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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날 (베드로후서 3:8-13)
부동산 투자에 관심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 이런 말을 주고 받는다고 합니다. “당신은 천당에서 살고 싶습니까? 분당에서 살고 싶습니까?”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분당”이라고 대답한다고 합니다. 언젠가는 천당에 가겠지만, 이땅에서 사는 동안은 분당처럼 살기에 쾌적하고 부동산 가격이 오르는 곳이 좋겠다는 것입니다.
얼마 전에 건설교통부장관이 수도권 지역에 신도시를 개발한다고 발표한 직후, 그 후보지로 꼽힌 인천 검단, 파주, 화성 동탄 지역은 미분양 아파트가 동이나고, 집값이 크게 뛰었다고 합니다. 집을 팔려고 계약했던 사람들도 계약을 취소하는 사태가 속출하여 큰 혼란을 빚었다고 합니다.
이처럼 사람들은 돈이 된다고 하면 무슨 일이든지 눈에 불을 키고 덤벼듭니다. 그러나 사람들은 거의 자기의 육체와 세상에서만 자기 것을 투자하지, 하늘나라에 투자하는 일에는 별로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물질, 명예, 권력 만을 추구하다가는 언젠가 맞이하게 될 최후의 순간에 비참한 처지를 면하지 못할 것입니다. 세상 그 어떤 것이라 하더라도 영원한 것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이 모든 것이 사라지고 소용이 없게 되는 그때를 생각하고 미리 준비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대림절 둘째 주일을 맞이하는 오늘, 우리는 “하나님의 날”에 대한 말씀을 함께 나누려고 합니다. “하나님의 날”이란 예수 재림의 날입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예수의 재림의 날을 두려움으로 바라봅니다. 적어도 자기가 살아있는 동안에는 맞이하지 않기를 바라기도 합니다. ‘이렇게 좋은 아파트와 고급승용차를 놓고 어떻게 예수의 재림을 맞이하란 말인가’하고 그날이 좀 늦어졌으면 좋겠다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는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2)고 말하면서, “하나님의 날”이 두려워하거나 피하고 싶은 날이 아니라, 우리가 꿈꾸던 완벽한 세상이라고 증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기독교 역사상 이 “하나님의 날”에 대한 오해가 많았습니다. 오늘 이 시간을 통해 그날에 대해 다시 한번 묵상함으로써, 하나님의 은혜가 넘치기를 바랍니다.
1. 주의 재림은 확실합니다(9절)
최후의 심판이니, 예수의 재림이니 하는 말을 교회에서 하면, ‘오늘날처럼 첨단과학의 시대에 어찌 이런 허황된 이야기가 가능하냐’고 하면서 고개를 갸우뚱하는 지성인들이 많습니다. 그들은 또 ‘이 세상이 창조된 이후 지금까지 이 우주 만물이 변함없이 존속되어 온 것처럼,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최후의 심판이나 예수의 재림은 과학이 발달하기 전에 사람들이 생각했던 종교적인 공상일 뿐이다’ 이렇게 말합니다. 경험과 이성을 중요시하는 과학적인 사고를 가진 사람들이라면, 이렇게 말하는 것이 당연한 것인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착각일 뿐입니다. 지금까지 이 세상에는 아무런 일도 없었던 것이 아니라, 세상이 뒤바뀌는 일이 몇 차례 있었습니다. 베드로후서 2장에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는 것처럼, 노아시대에는 큰 홍수가 나서 모든 인류와 동식물이 멸망을 당하고, 살아남은 노아 가족과 동식물을 시작으로 다시 생명의 역사가 시작되었습니다. 지엽적으로 보더라도 소돔과 고모라는 하나님의 진노를 사서 불로 심판을 당하였습니다. 즉 하나님께서는 언제든지 하나님의 자유하신 뜻 안에서 이 세상에 종말을 고하시고, 모든 것을 다시 시작하실 수 있는 전능하신 분이십니다. 이러한 하나님께서 최후의 심판을 통해 “경건한 자는 시험에서 건지시고 불의한 자는 형벌 아래” 두겠다고 말씀하셨습니다(벧후 2:9).
예수께서도 최후의 심판에 관해 여러 차례 말씀해 주셨습니다. “그때에 인자의 징조가 하늘에서 보이겠고 그때에 땅의 모든 족속들이 통곡하며 그들이 인자가 구름을 타고 능력과 큰 영광으로 오는 것을 보리라”(마 24:30),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 생각지 않은 때에 인자가 오리라”(마 24:44), “인자가 자기 영광으로 모든 천사와 함께 올 때에 자기 영광의 보좌에 앉으리니 모든 민족을 그 앞에 모으고 각각 분별하기를 목자가 양과 염소를 분별하는 것같이 하여 양은 그 오른편에, 염소는 그 왼편에 두리라”(마 25:31-33).
이밖에도 그 날에 대한 성경의 증거는 많이 있습니다. 성경은 거짓이 없는 하나님의 말씀입니다. 그러므로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약속은 언젠가는 반드시 성취될 것입니다. 그럼 ‘어찌하여 초대교회때 약속한 말씀이 아직도 이뤄지지 않고 있느냐’고 생각하는 이들이 있을 것입니다.
마태복음 24장 14절을 보면, 예수님께서 “이 천국 복음이 모든 민족에게 증거되기 위하여 온 세상에 전파되리니 그제야 끝이 오리라”(마 24:14)고 말씀하십니다. 본문 9절에서도 “주의 약속은 어떤 이의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치 않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벧후 3:9)고 말하고 있습니다. 즉, 하나님의 관심사는 ‘심판’에 있는 것이 아니라 ‘구원’에 있기 때문에, 천국 복음이 땅 끝까지 전해져서 아직도 구원받지 못한 많은 사람들이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하나님께서는 지금까지 기다리고 계신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도 하나님의 피조물일 뿐입니다. 우리가 보기에는 그 시간이 매우 긴 것 같지만, 하나님에게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을 뿐입니다. 인간이 살아가는 시간에 매이는 하나님이 아닙니다.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하나님께서 정한 시간에 그날은 반드시 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날은 우리의 생애 사상 최고의 날이 될 것입니다. 기대하시길 바랍니다.
2. 그날에 대비하기 위해서 경건하게 살아야합니다(11절)
그런데 그 날이 언제 올까요? 예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관심은 여기에 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딱 잘라 말씀하십니다. “그 날과 그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마 24:36). 예수님께서는 “생각지 않은 날, 알지 못하는 시간에” 인자의 재림이 있을 것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성경에서의 관심은 ‘그날이 언제냐’가 아니라, ‘그날을 어떻게 기다리느냐’에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그러므로 깨어 있으라”(마 24:42), “이러므로 너희도 예비하고 있으라”(마 24:44)고 말씀하셨습니다.
본문에 보면 그날이 “도적같이” 닥친다고 하였습니다. 도적이 언제 올지 모르기 때문에 언제나 대비하고 있어야 합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 날을 예비하고 대비해야 하겠습니까? “너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뇨.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벧후 3:11-12).
하나님의 나라에 참여하기 위해서 우리는 깨어있는 삶, 곧 경건한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날이 오는데 세상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만 좇아 살다가 어찌 그날 주님을 맞이할 수 있겠습니까? 우리는 거룩한 생활을 하다가 주님을 맞이해야 합니다.
정신병원에서 환자를 집으로 돌려 보낼 때, 환자가 정말 퇴원할 만큼 좋아졌는지 테스트하는 방법이 있다고 합니다. 수돗물이 나오는 방에 미리 수돗물이 조금씩 흐르도록 수도꼭지를 조금 틀어 놓습니다. 바닥에는 물이 흥건히 고여 있습니다. 그러면 의사는 환자에게 걸레를 들고 물을 닦으라고 합니다. 정상적인 사람은 수돗물이 열려 새고 있는 것을 알기 때문에 수도꼭지를 잠그고 바닥의 물을 닦습니다. 이런 사람은 퇴원을 시켜도 됩니다. 그러나 어떤 환자는 수도꼭지를 내버려두고 방바닥만 부지런히 닦습니다. 바쁘게 바닥을 닦지만 그는 아직 퇴원할 수 없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볼 때도 아직 치료가 필요한 사람이 많습니다. 그들은 문제의 근원을 쳐다볼 생각도 하지 않습니다.
토마스 케플러(Thomas Kepler)의 명저 “성자와의 여행(A Journey with Saints)에서 성서의 위인과 역사상 위인을 연구하면서, 훌륭한 사람에 대해 이렇게 정의를 내리고 있습니다.
“훌륭한 사람들은 단순히 시간의 중심에 하나님을 두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훌륭한 인물들은 결코 서두르거나 바빠 보이지 않았습니다. 그들의 생애는 여유있게 보였습니다. 그들은 아주 사소한 일도 하나님과 연결시켜 생각했습니다. 산다는 것은 하나님 틈 안에 있는 것이었습니다.”
우리들도 하나님 안에서 사는 것처럼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살다가 그 날을 맞이해야 하겠습니다.
3. 그날을 사모해야 합니다.(13절)
본문에서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13절)고 했습니다. 우리는 비록 땅에서 살고 있지만, 땅에 매이지 않고 하늘에 소망을 두고 살아야 합니다. 하늘의 소망을 잃어버린 사람들은 땅엣 것에 집착합니다. 땅엣 것에 집착을 갖게 되면 욕심을 갖게 됩니다. 이 욕심이 죄를 낳고, 사망을 낳습니다.(약 1:15).
욕심에 사로잡힌 사람은 세상 것만 탐하게 됩니다. 14세기 벨기에의 황제인 레이몬드 3세는 친동생의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기고 말았습니다. 구테타로 정권을 빼앗은 동생은 차마 형을 죽이지는 못하고 감방에 가두어 놓았습니다. 그런데 그 감방은 특별히 설계가 되어 있었습니다. 몸집이 큰 사람은 빠져나올 수 없도록 작게 만들어 놓은 것입니다. 대신 날씬한 사람이라면 어렵지 않게 나올 수 있었습니다. 그런데 식욕이 왕성한 레이몬드 3세는 뚱뚱해서 도저히 빠져 나올 수 없었습니다. 하지만 열심히 노력해서 체중을 줄일수만 있다면 여유있게 빠져나올 수가 있었습니다.
동생도 형이 그 감옥에서 나올 수만 있다면 자유를 주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감옥에 갇힌 레이몬드 3세는 먹는 것을 절제하고 다이어트만 잘하면 자유의 몸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형이 다이어트를 하지 못하도록 매일 그 감방에 온갖 맛있는 음식을 들여보냈습니다. 레이몬드 3세는 갈수록 더 뚱뚱해졌습니다. 맛있는 음식의 유혹을 이겨내지 못한 것입니다. 결국 레이몬드 3세는 평생을 감옥에서 보냈습니다. 그는 철창의 포로가 아니라 식욕의 포로가 되었던 것입니다. 그는 결국 스스로 자유를 포기한 사람이었습니다.
오늘날에도 우리 주변에는 이 레이몬드 3세 같은 사람이 얼마나 많은지 모릅니다. 스스로의 욕심에 끌려다니며 결국 자기 자신을 잃어버린 채, 불행한 삶을 사는 사람들이 너무 많습니다. 내일의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기보다, 오늘 당장 눈 앞에 보이는 맛있는 음식이나 먹고 보자는 식으로, 자신의 유익과 세상적 쾌락만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여러분은 어떻습니까? 영적으로 눈이 어두워 그날을 기다리지 않고 허송세월을 보내는 일이 없도록 그 날을 사모해야 합니다.
한편, '새 하늘과 새 땅'은 구약성경과 유대 묵시문학에 나타나며 신약성경에서도 받아들여져 나타나는 개념입니다. 이것은 하늘과 땅이 새롭게 창조되어 새로와지고 완전해짐을 시사합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날'이 죄악된 세상과 피조물에 대해서는 멸망과 재앙의 날이 될 것이지만,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죄악과 세상의 고난을 도말하는 기쁨의 날이 될 것임을 기억하고 기대해야 할 것입니다.
베드로는 새 하늘과 새 땅을 소망으로 기다리는 그리스도인들이 어떻게 경건한 삶을 실천해야 할 것인가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습니다. 거짓 교사에게 미혹되어 방종하는 삶을 지양하고, 재림을 소망하는 자들답게 모든 것에 초월하여, 이 세상에 집착하지 않고 살아야 할 것입니다. 이런 삶의 기준은 세상의 그 어떤 것에 있는 것이 아니라, 예수의 의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의에 합당한 삶을 사는 것이야말로 경건한 삶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는 모두 빈손으로 왔다가 빈손으로 가야만 하는 사람들입니다. 빈손으로 떠나야 할 이 세상에 미련을 두고 살아가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은 없을 것입니다. 우리는 언젠가 찾아오게 될 그 날을 바라보며 준비하는 삶을 살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세상에서 무책임하게 사는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어디에도 얽매이지 않기 때문에 자유로운 가운데, 맡겨진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입니다. 그 사명은 곧 주님을 섬기며, 이웃을 섬기는 사는 것입니다. 여기에 하나님의 나라가 보일 것입니다.
출처/전병금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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