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께서 남겨두신 씨 (로마서 9: 19- 29)
지난 주 수요일에 있었던 제1차 총력전도의 날에는 역곡 북부에 있는 동부센트레빌과 남부에 있는 주공 2, 3 단지를 대상으로 전도를 하였습니다. 기도하는 가운데 광고를 드리고 몇 분이나 나오실까 궁금했는데 무려 120명이 넘는 많은 분들이 참여하셨습니다. 나사렛성전을 가득 메우고도 남아서 출입구까지 찰 정도로 많은 분들이 함게 하신것을 보고 웨슬리전도대원들이 얼마나 힘을 얻었는지 모릅니다. 먼저 전도의 날 행사에 참여하신 분들에게 감사를 드립니다.
이번 주 수요일에는 제2차 총력전도의 날로 지키길 원함니다. 우리 교역자들은 물론이고, 12분의 장로님들과 5분의 교구장님, 5분의 남선교회장님, 7분의 청장년회장님, 그리고 25분의 여선교회 회장님들이 함께 할때에 웨슬리전도대는 큰 힘을 발휘할 줄로 믿습니다.
지난 주에는 우리가 누구를 만나러 갔었지요? 그렇습니다. 루디아 만나러 갔었습니다. 바울 사도가 성령에 강권하심으로 소아시아의 갈라디아와 부르기아 등 터어키 북동부지역을 전도하려던 계획을 포기하고, 마게도니아로 건너가 첫 성인 빌립보에 갔을 때 거기는 회당도 없었고 기도처도 없었습니다. 전도를 할만한 여건이 되어 있지 않았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 일행은 강가로 가서 여성들에게 전도하다가 루디아를 만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어떤 사역을 하려고 할 때, 할 만한 여건이 되지 않는다고 돌아서는 사람은 어리석은 사람입니다. 성경은 말합니다.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말씀을 전파하라..." 사실 여성들이 모여있는 자리는 일반적으로 전도하기가 쉽지 않는 환경입니다. 차분하게 복음을 전하기가 쉽지 않다는 의미입니다. 가장 좋은 것은 일대일로 만나는 일인데 주변에 많은 사람들이 있으니까 분위기에 휩싸이기 십상입니다.
그런데도 바울사도 일행은 어려움을 무릅쓰고 강가에 모인 여자들에게 복음을 전했는데 놀랍게도 하나님께서는 루디아라는 여성의 마음 속에 바울의 말을 청종하도록 역사하신 줄로 믿습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예비하심이요, 여호와 이레인줄로 믿습니다. 그녀는 즉시 자기집으로 일행을 초대하여 온 가족이 함께 말씀을 듣게 되었고 온 가족이 함께 세례를 받는 복을 누릴 수 있었습니다.
뿐만아니라 그녀는 자신을 예수 믿는 사람으로 여기거든 우리집에 계속 유하면서 빌립보 전도사역을 하라는 제안을 했습니다. 쉽게 이야기해서 "제가 여기 방 한 칸을 내어 놓겠습니다. 여기에 머무시면서 전도하세요..."라는 것이지요. 결국 그녀의 가정에서 빌립보교회가 탄생을 했습니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셨던 빌립보의 루디아, 이것은 복음전도의 사역에 순종한 결과였습니다. 자신의 생각을 접고 주의 뜻에 순종한 결과이며, 환경적 불리함을 핑게삼지 않고 열심을 가지고 헌신한 사람들에게 주시는 축복이었습니다.
이번 주 우리는 다시금 전도의 현장으로 나가길 원합니다. 고린도에서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장막을 기우며 수고했던 바울 사도에게 하나님께서는 브리스길라와 아굴라부부를 만나게 하신 줄로 믿습니다. 원래 이들은 로마에서 살았지만 로마황제가 유대인들을 추방하라는 명령에 따라 집과 재산을 모두 잃고 쫓겨 나온 불쌍한 유대인 가정이었습니다. 국경을 넘어 넘어 도착한 곳이 고린도였는데, 그곳에서 바울 사도를 만나게 된 것입니다.
초창기 복음을 전하는 이들은 대부분 자비량으로 일하였습니다. 왜냐하면 선교를 도울만한 인식이나 후원자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그는 선교를 위해 텐트 만드는 일을 통해서 수익을 선교비에 사용을 하고 있었습니다. 후에 크리스티 월슨이 '텐트메이커'라는 글을 써 이 말이 자비량선교사의 대명사가 되었습니다. 저는 성도 여러분들에게 권하고 싶어요. 여러분들이 사회생활 하면서 직업이 같은 사람들에게 복음을 전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벙어리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입니다.
어느 성도님은 가구점 사장님인데 그 분은 늘 전도했다하면 가구점 사장님들만 전도하여 지역의 가구점 사장님만 5- 6명을 등록을 하였고, 구두를 닦는 청년은 동료들을 주로 전도해서 매주 등록하는 젊은이들의 직업을 물어보면 뒷통수만 긁어요. 나중에 알고보면 구두 닦는 청년입니다. 무슨 이야기입니까? 자기와 업이 같은 사람들에게 다가가 좋은 열매를 거둔 간증들입니다. 여러분들은 지금까지 어떻게 사셨습니까? 업이 같은 사람들을 만나시면서 그저 장사만 하셨습니까? 돈만 버셨습니까? 이제부터라도 진정으로 그리스도의 증인으로서의 삶, 즉 증거의 삶을 사시기를 축원합니다.
우리가 오늘 본문 말씀을 통해서 깨닫는 것이 바로 이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바울 사도를 이방인을 위한 증인으로 세우셨습니다. 내가 너를 이방인을 위한 빛으로 사용하겠다고 하셨지만 바울은 가는 곳곳마다 가장 먼저 간 곳이 유대인들의 회당이었습니다. 그는 고백합니다.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둘째는 헬라인에게로다..." 이방인을 위하여 부름을 받았지만 자신의 동족인 유대인을 향한 관심과 사랑은 중단되지 않았습니다. 대부분의 유대인들로부터 배척을 당하고 핍박을 당할 뿐 아니라 심지어는 매를 맞아 죽었다고 성밖에 버리움을 당하기도 했습니다.
바울 사도는 고백합니다. "내 마음에 근심이 있는 것과 내 마음에 그치지 않는 고통이 있는 것을 내가 증거하노라" 그렇습니다. 그들에게는 양자됨과 언약됨과 율법을 세우신 것과 예배와 약속들의 축복들을 있었지만 그들은 그 은혜를 저 버리고 하나님의 영광에서 멀어져 있기 때문에 내 골육 친척을 구원하고자 하는 내 마음에 근심과 고통이 있다는 것입니다.
성도 여러분, 여러분들의 가정에 아직까지 믿지 않는 사람이 있을 때 그 사람을 기억하며 중보기도하면서 우리의 눈물이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내 친척 중에, 내 가까운 친구 중에 주님을 알지 못하는 그러한 사람들을 생각하면서 고통을 느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제가 그러한 근심을 거룩한 근심이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적어도 우리가 주님의 자녀들이라면 모두 거룩한 근심을 가지고 있어야 할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모두가 기도카드를 가지고 있는 것 아닙니까? 주님, 우리 어머니가 주님께로 인도되기를 원합니다. 우리 아버지를 주께로 인도하기를 원합니다. 우리가 중보기도하는 친정아버지, 친정어머니, 우리 누님, 우리 오빠, 우리 동생, 우리 아들과 딸들의 이름이 벌써 2,600명이 넘지 않습니까? 이 기도가 우리에게서 끊어져서는 안 될 줄로 믿습니다.
20절을 보겠습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우리가 무슨 이야기를 하다가 잘 이야기가 안 통하면 그러지요. 이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해? 바울사도가 요 앞엑까지는 논리적으로 차근차근 설명을 하다가 이 대목에 와서는 호통을 칩니다. 이 사람아 네가 뉘기에 감히 하나님을 힐문하느뇨.
그러면서 토기장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토기장이가 진흙을 잘 빚어서 아구가 넓은 그릇을 만들거나 아구가 좁은 그릇을 만들수도 있습니다. 아주 귀하게 쓰임받을 만한 도자기를 만들수도 있고, 일반식당에서 함부로 쓸 수 있는 그런 종기그릇도 만들 수 있습니다. 그러나 만들어진 그릇들이 토기장이에게 왜 이렇게 나를 만들었냐라고 항의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그것은 토기장이의 권한이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다시한번 전도의 근본적인 의미를 알아야 하겠습니다. 전도는 하나님의 소원입니다. 하나님의 소원을 이루어 드리는 거예요. 성도 수가 한 명이던 백명이던, 아니 천명이 되어도 전도는 그칠 수 없는 교회의 본질이요 성도의 사명인줄로 믿습니다. 이 시대를 위하여 주께서 남기신 자를 찾아야 합니다. 이사야서에 보면 남은 자의 사상이 등장합니다. 그렇습니다. 오늘 이 시대에도 남은 자가 필요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끝까지 승리할 믿음의 순결한 백성들이 필요합니다.
열왕기상 19장에 보면, 엘리야가 아합과 이세벨의 협박으로 호렙산까지 도망을 갔습니다. 숨을 헐떡거리면서 이제는 여호와여 이제 나만 혼자 남았다며 하나님 앞에 부르짖습니다. 이제는 감당할 수 없놀며 힘들어하는 그에게 하나님께서 여러 상황을 보여주십니다. 먼저 큰 폭풍우를 보여주십니다. 폭풍 속에서 역사하시는 줄 알았는데 아무런 소식이 없습니다.
지진이 일어납니다. 그러나 지진 가운데서도 소식이 없었습니다. 그리고 난뒤 적막이 흐르는 가운데 세미한 주님의 음성이 들립니다. "엘리야야 네가 왜 여기에 있느냐?" 네가 사명의 사람이라면 지금 이 자리에 있으면 안되는데 왜 여기에 있느냐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우리 사명의 사람들은 있어야 할 자리에 있어야 할 줄로 믿습니다. 여러분이 찬양대라면 주일 아침 찬양대 자리는 목숨을 걸고 지켜야 합니다. 그 시간에 해수욕장에서 기타치고 놀고 있다면 안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에게 말씀하셨습니다."일어나라 그리고 사명의 자리로 가라" 이 땅에 아직도 아합과 이세벨에 도전에 굴하지 않고, 우상에게 절하지 아니한 순결한 백성이 7000명이나 남아있다" 그렇습니다. 우리 주위를 살펴보면 멋있는 성도들이 곳곳에 산재해 있습니다. 결혼식을 토오일하고서 주일 아침 예배드리고 교사면 교회학교 봉사하고, 찬양대면 찬양사역을 한 뒤 신혼여행을 떠나는 멋진 젊은이들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이 모든 것이 주님의 긍휼 때문입니다. 우리의 행위의 옳음보다는 주님의 긍휼과 자비하심 때문에 오늘 우리가 여기에 남은 자가 되고 남은 씨가 되어서 오늘 주님께서 맡겨두신 귀한 사명을 감당하게 된 줄로 믿습니다. 이 사명 끝까지 붙잡아 주님 부르시는 그 날까지 주의 순결한 백성으로서의 삶을 살아가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하나님의 사랑과 은혜를 다시한 번 알게 하시니 감사합니다. 우리에게 허락하시는 놀라운 하나님의 은혜가 말씀을 통해서 깨달아지게 하시고, 우리의 심령 속에 가슴 깊이 뼛 속 깊이 새겨지게 하옵소서. 남은 자의 은혜를 남은자의 감격을 누리게 하시고, 땅끝까지 주의 증인되어 주의 뜻으로 살아가게 하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황요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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