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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의 능력을 본 후에 (눅 5:1-11)

by 【고동엽】 2022. 8. 28.

주님의 능력을 본 후에   (눅 5:1-11)

산에서 수천 마리씩 무리를 지어 생활하는<스프링 팍 영양(羚羊)>이라는 산양이 있습니다. 이 양들이 가끔씩 이유 없이 집단으로 달리다가 모두 다 절벽에 떨어져 죽는다고 합니다. 동물학자들은 이 양들의 이런 현상을 두고 집단으로 자살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세상에서 자살할 수 있는 동물은 유일하게 사람밖에 없다고 합니다. 그런데 스프링 팍 영양이 혼자서도 아니고 집단으로 자살한다는 것은 이해가 안 되는 일입니다. 어느 학자가 결국 스프링 팍 영양이 집단으로 몰사하는 이유를 밝혀냈습니다. 수천 마리가 무리지어 가다가 풀밭을 만나 풀을 뜯어먹을 때 문제가 발생합니다. 앞에 있는 양들이 풀을 뜯어먹고 짓밟으며 가기 때문에 뒤에 있는 양들은 도무지 풀을 먹을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뒤쪽에 있는 양들이 깨끗한 풀을 먹기 위해 서로 앞으로 나가려고 한답니다. 그런데 양들이 너무 많기 때문에 뒤엉켜서 자꾸 뒤에서 민답니다. 앞에 있는 양은 뒤에 있는 양이 미니까 걸음이 빨라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나중에는 뛰게 됩니다. 앞에 있는 양이 뛸 때 뒤에 있는 양은 천천히 풀을 뜯어먹으면 될 텐데 양의 본능에는 집단에서 이탈하지 않으려고 하는 성질이 있습니다. 그래서 뒤에 있는 양은 풀도 못 먹고 앞에 가는 양을 따라 같이 뜁니다. 무리에서 떨어지지 않으려는 본능 때문에 결국 모든 양이 초원을 달립니다. 그런데 문제는 그 양들이 자기들이 뛰는 이유를 모른다는 것입니다. 그저 앞에서 뛰니까 뒤에서 뛰고 뒤에서 미니까 앞에서 뛸 뿐입니다. 생각 없이 달리기 때문에 어디로 뛰는 지도 모릅니다. 멈출 생각도 안 합니다. 그냥 열심히 달립니다. 벼랑에 다다라서도 멈출 수가 없습니다. 뒤에서는 벼랑인지 모르고 계속 달리기 때문에 앞의 양들은 떠밀려서 벼랑으로 떨어집니다. 뒤에 오던 양도 속도를 줄이지 못해 수천 마리가 다 몰사한다는 것입니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참 열심히 삽니다.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밤늦게까지 일합니다. 그런데 정작 무엇을 위해 그렇게 숨차게 뛰는지를 모르고 무작정 뜁니다. 한참을 뛰면서도 때로는 왜 그렇게 죽어라 하고 사는지를 모릅니다. 십중팔구는“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대답입니다. 특별한 목표가 있어서 열심히 뛰는 사람들도 물론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대개의 사람들은<스프링 팍 영양>과 똑같습니다. 집단에서 이탈되는 것이 두려워서 공부합니다. 남들은 다 대학 가는데 나만 못 가면 소외되니까, 뒤쳐지기 싫으니까 그저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무슨 자기만의 목표가 아니라 남이 하는 대로 하는 것이 목표입니다. 남들이 자가용 사고, 좋은 집에 사니까 나도 당연히 그러지 못하면 뒤쳐지는 것이 아닌가 하여 어느새 그것이 목표가 되어버립니다. 그런데 여러분, 왜 사는지, 무엇을 위해서 사는지 모르고 열심히 살면 그만큼 빨리 지칩니다. 성실히 열심히 뛰면서 사는 것은 아름다운 일입니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은 생의 목표가 뚜렷할 때에만 가치를 발휘합니다. 목표 없이 뛰는 것은 그저 죽음을 향해 뛰는 것 일 뿐입니다. 그러기에 인간은 결코 허무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합니다. 문제는 삶의 목적입니다. 사단이 우리를 시험할 때 사용하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은 삶의 목표를 잃게 만드는 것입니다. 왜 사는지를 스스로 생각하지 않고<부화뇌동(附和雷同)>하게 만드는 것이 사단의 전략입니다. 현대인들은 직장에 가도 기쁨이 없습니다. 학교에 가도 기쁨이 없고 집에 와도 신나는 일이 없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그저 그렇고 무슨 음악회나 운동시합 등 어떤 모임에 참가해도 즐거움은 순간입니다. 무엇을 하든지 답답하고 허탈하고 무료합니다. 왜 이처럼 허무하고 즐거움이 없을까요? 그것은 많은 수고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별 성과가 없다는 것을 경험하게 될 때가 많기 때문입니다. 남들처럼 되기는 돼야 하는데 마음대로 되지는 않고 그나마 목표 없이 무작정 달려가는 일이 자꾸만 실패합니다. 이것이 인생을 허탈하게 만드는 것입니다. 노력만큼 얻어지는 성과가 없을 때 사람들은 지치고 절망하고 허탈에 빠집니다. 이게 현대인의 모습입니다.


오늘 본문을 보면 이런 허탈감에 젖어있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다. 지금 까지 뚜렷한 삶의 목표는 없었지만 자기들을 먹여 살려 준 바다에 그물을 던지고 지금까지 먹고살게 해주었던 물고기를 잡아 올리려고 했지만 던질 때마다 이상 하리 만치 단 한 마리도 건져 올리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이러기를 수십 번 아니 수 백 번했는지도 모릅니다. 어느덧 날이 밝았고 그들의 밤 샌 수고가 헛수고로 돌아갔음을 알고 실망합니다. 할 일이라고는 또 언제 물고기가 잡힐지 기약 없는 빈 그물을 정리하는 일뿐입니다. 오늘을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이 이와 똑 같습니다. 매일 매일 빈 그물을 정리하는 삶입니다. 공들여 쌓아올린 사업이며 평생을 헌신하고 일했던 직장이 와르르 무너졌습니다. 믿었던 자녀들이 탈선하고 대학을 나와도 취직도 잘 안됩니다. 이제 자포자기하고 맙니다. 기대했던 것들이 일시에 무너지고 오랜 수고가 그만 헛수고가 되었을 때 사람들은 삶의 의욕을 상실하고 허무함을 느낍니다. 성공의 기약이 없는 빈 그물만 하염없이 매만질 뿐입니다. 이대로 가다가는 일어설 용기도, 살아갈 의지도 없습니다. 그냥 끝인 것 같습니다. 그러나 여러분, 그 옛날에도, 지금도 인간의 삶의 허무한 현장에, 우리의 수고가 헛수고로 그치는 현장에, 어김없이 찾아오시는 분이 계십니다. 빈 그물 같은 인생, 실패한 인생에게 우리 주님이 찾아오고 계시다는 사실을 여러분 기억하십니까? 주님이 지금 우리의 배를 타고자 말씀하십니다. 그 실패의 배를 함께 타고 다시 나가서“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십니다. 왜입니까? 주님이 뱃놀이하자는 것입니까? 아니면 그물 던지는 법을 가르치시려고 하는 것입니까? 아닙니다. 왜입니까? 우리의 헛수고를 채워주시기 위해서입니다. 채워도 보통으로 채우시는 분이 아닙니다. 오늘 본문을 보세요.“그물이 찢어지고 두 배에 나누어 실어도 배가 가라앉을 지경이었다.”(눅5:6,7)고 말하고 있습니다. 자 이제 고기로 가득 찬 뱃머리를 포구로 돌리면서 집에 돌아가 가족들에게 자랑할 생각을 하며 이들이 얼마나 뿌듯했을지 상상이 가십니까? 배가 육지로 들어오는 그 짧은 시간에 여러 가지 생각을 하던 중에 이제 그 생각에서 돌이켜 순간 함께 배를 타고“깊은 데로 그물을 던지라”고 말씀하신 분이 누구인지를 생각하게 되었습니다.“황금어장을 알고 계시는 이분은 누구일까? 정말 보통 분이 아니구나. 우리의 헛수고를 단숨에 돌려놓으신 분, 게다가 우리가 누구인지 그 실체를 정확히 깨닫도록 만드신 분, 이분이야말로 우리가 진정 만나고자했던 메시야가 아닐까?”그들은 이런 생각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그리고 드디어 그들에게 예수님의 능력과 존재가 심어졌습니다. 그런데 그 능력을 본 후 그들의 결과가 너무 아름답습니다. 11절입니다.“저희가 배들을 육지에 대고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를 좇으니라.”오늘 이 말씀이 얼마나 귀한지 모릅니다. 참으로 어려운 이야기입니다. 생각해보십시오. 인생의 허무함을 단숨에 복의 열매로 바꾸어 놓으신 주님의 능력을 보았습니다. 그 능력 속에서 신앙을 깨달았습니다. 실망 속에서 회복한 기쁨과 실패 속에서 새롭게 펼쳐진 행복의 세계로 인한 황홀감이 채 가시기 전에 그들의 눈에는‘이제 무엇을 위해 나의 인생을 살아야 하는지’가 보이기 시작했다는 말입니다. 즉 삶의 목적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들은 그 목적을 붙들었습니다. 오늘도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믿는다고 지적으로는 동의합니다. 하지만 대부분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자리까지 나가지 못할 때가 참으로 많습니다. 삶의 최종목적이 하나님께 있지 못하고 순간순간 이루어지는 삶의 성취에 만족하고 맙니다. 필요한 물고기를 잡기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구하고 현세에 얻을 명예를 위해 주님께 함께 배를 타달라고 졸라대는 것이 전부입니다. 그래서 세상사는 동안 그 배로 물고기만 많이 잡으면 끝이라고 생각하며 삽니다. 주님의 능력도 거기까지만 필요합니다. 이것이 우리 신앙의 한계입니다. 이 얼마나 어리석은 일입니까?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욕심을 위하고 세상에서 내 삶의 목적을 성취하려고 하나님의 권능을 끌어들인다면 불교 신자가 돌부처에게 복을 달라고 비는 것이나 하등의 다를 바가 없습니다. 무속 신앙인들이<정화수(井華水)>를 떠놓고 자신의 소원이 이루어지기를 구하는 것과 같습니다. 예수 그리스도를 좇는 삶이란 나 자신을 위해서, 혹은 내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서 사는 정도가 아닙니다. 삶의 목적을 오직 하나님께 두는 것입니다. 정말 우리가 예수님을 좇는다면 오늘 어부들처럼 주님의 능력너머 보이는 삶의 목적을 볼 줄 알아야하는 것입니다.


교회를 출석하는 사람들을 보면 이유가 다양합니다. 그 동기들이 참 재미있어요.
첫째<친교형교인>이 있습니다. 놀이 형 교인이라고도 하는데 복음에 대한 관심보다 사람들 만나는 게 좋아서 교회 옵니다.
둘째<교양형교인>입니다. 좋은 분위기, 그리고 수준 높은 설교와 찬양대의 노래를 듣기 위해서 자기 수준에 맞는 교회를 찾아갑니다.
셋째<사업형교인>입니다. 교회를 통해서 자신의 욕망을 채우려고 합니다. 처음에 얼마동안은 열심히 교회생활을 하는 듯하고, 봉사도 열심히 하지만, 그 욕심이 채워지지 않으면 떠나 버리고 마는 것입니다.
넷째<카타르시스형교인>입니다. 이들은 이 세상의 억울한 일, 속상한 일, 가슴속에 응어리진 한을 풀려고 교회에 나온 것입니다.
다섯째< 구도형교인>입니다. 진리를 찾겠다고 나와서 예수를 좋은 선생으로 받아들이기는 하지만“나의 주 그리스도 하나님”으로 전적으로 믿지 못하기 때문에 구원을 경험하지 못합니다.
여섯째<습관형교인>입니다. 아무런 동기나 목적 없이 그냥 교회에 가는 것입니다. 교회 안가면 허전하거나 찜찜해서 그냥 습관적으로 교회에 갔다 와야 개운한 사람입니다.
일곱째<참 제자형교인>입니다. 어떤 사람들이겠습니까? 주님을 닮아가고 그 뜻을 이루고자 노력하며 삶의 목적을 하나님께 맞추고 늘 무엇에든지 은혜를 사모하는 사람들입니다.


오늘 우리가 이 제자들에게서 배워야 할 중요한 한 가지는<버려두고 좇는 신앙>입니다. 오늘 이들이 모든 것을 버려두고 예수님을 좇았다는 것이 여간 충격적인 일이 아닙니다. 적어도 이들의 인생에 중요한 몇 가지씩을 희생해야만 하는 큰일이었습니다. 최소한 생업과 사랑하는 부모와 처자식을 버려야만 했습니다. 이 사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합니까? 오늘 우리도 처자식을 버리고 가정도 팽개치고 교회에만 와서 살라는 말로 이해하면 될까요? 이 본문을 읽는 모든 사람이 다 목사가 되어야 합니까? 본문의 초점은 예수님을 따르기 위해서 생업을 포기하느냐 마느냐가 아닙니다. 본문은<가치의 문제>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에게 있어서 예수를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생업을 포기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야고보와 요한에게 있어서 예수님을 따른다는 것은 자기의 사랑하는 아버지를 버려두어도 조금도 후회하지 않을 정도의 가치가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택한 예수 그리스도, 여러분이 가진 이 신앙의 가치가 얼마정도입니까? 정말 자신할 정도로 가치 있다고 여기시면서 살아가십니까? 모든 것을 버려두고 좇을 만한 가치로 여기시느냐 말입니다. 더 중요한 것을 잡기 위해서 덜 중요한 것을 포기 할 줄 아는 것이 신앙의 지혜입니다.  가치 있는 것을 소유하기 위해 가치 없는 것을 버릴 줄 아는 신앙이 지혜로운 신앙입니다. 베드로와 안드레와 야고보와 요한이 모든 것을 포기할 수 있었던 것이 남이 하니까 나도 따라서 한 것도 아니요, 순간적인 충동에 의해서 반짝하는 기분으로 한 것도 결코 아닙니다. 한때는 너무 좋아서 어쩔 줄 몰라 하며 봉사하고 헌신하다가 일순간에 무너져 내리는 그런 신앙이 아니요, 세월이 흘러도 여전히 성숙되지 못하는 신앙이 불쑥 불쑥 튀어나와서 순간에 무너져 버리는 그런 얄팍한 믿음이 아니라 그들이 주님의 능력을 본 후에 그 기쁨에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삶의 목적이 바뀌고 나니까 가치관이 달라졌습니다. 남들만큼은 살아야 하지 않겠냐고 아등바등 하느라고 영적인 목적도 없었고, 어쨌든 다른 집만큼 만이라도 자식들 뒷바라지해야 하지 않겠냐고 뚜렷한 신앙의 목적도 없이 허무한 그물질만 하던 삶보다 더 높은 가치를 찾았을 때 그 모든 것을 버려두고 그 가치를 좇는 신앙을 보여 주고 있습니다.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그 동안 자신의 목적 없는 실패와 가치 없는 인생의 허무함을 주님의 능력 안에서 깨달았다면 그 능력을 본 후에 그 실패를, 그 무가치함을, 그 목표 없는 인생을 어떻게 해야 할 것입니까?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삶의 열정을 불태울 진정한 목표를 상실한 시대라고 합니다마는 주님의 능력을 보고 그 능력을 믿는 우리들의 삶의 목표만큼은 분명해야 할 것입니다. 신앙이란 능력을 보는 순간이 아니라 능력을 본 후에 모든 것을 버려두고 좇아도 후회하지 않을 진정한 가치를 바라보는 것입니다. 오늘도 주님의 능력은 계속됩니다. 그 능력을 본 후에 우리의 신앙이 어떻게 변화하는가가 삶의 가치를 결정합니다.

출처/김철현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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