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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옥한흠 목사님의 저서 로마서 강해 3권 <구원받은 자는 이렇게 산다> 315쪽에 있는 글입니다.
51. 위대한 평신도 동역자들
내가 겐그레아교회의 일꾼으로 있는 우리 자매 뵈뵈를 너희에게 너희에게 천거하노니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 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들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 나뿐 아니라 이방인의 모든 교회도 저희에게 감사하느니라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 나의 사랑하는 에베네도에게 문안하라 저는 아시아에서 그리스도께 처음 익은 열매니라 너희를 위하여 많이 수고한 마리아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이요 나와 함께 갇혔던 안드로니고와 유니아에게 문안하라 저희는 사도에게 유명히 여김을 받고 또한 나보다 먼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라 또 주 안에서 내 사랑하는 암블리아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동역자인 우르바노와 나의 사랑하는 스다구에게 문안하라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아벨레에게 문안하라 아리스도불로의 권속에게 문안하라 내 친척 헤로디온에게 문안하라 나깃수의 권속 중 주 안에 있는 자들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수고한 드루베나와 드루보사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하고 사랑하는 버시에게 문안하라 주 안에서 택하심을 입은 루포와 그 어머니에게 문안하라 그 어머니는 곧 내 어머니니라 아순그리도와 블레곤과 허메와 바드로바와 허마와 저희와 함께 있는 형제들에게 문안하라 빌롤로고와 율리아와 또 네레오와 그 자매와 올름바와 저희와 함께 있는 모든 성도에게 문안하라 너희가 거룩하게 입맞춤으로 서로 문안하라 그리스도의 모든 교회가 다 너희에게 문안하느니라.
로마서 16장 1-16절
우리는 로마서의 마지막 장을 펴 놓고 있습니다. 본문을 읽으면 바울의 인간미가 진하게 배어 있는 아름다운 내용이라는 사실을 금방 알 수 있습니다. 저자가 독자들에게 전하는 훈훈한 사랑의 대화가 있습니다. 가슴에 가득히 넘치는 감사가 있습니다. 사랑하는 동역자들을 향한 그의 그리움도 점점이 엿보입니다. 이 마지막 장 안에는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살고, 예수 그리스도를 위해 죽겠다고 하는 불타는 소명감을 가슴에 안고 한 생을 살았던 일단의 사람들이 모여 있습니다. 그들 모두는 세상 사람들이 전혀 이해할 수 없는 독특한 삶을 살다가 하늘나라로 갔습니다.
본문은 마치 그 위대한 인물들이 사도 바울을 가운데 세우고 빙 둘러서서 활짝 웃으며 찍어 놓은 앨범 사진을 보는 것 같은 느낌을 줍니다. 그들의 수가 자그마치 37명이나 됩니다. 그 중에는 여자가 7명 내지 8명이 포함되어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또 이름이 밝혀지지 아니한 사람이 여러 명 있습니다. 바울은 그들을 몹시 보고 싶어 했지만 모두가 로마에 살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 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안부를 전하고 있는 것입니다.
조금 뒤로 가서 21-23절의 내용을 보면 바울과 함께 고린도서에서 복음을 위해 충성하고 있었던 형제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바울은 그들을 대신하여 사랑의 안부를 전하고 있습니다. 얼마나 아름다운 그리스도인의 교제인지요!
'바울' 하면 얼른 떠오르는 첫인상이 매우 차갑게 느껴질 때가 있습니다. 그를 보면 완벽한 사람, 거룩한 사람, 근엄한 사람, 오직 예수만 아는 사람, 세상 일은 아무 것도 모르고 오직 외곬으로만 인생을 사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강하게 받습니다. 그러니까 접근하기가 대단히 어려운 사람이라는 고정관념을 가지기 쉽습니다.
그러나 사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본문을 읽어 보면 바울이 그런 사람이 아니었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습니다. 그는 사람을 좋아했습니다. 그는 누구를 만나든지 만나는 사람 모두를 자기의 친구로 만들어 함께 어울려 살기를 원했습니다. 물론 그에게는 적도 대단히 많았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반대하고 핍박했기 때문에 그의 적이 된 것이지 다른 동기로 적이 된 것은 아니었습니다. 바울은 소위 사람을 좋아하는 지도자였습니다. 그는 할 수만 있다면 되도록 많은 사람들을 친구로 삼아 복음의 동역자로 함께 뛰기를 원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사람을 좋아해야 합니다. 저도 이 부분에서 가끔 주님 앞에서 자신을 점검해 볼 때가 있습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대인관계에 있어서 사람을 피하면 안 됩니다. 주님이 우리를 가리켜 '양'이라는 별명을 붙이셨습니다. 양의 특성이 무엇입니까? 양은 혼자 살면 망합니다. 떼를 이루어 살아야 됩니다. 우리 모두는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람들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도 바울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주변에 많이 두고 훈훈한 인간미를 주고받으며 살아야 한다는 것을 새삼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 각자가 그와 같은 삶을 살고 있는지 한번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는 본문에서 사도 바울의 위대성을 또 하나 발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무엇입니까? 평범한 사람들을 발굴해서 복음을 위해 생명을 바쳐 일하는 탁월한 동역자로 만드는 것입니다. 바울의 영향력은 정말 대단했습니다. 바울의 주변 사람들은 그를 알게 되면서 생각과 행동이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그를 알고부터는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가만히 앉아 있을 수 없었습니다. 과거처럼 세상 돌아가는 대로 살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궂은 일, 좋은 일 가리지 않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 삶을 살기를 원했습니다. 그를 통해 예수 그리스도를 알게 된 사람들마다 사람이 달라지고 생활이 변했던 것입니다.
바울은 자기 혼자 일하고 자기가 아니면 안 된다는 독선을 가진 지도자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함께 일하기를 좋아했습니다. 함께 울고, 함께 웃으면서 주님의 나라를 건설하기 원했습니다. 주님의 일은 한 사람이 다 하는 것이 아닙니다. 바울은 그 사실을 잘 알고 있었습니다. 바울의 위대함을 요사이 말로 표현하면, 평신도의 잠재력을 극대화시켜서 하나님 나라를 위하여 최대치로 투자하도록 이끄는 데 탁월한 능력을 가진 지도자였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의 위대함이 여기에 있습니다.
바울은 가만히 앉아서 사람들이 찾아오기를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땀을 흘리며, 때로는 눈물을 흘리며 사람을 찾아다녔습니다. 그는 전도를 받아 예수 믿게 된 사람들을 위해 밤낮없이 하나님의 말씀을 가르쳤습니다. 그들을 그리스도 안에서 온전한 자로 세우는 데 혼신의 힘을 다 쏟았습니다. 예수의 제자를 만드는 데 온갖 정성을 다 기울였습니다. 본문에 등장하는 모든 평신도들의 이름은 바울이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서, 해산의 수고를 다해서 만들어 놓은 예수의 제자들이요 자신의 동역자들이었습니다.
이런 대가 지불을 통해서 얻은 아름다운 형제 자매들이었기 때문에 그는 그들을 놓고 조금도 어색하지 않게 이름을 부르면서 안부를 전합니다. 또한 재미있는 말들을 이름 앞에 하나씩 붙여 놓고 있습니다. 뭐라고 합니까? '나의 보호자', '나의 동역자', '처음 익은 열매', '나와 함께 갇힌 자', '내 사랑하는 자', '그리스도 안에서 인정함을 받은 자', '주 안에서 많이 수고한 자', '내 어머니', '나의 친척', '나와 온 교회 식주인' 등등의 별명들을 붙여 가면서 그들을 부르고 있습니다. 얼마나 멋있는 장면인지 모릅니다.
왜 이런 별명이 붙여졌는지 그 이유를 한번 생각해 봅시다. 여기에 등장하는 40여 명 가까운 이들은 저마다 진한 감동을 불러일으킬 만한 기막힌 간증거리들을 가지고 있었던 것으로 생각됩니다. 할 수만 있다면 이들 개개인으로부터 그들이 받은 은혜에 대해서 이야기를 듣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들의 이야기는 전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습니다. 단지 몇 사람의 경우만 우리가 조금 추리를 할 수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여기에는 아주 중요한 진리가 들어 있습니다. 평신도의 위대함은 사람들에게 널리 알려지지 않은 데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교역자는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그 이름이 많은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릴 수 있습니다. 위대한 선교사들의 이름은 역사적으로 길이 남을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을 돕는 평신도의 이름은 널리 알려지지 않은 채 세월의 모래 속에 묻혀버리는 일이 비일비재합니다. 평신도의 위대함과 영광은 사람들에게 알려지지 않은 익명성에 있습니다. 그들의 아름다움, 그들의 충성, 그들의 값진 인생에 대해서는 오직 예수님만이 알고 계십니다. 이것이 평신도의 위대함이요 영광입니다.
이런 점에서 저는 가끔 생각에 잠길 때가 있습니다. 세상에서 이름이 많이 알려진 사람은 하늘나라에 가서 상을 얻기가 매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세상에서 유명했던 사람이 천국에 가서도 유명할까요? 절대 그렇지 않다고 봅니다. 주님 앞에 갔을 때 진짜로 유명한 사람은 따로 있을 것입니다. 그들이 바로 여러분과 같은 평신도들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교회의 일꾼 뵈뵈
로마서 16장에 나오는 아름다운 이 형제 자매들, 바울이 만들어 놓은 예수님의 제자들을 몇 사람만 대표적으로 살펴봅시다. '교회의 일꾼', '나의 보호자' 라고 호칭했던 여자 한 사람이 나옵니다. 그의 이름은 '뵈뵈'입니다. 16장에 등장하는 여자의 수는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바울이 일부러 생략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남자의 이름이 아닌, 여자의 이름을 먼저 언급한 것이 특이합니다. 뵈뵈의 고향은 고린도 지방의 겐그리아라고 하는 항구였습니다. 뵈뵈는 바울이 고린도에서 1년 반 동안 선교할 때 그로부터 전도를 받았던 것 같습니다. 뵈뵈가 예수 믿게 되면서부터 그의 아름다운 생이 시작되었습니다. 그러나 구체적인 이야기는 성경에 언급되어 있지 않습니다. 우리는 뵈뵈에 대해서 정확하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한 가지 분명한 사실은 바울이 그를 교회의 일꾼이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일꾼이라는 말은 집사라는 말과 같은 용어입니다. 곧 여 집사라는 말입니다. 당시 교회 안에 집사라는 직책이 있었느냐 하는 문제에 대해서는 성경학자들 가운데 논란거리가 되고 있습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햇병아리나 다름없었습니다. 그러니 오늘의 교회와 같이 조직이 있었을 리가 없고, 따라서 집사라는 직분이 없었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할 것 같습니다. 여기에서 뵈뵈를 집사라고 부른 것은 어떤 공식적인 직책명이 아니라 뵈뵈가 교회 안에서 하는 역할이 너무나 중요하고 아름다우므로 교회의 일꾼이라고 부른 것이 일종의 별명처럼 되지 않았나 생각합니다.
지금과 마찬가지로 초대 교회에서도 여성의 위치는 참 중요했습니다. 아무리 공식적인 집사의 직분이 없었다 하더라도 그 당시 교회 안에는 여성들이 대부분이었을 것입니다. 동시에 여자가 해야 할 일이 매우 많았을 것입니다. 예를 들어 환자를 심방하는 일은 남자보다 여자가 더 잘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어려운 이웃을 구제하는 일도 남자보다는 여자가 더 적격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초대 교회에서 세례를 받을 때 침례를 행했다면 물 속에 사람이 들어가고 나오고, 옷을 입고 벗고 하는 그 모든 일들을 옆에서 도와 주는 사람도 여자였을 것입니다. 여자가 세례를 받는 경우에는 마땅히 여자가 도와야 했을 것입니다. 이런 여러 가지 사례를 놓고 볼 때 교회 안에서 여자가 맡은 역할이 대단히 크고 중요했음이 틀림없습니다.
특별히 우리의 주목을 끄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바울이 뵈뵈를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고 불렀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2절 끝에 나와 있습니다. 그러면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는 의미가 무엇일까요? 실제로 어떤 일에 뵈뵈가 바울의 보호자가 되었다는 의미일까요? 이 문제를 놓고 우리가 꼭 이것이다 하고 말하기는 어렵습니다. 그렇지만 그 말의 뉘앙스를 생각하면 뵈뵈가 경제적으로 바울을 후원하는 사람이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아니면 비서 일을 했는지도 모릅니다. 22절에 보면 더디오라는 비서가 나옵니다. 더디오는 바울 앞에서 그가 불러 주는 대로 로마서를 기록한 사람입니다. 일종의 받아쓰기를 한 것입니다. 22절을 보세요. 그가 바울의 편지를 받아쓰면서 자기 안부를 슬쩍 삽입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편지를 대서하는 나 더디오도 주 안에서 너희에게 문안하노라."
참 재미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뵈뵈 역시 더디오처럼 바울 곁에서 그의 손발 노릇을 했는지 모를 일입니다. 그러나 제가 볼 때는 경제적인 후원을 한 사람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그 당시의 교회는 매우 약했습니다. 선교사로서 바울의 형편이 얼마나 아려웠는지 우리는 잘 알고 있습니다. 이런 사정을 잘 아는 뵈뵈가 바울을 도와 주면서 예수를 갓 믿고 돌아온 가난한 교인들을 위해 숨은 봉사를 많이 하였을 것입니다. 이런 연유에서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라는 말을 쓰지 않았나 생각됩니다.
사실 선교사나 교역자에게는 일일이 공적으로 말하기 어려운 경제적인 애로가 참 많습니다. 제가 부교역자로 사역하던 20년 전만 해도 교회가 교역자의 사정을 잘 몰라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재정적으로 그렇게 어려운 교회가 아닌데도 박대를 했습니다. 그리고서는 은혜 없다고 야단이고, 옷이 누추하다고 야단이고 할 소리는 다 합니다. 저는 신학교를 다니면서 교회 일을 했는데 등록금을 마련하기가 매우 어려웠습니다. 그때 뵈뵈와 같이 남몰래 저를 도와 주는 형제들이 가끔 있었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에서는 뵈뵈가 상당히 큰 비중을 차지한 인물이었던 것은 틀림이 없습니다. 왜 그런가 하면 바울이 정성껏 기록한 로마서를 뵈뵈의 손에 들려서 로마에 있는 교인들에게 전달하도록 심부름시킨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로마서를 요즈음의 편지와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면 안 됩니다. 그 당시 형편에서는 로마서의 내용이면 그 양이 상당히 많았을 것입니다. 얼마나 정성껏 쓴 편지입니까? 이 귀중한 성경을 뵈뵈에게 들려서 전하라고 했을 때는 그만큼 신뢰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는 것을 말해 주는 것입니다. 그리고 바울이 그를 보내면서 로마 교인들에게 이렇게 추천을 하고 있습니다.
"너희가 주 안에서 성도들의 합당한 예절로 그를 영접하고 무엇이든지 그에게 소용되는 바를 도와줄지니 이는 그가 여러 사람과 나의 보호자가 되었음이니라"(2절).
뵈뵈가 귀중한 사람이니까 로마교회가 합당한 예절을 갖추어서 그를 영접하고 그에게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부 공급해 주기를 바란다고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뵈뵈는 정말 멋있는 사람이었습니다. 여러분도 평신도지만 뵈뵈처럼 주님이 가장 필요로 하는 일에 부름을 받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지도자가 누구에게라도 마음놓고 추천할 수 있는 평신도가 되기를 바랍니다. 교회 안에서 남몰래 봉사하고 후원자 노릇을 하는 숨은 손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이 모두가 주님이 원하시는 일입니다.
동역자 브리스가와 아굴라
바울의 동역자 가운데서 중요한 사람을 하나 더 살펴보겠습니다. 여기에 동역자라는 이름을 직접 붙인 부부가 나옵니다.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나의 동역자인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문안하라"(3절).
성경에 나오는 부부 가운데서 가장 이상적인 커플이 브리스가와 아굴라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멋있는 부부가 아닐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맺어 주신 천생연분의 부부입니다. 그런데 재미있게도 여자 이름이 먼저 나옵니다. 이 사실을 아굴라가 알았다면 기분이 좀 나빴을지 모릅니다. 그가 로마서를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는 모르지만 말입니다. 역시 신앙의 세계에서는 고금을 막론하고 여성이 앞서는 것 같습니다. 당시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로마에 있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로마 교회에 보내어 읽게 했으므로 이 부부가 자기들의 이름이 뒤바뀐 것을 모를 리가 없었다고 봅니다. 지금도 그렇습니다만 당시의 일반적인 통례는 남자 이름을 먼저 쓰게 되어 있었습니다. 부부인 경우에는 더 말할 나위가 없었습니다. 더욱이 여자의 이름은 아예 기록조차 하지 않는 예도 많았다고 합니다.
여성이 인격 대우를 제대로 받지 못하던 고대 사회에서 부부를 소개하면서 여자 이름을 앞세웠다는 것은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여기에 뭔가 있을 것 같지 않습니까? 이 사실을 놓고 어떤 학자들은 상상력을 동원해서 이렇게 해석합니다. 브리스가는 로마 귀족 태생이고 아굴라는 노예 출신이기 때문에 여자 이름이 앞에 나왔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이런 견해는 어디까지나 상상에 지나지 않습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예수를 믿은 것은 바울을 만나고 난 후의 일로 보입니다. 그 전에는 그들이 예수를 몰랐던 것 같습니다. 주후 52년에 글라우디오 황제는 반유대주의를 표방하여 유대인들을 로마 시에서 전부 쫓아내버렸습니다. 그때 쫓겨난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고린도를 찾아갔습니다. 그들은 고린도에서 천막 만드는 일을 했습니다. 그들이 전문적으로 하는 일은 텐트 제조업이었습니다. 텐트를 만드는 가게를 열어 놓고 사업을 했는데 이때 바울을 만났습니다.
바울을 통해서 복음을 들은 그들은 완전히 딴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리스도의 제자가 되었을 뿐 아니라 자신들의 삶에 획기적인 변화가 일어났습니다. 바울이 1년 반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고 교회를 개척할 때 그들은 바울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니며 정성껏 도왔습니다. 그리고 바울과 사업을 같이 했습니다. 사업을 같이 한다는 것이 좀 이상하게 들리지만 바울과 함께 천막 만드는 일을 하며 한 지붕 밑에서 한 식구처럼 살았다는 말입니다. 그러다가 바울이 장소를 옮겨서 에베소로 선교를 떠날 때 이 부부는 하던 장사를 전부 집어치우고 에베소로 따라갔습니다. 거기에 가서도 충성스러운 동역자가 되어 함께 일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 황제의 추방령이 해제되었을 때 이 부부는 로마로 돌아와서 자기들의 옛 집과 옛 직업을 되찾았습니다. 그들이 로마에서 평생을 보낸 것 같지는 않습니다. 디모데후서 4장 19절을 보면 그들이 다시 에베소로 돌아가서 거기에 거주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를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불렀습니다. 동역자라는 뜻이 무엇일까요? 이 부부는 디모데처럼 목회자가 아니었습니다. 21절에 보면 바울은 디모데를 '나의 동역자'라고 부르고 있습니다. 디모데는 목회자였고 바울의 후계자였습니다. 그러니까 당연히 동역자라는 말이 통합니다. 그러나 브리스가와 아굴라는 그런 위치에 있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순수한 평신도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바울은 그들을 가리켜 '나의 동역자'라고 했습니다. 동역자를 영어로 'fellow worker' 혹은 'helper'라고 합니다. 돕는 사람, 측근에서 손을 서로 맞잡은 사람을 동역자라고 자신 있게 부른 이면에는 그럴 만한 충분한 근거가 있습니다. 지금부터 몇 가지 말씀드리겠습니다.
첫째로 그들은 복음 전하는 일을 최우선에 두고 살았습니다. 그들은 바울과 함께 고린도에서 장사를 하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바울이 에베소로 자리를 옮기자 같이 짐을 싸고 따라갔습니다. 그리고 이 부부가 바울보다 먼저 로마로 이사를 간 것은 바울이 그곳에 올 것을 대비한 것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아무튼 이 부부의 삶을 보면 마치 집시 생활을 보는 듯 합니다. 그들은 주의 복음을 위해 떠돌이 생활을 했습니다.
복음을 위해 거주지를 자주 옮겼고 자기의 가정을 개방하여 바울의 안식처가 되게 했습니다. 복음이 그들에게는 최우선이었습니다. 그들에게 직업이라는 것은 복음을 전하기 위한 수단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주님은 오늘도 이런 사람을 찾고 계십니다.
이사에 대해서 잠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여러분은 이사를 해야겠다고 할 때 어떤 생각을 가지고 그 일을 합니까? 올바른 신앙생활을 우위에 두고 이사 갈 곳을 준비합니까? 아니면 단지 살기 좋은 주거지만을 찾아서 옮기는 사람입니까? 물론 살기 좋은 주거지를 찾아서 옮기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분명히 알아야 할 것이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복음을 위한 동역자가 되기를 원합니까? 주님 앞에 섰을 때 칭찬받기를 원합니까? 그렇다면 이사하는 것까지도 복음의 동역자가 되는 문제와 연계시켜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교회를 중심으로 신앙생활에 지장이 없겠는지를 먼저 생각하면서 결정해야 할 것입니다. 미국을 보면 흑인들이 살고 있는 다운타운에서 백인들이 자꾸 떠납니다. 좀더 안락하고 살기 좋은 분위기를 찾아 떠나는 것입니다. 그러나 끝까지 흑인들의 거주지를 안 떠나는 목사와 평신도들이 있습니다. 왜 그렇습니까? 흑인들을 위해서 복음의 봉사자가 되기를 원하기 때문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에게 또 하나 놀라운 사실이 있습니다. 그들의 집이 언제나 교회로 사용되었다는 것입니다.
"또 저의 교회에게도 문안하라"(5절).
이것은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한 것을 이야기합니다. 성경을 보면 브리스가는 고린도에서도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했고, 에베소에 가서도, 로마에 가서도 그렇게 했습니다. 그 당시에 무슨 교회 건물이 있었겠습니까? 가정집에서 모일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하는 데는 남자보다도 여자의 역할이 훨씬 컸다고 생각합니다.
왜 그런가 하면 집이라는 것은 부인에게 있어서는 안식처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집은 부인에게 있어서 자기의 프라이버시가 보장되는 곳이요, 자기의 소박한 꿈을 키워 볼 수 있는 곳입니다. 자기의 집을 완전히 개방해서 밤낮없이 사람들이 출입하고, 드나드는 사람들을 일일이 대접하는 일은 부인의 동의가 없는 한 도저히 불가능한 일입니다. 남자 혼자서는 죽었다 깨어나도 못하는 일입니다. 이렇게 어려운 일을 이 부부는 가는 곳곳마다 했던 것입니다. 한 주나 한 달 정도 집을 개방하는 것은 마음만 먹으면 할 수 있을지 모릅니다. 그러나 평생토록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한다는 것은 상상할 수 없을 만큼 어려운 일입니다. 어떤 면에서는 바울이 하는 일보다 더 어려운 일이라고 할 수도 있습니다. 그만큼 이 부부는 복음을 위해 헌신적인 삶을 살았던 것입니다.
23절을 보면 가이오도 비슷한 일에 헌신하였던 것 같습니다. "나와 온 교회 식주인 가이오"라고 바울이 소개하는 것을 보아 알 수 있습니다. 식주인(食主人)이 무엇일까요? 이것은 아마도 그 교회의 신자들을 먹여 살리다시피 하는 재정 담당자를 의미하는 것이 아닌가 합니다. 어쨌든 이런 일은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특별한 은혜가 아니면 못합니다.
사랑의교회는 청소년 선교 사역의 일환으로 구로공단에서 선교 활동을 펼치고 있습니다. 거기에 구명서 목사님이 가서 수고를 하고 있는데 조그마한 빌딩 한 층을 선교센터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는 교역자 사택이 있고 그 옆으로는 공단에서 일하는 청소년들이 훈련도 받고 예배도 드리고 상담도 하는 공간이 있습니다. 집이 곧 센터요, 센터가 곧 집인 셈입니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습니까?
한번은 사모들이 모여서 같이 은혜를 나누는 시간에 구 목사님 부인이 여자로서 말못할 여러 가지 어려운 사정을 털어놓더랍니다. 그래서 제 아내가 듣고 와 저에게 전해 준 일이 있었는데 들으나마나 공감할 수 있는 이야기입니다.
밤에 부부가 둘이서 오순도순 있고 싶은데 예고도 없이 공단 아가씨가 들이닥치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식구들이 모처럼 오붓하게 식사를 하고 싶은데 갑자기 남자애들이 찾아와서 만들어 놓은 음식을 다 먹어치우는 경우를 생각해 보세요. 그것도 한두 달이면 몰라도 1년 사시사철 그런 식으로 살아야 한다면 주부의 속이 타지 않는 날이 별로 없을 것입니다. 주님을 위해서 희생하겠다는 뜨거운 열정과 소명감이 없으면 도저히 자기 집을 교회로 개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처럼 주님을 사랑하는 뜨거운 마음이 없다면 도저히 불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세 번째로 이 부부에게서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 있습니다.
"저희는 내 목숨을 위하여 자기의 목이라도 내어 놓았나니"(4절).
번역을 그렇게 해서 그런지 모르지만 성경에 기록된 이야기 중에서 이 말처럼 재미있는 말이 없을 것 같습니다. 목을 내어 놓았다는 말이 무슨 뜻입니까? 바울을 위해서라면 생명도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바울을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하는 것이요, 복음을 위하는 것이 곧 주님을 위한 일이라는 확고부동한 믿음을 가진 부부였기에 바울을 위해서 자기의 생명까지 아끼지 않았다는 말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인물들입니다. 목이라도 대신 내어 놓고 싶을 정도로 존경하고 사랑할 만한 사람을 가지고 있었다는 점에서 얼마나 행복한 자들입니까?
지금까지 우리가 살펴본 몇 가지 사실을 보아도 그들을 두고 바울이 '나의 동역자'라고 부른 것은 조금도 지나친 말이 아니라는 것을 알 수 있습니다. 이제 저는 여러분에게 질문을 던지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어떤 평신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어느 신학자는 "성경은 영감된 사례집이다"라고 말했습니다. 그 의미가 무엇입니까? 성경에는 우리가 배우고 본받아야 할 아름다운 삶의 이야기들이 다양하게 기록되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을 배운 사람은 배운 대로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뵈뵈와 같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써 놓은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저 한번 지나가면서 읽어 보고 끝내라는 말이 아닙니다. 그 속에는 "너도 그런 사람이 되라"고 하는 무언의 명령이 내포되어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보여 주시는 모델, 거울이라는 의미에서 성경을 영감된 사례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브리스가와 아굴라 부부는 우리 삶의 모델이요 거울입니다.
평신도의 열등 의식을 극복하라
현대 교회 안에는 비뚤어진 교역자의 우월 의식이 자리를 잡고 있습니다. 동시에 비뚤어진 평신도의 열등 의식이 만연하고 있습니다. 교역자는 자기 혼자 일을 다하는 것처럼 큰소리칩니다. 교인들은 평신도로서 이 정도면 족하다고 하는 안일주의에 빠져 있습니다. 평신도를 일꾼으로 만들어서 복음을 위해 동역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도 바울의 철학이 결여되면 교역자는 자기 혼자만 일을 다하는 것처럼 우월 의식을 가지게 됩니다. 동시에 평신도들은 교역자 밑에서 명령하는 대로 움직여만 주면 된다고 하는 일종의 열등 의식에 빠져버립니다.
이것은 오늘날 한국 교회가 안고 있는 심각한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런 열등 의식을 참지 못해서 어떤 평신도는 세상 직업을 집어던지고 신학교로 달려가는 것을 봅니다. 그러나 너도 나도 다 신학교만 가면 주의 일이 제대로 되겠습니까?
뵈뵈, 더디오, 브리스가와 아굴라, 가이오, 에라스도와 같은 위대한 바울의 동역자들이 우리에게 주는 교훈은 무엇입니까? 가정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복음을 위해서 동역자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생업을 가지고도 주님을 위해서 동역자로 쓰임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나약한 여자이지만 주님을 위해서 생명을 바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고린도 시의 재정을 맡은 공무원과 같은 신분으로서도 복음을 증거하는 데 일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교회 지도자는 특별한 소명을 받은 사람입니다. 우리 모두가 다 그와 같은 소명을 받지는 않았습니다. 그러나 복음을 전하는 일에는 특별히 소명을 받은 자만 쓰임받는 것이 아닙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일할 수 있는 수많은 평신도들이 함께 동역자로 쓰임받을 때 하나님의 나라가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신분이 교역자냐, 선교사냐, 평신도냐 하는 것이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주님이 당신에게 맡겨 주신 일이 비서 일입니다. 심부름하는 일입니까? 지도자를 숨어서 돕는 일입니까? 우리는 무엇에서든지 쓰임받을 수 있는 복음의 일꾼임을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하는 일이 보기에 하찮은 것일지라도 주를 위해 일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것을 꼭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한국 교회의 장래가 어디에 있습니까? 교회마다 지도자의 손에서 만들어져야 할 뵈뵈, 브리스가와 아굴라가 얼마나 되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엄청난 인력을 보유하고 있는 한국 교회가 다음 세대에 제 구실을 감당하기 위해서는 사람이 열쇠라고 하는 의식 변화, 목회 전략의 변화가 꼭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없으면 다음 세대를 한국 교회가 감당할 수 없을 것입니다. 이런 뚜렷한 자각이 없다면 다음 세대뿐만 아니라 오늘날 이 세대조차 감당하기 어려울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미국에서 한참 각광을 받고 있는 10개의 대형 교회 지도자들이 있습니다. 그들이 각자의 교회에 대해 이야기해 놓은 책을 본 적이 있습니다. 10대 교회 지도자들이 공통적으로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아십니까? "교회를 제대로 성장시키고 이 땅에 주의 복음이 편만하게 하려면 교역자가 사역을 평신도와 나누는 팀 리더십을 개발해야 한다." 이것이 그들의 공통된 견해입니다. 목사가 교인들에게 무엇을 해 주는 것이 아니라, 교인들과 함께 무엇을 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목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목사의 설교를 듣기 위해서 모이느냐에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공적인 목회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복음을 전하고 사람을 돌아보는 사역에 동참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그들은 말합니다. 옳은 말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중시하는 목회입니다. 이것이 사람을 중시하는 리더십입니다. 바울이 이것을 우리에게 모범으로 보여 주었습니다.
일본은 40년 만에 세계 일등국이 되었습니다. 경제 평론가인 구영한 씨가 그 이유를 분석해 <인재론>이라는 책을 출간했는데 요즈음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고 있다고 합니다. 그 책이 말하고자 하는 중심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시아 사람들이 일본으로부터 배워야 할 것은 생산기술이나 일본식 경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것보다도 일본 기업들이 인적 자원을 어떻게 개발하고 있는가를 배우는 것이 더 중요하다고 했습니다. 일본이 오늘날처럼 발전하게 된 근본 동기는 사람에게 있는 것이지 제품에 있는 것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충성심이 없는 자는 전력이 되지 않는다"는 것이 그의 이론입니다. 제품 하나를 만들기 위해서는 그 일에 충성할 수 있는 사람을 만들어 놓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아무리 사람 수가 많아도 쓸데없는 하나의 군중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미국의 클린턴 대통령은 정부 정책의 바탕을 교육과 훈련을 통한 철저한 인력 관리에 두겠다고 공언했습니다. 이것은 오늘날 미국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급선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돈이나 생산품이 아닙니다. 사람이 중요합니다. 세상 나라의 흥망도 어떤 사람을 만드느냐, 어떤 인재를 길러내느냐에 달려 있습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그 원리는 동일합니다. 이사야의 예언을 들어 보십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이사야를 통해서 분명히 말했습니니다.
"그 작은 자가 천을 이루겠고 그 약한 자가 강국을 이룰 것이라 때가 되면 나 여호와가 속히 이루리라"(사 60:22).
하나님 나라의 사람들은 한 사람이 천을 당하고, 만을 당하고, 아무리 작은 자라도 강국을 이루고 아무리 약한 자라도 천을 이루는 생산적인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야 하나님의 나라가 흥왕할 것입니다.
클린턴이 교육과 기술 훈련을 통해 흐릿한 국민 의식을 혁신시키려고 제 아무리 노력을 한다 해도 얼마 후에는 국민들에게 실망을 안겨줄 것입니다. 대통령의 연설을 듣고 처음에는 환호했던 군중들이 머지않아 실망하게 될 것입니다. 왜냐하면 세상 지도자에게는 한계가 있기 때문입니다. 세상 나라는 항상 불안합니다. 세상 나라의 지도자는 항상 불만스럽습니다. 요즘 100가지 공약, 77가지 공약, 50가지 공약 등을 늘어놓는데 여러분은 그 말의 10분의 1만 믿으시기 바랍니다. 세상 나라는 완전하지 못합니다. 세상 나라의 지도자는 결국 실망을 안겨 주게 되어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왕은 누구입니까? 예수 그리스도, 그분이 우리의 왕이십니다. 우리의 나라는 어디에 있습니까? 하나님의 나라, 곧 우리의 나라입니다. 그 나라의 왕이신 주님은 절대로 우리를 실망시키지 않으십니다. 예수 그리스도는 우리가 영원히 의지하고 신뢰하고 믿어도 좋을 우리의 지도자이십니다. 예수님이 다스리시는 나라는 불만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분배의 불균형이 있을 수 없습니다. 재앙이 있을 수 없습니다. 불의가 있을 수 없습니다. 그 나라는 영원한 나라입니다. 의의 나라입니다. 영광스러운 나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소망은 그 나라가 임하는 데 있습니다. 세상 나라 사람들은 주님을 왕으로 모시기 싫어합니다. 끝까지 싫어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분이 왕이 되어야만 영원토록 평안히 살 수 있다는 것을 믿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어느 나라에 충성을 해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우리의 생명을 바쳐야 합니까? 누구를 위해서 우리의 생을 헌신해야 합니까? 브리스가와 아굴라처럼, 뵈뵈처럼, 디모데처럼, 더디오처럼 복음을 위해서 충성할 때 그분을 왕으로 모시는 일이 될 수 있고, 주님의 나라가 이 땅에 임하게 되는 데 벽돌 한 장의 구실이라도 할 수 있다는 것을 우리가 알아야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자매 여러분, 당신은 어떤 평신도가 되기를 원하십니까? 일어나십시오. 우리 모두 일어나서 주님의 영광을 위해서 쓰임받는 그릇이 되기를 사모하고 매달려 봅시다. 한 번밖에 없는 우리의 생을 헛되이 보내지 맙시다. 우리 모두 이런 뜨거운 열정을 가지고 주님의 복음을 위해 충성해야 하겠습니다. 영광스러운 그 나라를 위해 복음을 듣고 힘차게 뛰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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