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빌립보서 4:10-19)
I. 말씀을 향하여
미국 시카고에 살고 있던 한 가난한 농부가 기상천외 복권당첨이 됐습니다. 당국은 가난했던 농부가 어마어마한 상금을 받게되었을 때에, 또 복권당첨 소식을 접하게 되었을 때에 심장마비라도 일으킬 염려가 있겠다 싶어서 지혜를 구했습니다. 그가 천주교 신자인 것을 감안해서 신부님을 만나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신부님께서 그가 놀라지 않도록 잘 설명하고 상금을 전달해 줄 것을 부탁했습니다. 신부님이 기도하고 존을 만나러 갔습니다. “존 만약에 한 2억불 정도 돈이 생긴다면 존은 그 돈을 어떻게 할 것 같애?? 존이 빙그레 웃으면서 ”한 1억불 정도는 신부님 드리구요 그 다음에...? 뭔가 꽈당 하는 소리가 났는데 신부님이 심장마비로 쓰러져 죽었습니다.
인간이 탐욕으로부터, 물질로부터 자유스러울 수 있다는 것이 참 어려운 모양입니다. 인간의 욕망이나 욕심은 구멍뚫린 항아리와도 같습니다. 우리가 많은 돈을 벌면 그 돈으로 이 구멍난 항아리를 메꾸고, 만족한 삶을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닙니다. 그럴 수 없습니다.
가난한 사람이 고픈 배를 채우기 위해 라면 한 봉지를 요구하는 마음보다 재벌이 자신의 재산을 늘리려는 욕망이 더 큰 것은 인생의 아이러니가 아니겠습니까? 권력을 가진 자 권력으로 만족할 수 없고, 명예를 누리는 자 명예로 만족할 수 없으며, 돈을 얻은 자 돈으로 만족할 수가 없습니다.
II. 곤고할 때 풍부할 때
그래서 인생을 살다보면 곤고도 시험이지만 풍요도 시험입니다. 먼저, 인간은 환경이 어려울 때 자칫 불평과 원망의 노예가 될 수 있습니다. 자신을 환경의 피해자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환경에 태어난 것도, 가난한 것도, 실패도, 병든 것도, 피해자라고 느낍니다. 내 불행의 원인을 남들에게 돌리고, 멋대로 불평하고 원망합니다.
필립스라는 사람이 이런 사람에게 충고를 했습니다. “이런 저런 시련과 유혹이, 온갖 어려움이 당신의 삶에 끼어 들거든 그것을 침입자라고 원망하지 말고 오히려 친구로 삼아라. 그 친구는 당신에게 많은 것을 가르쳐 줄 것이다.?
그러면 환경이 나아지고 풍부해지면 자유할 수 있을 것 같습니까? 아니요. 욕망과 욕심은 더 커집니다. 감옥에서 자살하는 사람보다 별장에서 자살하는 사람이 더 많은 이유가 무엇이겠습니까? 그래서 어쩌면 가난에 처하는 지혜보다 한층 더 어려운 것이 풍부에 처하는 지혜입니다.
우리 민족이 과거 가난할 때는 입술을 꽉 깨물고 어려운 시절을 잘 이겨냈습니다. 우리 민족은 가난에 처하는 지혜를 잘 배운 사람들입니다. 언젠가부터 밥술을 먹기 시작했습니다. 돈줄이나 만지는 민족이 되었습니다. 어느 순간 허랑방탕하기 시작했고 사치와 타락을 일삼았습니다. 경제가 무너지고 말았습니다. 풍부에 처하는 지혜를 미처 배우지 못한 터였습니다.
헨리 벤 다이크의 소절 중에 Mantion이란 책에 보면 한 부자가 죽어 천국에서 구경한 이모저모를 기록하고 있습니다. 결론은 이 땅에서의 부자와 천국에서의 부자는 아무 상관이 없더라! 이 땅에서의 부자 중에 오히려 천국의 거지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많더라는 것입니다.
모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보다 더 귀한 것은 바르게 쓰는 것입니다. 궁핍이나 비천에 처하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러나 그보다 성공이나 풍부에 처하는 지혜가 더 필요한 시대속에 우리는 살고 있습니다.
III.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하나님은 당신의 자녀들이 풍성한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이 번성하고 충만한 삶을 살게 하시기 위해 천지를 창조하셨습니다. 성자 예수님께서도 우리에게 풍성한 삶을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셨습니다. 성령께서도 우리 신앙인들에게 풍부한 삶과 능력있는 삶을 약속하셨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인간의 삶이 불행에 울며 탄식하며 괴로워하며 저주스럽게 사는 것을 결코 바라지 않습니다.
오늘 본문에 풍성한 삶, 부요한 삶의 지혜를 깨달은 한 사람이 나옵니다. 이분이 바로 사도 바울입니다. 바울은 믿음으로 살고자 하는 사람들에게 인생의 수많은 문제에 해답을 주었습니다. 특별히 그는 우리가 풍성하게 살 수 있는 삶의 비결을 가르쳐 주었습니다. 바울은 참으로 소원이 많은 사람이었습니다. 꿈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꿈을 대단히 역설적으로 해결한 사람입니다.
오늘 본문 13절에 그의 유명한 명언이 나옵니다. 한국 교회 신자들이 대단히 좋아하는 성경 구절중에 하나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많은 한국 교회 신자들이 여기 “모든”이란 말 대신 자신의 소원과 자신의 꿈을 넣어 기도합니다. 괜찮습니다. 참으로 좋은 신앙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 정도의 신앙은 처음 예수 믿는 어린 신자들이나 그렇게 적용하는 겁니다. 신앙이 깊어지고 성경 지식이 더해지다 보면 뜻밖에도 이 본문은 그런 배경 그런 약속을 깔고 쓰여진 성경이 아니라는 데에 우리의 놀라움이 있습니다.
오늘 읽은 말씀은 사도 바울이 호화스러운 로마의 어느 별장에서 쓴 것이 아닙니다. 그가 그토록 가기 원했던 로마에 가긴 갔으나 죄수의 몸으로 로마에 갔습니다. 배고프고 매맞아 터지고 언제 처형될지 모르는 바로 이 로마의 감옥속에서 이 글을 쓴 것입니다.
바울 선생이 로마 감옥에 수감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빌립보 교인들이 산 넘고 물을 건너 멀고 먼 로마까지 위문품을 싸들고 면회를 왔습니다. 감옥생활에서 필요한 모든 물건을 한 보따리 풀어 놓았더니 사도 바울이 그 위문품을 받아들고 답사를 하는 내용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빌립보 교인들은 눈물 콧물을 흘리며 바울 선생 고생한다고 찾아갔더니 엉뚱하게 그는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하시는 겁니다.
무슨 말입니까?
가져온 위문품은 참으로 감사하다. 그러나 이 위문품이 주는 기쁨과 의미는 나에게 있다기 보다 너희들이 하나님 나라 사역에 동참하게 되었다는 거기에 있다. 나의 기쁨은 환경 여하에 따라 달라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나는 어떤 형편에서든지 자족할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기 때문에 배부르거나 배고프거나 풍부와 궁핍에도 그것을 감당할 일체의 비결을 알고 있다. 그것은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말씀을 합니다.
즉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모든 것을 할 수 있다”는 이 말씀은 무슨 소원이든지 이룬다는 뜻이라기 보다는 어떤 환경에서든지 승리할 수 있다는 뜻입니다. 배부른 것이 배고픈 것과 아무런 차이가 없다는 것입니다. 배부른 것이 나를 교만하게 하거나 방종하게 하지 않듯이 배고픈 것도 나를 비굴하게 할 수 없다는 말입니다.
어디서 이런 배짱이 나왔을까요? 그가 기뻐한 것은 교회가 보내준 넉넉한 사식이나 선물이 아니었습니다. 그의 기쁨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였습니다. 그의 삶은 예수 그리스도에게 뿌리를 내리고 있었고, 그의 인생의 목표는 예수 그리스도였고, 그가 살아가는 이유도 그분 때문이었습니다. 오직 예수 그리스도 때문에 행복했고 기뻐하며 감사하며 살아갈 수 있었습니다.
우리 성도들이 신앙생활을 하는 가운데에 가장 당황해 하고 잘 해결하지 못하는 문제가 바로 이 문제입니다. 내가 예수를 믿으면 만사형통한다고 생각하다가 그 반대현상에 부딪힐 때 너무나 쉽게 낙심해 버리고 맙니다.
세상사람들은 그렇게 묻습니다.
“신앙이 현실 생활에 무슨 가치가 있는가?”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면 무슨 유익이 있는가?”
“성경 열심히 보면 장사가 금방 잘 되는가?”
성도는 이 질문에 대한 대답을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예배에 열심히 참여하고 기도하고 성경 보고 전도한다고 돈이 생긴다면, 기업에 매상이 오르고 파급적인 승진이 있는가 하면 자녀들이 대학입시에 합격한다면 전도할 필요가 없을 것입니다. 성경 학원이 생기고 돈 내고 이곳 저곳 기도 배우러 다니느라 야단법석일 겝니다.
이런 세속주의적 사고방식이 한 두 사람의 문제가 아니고 오늘 모든 신앙인에게 만연되어 있다는 데에 문제의 심각성이 있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가운데 사도 바울과 같이 역설적으로 살고 역설적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단 몇 사람이라도 있어야 합니다. 최소한 의인 열 사람만이라도 말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그를 보고 힘을 얻고 그를 바라보고 성경의 진리를 배우고 복음의 능력을 믿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그의 자녀들에게 반드시 궁극적인 승리를 약속하셨습니다. 그러나 그 승리의 정상에 오르기까지는 때로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와 시련의 계곡을 건널 수 있습니다. 이 중간 다리를 견디지 못해 포기하는 사람은 그야말로 만사형통을 체험할 수가 없습니다.
미국 속담에 “시합 중에는 점수를 말하지 말라?는 말이 있습니다. 중간에 판단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여러분이 직면하는 상황들을 너무 조급하게 판단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에게 길을 열어 주시기를 원하십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순간적인 전투에서도 실패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반드시 궁극적인 전쟁에서는 승리하게끔 되어 있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 어떤 경우에도 그 어떤 환경속에서도 풍부한 삶을 살았습니다. 물론 인간적으로 볼 때 바울의 생애는 그렇게 행복한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굶주리고 헐벗고 병들고 매맞고 괴로워 하며 살았습니다. 그러나 그에게는 풍성한 삶의 비결이 있었습니다. “내게 능력주시는 자 안에서” 말입니다.
저는 이 사실을 설명하기 위하여 언젠가 우리교우들에게 온도계와 같은 인생과 온도조절기와 같은 인생이 있다고 비유적으로 설명한 적이 있습니다.
우리 신앙인들 가운데에도 “온도계”와 같은 사람이 있고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갑니다. 날씨가 더우면 올라갑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기분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신앙생활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기쁨이 오르락 내리락합니다.
온도 조절기는 날씨가 추우면 조절기로 올립니다. 조절기에 따라 방안 온도가 오히려 달라집니다. 날씨가 더우면 조절기를 내리면 됩니다. 그렇습니다. 안으로부터 오히려 온도를 조절합니다. 환경에 지배당하는 삶이 아니라 환경을 지배하는 삶입니다. 이것이 크리스챤의 삶이요 능력입니다.
우리의 삶을 지배하고 있는 온도계를 살펴보면,
어떤 사람들은 돈이 온도계, 주식이 온도계입니다. 주식이 올라가면 갑자기 기분이 좋아집니다. 그러나 주식이 뚝 떨어지면 코가 쑥 빠져 다닙니다. 어떤 사람들은 자식의 성적이 온도계입니다. 성적이 올라가면 세상 살 맛이 납니다. 그런데 성적이 뚝뚝 떨어지면 만사가 재미가 없습니다. 어떤 집사님은 외국에 나가있는 아들이 온도계입니다. 생글생글 웃으면서 전화하면 하루종일 기분이 좋고 우울한 전화 한통 받으면 일주일동안 기분 나쁘답니다. 이것이 온도계 인생이지요.
이런 온도계는 내가 어떻게 할 수 없는 영역입니다. 온도계에 집중하여 살면 환경 때문에 울고 웃는 삶을 살아갑니다. 이것 때문에 내 인생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온도조절기 이것은 내가 영향을 미칠 수 있는 영역들입니다. 환경이 어렵지만 우리는 기도할 수 있습니다. 살림이 막다른 골목 같지만 믿음의 눈을 열고 보면 창조적으로 긍정적으로 능동적으로 그 사건을 볼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들에 의하여 영향을 받는 삶이 아니고 다른 사람을 축복하는 영향을 미치는 삶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온도조절기의 영역을 계속해서 키워 가는 것입니다.
놀랍게도 온도계의 영역이 커져 가면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작아집니다. 온도조절기의 영역이 자꾸 커져 가면 온도계의 영역이 작아져야 되는 것입니다.
온도계에 의해서 영향을 받으면서 살아가는 삶을 스티븐 코비는 “대형적인 존재” “동물적인 존재”라고 얘기했습니다. 그러나 역사를 창조적으로 바꾸어 가는, 긍정적으로 바꾸어 가는, 삶의 환경을 아름다운 모습으로 건강한 모습으로 창조해 가는 삶을 주도적인 인생이라고 얘기했습니다.
옛말에 오는 말이 고아야 가는 말이 곱다는 말이 있습니다. 이것은 옳은 말 같지만 이것은 조폭적인 격언입니다. 우리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는 말이 더러워도 가는 말은 곱게 할 수 있어야 합니다.
환경이 좋아야 행복하다. 이것은 세상 사람들이 하는 얘기입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오는 환경이 더러워도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환경은 행복할 수 있어야 된다는 말입니다. 이런 삶이 주도적인 삶이요, 온도조절기와 같은 사람입니다.
온도조절기와 같은 삶을 사는 사람들에게 스티븐 코비는 그런 말을 남겼습니다. “네가 태어나던 날 세상은 웃고 너는 울었다. 이제 네가 세상을 떠나는 날 너는 웃고 세상을 울려라.?
영향력 있는 삶을 살아갈 수 있다. 창조적인 삶을 살아갈 수 있다. 환경을 바꾸는 건강한 삶을 살 수 있다는 말 아니겠습니까?
IV. 어떻게 우리는 영향력있는 풍성한 삶을 누릴 수 있을까요?
1. 먼저, 하나님으로부터 풍성한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풍성한 삶은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분으로부터 비롯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베드로가 지친 몸에 빈배를 끌고 나올 때 언제나 인생의 빈배를 찾아 오시는 주님께서 베드로를 찾아 오셨습니다. 그리고 빈배에 고기를 채워 주시기 전에 말씀을 채워주셨습니다. 먼저 은혜를 채워주시는 것은 물고기를 채워주시는 것보다 우선되는 일이며 중요한 일이기 때문입니다. 요한 3서 2절에 “사랑하는 자는 범사가 잘 되기 이전에 먼저 영혼이 잘 되어야 함”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우리 가운데 물질로는 가난하지만 믿음에 부요하신 분들이 있습니다. 반면 어떤 분들은 물질로는 부족함이 없으나 은혜 생활은 거지처럼 궁색한 사람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욕심은 목끝까지 차 올랐는데 은혜는 가난뱅이처럼 살아가는 사람, 육신의 장막은 어리어리한데 심령의 집은 헐고 무너지고 빈집처럼 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시편 106편 15절에 물질적인 풍요속에서 은혜의 삶을 상실한 저주스런 한 인간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여호와께서 저희의 요구한 것을 주셨을찌라도 그 영혼을 파리하게 하셨도다”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세상적인 것을 다 가지고서도 그 영혼은 주려서 파리해진 분들이 있습니다. 이것은 지혜가 아니고 미련입니다. 예수님께서 라오디게아 교회에게 “네가 말하기를 나는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 하나 네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도다”라고 영적 가난을 책망하셨습니다. 이 세상 것이 아무리 풍성해도 하나님의 은혜가 풍성치 못하면 그는 불행한 사람입니다.
신앙인들 가운데 참으로 멋지게 성공한 사람들을 만나봅니다. 혹 목사님들 가운데 참으로 아름답게 목회하시는 분들을 만나봅니다. “어떻게 당신의 그 일이 가능했습니까?” 물으면 한결같이 그들은 대답합니다.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입에 발린 소리가 아닙니다. 나는 자격이 없는데 별로 한 일이 없는데 이런 복을 누린다는 고백이지요. 은혜를 받아야 합니다.
그렇습니다. 은혜를 받아야 풍성한 삶이 가능해 집니다. 멋진 성공이 가능해 집니다. 아름다운 삶이 가능해 집니다.
2. 둘째, 이 풍성한 은혜를 주신 분이 누구인가를 기억할 때 우리는 감사할 수가 있습니다.
삶의 능력이 내가 만든 것이 아니라는 겁니다. 하나님의 은혜요 그래서 감사한 것 뿐입니다. “은혜”라는 말과 “감사”라는 말은 원어에서 같은 단어로 사용된답니다. 즉 은혜가 풍성하다는 말은 감사가 풍성하단 말입니다. 은혜 받았다는 말은 감사할 줄 안다는 말입니다. 많은 것을 가지고도 불평 속에 살아가는 사람이 있고 적은 것을 가지고도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사람이 있습니다. 바울이 어떤 형편에 처하든지 자족하기를 배웠다는 그의 고백은 어떤 처지에서든지 하나님께 감사할 수 있었다는 말입니다.
묻습니다.
이 시간 여러분의 삶은 감사로 충만해 있습니까? 아니면 불평과 불만으로 충만해 있습니까? 이제 하나님의 사람이 되었으면 행복의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다른 사람과 비교하여 속상해 하고 부러워하고 불행해 하는 것 좀 하지 마십시다. 신앙인은 부러워하는 차원이 달라야 합니다. 썩고 없어질 것들을 부러워하지 말고 영원히 남을 가치를 부러워 할 줄 알아야 합니다. 이런 사람은 환경에 따라 행불행이 왔다 갔다 하지 않습니다.
비신앙적 세상적이란 말이 다른 뜻 아닙니다. 어떤 사람이 가난하고 비천할 때에는 좋은 신앙생활을 하다가 부요해진 다음 교만하고 감사할 줄 모른다면 이것이 바로 비신앙이요 미련한 짓입니다. 풍부에 처할 줄 아는 지혜를 모르는 사람입니다. 혹 어떤 이는 풍부할 때는 잘 믿다가 환경이 조금만 어려워지면 낙심하고 비굴해지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것 또한 비신앙적이요 미련한 태도입니다.
예수 안에서 우리는 가난에 처하든 풍부에 처하든 모든 것이 하나님의 은혜인 줄로 알고 감사할 줄 알아야 합니다.
1808년 비엔나에서 대작 「천지창조」가 연주되었습니다. 물론 그곳에는 작곡자 하이든도 참석했습니다. 연주가 끝난 다음 감격한 청중들은 모두 기립하여 하이든에게 갈채를 보내고 환호하였습니다. 당시 하이든은 몹시 늙고 병약하여 자기 힘으로 일어설 수도 없었던 처지였습니다. 그러나 하이든은 그 우렁찬 갈채를 감당할 수 없어 두 다리를 떨면서 일어서 큰 소리로 외쳤습니다. “No! No! 아닙니다. 아닙니다. 이 작품은 내 것이 아니라 하나님께로부터 온 것입니다. 오직 은혜로 된 것이지 내 작품이 아닙니다. 하나님께 감사합시다. 하나님께 박수를 보냅시다.? 그리고 의자에 앉다가 실수하여 뒤로 넘어지고 말았습니다. 이 말이 하이든의 마지막 말이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 말은 영원히 우리가 외쳐야 할 말입니다. “아닙니다. 아닙니다. 내 것이 아닙니다. 모두 하나님의 은혜요 하나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람들은 모두 하나님의 것입니다. 그분께 감사합니다를 외치며 삽시다.
3. 셋째 “내게 능력주시는 자” 그분의 것을 그분에게 내려 놓을 줄 알아야 합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빌립보 교회 성도들의 넉넉하고 정성스런 헌금 생활을 맘껏 칭찬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축복을 약속하고 있습니다. 19절 “나의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영광 가운데 그 풍성한 대로 너희 모든 쓸 것을 채우시리라”
늘 풍성한 예물은 축복의 씨앗이 되고 있습니다. 풍부 속에서 넘치는 감사를 모르는 사람은 종자를 까먹는 농부와도 같고 펌프의 바가지 물을 마시는 어리석은 사람과도 같습니다.
수도가 발달하기 전에는 펌프를 사용하여 물을 끌어올렸습니다. 그런데 몇 시간 사용하지 않은 펌프는 아무리 펌프질을 하여도 물이 올라오지 않습니다. 그것은 땅 속에 물이 없기 때문이 아니라 펌프에 물이 말랐기 때문입니다. 땅 속의 물을 펌프로 끌어올리는 데에는 한 바가지의 물이 필요합니다. 물을 펌프에 붓고 펌프질을 하면 지하수가 펑펑 올라옵니다.
지금 우리는 풍성한 은혜 가운데 살면서도 신령의 펌프가 메말랐기에 은혜의 생수가 솟아오르지 않습니다. 하나님께 부어야 할 감사의 생수까지 마시고 살려고 하니 샘물이 날마다 새롭게 솟아 오를 수 없는 거지요.
카네기는 말했습니다. “하나님께 헌금 드릴 때마다 내 형편에 조금 부담이 될 만큼 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이 관리에 부담이 될 만큼 부어 주셨다.?
록 펠러는 얘기했습니다. “내가 힘껏 드릴 때 나는 이미 하나님 나라의 영광스런 사역자가 되어 있었다.?
「풍부와 궁핍에도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
일체의 비결을 가지고 있는 사람,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합니다. 승리하는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풍요로운 삶의 비밀을 알고 있는 사람, 인생의 비밀을 간직하고 살아가는 사람, 영원한 삶, 영생의 비밀을 알고 살아가는 사람을 두고 우리는 하나님의 사람이라고 부르는 것입니다.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V. 말씀을 맺으며 - 그래도 감사하라!
개척 초기 우리교회는 전기세도 제대로 못내고, 자동차 기름 넣기도 어렵고, 더구나 교역자 생활비는 엄두도 못내던 짧은 시간이 있었습니다. 그때 ‘한국의 교회가 다 하나님 아버지의 교회인데’ 그렇게 생각하고 선교헌금을 구걸하러 다녀본 적이 있었습니다. 얻는데 은사가 없었던지 결과는 섭섭함과 상처뿐이었습니다. 그때 나는 하나님 앞에서 기도하며 결단했습니다. “하나님! 하나님 외엔 누구에게도 사람 앞에서 무엇을 구하지 않겠습니다. 나는 하나님께 얻어서 사람들에게 풍성히 나누는 삶을 살고 싶습니다.” 교역자들에게 생활비를 못 주던 그 때도 우리는 작은 헌금을 모아서 중국에 선교사를 파송해 놓고 어려운 개척시절을 보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결심을, 이 교회의 결단을 기뻐하셨습니다. 언제나 하나님은 이 교회와 내게 능력이었습니다. 부요였습니다. 감사였습니다. 찬양이었습니다.
어느 동화집에 「거기 누가 있는가」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어떤 환경이 사람을 지배하는 것이 아니고, 어떤 환경에 누가 거기 있느냐 여하에 따라서 환경이 달라지더라는 것입니다. 누가 그 집에 사느냐에 따라서 지저분한 집이 될 수도 있고 깨끗한 집이 될 수도 있더라는 것입니다. 어떤 교회에 누가 모이느냐에 따라서 그 교회가 영향력 있는 교회가 될 수도 있고 초라한 교회가 될 수 있더라는 것입니다. 거기 누가 있느냐?
강남에 가면 말죽거리라는 동네가 있었습니다. 비까번쩍한 아파트들이 들어서고 부자들이 모여 살면서 그 동네가 개포동이 됐습니다. 왜 그 동리가 개포동인가 하니 사람이 하도 살기가 더럽고 지저분한 동네라서 개도 살기를 포기했다고 해서 개포동이었습니다. 그런데 부자들이 거기 가서 살기 시작하면서 비까번쩍했습니다. 개포동 신문에서 아직도 우리는 이 동리를 개포동이라 부른다 왜냐? 개도 포텐샤를 타고 다니기 때문에...
「거기 누가 있는가」 라는 동화는 짤막한 내용으로 그린 동화입니다.
연못이 있었다. 그리고 그 연못의 동쪽 귀퉁이에는 물망초가 살고 있었다. 동쪽 귀퉁이에 사는 물망초는 불만이 많았다. 허구헌날 물에다 뿌리를 내리고 살아야 하는 자신의 신세를 한탄하였다. 물방개가 스쳐 가는 것에도 신경질을 부렸으며 심지어 산그리메가 지나가는 것에까지도 역정을 내곤 하였다. 그러나 서쪽 귀퉁이에 사는 수련은 즐거움이 많았다. 물에서 살게 되는 청결함에 감사하였다. 어쩌다 물잠자리가 잠시 들러도 반겨 맞이하곤 하였다. 때론 흰구름 깃이 물 속으로 스며드는 것에도 환희로워하였다.
얼마쯤 지났다. 물망초가 사는 연못의 동쪽 귀퉁이에는 찾아오는 이 하나 없이 물파래만 가득 끼었다. 물망초는 꽃은커녕 제자리조차도 물파래한테 빼앗기며 죽어가고 있었다. 오직 연못의 서쪽 귀퉁이에 사는 수련만이 번성하고 있었다. 파란 물 위에 꽃을 띄웠으며 새순을 얻었다. 그러자 지나가는 나비조차도 쉬어 갔고 노을까지도 적셔 들었다.
당신은 당신이 지금 있는 바로 그 자리의 주인입니다. 당신 코너가 물망초처럼 되느냐 수련처럼 되느냐는 당신 하기에 달려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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