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 이민족의 개종 ~31. 종교개혁의 선구자 |
19. 이민족의 개종 | ||
종족 | 개종 시기 | 대표적인 선교사와 지배자 |
고트 | 340년경 | 울필라(아리우스파) |
720년경 | 보니페이스(인프리트)(가톨릭) | |
픽트 | 400년경 | 니니안 |
아일랜드 | 435년경 | 패트릭 |
프랑크 | 496년경 | 클로비스 |
스코틀랜드 | 563년경 | 콜룸바 |
앵글로색슨 | 600년경 | 켄터베리의 어거스틴, 에델베르 |
프리즐랜드 | 690년경 | 윌리브로르드 |
20. 교회와 국가 (754-1309년) | ||||
시기 | 연도 | 주요 사건 | 지도자 | 주요 사실 |
샤를마뉴의 신성로마제국 |
754-962 | 754년 : 피핀의 교황령 기증8세기 중엽 : 콘스탄티누스의 기증서(후대에 위조로 밝혀짐)800년 : 샤를마뉴 대관식9세기 중엽 : 위(僞)이시도르 문서(위조로 판명됨)840년 : 샤를마뉴의 손자들에 의한 제국의 분할 | 피핀 (714년경-768년)샤를마뉴(742-814)니콜라스 1세 (800년경-868년) | 교황려의 탄생은 교황이 세속의 통치자가 되게끔 만들었다.샤를마뉴의 대관식은 교회와 국가간의 권력투쟁의 계기가 되엇다.봉건적인 사회의 분권화현상이 나타났다.제국의 말기 교황권은 로마 귀족들의 지배하에서 불경건한 사람들에 의해 주도되었다. |
오토대제의 신성로마제국 |
962-1059 | 962년 : 오토1세가 교황에 의해 황제로 즉위됨1044-1046년 : 교황의 대분열1054년 : 동방과 서방교회의 대분열 | 오토 1세(912-973)레오 9세(1002-1054) | 이 시기는 이탈리아 내정과 교황권에 대해 독일의 부단한 간섭이 있었던 것이 특징이다.교황들은 대체로 미약하여 이탈리아와 독일 대군주의 꼭두각시에 불과하였다.클뤼니수도원 개혁운동은 교회가 강한 지도력을 갖게 했다. |
교황지배권의 확대 | 1059-1216 | 1059년 : 추기경단에 위임된 교황 선거 실시1077년 : 헨리4세의 카놋사의 굴욕1095년 : 십자군운동 시작1122년 : 보름스협약1215년 : 제4차 라테란회의 | 힐데브란트(그레고리7세)(1021년경-1085년)우르반 2세 (1042-1099)헨리 4세(1050-1106)인노센트 3세 (1161-1216) | 힐데브란트 식(式)의 개혁은 점차로 교황권의 확대를 가져왔다.평신도 서임논쟁은 절정에 다다랐으며 파문과 금령(禁令)은 교황권의 적절한 조치로 사용되었다.교황권은 절대적인 성속(成俗)의 권위를 주창한 인노센트 3세때에 전성기를 맞이하였다. |
교황지배권의 쇠퇴 | 1216-1239 | 1291년 : 아크르의 함락, 십자군의 종말1302년 : 교황칙서(하나의 거룩한 교회)1309년 : 교황의 바빌론 유수(교황권을 프랑스의 아비뇽으로 천도함)(교황의 아비뇽 유수라고도 일컬음) | 보니파시우스 8세 (1234년경-1303년)필립 4세(1268-1314) | 교황들은 세속권력에 대한 정당성을 주장했으나 점차로 교황권은 쇠퇴의 길을 걷기 시작하였다.교황권도 결국에 가서 그 지배권을 프랑스에 넘겨주고 말았다. |
21. 중세 초기의 교회 지도자 | ||||
이름 | 연도 | 사역지 | 대표 저서 | 주요 사실 |
보에티우스 | 480년경-524년 | 아테네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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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고트 왕 데오드릭을 섬기고 있었으며 그의 철학은 인간이 신(神)에게 도달하도록 안내하는 것을 중심으로 삼고 있으며 결국 그는 반역죄로 고소되어 사형되었다. |
대(大) 그레고리 | 540-604 | 로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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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가문에서 출생, 베네딕트 수도원에서 교육받은 후 최초로 로마교황이 된 그는 로마교황의 권위를 전(全) 서방교회에 천명하였으며 중세교회에 영향을 끼친 대중신학을 기초하였고 영국에 대한 선교의 열정을 지녔으며 로마를 롬바르드 족(族)으로부터 보호하였다. |
이시도르 | 560년경-636년 | 세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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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0년에 세빌의 대주교가 되었으며 633년 톨레도회의의 의장이 되었고 중세에 의심스러운 위(僞) 이시도르 문서의 편집자가 되었다. |
베데 | 673년경-735년 | 노덤브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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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에 수도원생활을 시작하여 그의 출생지로부터 몇마일 밖으로 여행해본 적이 없었으며 그의 지식은 수도원의 도서관에서 홀로 습득하였다. |
다메섹의 요한 | 675년경-749년 | 다메섹팔레스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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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가정에서 출생하여 이슬람 칼리프의 궁정에서 생활하였다.성상숭배론자로서 수도원에 들어가 헌신하였으며 동방교회에 적합한 정통신학을 체계화시켰다. |
알퀸 | 735-804 | 요오크아헨투우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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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족가문의 태생으로 요오크의 성당학교에서 공부한 후 성당학교의 교장이 되었다. 사를마뉴 궁전의 가정교사로 초빙되었고 양자설을 배격하였으며 제롬의 라틴어성서(Vulgate)를 개정하였다. |
파스카시우스 라드베르투스 |
785년경-865년 | 소숀삭소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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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린시절 고아로 성장한 후 베네딕트 수도원에 들어간 그는 화체설이론의 옹호자로서 경건왕 루이의 친구였고 고트샬크(Gottschalk)를 배격했다. |
고트샬크 | 805-868 | 라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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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에 의해 어린시절 수도원에 들어온 후 성인이 된 다음에는 수도원을 떠나기를 희망했으나 결국 그의 뜻이 받아들여지지를 않았다.어거스틴의 예정설의 교리 옹호자로서 때로는 정죄시되거나 투옥되기도 하였다. 20년간의 옥고 끝에 잔인하게 죽임을 당했고 그의 유해조차 기독교식으로 묻히지 못하였다. |
요한 스코투스 에리게나 |
810-877 | 아일랜드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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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일랜드 태생으로 프랑스 샤를왕의 궁정에서 생활하였고 범신론적 경향을 지닌 자로서 신플라톤주의자가 되었다.예정론과 성찬론의 논쟁에 참가하기도 하였다. |
22. 1054년 동서교회 분열의 주요 사항 | ||
원인 | 동방 교회 | 서방 교회 |
정치적인 경쟁대상 | 비잔틴제국 | 신성로마제국 |
교황권의 주장 |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는 그 서열상 로마대주교 다음에 있었다. | 로마 대주교는 모든 교회의 최고권을 주장하였다. |
신학논쟁 발전 | 칼케돈회의 이후 정체되었다. | 끊임없는 논쟁의 전개 속에서 성장과 변화가 지속되었다. |
삼위일체 논쟁 | 성령은 성부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 성령은 성부와 성자로부터 기인한다고 선언하였다. |
성상숭배 논쟁 | 120년 동안 예배시 사용된 성상(聖像)에 관한 논쟁을 전개하면서 마침내 그들은 조상(彫像)사용을 금지하였다. | 동방교회와의 부단한 논쟁 끝에 조상(彫像) 사용을 허용하였다. |
언어와 문화의 차이 | 그리스어(동방) | 라틴어(서방) |
성직자 독신문제 | 하급 성직자의 결혼은 허용되었다. | 모든 성직자는 독신생활을 하게 되었다. |
외부세력 | 회교도들의 압력과 동방교회에 대한 지속적인 침입이 감행되었다. | 서방의 이민족은 기독교화하여 서구교회에 동화되었다. |
1054년 상호파문 결정 | 미카엘 케룰라리우스는 교황 레오 9세에 의해 파문당한 후 교황을 저주하였다. | 레오 9세는 콘스탄티노플의 미카엘 케룰라리우스 대주교를 하였다. |
23. 십자군 운동 | |||||
십자군 | 연도 | 주요 제창자 | 대표적인 참가자 | 목표 | 결과 |
제 1차 | 1096-1099 | 우르반 2세은자 피터 | 위터 산사브와은자 피터고트샬크투울루즈의 레이몽갓프리탄크레드노르망디의 로베르트 | 터어키 치하(治下)예루살렘의 자유선포 | 십자군들은 니케아, 안디옥, 에뎃사, 예루살렘을 차례로 탈환한 후 그곳에 봉건왕국을 세움 |
제 2차 | 1147-1148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에우게네 3세 | 콘라드 3세루이 7세 | 터어키로부터 에뎃사 탈환 | 서방 십자군과 동방 수비대간의 불화는 결과적으로 많은 군사를 잃었고 다메섹 탈환도 실패하였다. |
제 3차 | 1189-1192 | 알렉산더 3세 | 프리드리히 1세존엄왕 필립리챠드 1세 | 살라딘과 사라센 치하예루살렘의 재탈환 | 프리드리히는 익사하고 필립왕도 귀국하였으며 리차드는 아크르와 욥바를 탈환했으나 살라딘의 계략에 말려 포로가 되어 실패하고 말았다. |
제 4차 | 1200-1204 | 인노센트 2세 | 샹파뉴의 티보블루와의 루이플란더즈의 볼드윈시몬 드 몽포르헨리 단돌로 | 이집트를 침공함으로써 사라센 세력의 약화 | 기독교권의 자라 도시가 베니스 상인의 농간으로 약탈을 당하였는데 이 당시 십자군은 읻르에게 교통수단을 확보하려고 하였을 뿐이었으나 결과적으로 교황에게 파문당하였고 그러자 그들은 콘스탄티노플시를 약탈하였다. |
소년 십자군 | 1212 | 니콜라스스데반 | 순전한 마음으로 성지회복을 위한 출전 | 대다수의 어린이들이 익사하였고 그중 일부는 살해되거나 노예로 팔렸다. | |
제 5차 | 1219-1221 | 호노리우스 2세 | 홀란드의 윌리암브랜느의 존 | 이집트를 공격함으로써 사라센 세력을 약화 | 십자군은 이집트의 라미에타 지역을 일시적으로 점령했으나 곧 탈환당하고 말았다. |
제 6차 | 1229 | 프리드리히 2세 | 예루살렘의 재탈환 | 십자군은 술탄과 계약을 맺어 예루살렘의 지배권을 얻었으나 이 일로 프리드리히는 파문당하였다. | |
제 7차 | 1248 | 루이 9세 | 이집트 침공으로 성지 회복 | 십자군은 이집트에게 패배하고 말았다. |
24. 이슬람의 정복과 십자군 | ||
비교 영역 | 이슬람의 정복 | 십자군 |
연 도 | 633-732 | 1095-1291 |
착 수 | 마호메트의 죽음 | 클레르몽 회의 |
결 말 | 투우르 전투 | 아크르의 몰락 |
동 기 | 성전(聖戰) (지하드)을 통해 불신자들에게 그들의 참다운 신앙을 전파하기 위함이다. | 순례자를 보호하고 신의 영광과 이교도 터어키족으로부터 성지(聖地)를 탈환키 위함이다. |
동기 유발 | 전투에 직접 참가한 자에게 사망시 낙원을 보장했다. |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사면받아서 전투 중에 죽는 자는 바로 천국에 들어가며 그밖의 모든 사람들에게도 죄의 짐과 세금감면의 혜택을 부여했다. |
타민족(他民族)에 대한 처우 | 이교도는 코란을 받거나 죽음을 택했으며 우대인과 기독교인은 그들의 종교를 지킬 수 있어서 일정한 세금을 내고 개종하지 않아도 되었다. | 정복된 회교도는 무차별하게도 처단당했으며 유대인 거주민들은 학살되었다. |
결 과 | 팔레스틴, 시리아, 소아시아, 이집트, 북아프리카, 스페인은 정복되었지만 그리스 문헌은 "암흑시대"속에서도 보존되었다. | 영속적인 영토를 확보할 수 없었고 고전 그리스와 로마문화는 회복되었으며 동방과 서방교회, 기독교인, 유대인 , 회교도인 간의 분열은 심화되었다. |
25. 토마스 아퀴나스의 신(神) 존재 증명논쟁 | |||
논쟁점 | 관찰 | 관련성 | 결론 |
운동의 원인 | 세계의 운동은 그 자체로는 시작할 수 없으나 운동 가운데 부동(不動)의 원동자(原動者)에 의해 움직여야만 한다. | 운동자의 무한한 연결은 불가능하다. 따라서 최초운동자는 존재할 수 없으며 그것 없이는 어떠한 운동도 발생할 수 없다. 그러므로 운동의 무한한 연결은 최초의 동인(動因)을 필요로 한다. | 움직일 수 없는 최초 운동의 제 1동인을 신(神)이라 부른다. |
인과율의 원인 | 분명한 사건들은 최초사건과 관련성을 지닌다. 곧 이것이 그들 자신의 원인이다. | 위와 같이 인과율의 연쇄고리는 무한정일 수 없다. | 영원한 제 1원인을 신(神)이라 부른다. |
가능성의 원인 | 반드시 사물들은 유한하며 그들의 존재는 필요에 의한 것보다 가능성에 있다. | 존재의 부차적인 연쇄고리는 유한하지만 필요에 의해 자존하는 존재로서 그들의 원천은 밝혀져야만 한다. | 이 자존하는 필연적 존재를 신(神)이라 부른다. |
불완전성의 원인 | 인간은 다른 것보다 완전의 정도를 적게 지닌 사물을 판단한다. | 상대적인 평가에서는 절대적으로 완전한 기준을 요구한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진리에 있어 가장 위대한 것이 가장 위대한 존재이다. | 이 절대기준인 신(神)은 반드시 존재해야만 한다. |
설계자 원인 | 생명없는 사물은 정해진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함께 작동한다. | 이 현상은 우연성을 배제하며 합리적인 설계자를 요청한다. | 이 합리적인 설계자를 우리가 신(神)이라고 부른다. |
26. 대표적인 스콜라 신학자 | ||||||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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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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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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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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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과 이성에
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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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주의 본성에
대한 견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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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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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셀무스 | 1033-1109 | 이탈리아프랑스켄터베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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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지식에 선행(先行)한다." | 실재론자-보편은 개별적 물체에 앞서 실재한다. | 이탈리아 태생으로 프랑스 수도원에 입문하여 1093년 켄터베리의 대주교가 되었다. 평신도 서임을 반대하였으며 신(神)존재논쟁에서 존재론적인 주장을 창안해내었으며 그리스도 속죄의 핵심적인 견해를 선언하였다. |
피터 아벨라르 | 1079-1142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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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될 때까지 아무것도 믿을 수 없다." | 보편실재론자-보편은 개별적물체 속에 있다. | 어린 시절부터 지도교사들과 논쟁하였으며 이후 파리 성당학교의 교장이 되었고 엘로이즈와의 결혼생활로 아버지가 되었으나 엘로이즈의 삼촌에 의해 거세되었다.수도원에 은거하였으나 클레르보의 베르나르를 선동한 죄로 이단으로 정죄되었다. |
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1090년경-1153년 | 프랑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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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사랑이신 분으로 알려진다." | 신비론자 | 귀족 계층 출신으로 시토수도원에 1113년 입문하여 이후 클레르보에 수도원을 세웠다. 제2차 십자군운동에 앞장섰으며 아벨라르의 격렬한 반대자로 찬송시도 많이 작사하였다. |
피터 롬바르드 | 1095년-1159년경 | 이탈리아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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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의 갈등은 이성에 의해 해결될 수 있다. | 보편실재론자 | 북이탈리아 태생으로 아벨라르의 제자로 파리의 주교가 되었다. 그의 명제집은 중세 조직신학의 교과서가 되었으며 7성사를 강조하였다. |
성(聖) 빅토르 위고 |
1096년경1142년 | 삭소니파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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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은 확실히 "경험보다 위이고 학문보다는 아래이다." | 신비론자 | 삭소니 태생으로 파리의 성(聖) 빅토르 학교에 입학하여 후에 교장이 되었다. |
알베르투스 마그누스 |
1200년경-1280년 | 바바리아파두아파리꼴로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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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학은 참된 의미에서의 학문이다." | 보편실재론자 | 바바리아에서 태어나 도미니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아퀴나스의 스승으로 레겐스부르크의 주교였으며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에 깊은 식견을 지녔고 마리아 숭배를 찬양하였다. |
존 보나벤투라 | 1217년경-1274년 | 이탈리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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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된 지식은 신(神)과의 명상에서만 얻을 수 있다. | 신비론자 | 투스카니 태생으로 17세에 프란시스코 수도회의 책임자가 되었으며 마리아 숭배의 예찬론자로서 주옥같은 찬송시를 지었다. |
토마스 아퀴나스 | 1225년경-1274년 | 이탈리아파리꼴로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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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이성은 인간을 "신앙의 문"으로 안내한다. | 보편실재론자 | 아퀴노의 귀족가문 태생으로 5세에 몬테카시노수도원에 입문하였고 19세에 도미니코수도원에 다시 입문하였다. 스승 알베르투스 마그누스에게 사사를 받았으며 파리, 꼴로뉴, 이탈리아 등지에서 설교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와 어거스틴의 저작에 관심을 가지면서 그의 신학체계를 세웠다. |
존 둔스 스코투스 |
1266년경-1308년 | 영국파리꼴로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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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神)에 대한 지식은 이성으로가 아니라 교호의 권위에 근거해 수용해야만 한다."한가지 사물이 동시에 존재하는 것은 철학에서는 진리이지만 신학에서는 그렇지 않다." | 보편실재론자 | 영국 태생으로 프란시스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옥스퍼드에서 연구와 교수생활을 하였다. 파리대학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한 후 아퀴나스의 적수가 되었다.성모 마리아의 정결교리(무흠설)에 영향받았다. 후에 프로테스탄트에 의해 그는 저능아라는 별명을 얻기도 하였다. |
윌리암 옥캄 | 1280년경-1349년 | 영국파리뮌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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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리는 독특함이란 계시된 신학이 순수이성의 증거에 민감하지 못하다는 것이다." | 유명론자-보편은 사물이 있은 뒤에 실재한다. | 서레이 태생으로 프란시스코수도회에 입문하였고 둔스 스코투스에게 사사를 받았다. 파리대학 교수생활을 하였으나 그의 이론으로 인하여 파문당하게 되었다.특히 교항무오설에 반대하였고 교회의 일반적 권위를 배격하였다. |
27. 중세의 대표적인 수도회단체 | ||||||
분류 | 교단 | 설립자 | 설립연도 | 발생지 | 핵심 인물 | 주요 사실 |
베네딕트수도회 | 누르시아의베네딕트 | 529 | 이탈리아의몬테카시노 | 베데보니페이스 | 최초 수도원으로 베네딕트계율에 근거하여 설립되었다. | |
기 사 수 도 회 |
성(聖)요한 기사수도회(병원기사단) | 레이먼드 드 페이 | 1113 | 예루살렘 | 순례자들의 보호처로 후대에 십자군의 싸움터가 되었다. 수도회 본부는 1530년 몰타섬으로 옮기었고(몰타기사단)1798년 나폴레옹에 의해 폐쇄되었다가 1834년에 재건되었다. | |
성전기사수도회 | 위고 드 페이앙성(聖) 오메르갓프리 | 1119 | 예루살렘 | 무력으로 순례자들의 안전을 보호하여 부(富)와 권력을 얻었으나 1312년 폐쇄되었다. | ||
튜튼기사수도회 | 독일 순례자들 | 1190 | 아크르 | 성지(聖地)의 병원과 경비를 담당하였고 독일지방에서 선교활동을 펼쳤으며 1523년 와해되었으나 동 프리시아 지역에 진출하여 융커지주의 조상이 되었다. | ||
베 네 딕 트 파 |
클뤼니수도회 | 아퀴텐느의 윌리암 | 910 | 프랑스의클뤼니 | 그레고리 7세우르반 2세 | 베네딕트파 개혁의 결과로 발생하였으며 베네딕트계율을 충실히 이행하였다.(클뤼니 개혁) |
시토수도회 | 로베르 몰렘 | 1098 | 프랑스의시토 | 에우게네 3세베네딕트 12세클레르보의 베르나르 | 베네딕트계율 추종, 트래피스트 수도회는 이 수도회의 일파였다. 1790년 와해되었다. | |
어 거 스 틴 파 |
어거스틴수도회 | 토마스 아 켐피스게르하르트 그루테마르틴 루터리미니의 그레고리 | 성(聖)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신봉하였으며 이들중 몇몇은 탁발수도사가 되었다. | |||
프레몽트르수도회 | 노르베르 | 1119 | 프랑스의프레몽트르 | 성(聖)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준수하였다. | ||
독 립 파 |
카르투지오수도회 | 브루노 | 1082년경 | 프랑스의카르투지오 | 린컨의 위고 | 카르투지오 계율에 충실하여 매우 엄격하며 자신의 몸을 채찍질하는 고행을 일삼았다. |
갈멜수도회 | 비톨드 | 1156 | 갈멜산 | 아빌라의 테레사 | 미확인된 엘리야 선지자(구약성서 참조)의 업적을 추모하였으며 후대에 탁발 수도사가 많이 배출되었다. | |
탁 발 수 도 회 |
도미니코수도회 | 도미닉 구즈만 | 1216 | 스페인 | 토마스 아퀴나스알베르투스 마그누스존 타울러바르톨로메오 드 라 카사지롤라모 사보나롤라토마스 드 토르케마다 | 어거스틴의 가르침을 전수하였고 교황에 힘입어 이단학설에 대항하였으며 종교재판소를 주관하였다. |
프란시스코수도회 | 아씨시의 프란시스 | 1223 | 이탈리아 | 보나벤투라둔스 스코투스윌리암 옥캄로저 베이컨리라의 니콜라스 | 이들의 근본규칙과 가르침은 성서에 기인하였다. 절대적인 빈곤생활을 서약하였고 1525년 캐퓨친수도회를 설립, 운영하게 되었다. | |
예수회(제수이트파) | 이그나티우스로욜라 | 1540 | 로마 | 프란시스 싸비에르로베르 드 노빌리마테오 릿치 | 이들의 규칙은 로욜라의 영성훈련에 기인하며 이들은 선교와 교육사업에 전력을 다하였고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박멸하는 일에 앞장섰으며 1773년 와해되었다가 1814년 재건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28. 중세의 비국교도 및 이단 | ||
단체 | 가르침의 특징 | 주요 사실 |
바울파 | 이원론과 가현설, 바울서신의 강조 및 영지주의자 말시온의 가르침과 유사하며 구약성서와 베드로서신을 거부함과 동시에 모든 외형적인 종교훈련을 배척하였고 극도의 금욕주의생활을 강조하였다. | 7세기에 발생하여 동방교회에 한정되어 만연되다가 동방교회의 박해를 받았으며 12세기에 쇠퇴하였다. |
보고밀파 | 이원론에 입각한 철저한 고행생활을 강조하였고 삼위일체논쟁에서 양태론(사벨리안)을 표방하였으며 성찬을 거절하였다. | 유키테스의 영향 아래 성장하여 동유럽의 현저한 세력으로 성장하였다. |
카타리파 (파타리파,알비겐파) |
이원론과 가현설의 주장 및 성찬의 거부를 내세우며 철저한 독신주의를 표방하며 마니교와 유사하였다. 그들만이 참된교회를 나타내며 참신자와 거짓신자를 구분하며 연옥, 면죄부를 거절함과 동시에 종종 금식을 통해 죽음을 맞이하였고 영혼재래설을 믿으며 평화를 애호하는 자들이었다. | 11세기 초에 발생하여 바울파와 보고밀파의 영향 아래 성장하였고 추종자들은 유럽 도처에서 화형을 당하였으며 한때 남프랑스 지역에서 커다란 세력을 형성하였으나 여러 차례 종교재판소와 십자군의 공격대상이 되어 점차 쇠퇴하였다. |
왈도파 | 간단한 공동체생활 및 각 지방어로 성서를 전하였고 특히 산상수훈(마태복음 5~7장)을 강조하였으며 평신도설교를 형요하였고 여성설교자를 인정하였으나 연옥을 부정하였다. | 피터 왈도(1215년경 사망)에 의해 남프랑스 지역에서 발생한 이들은 리용의 빈자(貧者)"라는 별명이 주어졌으며 교회의 동의없이 하였던 이들의 설교는 저주받았고 북이탈리아 및 오스트리아에서 박해를 당하였다. 1532년 종교개혁에 적극 나섰다. |
롤라드파 | 평신도 설교자의 양성과 화채설의 부정 및 영국민의 평화에 성서의 사용을 강조하였다. 순례여행, 고해성사, 성상숭배를 비난하였고 연옥 및 성직자 독신주의를 부정하였다. | 존 위클리프의 추종자들이 결성한 모임으로 다수가 순교하였지만 박해가 시작되자 많은 사람이 국교도로 개종하였다. |
후스파 | 교회보다 성서의 권위 강조와 평신도에게 성찬의 완전한 참여보장요구 및 화채설, 성인(聖人)숭배, 면죄부, 고해성사의 전면부정 그리고 각 지방어로 성서를 읽을 수 있도록 조치하였다. | 존 후스의 추종자들이 결성한 모임으로 후에 보헤미아 형제단의 원형이 되었다. 이들을 섬멸하기 위한 다섯 차례의 종교전쟁이 있었으며 바젤회의에서 국교도와 타협점을 모색했다. 왈도파에 깊은 영향을 받았으며 오늘날 모라비안교도 형성에 깊이 관여하였다. |
30. 중세교회의 회의 | |||
회의 | 연도 | 관련 인물 | 결정 사항 |
제1차 리테란 | 1123 | 칼리스투스 2세 | 보름스협약을 확정하였다.성직자의 결혼을 금지하였다.십자군 참전자에 대한 면죄부를 승인하였다. |
제2차 리테란 | 1139 | 인노센트 2세 | 반(反)교황주의자 아나클레투스 2세의 추종자를 정죄하였다.대분열집단을 비난하였다.제1차 라테란회의의 결정사항을 재확인하였다. |
제3차 리테란 | 1179 | 알렉산더 3세 | 카타리파를 비난하였다.교황 선출시 추기경외의의 2/3찬성을 원칙으로 하였다. |
제4차 리테란 | 1215 | 인노센트 3세 | 종교재판소 설치와 황제 프리드리히 2세 선출의 승인 및 대헌장의 비난 그리고 화채설의 규정을 정하였다.프란시스코 종단을 승인한 반면 카타리파와 왈도파를 비난하였다.제5차 십자군 출정을 결의하였다. |
제1차 리용 | 1245 | 인노센트 4세 | 황제 프리드리히 2세를 폐위하였다.성지 예루살렘이 이슬람에게 정복되었음을 애도하였다. |
제2차 리용 | 1274 | 그레고리 10세 | 삼위일체 조항 재확인 및 새로운 수도원 신설금지, 그리고 동방과 서방교회의 재통합을 추진하였다.추기경단은 교황선거기간 동안 급료를 받지 않기로 결정하였다. |
비엔나 | 1311-1312 | 클레멘트 5세 | 성전 기사단 폐지 및 새로운 십자군 창설에 노력했으나 실패하였다.베긴수도회와 베가르트수도회를 비난하였다. |
피사 | 1409 | 피터 달리피터 필라르기귀 드 마제즈 | 교황권의 중재안 승인 및 로마의 그레고리 12세와 아비뇽의 베네딕트 13세의 파문 결정 및 알렉산더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였다.이 결정으로 세 명의 교황이 존재하여 교황권의 막대한 타격을 안겨 주었다. |
콘스탄스 | 1414-1418 | 요한 23세지기스문트피터 달리존 거슨 | 세명의 대립교황을 파문하고 마르틴 5세를 새 교황으로 선출하여 대분열의 막을 내렸다.존 후스의 사형이 결정되었고 회의의 권위는 교회에 대해 절대적이 되었고 교회 결정사항이 필요로 하는한 회의가 소집되는 선례를 남겼다. |
바젤 | 1431-1449 | 마르틴 5세에우게네 4세줄리안 케사르니쿠사의 니콜라스 | 교황이 회의를 해산시키려는 노력을 기울인 결과 회의의 권위는 더 한층 강화되었다.교황은 자신의 권위를 재확인하고자 회의의 분열을 조장하였고후스파와의 타협점을 모색하였다. |
31. 종교개혁의 선구자 | |||||
이름 | 연도 | 교회에 도전한 요소 | 신상명세 | ||
토마스 브래드워딘 | 1290년경-1349년 | 구원에 있어서 신(神)의 은총을 강조함 | 영국의 신학자이며 수학자로 1349년 켄터베리 대주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흑사병으로 사망하였다. | ||
리미니의 그레고리 | ?-1358 | 구원에 있어서 신(神)의 은총을 강조함 | 이탈리아 철학자이며 어거스틴수도회 수도사였다. | ||
존 위클리프 | 1329년경-1384년 | 화채설을 부인함 | 교회의 부(富)의 축적, 면죄부 판매를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옥스포드대학 교수로 1381년 농민반란과 연루되어 해직되었고 라틴어성서 대부분을 영어로 번역하였으며 그가 죽은 후 그의 시체는 발굴되어 1428년 화형을 당하였다. |
존 후스 | 1373년경-1415년 | 교회를 성사(聖事)보다 그리스도인답게 사는 자들의 모임으로 규정지음 | 면죄부 판매, 성상숭배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보헤미아의 사제로서 프라하대학 교수였으며 콘스탄스회의의 결정에 의해 화형에 처해졌다. |
베젤의 존 | 1420년경-1489년 | 화채설을 부인함 | 면죄부 판매, 성직자 독신주의에 반대함 | 성서의 권위를 강조함 | 독일 신학자로 공동생활의 형제단 일원으로 개종한 후 이단으로 정죄되어 투옥생활 끝에 사망하였다. |
지롤라모 사보나롤라 |
1452-1498 | 교황의 부도덕성을 공박함 | 이탈리아 도미니코수도사로 플로렌스에서 이단으로 정죄되어 화형을 당하였다. | ||
데시데리우스 에라스무스 |
1466년경-1536년 | 교회내 성직자의 위선과 모순을 지적함 | 화란의 인문주의자로 루터가 사용한 그리스어 신약성서를 편찬하였으며 그의 명저 "우신 예찬(In Praise of Folly)"은 교회의 무능력함을 신랄하게 비판하고 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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