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인생 (로마서 9: 14- 18)
어제부터 많은 비가 내려 중부지역 특히 영동, 영서지방에는 산사태로 인하여 고속도로가 두절되는 등 최악의 상황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장마비가 올때마다 어려움 겪는 많은 수재민들이 우리의 일가친척이 아니더라도 그들을 위하여 염려하고 자중하면서 어려움을 잘 극복할 수 있도록 기도하며 협력하는 기회가 되기를 바랍니다. 웨슬리 봉사대는 이러한 때를 위하여 준비시켜주신 주님의 손길이 되었으면 하는 마음 간절함니다.
저는 오늘 여러분들과 함께 '여호와로 말미암는 인생'이라는 제목으로 말씀을 나누고 싶습니다. 지난 주일에는 약속의 자녀와 육신의 자녀라고 하는 아주 중요한 구별이 있음을 말씀을 통해 들었습니다. 자녀라고 해서 다 약속의 자녀가 아니라 이삭의 씨에서 난 자라야 약속의 자녀라는 말씀을 듣고 놀랐습니다.
약속의 자녀에 대한 말씀을 하신 후 오늘 본문은 이렇게 시작합니다. "그런즉 하나님께 불의가 있느뇨..." 하나님의 판단과 선택이 잘못 되었느냐 하는 반문입니다. 성경은 단호하게 대답합니다. "그럴 수 없느니라" 우리는 이 부분을 좀더 바로 이해하기 위해 출애굽기 32장과 33장을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출애굽기 37장에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하나님의 산 시내로 부르셔서 십계명을 주셨고, 또한 광야생활 동안 하나님께 예배할 수 있도록 장막에 대한 구조와 치수 등을 당신의 방법대로 알려 주셨습니다.
하나님을 대면한 감격과 말슴의 돌판과 성막에 대한 건축계획을 듣고 산을 내려오던 모세는 점점 이상한 소리들을 듣게 되었습니다. 정상적이라면 40일 동안이나 자신이 자리를 비었던 이스라엘 공동체에서는 두려움과 기다림의 침묵으로 경건한 분위기여야 하는데 놀랍게도 축제분위기였기 때문입니다. 모세는 그 축제가 다름아닌 금송아지 우상을 중심으로 벌어지는 우상의 축제였음을 알고 분노한 나머지 하나님께서 주신 십계명 돌판으로 그 우상을 깨뜨려 버렸습니다.
사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 우상을 섬긴 것은 갑자기 생긴 아이디어가 아니었습니다. 그들이 오래전 부터 노예생활하던 애굽에서 익히 보고 듣던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출애굽하면서 버렸던 애굽에서의 습관들이 자신들도 모르게 이심전심으로 의견이 모아져 엉뚱한 일을 벌이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 일에 불을 붙인 사람이 놀랍게도 모세의 동역자 아론이었다는 사실은 참으로 충격적인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오늘 이스라엘 백성들의 우상숭배의 모습을 보면서 오늘 자신들을 되돌아 보는 계기가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도 모르게 생활 속에서 학습되어진 잘못된 습관들이 결정적인 삶의 위기때에 슬며시 나타날 수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이 금송아지를 만들어 우상숭배를 한 것은 사형에 해당되는 중한 죄입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주신 십계명 중 첫째가 곧 우상숭배의 금지였기 때문입니다. 나 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며 하나님 외에 어떤 우상의 형상도 만들어서는 안 된다는 말씀이 십계명의 첫째요 둘째가는 계명이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경우, 하나님의 공의의 잣대로 볼 때에 그들은 살아남을 방법이 없는 것입니다.
우리는 흔히 하나님의 속성을 말할 때에 두가지를 말합니다. 첫째는 하나님의 공의요, 다른 하나는 하나님의 사랑입니다. 공의와 사랑은 하나님의 속성을 대변하는 대단히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만약 이스라엘을 공의로 대하셨다면 이스라엘은 아무도 살아날 자가 없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을 사랑으로 대하셨기에 이스라엘이 오늘날 까지 살아남은 줄로 믿습니다. 모세의 눈물의 간구가 이스라엘을 살렸습니다. 하나님의 진노하심으로 모두가 심판받아야 마땅하지만 모세의 호소가 하나님의 마음을 바꾼 것입니다.
모세는 간구합니다. "하나님이여, 만약 이 백성을 광야에서 다 진멸하신다면 세상 사람들이 무엇이라고 하겠습니까? 하나님께서 이 백성을 죽이려고 광야로 데리고 나왔다고 하지 않겠습니까? 하나님, 이 백성을 불쌍히 여기셔서 용서해 주시옵소서. 혹 내 이름이 구원의 책에서 지워지는 한이 있어도 이 백성은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눈물로 호소하는 모세의 간구에 하나님께서는 그 계획을 돌이키신 줄로 믿습니다. 15절의 말씀입니다. "모세에게 이르시되 내가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히 여기고,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그래서 하나님의 공의의 세계가 새롭게 시작되었습니다. 하나님의 공의가 사랑 때문에 완성된 것입니다. 단순히 공의를 말한다고 세상이 공의로와지지는 않습니다. 운동권들이 공의를 말한다고 세상이 공의로워집니까? 더 나아가 운동권이 정권을 잡았다고 해서이 세상이 더 공의로워졌습니까? 아이러니하게도 정의사회 구현을 국정지표로 삼았던 정권이 5공화국이었는데 가장 부패한 정권으로 결론이 나지 않았습니까? 이 세상이 깨끗해 지고 정의로워지는 사회가 되는 것은 공의를 말하고 정의를 부르짖는다고 해서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성도여러분, 사랑해야 공의가 생기는 줄로 믿습니다. 용서할 때 정의가 일어나는 줄로 믿습니다. 십자가는 우리의 구원입니다. 십자가는 정의의 결과로 온 것이 아닙니다. 사랑 때문에 십자가가 우리에게 주어진 줄로 믿습니다. 그러므로 구원은 공의가 아닙니다. 구원은 사랑이요, 구원은 긍휼이요, 구원은 은혜인 줄로 믿습니다. 우리가 그 은혜 때문에 구원을 입은 줄로 믿습니다. 할렐루야!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건강한 모습으로 설 수 있게 된 것은, 우리가 운동을 열심히 했기 때문도 아니며, 열심히 약수터에 다니거나 수돗물을 안 마시고 정수기 물 마셔서 오래 살게 된것이 아니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저와 여러분이 이 자리에 있게 된 것, 오늘도 생명을 유지하게 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긍휼하심인 줄 믿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살리신 것은 불쌍히 여길 자를 불쌍히 여기시고, 긍휼히 여길 자를 긍휼이 여기셨기 때문인줄로 믿습니다. 이 놀라운 하나님의 선택을 누가 불의하다고 말할 수 있겠습니까?
17절입니다. "바로에게 이르시되...." 지금까지 우리는 모세에게 이르신 말씀을 보았다면 이제는 애굽의 왕 바로에게 하시는 말씀을 보게 됩니다. "내가 이 일을 위하여 너를 세웠노라" 성도 여러분, 놀랍지 않습니까? 하나님의 일을 위하여 바로를 세웠다고 했습니다. 하나님을 대적하는 바로가 하나님의 일을 위해서 세움 받았다고 하는 것입니다.
잠언 16장 4절을 보면 우리는 이 말씀을 이해할 수 있는 중요한 구절이 나옵니다. "여호와께서 온갖 것을 그 씌움에 적당하게 지으셨나니 악인도 악한 날에 적당하게 하셨느니라" 가룟유다도, 바로도, 느부갓네살왕도, 저 북한의 김정일도 하나님이 지으신 피조물입니다. 그들이 때러는 악하게 행동하여 하나님을 대적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억압하지만 역사의 주관자가 되시는 하나님 앞에서 보면 그들도 하나님이 적당하게 사용하고 계시다다는 고백입니다.
그 대표적인 사람이 바로 바로입니다. 바로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두가지 목적을 이루셨습니다. 첫째는 17절 중후반을 보면 너로 말미암아 첫째 내 능력을 보이고, 바로의 강팍함으로 인해서 이스라엘 백성들을 출애굽 시키지 못한다고 했을 때, 바로에게 열가지의 재앙을 보여 주셨습니다. 열가지 재앙을 통해서 하나님은 바로의 강팍함을 꺾으셨습니다.
뿐만 아니라 두 번째 내 이름이 온 땅에 전파되게 하려 함이라. 악한자는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전파되는 경우가 많아요. 성도 여러분, 하나님께서는 다니엘이 사자 굴에 들어갔을 때, 다리오왕을 통해서 ‘하나님이 너를 살렸느냐?’ ‘예 살아계신 하나님이 나를 살리셨습니다.’ 그 때에 다리오왕은 살아계신 하나님을 찬양할지라. 하나님을 모르는 사람들이 하나님을 모르는 권력자들이 하나님을 믿는 하나님의 사람들을 통해서 하나님을 보고 만나고 찬양하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바로가 하나님 앞에서 강팍하게 행하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강팍함으로 대하지만 하나님은 그 바로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능력을 보이시고, 그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영광이 온 땅에 드러내도록 사용하신다는 사실이, 그러나 그 강팍한 바로는 하나님의 심판의 도구가 됩니다. 강팍했던 가룟유다도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가 없게 되었어요.
문제는 하나님의 의로운 도구로 선하심의 도구로 우리가 쓰임을 받느냐? 하나님의 강팍한 도구로 쓰임을 받는다는 것이 문제입니다. 가룟유다와 바로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들은 모두가 하나님 앞에 회개할 기회를 가졌었다는 것입니다.
우리 제자들은 하나님께서는 제자들 앞에서 가룟유다가 있는 모든 제자들에게 이 자리에 나를 팔 자가 있느니라라고 말씀을 하시면서 결정적으로 가룟유다가 자신이 하는 행동이 잘 못 되었다는 지적을 하시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셨습니다.
그러나 가룟유다는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여러차례 가룟유다에게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말씀해 주셨지만, 가룟유다는 주님의 말씀을 들으면서도 회개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바로에게 열가지 재앙을 주셨다는 말씀은 역으로 말하면 제가 하나님 앞에 대적하지 않고, 창조주 하나님 앞에 열 번씩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가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가장 불행한 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회개할 기회를 주셨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그 기회를 선용하지 못했다고 하는 어리석음을 가지고 있습니다. 때때로 하나님께서 주의 종을 말씀을 통해서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실 때, 회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때때로 사람들에게 회개할 기회를 통해서 하나님이 주시는 지혜로 깨닫게 하시고, 회개할 수 있도록 깨닫게 하실 때 그 기회를 선용하시기 바랍니다. 때때로 사건들을 통해서 여러 가지 삶의 일들을 통해서 우리를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게 하실 때 회개할 수 있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나 강팍해서 유다처럼 바로처럼 회개할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허락하여 주시지만 우리의 강팍함으로 인해서 회개하지 못한다면 그것은 결국은 멸망 밖에는 주어질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18절은 말씀합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이를 긍휼히 여기시고,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는 자를 강팍케 하시느니라. 하나님이 하고자 하시는 자를 긍휼히 여기시는 자는 이스라엘 백성이요, 모세의 경우입니다.
하나님께서 하고자 하시는 자를 강팍케 하신 자는 바로입니다. 오늘 우리가 바로가 경우가 되어질지, 모세의 경우가 되어질지 참으로 두렵고 떨린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도 우리가 살아온 것도 앞으로 살아가야 할 것도 우리의 소원이나 우리의 달음박질 같은 우리의 수고와 노력 때문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말미암은 줄로 믿습니다.
그래서 우리 인생은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았다는 거지요. 이 하나님으로 말미암은 인생들이 하나님과 동행하면서 그를 기쁘시게 하면서 그의 뜻을 이루어 가는 성도의 삶이 되시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기도하시겠습니다.
자비하신 하나님, 말씀 속에 깨닫게 하시고, 성령으로 알게 하시니 감사를 드립니다. 우리의 원대로가 아니라 우리의 달음질로 인해서가 아니라 하나님의 긍휼하심으로 인해서 오늘 여기까지 우리가 있음을 기억하게 하시고, 감사하게 하시고, 그 하나님을 찬양하게 하옵소서. 바울사도의 고백처럼 나의 나된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임을 고백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하옵나이다. 아멘
출처/황요한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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