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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난.종려주일설교 : 겸손한 왕

by 【고동엽】 2022. 8. 22.

눅 19:28 ~ 40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 감람원이라는 산의 벳바게와 베다니에 가까이 왔을 때에 제자 중 둘을 보내시며 이르시되, 너희 맞은편 마을로 가라. 그리로 들어가면 아직 아무 사람도 타 보지 않은 나귀 새끼의 매여 있는 것을 보리니 풀어 끌고 오너라. 만일 누가 너희에게 어찌하여 푸느냐 묻거든 이렇게 말하되, 주가 쓰시겠다 하라 하시매, 보내심을 받은 자들이 가서 그 말씀하신 대로 만난지라. 나귀 새끼를 풀 때에 그 임자들이 이르되 어찌하여 나귀 새끼를 푸느냐. 대답하되 주께서 쓰시겠다 하고 그것을 예수께로 끌고 와서 자기들의 겉옷을 나귀 새끼 위에 걸쳐 놓고 예수를 태우니 가실 때에 저희가 자기의 겉옷을 길에 펴더라.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 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하나님을 찬양하여 가로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는 영광이로다... 누가복음 19:28-40.

   오늘은 예수님께서 나귀를 타시고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을 향해 가시는 종려주일입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예루살렘을 향하여 앞서서 가시더라”(눅19:28). 예루살렘으로 가시는 길은 죽음의 길이요, 고난의 길이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은 “앞서서” 가셨습니다. 영원 전부터 계획하고 실행해온 구속사를 드디어 완성하는 마지막 주에 예수님은 제자들보다 앞서서 가신 것입니다. 고난의 주로 오셔서 마지막 고난의 순간을 적극적으로 맞이하시는 예수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습니다. 나귀를 타고 입성하시는 예수님이 어떤 분인지 알아봅시다.

   첫째로,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시는 왕이십니다. 28-34절에 보면, 예수님께서는 예루살렘에서 2km 떨어져 있는 베다니에서 아침을 드시고 떠나시면서 예루살렘과 베다니 중간에 있는 벳바게라는 작은 동네에 베드로와 요한을 보내셨습니다. “저 동네에 들어가면 입구에 나귀 두 마리가 묶여있는데, 그 중 아직 사람을 태워보지 않은 어린 나귀를 끌고 오라. 주인이 왜 푸느냐 물으면 ‘주께서 필요해서 쓰려고 하신다’ 하면 순순히 내어줄 것이다.”

   예수님은 벳바게에 가보지도 않으시고 이 간단한 사건에서 7가지 사실을 정확히 알아맞히셨습니다. 첫째, 동네입구에 나귀가 있고, 둘째, 두 마리가 있고, 셋째, 그 중 한 마리는 사람이 탄 적이 없는 새끼나귀이며, 넷째, 나귀가 매여 있고, 다섯째, 매인 것을 풀면 주인이 왜냐고 물어볼 것이며, 여섯째, 주께서 쓰시겠다 하면 그 사람이 가만히 있을 것이며, 일곱째, 그 주인이 순응한다는 것입니다. 7가지 사실이 한 사건에서 우연히 다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정확히 계산해 내기는 어렵지만, 분명한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는 것입니다.

   그러면 예수님은 어떻게 다 아셨을까요? 이 사건은 예수님이 우리와 같은 보통 사람 정도가 아니라 하늘에서 오신 하나님의 아들이요, 시간과 공간을 초월하는 모든 것을 보고 계신 전지한 능력자라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예수님은 모든 것을 아십니다. 우리의 마음도, 형편도 다 아십니다. 그러므로 마음이 답답하고 미래에 대한 걱정이 있으면 예수님께 여쭤보시기 바랍니다. 그분이 여러분에게 말씀해 주시고, 보여 주시고 인도해 주실 것입니다.

   둘째로, 예수님은 사랑과 존경을 받는 겸손한 왕이십니다. 제자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얹고 예수님을 그 위에 앉으시게 했으며, 또한 겉옷과 종려나무 가지를 길에 펴서 예수님이 타신 나귀가 밟고 지나가게 했습니다. 사람들은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호했습니다. 왜 그들이 이토록 예수님께 사랑과 존경을 보였을까요? 심은 대로 거두신 것입니다. 예수님은 언제나 사람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멸시와 천대를 받는 사람들을 사랑하셔서 그들과 함께 음식을 잡수시고 교제를 했습니다. 그래서 바리새인들은 예수님을 비웃으며 “저 자는 죄인들의 친구다. 거룩한 하나님의 아들이란 자가 어떻게 저런 죄인들과 사귄다는 말인가!” 했지만, 그 말 그대로 예수님은 가난한 자를 사랑하셨고, 불쌍한 자를 돌보셨고, 병든 자와 죄인취급 받던 사람들을 끌어안으셨습니다. 제자들은 지난 3년 동안 예수님의 이런 일관된 모습을 보며 감동했기 때문에 예수님을 그토록 존경하고 사랑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예수님에 대한 존경과 사랑은 강요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라 감동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가슴속에서 우러나오지 않았다면 그들은 겉옷을 벗어 나귀 위에 올려 드리지도, 길에 깔아드?層?않았을 것입니다. 예수님이 먼저 사랑과 존경을 보여주셨더니, 제자들도 사랑과 존경을 돌려주었습니다. 예수님은 공부도 못한 갈릴리 어부들에게 하나님의 일을 맡겨주시고, 인간의 소중함과 가치를 보여주시고, 영원한 생명과 보람된 삶을 가르쳐주시고, 몸과 마음과 영혼의 건강을 지켜주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은 여러분과 저를 한없이 사랑하십니다. 사람들은 때때로 우리를 귀하게 보지 않지만, 기억하십시오. 하나님께서는 여러분과 저를 귀하게 보시고 우리를 사랑하십니다. 우리가 주님을 소중히 여기며 찬양하며 섬기는 것은 주님이 우리를 소중히 여기시기 때문입니다. 우리도 그들처럼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목소리를 높여 하나님의 사랑과 그 뜻을 표현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도 주위의 연약한 자를 사랑해야 합니다.

   셋째로, 예수님은 많은 기적을 행하신 전능자이십니다. 37절에 보면 “이미 감람산에서 내려가는 편까지 가까이 오시매 제자의 온 무리가 자기의 본바 모든 능한 일을 인하여 기뻐하며 큰소리로 하나님을 찬양하여”라고 했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이 무엇입니까? 다른 복음서들을 참고해 보면, 그들은 바로 지난주에 베다니에서 죽었던 나사로가 다시 살아나는 것을 보았습니다. “나사로를 무덤에서 불러내어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실 때에 함께 있던 무리가 증거한지라”(요12:17). 예수님이 예루살렘으로 들어오신다고 하니 나사로의 소문을 들은 사람들이 전부 몰려와서 찬양을 한 것입니다. 예수님은 수많은 기적을 일으킬 수 있는 능력의 하나님이십니다.

   누가 찬양을 하였습니까? 예수님의 능력을 보고 체험한 사람들입니다. 죽은 자를 살리셨고, 소경의 눈을 뜨게 하셨고, 병든 자를 고쳐주셨고, 앉은뱅이를 일으켜주셔서 그들로 하여금 주님을 찬송하는 삶을 살게 하셨습니다. 문둥이 시몬이 낳았고 마리아의 동생 나사로가 살아났습니다. 그들이 가만있을 수 없습니다. 나서서 찬양했을 것입니다. 여러분, 우리는 능력이 부족해도 예수님은 능력이 있으십니다. 영적, 육적으로 병들었던 우리도 예수님을 만났기 때문에 새 인생을 살게 되었습니다. 예수님께 능력이 있습니다. 그분이 여러분의 병을 고칠 수 있습니다. 여러분에게 평화를 줄 수 있습니다.

여러분의 삶을 풍요롭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 나아와 부르짖으십시오.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주께서 원하시면 내 회사의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음을 믿습니다. 주여, 역사하옵소서. 호산나, 지금 구원하소서.” 그분에게 다가가면 그 분의 능력을 체험할 수 있습니다. 영적 체험이 있어야 하나님을 찬양할 수 있습니다. 영적 체험을 하려면 예수님께 와야 합니다. 예수가 소망이요, 예수가 생명이요, 예수가 문제의 해결책임을 깨닫고 그분을 찾아오시기 바랍니다. 그분을 만나 대화하시면 그분이 우리의 삶에 반드시 역사하실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의 이름만 들어도 감격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예수를 믿은 날부터 오늘까지 그분과 가까이 살면서 온갖 체험을 했기 때문입니다. 신앙적 체험이 있는 사람은 누가 뭐라 해도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을 사랑하고 존경하니까, 주님이 오실 때 환호성을 지르고 종려나무가지를 흔들며 환영하고 싶을 것입니다. 여러분도 주님께 오셔서 주님의 능력을 체험하시기 바랍니다. 주님과 더 가까워지시기를 바랍니다.

   요한복음 12:13에 보면 사람들이 예수님을 환영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 곧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외쳤습니다. ‘호산나’는 ‘지금 나를 구원하소서!’ 라는 뜻입니다. 예수님은 우리가 어떤 형편, 어떤 모습으로 있든지, 육적, 영적, 심적, 경제적, 인간적, 사회적, 환경적으로 우리를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이여, 이스라엘의 왕이시여” 라고 외치며 종려나무를 가지고 예수님을 맞으러 나갔습니다.

   시편 118:24-29을 첫 부분을 인용했습니다. “이날은 여호와의 정하신 것이라. 이날에 우리가 즐거워하고 기뻐하리로다. 여호와여 구하옵나니, 이제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우리가 구하옵나니, 이제 형통케 하소서. 여호와의 이름으로 오는 자가 복이 있음이여! 우리가 여호와의 집에서 너희를 축복하였도다. 여호와는 하나님이시라. 우리에게 비취셨으니 줄로 희생을 제단 뿔에 맬지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께 감사하리이다.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주를 높이리이다. 여호와께 감사하라. 그는 선하시며 그 인자하심이 영원함이로다.” 여기서 형통케 해달라는 것은 하나님의 역사가 우리의 삶 속에 나타나달라는 뜻입니다. 그들은 말씀의 일부를 생각하며 “호산나, 찬송하리로다. 주의 이름으로 오시는 왕이여! 하늘에는 평화요 가장 높은 곳에서는 영광이로다!” 찬송한 것입니다.

   스가랴 9:9을 또 인용했습니다. “시온의 딸에게 이르기를, 네 왕이 네게 임하나니 그는 겸손하여서 나귀를 타나니 나귀의 작은 것 곧 나귀새끼니라.” 예수님은 왕이시지만 겸손하게 나귀를 타고 오셨습니다. 만약에 예수님께서 군대를 이끌고 갑옷을 입고 준마를 타고 칼을 빼들고 오셨다면 누가 감히 옆에 접근할 수 있었겠습니까? 그러나 능력자 하나님,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 지난 3년 동안 인간들에게 사랑과 존경을 온전히 주셨던 바로 그분이 나귀를 타고 겸손하게 나타나셨기에 아무도 두려워하지 않고 오히려 친근감을 느끼면서 어린 아이들까지도 그분께 다가설 수 있었던 것입니다.

   여러분, 권세와 겸손은 반드시 같이 가야 합니다. 권세를 가진 사람이 교만하여 힘을 과시하면 존경을 받지 못합니다. 그들이 왜 예수님께 겉옷을 벗어 가시는 길에 깔아드렸습니까? 온갖 기적을 행하시고 모든 것을 아시는 하나님의 아들이 겸손하게 나타나셨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가운데 권세를 가진 분이 계십니까? 돈이 많은 분이 계십니까? 지식이 많고 학위가 높으신 분이 계십니까? 인기가 있는 분이 계십니까? 예수님처럼 겸손하십시오. 능력이 많을수록 겸손하면 더 존경과 사랑을 받습니다. 반면에 힘이 있을수록 교만하여 남을 탄압하면 혁명이 일어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믿는 하나님의 백성입니다. 우리는 예수님을 닮기 원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축복하실수록, 은혜를 주실수록, 높여주실수록 예수님처럼 겸손해지기 원합니다. 그리하여 수많은 사람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으며 더 많은 사람들을 섬길 수 있는 기회들이 오기를 원합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예수님을 환영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바리새인들입니다. 그들은 예수님께 “선생이여, 당신의 제자들을 책망하소서!”(39절) 라고 꾸짖었습니다. 예수님이 수많은 사람들로부터 찬양을 받으시는 것을 보고 그들은 매우 속상하고 기분이 나빠졌습니다. 기뻐하는 자들과 함께 기뻐할 줄 모르는 사람들입니다. 이에 예수님은 “만일 이 사람들이 잠잠하면 돌들이 일어나 소리를 지를 것이다.” 하셨습니다. 왜 바리새인들은 하나님의 아들이 구원자로 오셨는데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반대했을까요? 그들은 율법주의자라 따지는 것이 많았습니다. 구원자가 나타났으면 주의 날이니 기뻐하고 즐거워해야 할 텐데, 뭘 그리 따지는 게 많습니까? 그들은 법도 많고 조건도 많으니 속상한 겁니다.

그들은 또한 완벽주의자들이었습니다. 남들이 조금만 잘못해도 그것을 문제 삼아 남도 고생시키고 자신도 고생했습니다. 그리고 그들은 위선자들입니다. 겉과 속이 다릅니다. 결국 예수님을 환영하기는커녕 오히려 못마땅해 여겼습니다. 이 얼마나 대조적입니까? 예수님은 인간에게는 위기입니다. 인간은 누구나 예수님에 대하여 개인적인 결단을 해야 합니다. 그분께 엎드려 절하든지, 그분을 십자가에 못 박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합니다.

   겸손하여 나귀를 타고 오신 왕 예수 그리스도! 모든 것을 아시고, 모든 능력이 있으시고, 모든 죄인을 사랑하여 구원하러 오신 주님을 마음껏 찬양하며 묵상하며 고난주간을 보내시기 바랍니다. 마지막으로 예루살렘에 들어가신 예수님은 이제 한 주 동안 우리 때문에 고난을 받으십니다. 그것은 바로 나를 위한 고난이요, 내 죄 값을 대신 치르기 위한 고난입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영생과 능력과 소망과 미래를 주시기 위하여 오셨습니다. 영광의 왕께서 우리를 위하여 겸손하게 오신 것과, 그분의 찢기심과 피 흘리심을 묵상하며 감사하며 성찬을 받음으로 우리의 영혼이 새로운 건강을 얻기를 원합니다.


출처/김상복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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