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명적인 삶의 축복 (요 21:18-19)
마태복음 21장을 보면 주님은 나귀를 쓰실 때 주님은 “나귀를 풀어 내게로 끌고 오라!”고 말씀하셨습니다(마 21:2). 그처럼 무엇이든지 풀어 주님께 끌고 가야 주님이 쓰실 수 있습니다. 우리가 물질과 건강, 시간과 재능을 풀어 주님께 끌고 가면 인생도 풀리게 되지만 그것들을 그냥 묶인 상태로 두면 인생도 같이 묶이게 됩니다.
모든 것이 주님께서 쓰지 않으면 내가 쓰는 것이 아니라 결국 마귀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내 시간과 재능을 주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고, 내 물질과 지위와 육신도 주님을 위해 쓰지 않으면 사탄의 도구가 될 수 있습니다. 나귀 새끼 한 마리도 “주님이 쓰시겠다!”고 하면 주님을 위해 크게 쓰임 받았습니다.
큰 것을 만들어 주님께 드리려 하지 말고 작은 것이라도 먼저 주님께 매이게 해야 합니다. 크게 받아 일하는 것이 아닙니다. 크게 일하면 크게 부어 주십니다. 가만히 앉아 있고 가만히 묶여 있는 자를 하나님은 쓰시지 않습니다. 주님이 쓰시겠다고 할 때 “제가 여기 있나이다. 저를 쓰소서.”라고 할 때 진짜 행복하게 사는 길이 열립니다.
어떤 집사님의 이야기입니다. “제가 이제까지 행복하게 살려고 수많은 일을 해보았는데, 역시 몸이 힘들 정도로 주님과 교회를 위해 헌신할 때가 가장 행복했었습니다.” 사실 그 고백은 우리 모두의 고백입니다.
살면서 가장 보람된 때는 “내가 하나님 앞에서, 교회와 가정에서 아직도 필요한 존재구나, 쓸모가 있구나” 하는 것을 발견할 때입니다. 반대로 살면서 가장 비참한 일은 “너는 더 이상 필요 없는 존재다.”라고 여겨질 때입니다. 우리는 어디에 가든지 “당신은 소중한 사람입니다. 당신은 우리에게 꼭 필요한 사람입니다.”는 말을 듣는 복된 존재가 되어야 합니다.
사명감이란 “나는 어디에 필요한 존재인가? 내가 어떻게 쓰임 받는 인생을 살 것인가?”를 자각하는 것입니다. 그런 사명감을 가지고 열심히 사는 인생이 건강한 인생입니다.
< 성공이란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 >
오늘 본문 말씀은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도전하는 말씀입니다. 주님은 15-17절에서 베드로의 사랑을 회복시키시고, 바로 이어서 사명을 도전하셨습니다. 그처럼 사랑의 회복은 사명의 회복으로 연결되어야 합니다. 사명이 없는 사랑은 진짜 사랑이 될 수 없고, 책임감이 없는 사랑도 진짜 사랑이 될 수 없습니다. 우리는 목숨 걸고 사랑하고, 목숨 걸고 사명을 수행해야 합니다. 사랑에 매이게 되면 반드시 사명에 매이게 됩니다.
주님이 베드로에게 사명을 도전하시면서 어떤 말씀을 하십니까? 본문 18절 말씀을 보십시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네게 이르노니 젊어서는 네가 스스로 띠 띠고 원하는 곳으로 다녔거니와 늙어서는 네 팔을 벌리리니 남이 네게 띠 띠우고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데려 가리라.” 주님은 베드로의 사명을 회복시켜 주면서 베드로가 원치 아니하는 곳으로 가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곳이 어디입니까? 본문 19절 전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 말씀을 하심은 베드로가 어떠한 죽음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을 가리키심이러라.” 베드로가 원하지 않지만 가야 할 곳은 바로 십자가의 죽음의 자리였습니다. 그러나 그 죽음으로 그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될 것이라고 오늘 본문은 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이 구절을 통해서 무엇이 성공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성공이란 주님을 위해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특별히 오늘 말씀을 보면 베드로는 이미 십자가를 지고 죽도록 계획되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그처럼 주님은 우리의 죽는 문제까지도 철저한 계획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를 지는 것을 무서워할 필요가 없습니다. 십자가란 어렵고 힘들고 두려운 것이지만 최종 승리가 약속되어 있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의 삶의 핵심 내용이 바로 십자가였습니다. 주님은 공생애 시작부터 끝까지 십자가의 삶을 향해 사셨고, 사단 마귀는 공생애 시작부터 주님의 십자가의 삶을 방해했습니다. 왜냐하면 사단도 십자가를 지는 삶이 가장 복된 삶이라는 것을 알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지지 않으면 사단은 기뻐서 노래 부릅니다. 그러나 우리가 기쁘게 십자가를 지면 사단은 괴로워서 견디지를 못하고 떠납니다.
신앙생활에서 가장 복된 일은 기쁘게 십자가를 지는 일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십자가의 시험 앞에서 너무 겁내지 말아야 합니다. 정신을 차리고 미리 대비만 하면 십자가의 시험은 항상 좋은 열매를 맺게 하고 사라집니다.
< 십자가는 지는 삶이 승리하는 삶입니다 >
우리에게 진짜 무서운 시험이 있습니다. 그것은 십자가를 피하게 하는 시험입니다. 주님이 광야에서 받은 시험도 결국 십자가를 회피하라는 시험이었습니다. 주님이 어떤 시험을 받으셨습니까? 첫째 시험은 40일 금식기도하고 배고프실 때에 광야에서 돌을 떡으로 만들어 먹으라는 시험을 받으셨습니다. 가끔 인생에 광야가 찾아오고, 경제적으로 어렵고, 뭔가 일이 잘 안되면 사단은 꼭 십자가를 회피하고 잘못된 기적을 추구하도록 유혹합니다.
둘째 시험은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면 천사를 보내어 받아주실 것이라는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은 능력을 과시하는 명예욕에 대한 시험인데, 그 시험도 결국 보면 십자가를 회피하게 하는 시험입니다. 우리는 성전 꼭대기에서 뛰어내리고 누가 받아주는 것과 같은 환상적인 신앙의 유혹을 조심해야 합니다. 신앙의 정수는 환상적인 기적의 주인공이 되는 것이 아니라 묵묵히 십자가를 지는 것입니다.
셋째 시험은 자기에게 절하면 모든 것을 주겠다는 시험이었습니다. 그 시험도 결국 십자가를 거부하라는 시험입니다.
지금도 마귀는 끊임없이 “십자가를 지지 말라! 사명을 감당해서 뭐하느냐? 편하게 살라!”고 유혹합니다. 그 유혹에 넘어가면 육신은 편해도 영혼은 망하게 됩니다. 모세가 지팡이를 버리면 그 지팡이가 자신을 무는 뱀이 되고 그 지팡이를 손에 쥐면 홍해를 가르는 능력의 지팡이가 되듯이 십자가를 버리면 영혼도 망하게 되고, 십자가를 과감히 지면 오히려 능력 있는 삶이 펼쳐지게 될 것입니다.
그 사실을 사단은 알고 끊임없이 예수님이 십자가를 지지 못하게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영웅의 길을 포기하고 십자가의 길을 택하심으로 마침내 승리하셨습니다. 우리도 승리하는 길은 주님의 십자가를 지는 길밖에 없습니다. 가정에서, 사회에서 내 몫에 태인 하나님의 십자가를 지면 그때부터 영혼은 살고, 인생의 무거운 짐이 가볍게 느껴질 것입니다.
오늘도 사탄은 십자가를 버리고 돈과 권력의 꽃을 추구하라고 유혹합니다. 그러나 인생의 목적은 꽃이 아닙니다. 어느 대중가요 가수가 “난 꽃이 아니야!”라고 노래한 것처럼 우리는 사명에 관심이 없는 화류계 성도가 되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세상 영광을 위해 사명을 버리지 말고 오히려 내 사명 때문에 시간과 물질과 명예에 손해를 볼 수도 있어야 합니다. 그처럼 십자가를 기쁘게 지면 하나님이 반드시 그 헌신을 기억해주실 것입니다.
< 사명을 따라 살 때 주어지는 5가지 축복 >
사람이 사명을 버리는 것은 하나님의 축복을 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하나님께서 사명을 주시는 이유는 우리를 축복하시기 위해서 주신 것입니다. 사람이 사명을 따라 살면 어떤 축복이 주어집니까? 수많은 축복 중에 이 시간에는 5가지만 생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1. 사람을 주십니다.
살면서 누가 좋은 친구를 얻습니까? 남의 배려하는 사람은 친구가 많습니다. “자기를 위해 달라, 알아 달라, 섬겨 달라, 생각해 달라!”고 하는 ‘달라 맨!’은 친구가 없지만 남을 위해 주고, 알아주고, 섬겨주고, 생각해주는 ‘주라 맨!’은 친구가 많습니다.
가끔 교단 총회에 가보면 친구가 없는 목사님들이 있습니다. 그런 분들은 거의 예외 없이 ‘달라 목사님’입니다. 그런 목사님들은 어느 지역에 가도 전화를 걸 목사님이 없습니다. 반대로 친구가 많은 목사님들은 거의 예외 없이 ‘주라 목사님’입니다. 그런 목사님들은 어디에 가도 전화를 걸 곳이 많습니다. 전화를 걸면 즉시 와서 섬겨주고, 전화하지 않아도 어느새 알고 와서 섬겨줍니다. 오히려 전화하지 않으면 “왜 전화하지 않았느냐?”고 성화를 냅니다.
주는 마음으로 살면 많은 좋은 친구를 얻게 됩니다. 그 친구들이 나중에 인생 위기의 순간에 얼마나 많은 도움을 주는지 모릅니다. 자린고비처럼 살면 재산은 생겨도 재산보다 더 귀한 친구는 얻지 못합니다. 나눌 줄 알아야 하나님께서 친구를 주십니다.
그런데 나누는 삶만큼 소중한 삶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명을 따라가는 삶입니다.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사명을 이룰 수 있는 친구를 붙여주십니다. 인복이 있다는 사람을 보십시오. 대개 보면 사명에 충실한 사람입니다. 우리가 사명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 좋은 친구들을 많이 붙여주실 것입니다.
2. 물질을 주십니다.
사명을 따라 살면 하나님께서 사람만 주시는 것이 아니라 물질도 주십니다. 물질을 추구하며 살면 오히려 물질을 얻지 못하고, 사람을 추구하며 살면 오히려 사람을 얻지 못합니다. 그러나 사명을 따라 살면 물질도 얻고, 사람도 얻게 됩니다.
선교의 사명에 힘쓰면 이상하게 물질도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됩니다. 기독교 역사를 살펴보면 선교에 쓰임 받는 개인이나 민족은 언제나 복을 받았습니다. 로마, 스페인, 독일, 영국, 프랑스, 미국 등의 국가들이 언제 가장 나라가 힘 있는 나라, 능력 있는 나라로 뻗어나가게 되었습니까? 열심히 선교에 관심을 둘 때였습니다. 하나님은 선교 마인드를 가지고 힘써 나눔의 삶을 실천할 때 나눌 수 있는 물질적인 능력도 주실 것입니다.
제가 미국으로 공부하러 간 것은 선교사가 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리고 미국에서 선교를 교단의 최대 목적으로 삼는 미국 기독교 선교 연맹(The Christian & Missionary Alliance)의 신학교에서 공부를 하면서 전방 선교사보다는 후방 선교사가 저에게 더 적합한 것을 깨닫고, 공부를 마치고 ‘후방 선교사’의 사명을 가지고 다시 한국에 돌아왔습니다. 그리고 미국 CMA 출신으로는 한국에서 처음으로 교회를 개척했습니다.
처음 교회를 개척할 때 막막했습니다. 동역자도 없었고 재원도 없었습니다. 교회는 생각만큼 빠르게 성장하지 않았습니다. 요새는 장로교 교회도 성장이 어렵다는데 미국 CMA 교회로 교회성장을 이루는 것은 더욱 힘들었습니다. 그래도 언제나 후방 선교사로서 전방 선교사를 돕고, 많은 선교후보생을 배출하겠다는 꿈과 사명만은 잃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2000년부터 생각을 바꿨습니다. 동역자도 없고, 재원도 없지만 인터넷이란 틀을 이용해서 먼저 말씀 선교에 주력하기로 했습니다. 먼저 말씀으로 은혜 받게 하면 동역자도 생기고, 은혜 받은 동역자를 통해서 선교할 수 있는 능력도 주실 것이라는 확신을 가졌습니다.
그 생각은 별로 틀리지 않았습니다. 하나님께서 많은 숫자는 아니지만 선교에 동참하는 숨은 동역자를 보내주셨습니다. 그 중에는 거의 몇 년 동안 제가 전하는 말씀을 인터넷을 통해 꾸준히 접하니까 몸은 떨어져 있지만 거의 우리 교인처럼 여겨지는 분들이 생겼습니다. 그리고 그런 분들 중에서 물질적으로 헌신하는 분들도 생겼고, 심지어는 십일조를 보내는 분도 생겼습니다.
한번은 십일조 하는 분에게 “왜 선교헌금도 아니고 십일조를 하느냐?”고 물었습니다. 답은 간단했습니다. 비록 글로 전해지는 말씀이지만 그 말씀으로 은혜 받고 삶이 변하고 마음이 풍성해져서 저의 사역과 비전에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리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런 분들을 볼 때마다 심신이 피곤한 중에도 사역을 계속 할 수 있는 힘과 능력을 얻게 됩니다. 우리가 묵묵히 맡은 사명에 충실하면 하나님께서는 사람도 주시고, 물질도 주실 것입니다.
3. 좋은 마음과 정신과 성품을 주십니다.
우리나라는 옛날부터 오복이라고 해서 장수, 부, 권세, 건강, 그리고 자식 많은 것을 복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진짜 복은 정의감, 사명감, 책임감 등 정신적인 면이 풍성한 것입니다. 정신이 건강하지 않으면 오복이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 오복은 오래 가지 못하고 언젠가는 무너집니다. 그러므로 오복이 있으면 좋지만 보다 중요한 것은 정신적인 자산입니다.
미국에서는 아무리 유명한 국립공원에 가도 여관과 술집이 거의 없는데, 우리나라는 조금만 관광객이 모여도 러브호텔과 술집이 가득합니다. 좋은 곳에 갔으면 밖에서 자연을 보고 즐겨야 하는데 방안에서 즐기려고 하니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복 받은 모습입니까?
미국의 대학 근처에 가면 여관과 술집과 오락실 등을 하나도 찾기 힘듭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대학촌이 오히려 소돔과 고모라입니다. 대학에 가면 더 공부해야 하는데 더 공부를 멀리합니다. 그 중에서 가장 타락한 곳이 서울대학 주변의 신림동입니다. 사명이 없으면 정신이 망가집니다. 그러나 사명이 있으면 서울대학 주변의 소돔과 고모라에서도 최고의 고시촌이 생겨나게 됩니다.
또한 사명이 있으면 정신적으로 건강하게 되고, 매사에 자신감을 가지고 적극적으로 살게 됩니다. 그리고 어려운 고난이 있어도 마음이 넉넉합니다. 왜냐하면 자신은 사명 받는 존재라는 확신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고난조차 하나님께서 나를 잘되게 하시려는 경륜 가운데 이루어진 것을 믿기 때문입니다. 사람에게 사명이 없으면 상처와 불행은 크게 느껴지고, 사람에게 사명이 있으면 상처와 불행은 작게 느껴집니다. 그처럼 사명감을 가지고 살면 정신적으로 건강해지고, 시야도 넓어지고, 성격도 좋아지게 됩니다.
4. 건강을 주십니다.
육신의 건강은 마음의 건강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마음의 건강은 자기의 존재 의미를 느끼는 사명감에서 옵니다. “내가 이 가정에 필요한 존재이구나! 내가 이 교회에 필요한 존재이구나! 내가 하나님의 일에 필요한 존재이구나!”하는 생각을 하면서 열심히 사명을 이해하려고 할 때 삶의 따분함이 사라지고 정신적인 건강과 함께 육체적인 건강도 뒤따르게 됩니다.
미국에 해럴드 월터즈(Harold Walters)라는 TV 배우가 있었습니다. 어느 날, 그가 암으로 사형선고를 받았습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일리노이주의 블루밍턴 성극회에서 그에게 예수 수난극에서 예수 역을 맡아 달라고 했습니다. 그는 고민하다가 무대에서 죽을 각오를 하고 출연합니다. 그리고 연극 마지막 장면에서 십자가를 지는 장면을 연기할 때 그의 얼굴에서는 땀이 비 오듯이 흐르며 마치 온 몸이 용광로에 들어간 것 같았는데, 그때 기적적으로 그가 회복되었다고 합니다.
사람이 사명이 몰입하면 건강도 주어집니다. 민수기 20장 26절에는 아론의 대제사장복을 벗기는 순간 아론이 세상을 떠나는 장면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사람이 사명을 내던져버리면 사망의 음침한 골짜기에 처하게 되지만 사명을 붙들고 있으면 하나님께서 일할 수 있는 건강도 허락해주실 것입니다.
5. 행복을 주십니다.
사람이 행복하게 살려면 기본적으로 일이 있어야 합니다. 리더스 다이제스트에 실린 연구결과를 보면 복권 당첨으로 백만장자가 된 139명을 추적 조사해 보았더니 약 60%의 사람들이 1년 후에 다시 직장 생활을 시작했다고 합니다. 물론 돈을 벌기 위해서가 아니라 행복해지기 위해서였습니다. 사람에게는 일과 사명이 있어야 행복을 느낄 수 있습니다.
< 영혼을 구하는 사명이 최대의 사명입니다 >
우리는 어떤 사명을 가져야 할까요? 여러 가지 사명을 가져야 하지만 가장 소중한 것은 역시 영혼을 구원하는 사명입니다. 주님께서 사명적인 삶을 도전하시기 전에 무슨 말씀을 하셨습니까? “내 양을 먹이라!”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사명에 매인 삶을 살라고 하셨습니다. 무슨 말입니까? 양을 먹이는 일을 최대의 사명으로 알라는 말입니다.
복음 전파는 선택 사항이 아니라 필수 사항이고 가장 중요한 사명입니다. 내가 은혜를 받았으면 보다 많은 사람이 은혜를 받게 힘써야 진짜 은혜 받은 것입니다. 우리의 모든 삶은 복음 전파에 초점이 맞추어져야 합니다. 물론 다른 사명도 잘 이행해야 하지만 영혼 구하는 최대의 사명을 항상 최우선적으로 생각해야 합니다.
축구 시합에서 열심히 뛰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골을 넣는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우리가 신앙생활에서 골을 넣는 것처럼 중요한 것은 영혼을 구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 섰을 때 가장 중요하게 평가될 것은 바로 영혼을 구한 기록일 것입니다.
사정과 형편이 여의치 않아도 영혼 구하는 일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성경에서는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전도해야 한다고 말씀합니다. 우리는 사정을 따라 살지 말고 사명을 따라 살아야 합니다. 과거에 우리 신앙 선배들은 복음을 전하지 않으면 답답해서 견딜 수 없다고 했습니다. 우리도 그런 마음을 회복해야 합니다.
류관순 여사는 기차가 “칙칙폭폭”하는 소리를 낼 때 그 소리가 “독립만세!”라는 소리로 들렸다고 합니다. 우리도 다른 사람들의 한숨소리를 들을 때마다 “내 영혼을 살려 달라!”는 소리로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우리가 그 한숨소리를 외면하면 하나님은 그 피 값을 우리로부터 찾겠다고 했습니다.
이 세상에 영혼 구원보다 더 큰 사명은 없고, 더 큰 사랑도 없습니다. 그리고 영혼 구원보다 더 크게 하나님의 상급을 예비하는 것도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내게 이곳에 살게 하신 이유는 이곳을 복음화시키라는 뜻이 있고, 하나님께서 내게 직장을 주신 것은 그 직장을 복음화시키라는 뜻이 있습니다. 우리는 복음 전파의 사명을 꿈에도 잊지 말고 그 일을 위해서라면 내 모든 것을 걸 수 있어야 합니다.
제가 얼마 전부터 사랑매거진 사역을 시작했습니다. 사랑이라는 주제로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조금 더 다가서기 위해 시작했는데 그 사역을 시작하면서 얼마나 바빠졌는지 너무 힘들 때는 가끔 “이러다 하나님께 가나보다!” 하는 생각도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그래도 한 영혼이라도 더 복음에 마음을 연다는 생각을 하니까 기쁜 마음으로 임하게 됩니다. 우리는 영혼 구원을 위해서는 어떤 희생도 감수하려고 해야 합니다.
하나님의 최대 관심은 영혼 구원입니다. 우리의 삶의 최대 사명도 영혼 구원이고, 교회의 가장 우선적인 관심과 사명도 바로 영혼 구원입니다. 그 일을 위해 어떤 십자가도 기쁘게 지고 최선을 다할 때 우리는 이 땅에서 가장 행복하고 보람 된 삶을 살 수 있고, 저 하늘에서는 가장 영광스런 존재가 될 것입니다. 그런 복된 삶이 저와 여러분에게 넘치기를 바랍니다.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처음 사랑 (계 2:1-7) (0) | 2022.08.28 |
---|---|
이 전이 황무하였거늘 (학 1:1-6) (0) | 2022.08.28 |
그치지 않는 고통을 가진 자 (로마서 9: 1- 5) (0) | 2022.08.28 |
하나님으로부터 말미암는 인생 (로마서 9: 14- 18) (0) | 2022.08.28 |
주께서 남겨두신 씨 (로마서 9: 19- 29) (0) | 2022.08.28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