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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337쪽에 있는 글입니다.
52.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께 영광을!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평강의 하나님께서 속히 사탄을 너희 발 아래서 상하게 하시리라 우리 주 예수의 은혜가 너희에게 있을지어다 나의 동역자 디모데와 나의 친척 누기오와 야손과 소시바더가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도 너희에게 문안하고 이 성의 재무 에라스도와 형제 구아도도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로마서 16장 17-27절
사도 바울이 전하고자 했던 복음의 핵심은 15장 13절에서 이미 끝을 맺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소망의 하나님이 모든 기쁨과 평강을 믿음 안에서 너희에게 충만케 하사 성령의 능력으로 소망이 넘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롬 15:13).
그 이후에 나오는 내용은 사적인 이야기와 안부 인사가 대부분을 차지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바울이 편지 마지막 부분에 이르러 새삼스럽게 또 하나의 권면을 삽입해 놓은 것을 보게 됩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7절).
이것은 권면이라기보다 일종의 경고라고 하는 편이 더 적합할 것 같습니다. 로마교회 안에 아직은 완전히 본색을 드러내고 있지 않지만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해야 할 이단이 들어와 있다는 것입니다. 초대 교회 당시에 얼마나 많은 이단이 극성을 피웠는지 모릅니다. 우리는 그 사실을 서신서의 말씀을 통해서 익히 알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겸손하고 온유한 하나님의 종이었지만 이단에 대해서만은 가혹하리만치 냉정했습니다. 그는 이단에 대해서 한시도 긴장을 늦추지 않았으며 가장 강경한 자세로 대처했습니다. 바울이 전해 준 복음을 듣고 구원받은 신자 가운데 이단의 유혹에 넘어가 돌이킬 수 없는 길로 빠져버린 사례가 많았기 때문입니다. 1년 내내 땀 흘려 농사 지은 밭에 산돼지가 들어가서 순식간에 곡식을 망쳐 놓았다고 가정해 보세요. 농부의 가슴이 얼마나 찢어질듯이 아프겠습니까? 그와 비슷한 고통이 사도 바울에게도 있었던 것입니다.
이단은 종종 바울이 애써 개척해 놓은 교회에 들어가 쑥대밭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어떻게 해서든지 이단을 막으려고 했습니다. 이단에게 한 생명이라도 빼앗기지 않으려고 밤낮없이 경계를 게을리하지 않았습니다. 그러므로 17절 이하의 말씀을 가지고 그가 이단을 경고하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로마서를 마무리하는 마당에 왜 새삼스럽게 이런 경고의 말씀을 삽입했을까 하는 것이 우리의 관심을 끄는 문제입니다.
우리가 이미 본 바와 같이 로마서 편지는 절대로 짧은 내용이 아닙니다. 아마 모르기는 해도 이것을 쓰는 데 여러 주간이 걸렸을 것입니다. 어쩌면 몇 달이 걸렸을지도 모릅니다. 이렇게 긴 시간 동안 로마서를 기록하여 거의 마무리 단계까지 왔을 즈음, 로마교회로부터 어떤 방문객이 마을을 찾아왔던 것 같습니다. 그는 로마교회 안에 심각한 이단이 들어왔다는 소식을 전해 주었습니다.
정체가 밝혀지지는 않았지만 로마교회가 대단히 경계해야 할 상황이 되어버렸다는 소식을 접하고 바울은 매우 불안감을 느꼈습니다. 그래서 안부 인사를 기록하던 중에 새삼스럽게 이단에 대한 경고 말씀을 삽입한 것이 아닌가 하고 생각합니다.
소중한 보물을 가진 사람은 길을 갈 때 혹시나 강도를 당하지 않을까 하고 각별히 조심을 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은 얼마나 값진 보화입니까? 이 소중한 것을 값없이 손에 넣은 우리들은 각별히 조심해야 합니다. 주님이 경고하신 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 강력히 경계하며 대처해야 합니다.
"그러므로 모든 들은 것을 우리가 더욱 간절히 삼갈지니 혹 흘러 떠내려갈까 염려하노라"(히 2:1).
우리는 험한 세상을 살면서 자칫하면 이 소중한 보화를 빼앗기기 쉽습니다. 오늘 우리 주변을 한 번 돌아보십시오. 조금만 방심해도 유혹당할 여지가 너무 많고, 자칫하면 빠져들 수 있는 무서운 이단이 너무 많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이단이 끼치는 해독이 얼마나 치명적인가 하는 것은 한때 세상을 시끄럽게 했던 시한부 종말론자들을 통해서 생생하게 보셨을 줄 압니다. 당시 로마교회가 처해 있던 상황이나 오늘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이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오늘 본문이 주는 교훈을 우리에게 주시는 경고의 말씀으로 받아야 합니다.
이단의 전술
그러면 먼저 이단의 정체가 무엇인지 살펴보기로 하겠습니다.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의 배만 섬기나니"(18절).
이 같은 자들은, 이단 지도자들을 뜻합니다. 우리는 이단의 본색을 정확하게 꿰뚫어 보는 눈이 있어야 합니다. 그들은 예수의 이름으로, 성령의 이름으로 다가옵니다. 그러나 그들은 하나님을 섬기는 자들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종이 아니요, 예수의 종이 아닙니다. 그들은 자기가 하나님입니다. 자기의 유익을 위해 열심을 내는 자들이라는 말입니다. 이것이 이단의 본색입니다.
우리는 이단을 겉으로 보아서는 잘 모릅니다. 이장림이라는 사람이 검거되기 전에는 어떤 사람인지 잘 몰랐습니다. 그러나 수사 과정을 통해서 그가 얼마나 더러운 사리사욕에 사로잡혀 수많은 사람을 농락했는지 그 죄상이 적나라하게 드러났습니다. 이단의 본색이 얼마나 악랄한가를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분명하게 보았습니다. 2천 년 전에 있던 이단이나 지금 나타나는 이단이나 그 본색은 다른 점이 없습니다. 오로지 자기 배만 채우려는 동기와 목적을 가지고 날뛰는 것이 이단의 정체입니다. 우리는 이것을 바로 파악해야 합니다.
한국 교회의 현실을 보면 겉으로는 이단인지 아닌지 구별하기 어려운 교회가 적지 않습니다. 그러나 유심히 살펴보면 티가 전혀 안 나는 것은 아닙니다. 한국 교회에는 전통적으로 모이는 날짜가 정해져 있습니다. 주일 낮에 모이고, 수요일 저녁에 모이고, 금요일 밤에 주로 철야 기도회로 모입니다. 이것이 한국 교회에 백여 년 동안 이어져 내려온 아름다운 전통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요즘 보면 교회들이 모여서 집회하는 시간은 빼버리고 다른 교회가 모이지 않는 시간을 유독 따로 구별해서 성경공부를 하느니, 무슨 집회를 하느니 떠들어대면서 선전 유인물을 신문 사이에 끼워서 돌리는 교회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이단의 냄새를 강하게 풍기는 교회입니다. 왜냐하면 정말 주님을 겸손하게 섬기는 교회요, 모든 교회가 가 같이 주님의 몸을 이루고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면 이웃 교회 양들을 유인하는 식의 행동은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쉽게 말하면 목회 윤리를 짓밟아 가면서까지 그런 짓은 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이렇게 잘못된 교회들이 오늘 우리 주변에 너무 많습니다.
이단의 전술은 간교하기 짝이 없습니다. 이단이 하는 짓은, 첫째로 복음을 거스릅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로 권하노니 너희 교훈을 거스려 분쟁을 일으키고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7절).
여기서 교훈을 거스르게 한다는 말은 복음을 통해서 배우는 귀중한 교훈을 받지 못하게 만들고 나중에는 내버리도록 만든다는 말입니다. 이단은 참된 복음을 비판하게 만들고 믿지 못하게 합니다.
둘째로 이단은 분쟁을 일으킵니다. 교회 안에서 서로 논쟁하게 하고 반목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교회 안에 가끔 형제들끼리 감정이 생길 수 있고 또 어떤 때는 큰소리를 내며 싸우는 그런 불행한 사례도 일어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이해 관계가 달라서 일어나는 싸움은 얼마 지나면 서로 화해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절대 안 되는 것이 있습니다. 한번 터졌다 하면 화해가 불가능한 것이 진리 싸움입니다. 그러므로 이런 불상사가 생기기 전에 예방해야 하는 것입니다. 로마교회가 바로 이런 위기에 놓여 있었습니다.
셋째로 이단은 거치게 합니다. 사람들이 쉽게 끌려 들어갈 수 있도록 덫이나 함정을 많이 만들어 놓는다는 말입니다. 사람들이 걸려 넘어지도록 만드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말해서 이단은 진리를 의심하게 하고 거부하게 만든 다음, 형제들 간에 분쟁을 일으키고, 나중에는 걸려 넘어지도록 만듭니다. 이것이 이단이 벌이는 가증스런 짓입니다.
이단은 이와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서 대단히 간교한 방법을 동원합니다.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18절).
자기들이 하는 말에 속아 넘어가지 않을 수 없도록 미리 짜 맞춘 교묘한 말들을 가지고 사람들을 낚아채는 것입니다. 한번 걸렸다 하면 낚시 바늘에 걸린 고기처럼 꼼짝달싹 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이 제대로 돌아오는 것을 보셨습니까? 그들은 잘못된 줄 알면서도 못 돌아옵니다. 공교한 미끼에 꼭 물려 잡혀 있기 때문입니다. 시한부 종말론에 빠져서 그렇게 망신을 당한 사람들이 돌아오나요? 못 돌아오는 사람이 태반입니다. 한번 이단에 빠졌다가 도망쳐 나온 사람이 또 다른 이단으로 넘어가는 것을 봅니다. 그들을 꽉 잡고 있는 무서운 고리가 있기 때문입니다. 이단이 잡아매는 쇠사슬이 있습니다. 그것이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들입니다.
이단에 빠지는 사람들
제가 시무하고 있는 교회에는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형제들을 섬기는 평신도 지도자들이 많습니다. 500~600명 되는 순장을 위시해서 300~400명이 넘는 젊은이 선교회의 리더들, 600명 가까운 교회학교 교사들, 이런 분들은 말씀을 가지고 형제를 섬기는 작은 목사들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너무나 중요한 일을 하기 때문에 교회에서 훈련을 많이 시킵니다. 또 은사가 있고 인격적으로 존경할 만한 사람들을 택합니다. 함부로 세우지 않습니다. 잘못 세우면 다른 사람이 넘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런 지도자 중에 1년에 한 명 정도는 이단에 빠지는 경우를 봅니다. 정말 괴로운 일입니다. 어떤 자매가 순장 사역을 10년 동안 했습니다. 그는 교회를 잘 섬겼습니다. 누구도 따라오지 못할 만큼 열심으로 봉사했습니다. 그런데 그렇게 일을 잘하던 사람이 하루 아침에 '지방교회'로 넘어갔습니다. 지방교회라고 하니까 지방으로 이사를 갔다는 말로 들릴지 모르겠습니다. 지방교회라는 이단이 있습니다. 서초동에 지방교회의 본거지라고 할 수 있는 교회가 있습니다. 신동아아파트 상가 4,5층에 서울교회라는 간판을 붙여 놓고 있습니다. 사랑의 교회보다 먼저 자리를 잡고 문을 열었습니다. 그런데 자매 하나가 지방교회에 빠진 것입니다. 사전에 상의라도 했더라면 막을 수도 있었을 것입니다. 제가 알았을 때는 이미 늦어서 더 이상 손을 쓸 수가 없는 상태였습니다.
이단에 빠진 사람들을 주의해서 살펴보면 대개 몇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정서적으로 불안한 사람입니다. 순수한 복음으로 만족하지 못하거나, 무엇인가 새로운 지식을 찾아다니는 좋지 못한 근성이 있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귀가 여려서 새로운 것을 들으면 정신을 못 차리는 사람입니다. 그리고 극성맞게 순진한 성도들을 유인합니다. 이것이 이단에 빠지는 사람에게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공통점입니다. 지방교회에 빠진 그 순장의 유인을 받아 가깝게 지내던 다락방 순원 몇이 끌려 넘어갔습니다. 지방교회는 다른 이단 집단과 똑같이 공교하고 아첨하는 말로 기성 교인을 유인합니다. 그곳에 가 보면 그들이 새로 믿게 해서 데리고 온 사람은 극소수입니다. 대부분이 장로교, 침례교, 성결교, 감리교 등에서 끌어들인 사람들입니다. 그들은 갖가지 감언이설로 사람들을 유인합니다. 그리고 성경공부라는 미명하에 진리와 거짓을 혼합하여 가르칩니다. 순진한 성도들은 진리를 제대로 분별하는 능력이 부족합니다. 그 약점을 이용하여 성경을 문맥과 관계없이 자기들 마음대로 해석하여 가르치고 있는 것입니다.
제가 몇 가지 예를 들어 볼까요? 이것이 참이냐, 거짓이냐를 분별해 보시기 바랍니다.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해서 지방교회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수백 년 전에 이미 이단의 교리로 선고받은 양태론을 가르칩니다. 하나님은 한 분이지만 세 위가 계시다는 것을 우리는 믿습니다. 하나님이 계시고 아들이 계시고 성령이 계십니다. 그 분은 본체적으로는 한 분이지만 세 분의 역할이 분명히 구별되어 있습니다. 우리는 이 삼위일체 하나님을 믿습니다. 그러나 지방교회에서는 하나님이 하늘에 계실 때는 아버지요, 땅에 오셨을 때는 아들이요, 우리 마음에 오셨을 때는 성령이라고 가르칩니다. 그러므로 한 하나님이 형편에 따라서 모양을 바꾼다는 말이 됩니다. 이것이 양태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오묘한 진리입니까? 그런 식으로 받으면 어떻게 됩니까? 우리 마음에 하나님이 계신다고 하면 그분은 성령입니다. 그러면 누가 없어집니까? 아버지 하나님도 없어지고 예수님도 없어집니다. 이것이 말이 됩니까?
예수님에 대해서는 무엇이라고 가르치는지 아십니까? 부활 전까지는 단지 사람의 아들이었으나 부활한 다음에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고 합니다. 부활한 다음에 인성과 신성을 겸비한 하나님이 되셨다는 것입니다. 성경에 그렇게 기록되어 있나요? 사랑의교회에서 순장까지 한 사람이 그런 데 빠져서 끄떡끄떡하고 있으니 제 가슴이 어찌 답답하지 않겠습니까?
또 그들은, 죄는 사탄이라고 가르칩니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령으로 우리 마음에 들어오셔서 사탄을 멸하셨기 때문에 죄도 함께 멸망을 받았다고 합니다. 따라서 이제부터는 회개할 필요가 없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죄가 사탄입니까? 가령 어떤 사람이 도적질을 했다고 하면 그 도적질한 것이 사탄입니까? 성경에 보면 죄를 사탄의 어떤 권세처럼 표현하는 데는 있지만 죄와 사탄이 하나라고 가르치는 데는 한 군데도 없습니다.
그들은 불신자들을 전도하기 위해서 설교를 한다든지 따로 복음을 전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합니다. 그 대신 '오 주 예수여'를 세 번만 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가르칩니다. 누구든지 억지로라도 '오 주 예수여'를 세 번만 하면 말하는 그 입을 통해서 성령이 들어간다고 가르치는 것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오 주 예수여'를 주문처럼 외웁니다. 백 번 천 번 리듬에 맞추어서 "오 주 예수여, 오 주 예수여..." 여러분, 이렇게 주문 외우듯이 정신없이 외우면 사람이 어떻게 되는지 아십니까? 최면에 걸립니다. 성경에 '오 주 예수여'를 그렇게 하라고 했나요? 인도의 하리크리슈나가 가르치는 주문과 뭐가 다릅니까? 불교의 나무아미타불과 뭐가 다릅니까? 그들은 지방교회 안에 들어오는 교인은 '산 별'이고 다른 교회에 다니는 사람은 '유리하는 별'이라고 가르칩니다. 떠돌아다니는, 이 유리하는 별의 운명은 캄캄한 흑암이며 지옥이라고 가르칩니다. 이단의 본색은 여기서 분명하게 드러납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단에 대해서 정확하게 알아야 합니다. 그들은 다른 교회를 정죄하고 자기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주장합니다. 이것이 이단의 아주 뚜렷한 특징입니다. 간교하고 기만적인 성경 해석을 예사로 하고 진리와 비진리를 뒤섞어버리고 공교하고 무서운 술책으로 사람들을 낚아채는 것이 이단의 본색입니다. 이단 집단들은 성경공부를 한답시고 사람들을 무자비하게 끌어드립니다. 그래서 단순한 복음을 복잡하게 해석하여 혼란에 빠뜨릴 뿐만 아니라 처음 받은 복음을 의심하게 합니다.
나아가 타교인을 유혹하려고 온갖 아첨을 다 합니다. 이것이 이단들이 벌이는 가증스런 작태입니다. 만약에 옥 목사가 강단에서 사랑의 교회에만 구원이 있다고 말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습니까? 여러분은 "틀렸소" 하고 일어나서 주저하지 말고 나가야 합니다. 분명히 잘못된 소리이기 때문입니다. 우리 모두는 이단에 대해서 바울처럼 태도가 단호해야 합니다.
이단을 단호하게 배격하라
이단에 대해서 우리가 취할 태도를 살펴봅시다.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저희에게서 떠나라"(17절).
자, 보세요. 여기에서 나오는 '살피라' 하는 말은 굉장히 강경한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교회 안에 이단의 물이 든 사람이 있는지 철저하게 조사해서 가려내라는 말입니다. 그들의 말 하나하나를 잘 분별해서 어딘가 잘못된 것이 있나 없나 눈을 똑바로 뜨고 분별하라는 말입니다. 만일 복음을 이상하게 받아들이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는 경고를 해야 합니다. "당신 그렇게 하면 안 됩니다. 성경 말씀이 이렇게 가르쳤는데 이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하고 교훈하고 권고해야 합니다.
그러나 이단에 한번 빠졌다 하면 이미 시기를 놓쳐버린 경우가 태반입니다. 손을 쓸 수 없는 경우가 대부분입니다. 말을 해도 안 듣습니다. 이런 사람들에 대해서는 성경의 교훈대로 해야 합니다. 동정하면 안 됩니다. 무조건 사랑을 가지고 안아 주려고 안 됩니다. 그런 사람을 안으면 그가 숨기고 있는 칼에 찔리는 꼴이 되고 맙니다. 바울이 가르쳐 준 말씀대로 해야 합니다. '떠나라'고 하는 말은 '내보내라', '갈라서라' 아니면 '네가 나오라' 라는 의미를 가지고 있습니다.
세상에는 그대로 덮어두어서 좋은 일이 있고, 절대로 덮어두어서는 안 되는 일이 있습니다. 우리는 이것을 구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단은 잠재적인 말썽의 소지를 안고 있기 때문에 적당히 사랑으로 덮어두면 나중에는 당하게 마련입니다. 때를 놓치면 속수무책의 궁지에 빠집니다. 불씨는 타오를 때 발로 밟아 꺼버려야 합니다. 합선이 되어서 스파크가 일어날 때 빨리 손을 쓰지 않으면 화재를 진압하기가 어렵습니다. 빌딩이 화염에 싸이고 불길이 거세게 몰아칠 때는 모든 것이 끝나버린 뒤입니다.
이단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철저히 조사해서 무엇인가 냄새가 날 때 빨리 처리해야 합니다. 사랑이니 동정이니 인내니 하면서 감싸 주려고 하면 교회 전체에 불이 붙어버립니다. 그래서 본문이 '떠나라' 하고 강경하게 경고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단이 많은 세상에서는 신앙생활을 순진하게 하는 것만으로 만족할 수 없습니다.
"너희 순종함이 모든 사람에게 들리는지라 그러므로 내가 너희를 인하여 기뻐하노니 너희가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19절).
이 말씀은 로마 교인들의 약점을 찌른 것입니다. "로마 교인들아, 너희가 지금까지 순종을 잘하고 교회생활을 열심히 하고 있는 것은 고맙다. 내가 그 말을 듣고 얼마나 기뻤는지 모른다. 그러나 그렇게 순종 잘하고 교회생활 잘하는 것만으로 절대 안심할 수 없다. 너희들은 한걸음 더 나아가서 선한 데 지혜가 있어야 하고 악한 데 미련할 수 있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단에 끌려 들어가지 아니하고 바른 신앙생활을 하려면 무엇이 진리이고, 무엇이 비진리인가를 아는 밝은 영안이 있어야 합니다. 아무나 팔을 벌리면 잘 가는 아이가 있지 않습니까? 여기서 오라 하면 덥썩 안기고, 저기서 오라 하면 덥썩 안기는 아이가 있지요? 그런 애를 보고 "너 참 성격 좋구나. 얼굴을 안 가리니 얼마나 좋으니? 네 엄마가 참 편하시겠구나" 이렇게 칭찬을 하기도 하지만 그 정도가 지나치면 총명하지 못한 아이로 취급당합니다. 아이가 그렇게 흐리멍덩하면 좋은 것이 아닙니다.
성도들도 마찬가지입니다. 교회에 열심히 다니고 그저 교회가 시키는 대로 "예, 예" 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옳고 그름을 분별할 줄 알아야 합니다. "선한 데 지혜롭고 악한 데 미련하기를 원하노라" 라는 이 말씀을 다른 말로 바꾸어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습니다. "속이지 못할 만큼 선해야 하고, 속지 않을 만큼 지혜로워야 한다." 어쨌든 신앙생활을 바로 하려면 순진하기만 해서는 안 됩니다.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진리인가, 비진리인가를 분별할 줄 알아야 비로소 안심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언젠가 신문에 보도된 한 이단 교회가 있었습니다. 부평에 있는 모 교회입니다. 그 교회가 얼마나 무서운 이단 집단인가를 우리는 그때 신문을 통해서 똑똑히 보았습니다. 지금 그 교회 목사라는 사람이 도망가서 잡히지 않고 있는데 사람을 몇 명 죽였다는 소문까지 들리고 있습니다. 그야말로 무서운 집단입니다. 거기에 들어가 있는 사람들 중에 깜짝 놀랄 만한 사람이 하나 있습니다. 그는 퇴역한 고위 장성의 부인입니다. 연세가 벌써 60이 훨씬 넘은 권사님입니다. 그 권사님이 거기 가서 아주 핵심 인물로 활동하고 있다고 합니다. 제가 그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습니다. 제가 그 권사님을 잘 알거든요. 과거에 믿음 좋고 헌신적인 사람으로 소문난 분인데 어쩌다가 거기에 빠졌는지 모르겠습니다.
그 이유가 뭘까요? 간단합니다. 순종 잘하고 열심히 봉사하는 것, 그것만 가지고는 안 된다는 것입니다. 영적으로 흐리멍텅하면 그렇게 불행해질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단에 빠지지 않으려면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에 대해서 정확히 알고 확신을 가져야 합니다. 그리고 자기가 소속한 교회의 교역자들을 신뢰해야 합니다. 대부분 이단에 빠지는 사람을 보면 교역자를 신뢰하지 않는 경향이 많습니다. "목사님은 그렇게 가르치시지만 다른 데 가니까 그렇게 이야기 안 하던데요"라는 식의 말을 잘합니다. 자기 교회 지도자가 가르쳐 주는 대로 하나님의 말씀을 열심히 배우십시오. 또 하나 중요한 것은 여기 기웃, 저기 기웃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마치 못 얻어먹은 아이처럼 돌아다니지 마십시오. 그런 사람을 이단이 끌고 가기는 식은 죽 먹기보다 쉬운 것입니다.
복음의 능력, 복음의 감격
이렇게 이단에 대해서 경고를 한 바울이 25절부터 로마서의 대미를 장엄한 찬양으로 끝맺고 있는 것을 봅니다.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취었다가 이제는 나타나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좇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 모든 민족으로 믿어 순종케 하시려고 알게 하신 바 그 비밀의 계시를 좇아 된 것이니 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
이 말씀은 하나의 긴 문장입니다. 대단히 긴 문장이지만 이것은 로마서의 피날레를 찬양으로 장식하는 멋진 내용입니다. 그 내용 중에 우리의 주목을 끄는 세 단어가 나옵니다. 첫째, "전파한다"는 말이 25절에 나옵니다. 그 다음에 26절에 "나타나셨다"는 말과 "믿어 순종케 하셨다"는 말이 나옵니다. 이 세 마디의 말이 중요한 골자를 이루고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자기가 나타내시고, 자기가 전하시고, 자기가 믿게 하신 그 복음을 가지고 우리를 능히 견고케 하신다고 26절에서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로마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귀한 복음을 가지고 우리의 영혼을 든든하게 세우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의 두 발을 힘있게 땅에 딛고 신앙생활을 바로 하도록 하나님이 만들어 주시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복음은 그가 계시하신 것입니다. 우리가 찾아다니면서 얻은 것이 아닙니다. 그것은 오랫동안 사람들의 눈에 감추어져 있었습니다. 사람의 지혜나 생각으로 발견할 수 없었습니다. 때가 되자 하나님께서 이 복음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의 길은 우리가 찾아낸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만들어 낸 것도 아닙니다. 우리가 연구한 것도 아닙니다. 전적으로 하나님 편에서 우리에게 나타내 보여 주신 길입니다. 선지자들과 사도들을 통해 기록한 성경을 통해서 계시해 주신 것입니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 1:2).
"이제는 율법 외에 하나님의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 곧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모든 믿는 자에게 미치는 하나님의 의니 차별이 없느니라"(롬 3:21, 22).
예수 그리스도는 친히 육신을 입고 이 땅에 찾아오셔서 우리를 만나 주셨습니다. 우리는 성경 66권에 기록된 진리의 말씀을 통해서 예수님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님을 믿으면 영원히 산다는 진리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수 믿고 영생을 얻은 사람이 누리는 영광과 축복이 얼마나 큰가를 알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을 부르셔서 "너희는 온 천하에 다니며 만민에게 복음을 전파하라"(막 16:15)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복음이 온 땅에 퍼졌습니다. 그 말씀이 땅 끝까지 미쳤습니다.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서 하나님은 우리에게 성령을 부어 주셨습니다. 모든 사람을 그리스도의 증인으로 만들어서 능력있게 증거하도록 하셨습니다.
1세기 전에 누가 대한민국이라는 나라를 알아 주기나 했습니까? 세계 어느 민족이 한국인을 알아 주었습니까? 국제적으로 관심을 끌지 못하는 후진국이었고, 여러 가지 면에서 소망이 없어 보이던 민족이었지만 하나님은 우리에게 복음의 빛을 비추어 주셨습니다. 누가 선교사들을 우리 땅에 보내었습니까? 누가 그들의 마음에 소명을 불러일으켜서 우리에게 생명 걸고 복음을 전하게 했습니까?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 성령께서 그들의 마음을 움직여 주셨습니다.
우리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신 이도 하나님이요, 이 복음을 들었을 때 믿게 하신 분도 하나님입니다.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 하나님이 우리로 하여금 믿게 하셨습니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롬 9:15).
하나님이 우리를 불쌍히 여기셔서 우리의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우리에게 들을 수 있는 귀를 주시고 예수님을 나의 구주라고 고백하며 영접할 수 있게 해 주셨습니다. 내가 잘나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내가 똑똑해서 믿은 것이 아닙니다. 이렇게 하나님이 나타내시고, 하나님이 전하시고, 하나님이 믿게 하신 이 복음을 가지고 오늘도 하나님은 우리를 견고하게 하기를 원하고 계십니다. 우리를 강하게 하기를 원하신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의 영혼을 날마다 힘있게 자라도록 해 주시는 것입니다.
로마서를 다 쓰고 나서 바울은 얼마나 감격에 떨었을까요? 본문 마지막 부분을 큰소리로 한번 읽어 보십시오. 두 손을 번쩍 들고 하나님을 소리 높여 찬양하는 바울을 만날 수 있습니다. 세세 무궁토록 하나님을 찬양하며 영광 돌리기를 원하는 바울의 그 뜨거운 열정과 그 감격! 그것이 우리에게도 진한 감동으로 다가와 우리의 가슴을 가득히 채우는 것 같습니다. 우리의 가슴도 바울의 가슴처럼 뜨거워지는 것을 느낍니다.
복음의 능력은 대단합니다. 복음은 확실히 우리 믿음을 강하게 만들어 줍니다. 복음은 우리의 영혼을 든든하게 자라도록 합니다. 복음은 우리에게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줍니다. 그리고 우리의 가슴을 뜨겁게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영혼의 구석구석을 채우고 성령의 감동과 능력을 체험하게 만듭니다. 우리가 아무리 힘든 세상을 살아도 복음은 우리로 쉬지 않고 하나님을 찬양하게 만듭니다. 그리고 믿지 않는 사람들을 향하여 불타는 마음으로 전도하게 만듭니다. 이것이 복음의 능력입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이제 로마서를 덮어야 할 시간입니다. 로마서를 들으면서 믿음이 크게 자란 형제 자매들이 많이 있음을 감사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신앙생활이 흔들리지 않도록 요지부동의 확신을 주심을 감사합니다. 영적 활력을 재충전할 수 있는 기회로 하나님이 이용해 주신 것을 감사합니다.
그러나 우리 중에는 아직도 믿음이 약한 분이 있습니다. 아직도 믿음의 확신이 없나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살리라"고 하신 그 복음을 다시 배우시기 바랍니다. 말씀을 날마다 묵상하시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영혼이 힘을 잃고 있습니까? 복음을 먹고 또 먹기를 바랍니다.
아직도 신앙생활에 기쁨이 없습니까? 복음의 기름을 치기 바랍니다. 다른 것으로 영혼을 강하게 하려고 하지 마십시오. 다른 것으로 믿음을 키우려고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은 복음으로 우리를 견고케 하기를 원하십니다. 10년 전에 들었던 똑같은 복음, 1년 전에 들었던 똑같은 복음, 오늘도 똑같은 복음을 듣고 있지만 그 복음은 언제나 우리를 견고하게 세우는 강한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우리가 로마서 강해를 한 번 들었다고 해서 다 아는 것은 아닙니다. 설교를 듣고 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내용을 잊어버립니다. 남아 있는 것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노력해야 합니다. 또 한 번 공부하십시오. 이 책을 펴 놓고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성경을 읽어 가면서 다시 정리해 보세요. 빨간 연필로 줄을 그려 가면서 들은 설교를 다시 한 번 기억하면서 정리해 보시기 바랍니다.
제가 지금 이 말씀을 드리는 이유는 로마서가 우리의 신앙생활을 위해 너무나 중요하기 때문입니다. 말씀 안에 굳게 서기를 힘쓰는 사람은 결코 이단에 넘어가지 않습니다. 말씀을 공부하십시오. 그러면 복음이 우리를 견고케 만들 것입니다.
우리 모두 눈을 감고, 펜을 놓은 다음 감격을 이기지 못하여 벌떡 일어나 두 손을 높이 들고 "하나님께 세세 무궁토록 영광, 영광!" 하며 소리 높여 찬양하는 사도 바울의 모습을 한 번 그려 봅시다. 그 감동, 그 감격을 우리 가슴에도 가득히 담아 봅시다.
우리가 무엇을 가지고 구원 얻을 수 있습니까? 무슨 재주로 하나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습니까? 무슨 공로를 가지고 우리 죄를 용서받을 수 있습니까? 자비로우신 하나님, 이 값없이 주신 복음, 예수 그리스도가 있을 뿐입니다. 우리도 두 손 높이 들고 이 좋으신 하나님을 찬양합시다.
"세세 무궁토록 그에게 영광이 있을지어다. 아멘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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