회당은 꽤 큰데 어떻게 된 일인지 대부분의 교인들이 떠나버린 것입니다. 그런데 그분이 처음 그 교회에 갔을 때 교회당 2층에서 이상한 방 하나를 발견했다고 합니다. 알고 보니 예배를 마치면 교인들이 올라가 담배를 피우고 술을 마시는 방이었습니다. 선반에 술병이 즐비하게 놓여 있고 한쪽 벽에는 담배 연기를 뽑아 내는 환풍기가 돌아가고 있었다고 합니다. 그가 처음 그 장면을 보았을 때 너무 기가 막혀 속으로 이런 말을 했다고 합니다. '이 교회는 시내 산 같군.' 하나님이 시내 산에서 임재하실 때 연기가 자욱했거든요. 그분은 그때 중대한 결단을 내렸습니다. 교인들에게 술 담배를 끊게 하고 그들에게 성경 말씀을 가르치기로 한 것입니다. 그러자 얼마 지나지 않아서 교회가 부흥하기 시작했습니다. 4년 후에는 교인 수가 430명으로 늘어났다고 합니다. 이 사례가 우리에게 가르쳐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음주, 흡연은 하지 않는 것이 교회 갱신에도 좋고 전도에도 좋고 부흥에도 좋다는 것입니다. 아무리 우리에게 할 수 있는 자유가 있다 해도 술, 담배는 안 하는 것이 최선이라는 말입니다.
"만일 식물을 인하여 네 형제가 근심하게 되면 이는 네가 성령으로 행치 아니함이라 그리스도께서 대신하여 죽으신 형제를 네 식물로 망케 하지 말라"(15절).
"고기도 먹지 아니하고 포도주도 마시지 아니하고 무엇이든지 네 형제로 거리끼게 하는 일을 아니함이 아름다우니라"(21절).
이 구절들에 대해서 고린도전서 8장 12, 13절이 보충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같이 너희가 형제에게 죄를 지어 그 약한 양심을 상하게 하는 것이 곧 그리스도에게 죄를 짓는 것이니라 그러므로 만일 식물이 내 형제로 실족케 하면 나는 영원히 고기를 먹지 아니하여 내 형제를 실족치 않게 하리라"(고전 8:12, 13).
바울은 형제에게 조금이라도 거리낌을 주고 실족하게 하는 일이 있다면 평생 고기를 안 먹겠다고 선언합니다. 고린도전서 10장 23, 24절 말씀도 참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이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이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치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고전 10:23, 24).
자유를 절제하는 사람에게 따르는 축복
예수 믿는 사람은 무엇이든지 다 할 수 있지만 그렇다고 마음대로 해서는 안 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주일을 지키는 것도 각자 마음에 작정한 대로 행동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형제에게 거치는 자가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합니다. 주일에 영업을 하는 것이 죄인지 아닌지 딱 잘라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영업을 안 하는 쪽이 훨씬 더 형제에게 은혜를 끼칠 수 있을 것입니다. 주일에 매매하는 것이 죄냐, 아니냐 하고 따지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내 주변에 있는 형제들에게 영적으로 은혜를 끼치기 원하면 가급적 사고 파는 일을 금하는 것이 더 아름다운 일입니다. 주일에 예배를 드리는 것은 제쳐두고 공항에 나와 서성대고 있나요? 주일에 예배시간인데도 극장에 나와 앉아 있나요? 주일에 교회는 안 가고 등산복 차림으로 산을 찾아 떠납니까? 대청봉 정상을 향해 올라가는데 같은 교회 성도와 마주쳤다고 합시다. 서로 웃고 악수는 하겠지만 둘 다 부끄러워서 고개를 돌릴 것입니다. 마음속으로는 서로가 서로를 조롱할 것입니다.
그리스도인에게 주일 성수는 가장 중요한 것입니다. 음주, 흡연, 도박, 사치, 이런 것들은 불신자까지도 멸시하는 일입니다. 그런데 성경에 구체적으로 언급하지 않았다고 해서 우리가 함부로 할 수 있습니까? 그렇게 하는 것은 우리의 신앙 양심상 대단히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올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다른 형제를 생각하고, 자기가 하고 싶은 것도 자제해야 합니다. 흔히들 하고 싶은 것을 자제하는 것은 고통이라고 생각합니다. 무엇이나 마음대로 할 수 있으면 행복하다고 말합니다. 정말 그럴까요?
"하나님의 나라는 먹는 것과 마시는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 안에서 의와 평강과 희락이라"(17절).
먹고 싶은 대로 먹는다고 천국이 마음에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시고 싶은 것 마셨다고 해서 천국의 행복이 찾아오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마음의 평안과 기쁨을 주는 천국은 그런 데 있지 않다고 합니다. 그럼 어디에 있습니까? 성령 안에서 행하는 자의 심령에 있습니다. 의와 평강과 희락이 넘치는 심령에 있습니다. 예수님이 통치하시는 그 아름답고 거룩한 나라는 멀리 있지 않습니다. 내 마음속에 있습니다. 천국을 소유하는 사람의 가정 안에 있습니다. 천국을 체험하는 성도들의 교회 안에 있습니다.
의(義)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최상의 의로운 관계를 이루는 법칙입니다. 인간관계의 법칙이요, 하나님 나라 관계의 법칙입니다. 이것이 의입니다. 평화는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최상의 의로운 관계를 유지하는 것입니다. 기쁨은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서 최상의 의로운 관계를 통해 체험되는 열매입니다. 의로운 관계를 유지하고 있기 때문에 기쁨을 체험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하나님 앞에서 뭔가 우리가 가책받는 짓을 하면 이것은 의롭게 행하는 삶이 아닙니다. 그렇게 되다 보면 마음에 가책이 옵니다. 가책이 오면 마음에 평화가 사라집니다. 마음에 평화가 사라지면 기쁨이 없습니다. 이것이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입니다.
그러므로 의와 화평과 기쁨이 충만한 천국의 행복을 우리 마음에 소유하고 살려면 하나님과의 관계가 바로 되어야 합니다. 형제와 나와의 관계도 바로 되어야 합니다. 내가 뭔가 형제에게 거리끼는 행동을 하면 형제가 실망을 하게 됩니다. 형제에게 사랑으로 행치 아니해서 거치는 돌이 되면 가책을 받게 됩니다. 그렇다면 그 형제와 나 사이는 굉장히 어렵고 불편한 관계가 되어버립니다. 따라서 내 마음에 평화가 사라집니다. 평화가 사라지면 기쁨이 없습니다. 형제를 만나도 기쁨이 없습니다.
정말 우리가 이 악한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으로서 하나님 앞에서 행복하게 살려면 우리 마음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내 가정에 천국이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환경이 천국으로 변해야 합니다.
어떻게 그것이 가능할 수 있습니까? 형제와의 의로운 관계를 통해서 우리 마음에 평화를 소유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평화를 누림으로써 우리 안에 기쁨이 충만하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 나라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행복해질 수 있는 비결입니다. 이 행복을 술 때문에 포기할 수 있습니까? 이 놀라운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담배 때문에 잃어버릴 수 있습니까? 이 영광스러운 축복을 주일에 함부로 어디 놀러가서 실컷 즐기는 쾌락 때문에 놓칠 수 있습니까? 안 됩니다.
우리가 참그리스도인으로서 형제를 위하여 자유를 절제하며 신앙생활을 하려고 힘쓰면 하나님의 축복이 따라옵니다. 어떤 축복입니까?
"이로써 그리스도를 섬기는 자는 하나님께 기뻐하심을 받으며 사람에게도 칭찬을 받느니라"(18절).
이 말은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말도 되고 하나님이 우리를 보시고 기뻐하신다는 말도 됩니다.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존재가 된다는 것이 얼마나 놀라운 복입니까? 우리가 이 복을 누리며 살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술 때문에, 담배 때문에 하나님 나라를 잃어버리지 마십시오. 잠깐 즐기는 쾌락 때문에 하나님이 주시는 그 기쁨을 싼 값에 팔아넘기는 부끄러운 사람이 되지 마십시오. 본문에 나오는 원칙을 깊이 명심함으로써 우리 모두가 하나님 나라의 행복을 마음껏 누리는 사람이 될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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