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 주제별 설교 3,276편 】◑/교회 설교 110편

좋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 (느헤미야 12장 44-47절)

by 【고동엽】 2022. 8. 9.
전체 목록가기 교회 목록 돌아가기
   

좋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   (느헤미야 12장 44-47절)


요즘 일부 교회들은 ‘열린 예배’를 지향합니다. 그런 교회에서는 예배 시간에 멀티비전을 이용하고, 강단은 무대처럼 조명세트를 설치해서 드라마, 무용, 찬양 등으로 예배를 돕습니다. 강대상은 큰 강대상 대신 작고 투명한 이동식 강대상을 사용하고, 과거의 예배형식을 깨고 현대적인 스타일을 추구하고, 절대 강요하지 않고 편안한 분위기를 만들려고 합니다. 그래서 목사나 안내위원 등이 자연스런 복장을 하고 심지어는 청바지를 입기도 합니다.

릭 워렌 목사님은 영혼 구원이라는 목적이 이끄는 교회가 되려면 불신자들을 더 이끌 수 있도록 교회가 열려야 한다고 주장합니다. 음악도 현대인의 특성에 맞게 크리스천 록을 부르면서 크리스천 록을 시편에 나오는 표현인 ‘새 노래’라고 주장합니다. 그래서 그는 교회가 해야 할 가장 중요한 일 중의 하나가 오르간을 밴드로 대체하는 것이고, 전통적인 성가대와 찬송가에 대한 선호는 우상숭배의 죄를 짓는 것이라고 했습니다.

워렌 목사님은 자신의 교회가 록 음악을 수용한 이유는 설문 조사 결과 교인의 96%가 현대 음악을 듣기 때문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전도 대상자에게 맞는 노래를 해야 하기 때문에 더 이상 찬송을 부르지 않기로 전략적 결정을 했다고 합니다. 그는 강렬한 비트를 가진 헤비 록도 좋은 의도로 노래하고, 좋은 가사를 가지고 있으면 괜찮다고 합니다. 그런 주장은 목적이 좋다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오해받을 수 있습니다.

또한 열린 예배를 주창하는 사람들은 성도를 고객(Customer)으로 봅니다. 열린 예배를 드리는 미국의 어떤 교회는 전화하면 “고객 서비스입니다(Customer Service)”라고 전화를 받습니다. 그래서 무엇이든지 고객 위주입니다. 한국은 조금 다르지만 미국에서 열린 예배를 드리는 목회자들의 다수는 설교할 때 회개, 거룩함, 십자가, 인내 등에 대해서는 별로 설교하지 않습니다. 그런 설교는 고객에게 부담을 주는 고객 위주의 설교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열린 예배는 불신자들에게 조금 더 다가가기 좋고, 일부 교회에서는 교회성장에 큰 도움을 줍니다. 그러나 그처럼 세상 흐름에 적합한 예배가 영혼 구원에 적합한 예배인가 하는 것에는 의문이 많습니다. 실제로 한국에 열린 예배가 등장하는 시점은 한국교회의 마이너스 성장기와 맞물려 있습니다. 세상을 향해 너무 열리면 오히려 전도의 문이 닫히게 됩니다. 세상과 교회의 구별이 없어지면 불신자들이 편안해서 교회에 더 찾을 수도 있지만 오히려 구별이 없기 때문에 “교회도 별 차이 없네?”하면서 덜 찾을 수도 있습니다.

팀 포터 목사님은 릭 워렌의 책 ‘목적이 이끄는 교회(The Purpose Driven Church)’의 문제점에 대해 이렇게 지적했습니다. “장삿술에 이끌린 목회는 불신자의 요구에 맞춰 결국 불신앙에 이르게 될 암(癌)이다.” 요새 많은 목사님들은 불신자들을 교회로 이끈다는 명목으로 행하는 여러 가지 세속적인 교회의 경영 전략들에 대해 심히 염려하고 있습니다.

지금 새벽기도가 각종 훈련 프로그램으로 대치되고, 예배가 콘서트로 대치되고, 진실함과 거룩함이 교인 숫자와 성공주의로 대치되고, 헌신과 충성이 교회행정과 시스템으로 대치되고 있습니다. 또한 교인 수 느는 것을 복과 성공의 기준으로 여겨 그 목적을 이룰 수 있다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습니다. 그처럼 목적을 위해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으면 교인 숫자는 늘 수 있을지 몰라도 하나님께서 기뻐하는 교회가 될 수는 없습니다.

요새 미국의 일부 청소년 찬양 집회는 마치 나이트클럽의 록 콘서트 같습니다. 그 집회의 안내 위원들은 남자들이 귀걸이를 하고 이상한 차림을 하기도 합니다. 한국과는 달리 미국에서 불려지는 현대 기독교 음악(CCM)의 다수는 록 음악입니다. 록은 록앤롤(rock and roll)의 약자로 ‘쿵쿵거리고 구른다’는 뜻을 가진 성적 욕망을 촉발시키는 음악으로 자극적이고 반복적인 비트와 고음으로 사람을 흥분시킵니다. 우리는 그런 음악을 경계해야 합니다.

이사야 14장 11-12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네 영화가 스올에 떨어졌음이여 네 비파 소리까지로다 구더기가 네 아래에 깔림이여 지렁이가 너를 덮었도다/ 너 아침의 아들 계명성이여(O Lucifer, son of the morning) 어찌 그리 하늘에서 떨어졌으며 너 열국을 엎은 자여 어찌 그리 땅에 찍혔는고,” 루시퍼(사단)가 하늘에서 떨어질 때 비파 소리도 떨어졌다는 말씀은 마지막 때에 사단의 최후의 강력한 공격무기가 음악이 될 것임을 암시합니다.

우리는 음악도 가려들을 줄 알아야 합니다. 물론 복음성가와 CCM 중에는 좋은 찬양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크리스천 록과 같은 음악들은 경계해야 합니다. 뿐만 아니라 불신자들을 전도한다는 명목으로 내세우는 수많은 교회 성장 방법론들 중에 잘못된 것들도 많습니다. 우리는 바른 분별력을 가지고 교회를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교회로 만들기 위해 더욱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 좋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 >

오늘 본문은 성벽 봉헌식을 성대하게 끝내고 있었던 이스라엘 백성들 사이에 성전과 성전 종사자들을 위한 자발적인 헌신이 나와 있는 장면입니다. 이 장면을 통해 교회를 사랑하고 좋은 교회를 만드는 방법에 대한 몇 가지 원리를 배우게 됩니다. 그것이 무엇일까요?

1. 교회 곳간을 채워야 합니다

본문 44절 말씀을 보십시오. “그 날에 사람을 세워 곳간을 맡기고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곧 율법에 정한대로 거제물과 처음 익은 것과 십일조를 모든 성읍 밭에서 거두어 이 곳간에 쌓게 하였노니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당시 백성들은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제사 및 성전 봉사 사역을 맡은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의 중요성을 인식했습니다. 그래서 율법에 정한 대로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에게 돌릴 것, 즉 거제물과 처음 익은 열매와 십일조를 거두어 따로 구별해서 성전 곳간에 쌓아놓게 한 후에 성전을 섬기는 사람의 생활과 성전 운영에 사용하게 했습니다. 제사장들을 귀하게 보기 시작하면서 바치고 드리는 삶을 새롭게 한 것입니다.

주님은 “네 물질이 있는 곳에 네 마음도 있다”고 하셨습니다. 교회를 사랑하는 가장 중요한 표식 중의 하나가 헌금생활을 잘하고 있느냐를 통해서 알 수 있습니다. 감리교의 창시가 웨슬레는 주머니가 회개하지 않은 회개는 진짜 회개가 아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헌물과 처음 것과 십일조를 하나님의 사역에 드리기를 원하십니다.

어떤 분은 십일조가 율법시대인 구약 시대의 의무이지 은혜시대인 신약 시대에는 상관이 없는 계명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은혜는 방종이 아닙니다. 더 큰 은혜와 사랑을 받았다면 더 큰 헌신을 해야 합니다. 그런 의미에서 십일조는 구약 시대의 성도에게는 ‘기본 의무’이지만 신약 시대의 성도에게는 ‘최소한의 의무’로 받아들이는 것이 좋습니다.

2. 서로를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

왜 유다 백성들이 성전의 곳간을 채울 생각을 했습니까? 본문 44절 하반부 말씀을 보십시오. “이는 유다 사람이 섬기는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을 인하여 즐거워함을 인함이라.” 당시 성벽 봉헌식을 하면서 모든 백성들 사이에 제사장들과 레위 사람들로 인해 기쁨과 감사와 즐거움이 넘치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교회에서는 사역자와 평신도 사이의 관계뿐만 아니라 모두가 서로를 즐겁게 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한 사람도 미워하지 말아야 합니다. 물론 사람인지라 미운 사람이 생길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실수가 없으신 하나님께서 그 사람도 우리 곁에 있게 하셨습니다. 우리는 그 사람을 통해 사랑과 용서와 마음 넓히는 훈련을 잘해야 합니다. 군대에 가면 훈련을 돕는 조교들이 있습니다. 훈련이 힘들 때는 가끔 그 조교들이 미운 생각도 들지만 그래도 조교를 인정하고 잘 훈련받으면 좋은 군사들이 될 수 있습니다.

우리는 교회에서 서로를 즐겁게 해주려고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그것을 위해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나’를 감추는 것입니다. 교회에서는 ‘나’를 드러내지 말아야 합니다. 나 한 사람이 중요한 사람이지만 “내가 없으면 안 된다!”는 착각도 버려야 하고, “누가 없으면 안 된다!”는 오해도 버려야 합니다.

가정에서도 내가 죽으면 배우자와 자녀들은 못살 것 같습니다. 그러나 하나님만 돌아가시지 않으면 산 사람은 산 사람대로 다 살 길이 있습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중요하지만 사실 나 한 사람이 없어도 교회는 얼마든지 잘 운영될 수 있습니다. 그런 겸손한 마음을 가지고 우리는 항상 남을 앞세우고, 남을 높여주고, 행사 관계자가 내린 결정이 내 맘에 들지 않더라도 최대한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어떤 일을 할 때 왕따가 된 기분이 들면 어떻게 생각해야 됩니까? 그때는 “내가 왕따가 되어도 저들이 즐겁게 지내니까 좋구나!”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때를 자신을 성찰하고 기도하면서 하나님께 가까이 가는 기회로 활용하면 됩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그런 사람에게 신속하게 찾아오셔서 그의 마음을 위로하시고 그의 기도에도 신속하게 응답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는 남을 즐겁게 하는 것을 나의 즐거움으로 삼아야 합니다.

저는 눈치가 없어서 어디에 가든지 왕따가 잘 되는 편이었습니다. 남들은 좋은 곳을 발견하면 어느새 그곳에 가서 다 모여 있는데, 저는 뒤늦게 가서 “저기 왜 사람들이 모여 있지요?”하고 물을 때가 많습니다. 그러니까 본의 아니게 왕따가 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그래도 왕따가 되든 말든 상관없이 “너희들끼리 즐겁게 놀아라!”하고 꾸준히 있어야 할 자리에 있는 편입니다. 그래서 제 기억에 손해 본 기억이 별로 없습니다.

왕따라도 꾸준히 자기 자리를 지키면 시간이 흐르면서 중요 멤버가 됩니다. 저는 그런 경험을 참 많이 했습니다. 미국에서 신학교 다닐 때 주말에는 한인 교회에서 전도사로 봉사하고 수요일 저녁에는 뉴욕 아몽크(Amonk)에 있는 미국인 교회의 청년 모임에 짐 롱(Jim Long)이란 친구가 같이 가자고 너무 졸라대서 같이 다닌 적이 있었습니다.

거기 가면 거의 왕따 수준입니다. 청년들이 저를 반갑게 맞이해주긴 하지만 언어가 자연스럽지 않고 동양인은 저 혼자니까 본의 아니게 왕따 비슷한 처지가 됩니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런 모임을 피합니다. 그러나 저는 신학교 졸업을 앞두고 아주 바빠지기 전까지 상당히 오랫동안 그 모임에 꾸준히 참석했습니다. 그때 좋은 친구도 많이 사귀고 미국 문화도 가장 깊이 체험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는 즐거운 왕따가 되어야 합니다. 때로는 남을 즐겁게 하기 위해서 왕따가 되는 것을 자처해야 합니다. 행복하게 사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습니다. 자랑과 주인공 의식을 버리고 사랑과 종 의식을 내세우면 누구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남을 행복하게 하면 내가 행복하게 되고, 남을 즐겁게 하면 내가 즐거워집니다.

어느 날, 하치라는 청년이 신학교에 가겠다고 하자 아버지 목사님이 말했습니다. “하치야! 나는 네가 목사가 안 되었으면 좋겠다. 목사의 길은 힘든 길이다. 내가 빨간 넥타이를 매면 교인들은 야하다고 하고, 검정 넥타이를 매면 우중충해졌다고 말한단다. 심방을 하면 하릴없이 여기저기 다닌다고 하고, 심방을 안 하면 게을러졌다고 비난한단다. 교회가 부흥하지 않으면 무능하다고 얘기하고, 교회가 부흥되면 물량주의와 성공주의에 빠져 타락했다고 말한단다.”

그 얘기를 옆에서 듣던 어머니가 말했습니다. “하치! 너무 염려하지 말라. 네 아빠가 지금까지 목회를 잘한 것은 천사 같은 성도들 때문이야. 그들은 네 아빠가 빨간 넥타이를 매면 세련됐다고 했고 까만 넥타이를 매면 경건하다고 했단다. 심방 많이 하면 부지런하다고 칭찬했고, 심방을 못하면 묵상을 많이 해서 영성이 깊다고 칭찬했단다. 교회가 부흥하면 목사님이 잘해서 그랬다고 했고, 부흥이 안 되면 우리가 못해서 그랬다고 울며 기도했단다. 하나님께서는 네게도 좋은 사람을 보내주실 거야.”

그때 하치는 아버지의 말도 기억했고 어머니의 말도 기억했습니다. 그래서 목회할 때 어려움을 당하면 훌륭한 아버지에게도 어려움이 있었음을 기억하고 힘을 냈고, 또한 어머님 말씀대로 어려운 순간마다 하나님께서 신기하게 좋은 성도를 붙여주어서 위기를 극복하고 목회를 잘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서로 격려하고 서로를 즐겁게 함으로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좋은 교회를 만들어가야 합니다.

3.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해야 합니다.

본문 45절 말씀을 보십시오. “저희는 하나님을 섬기는 일과 결례의 일을 힘썼으며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도 그러하여 모두 다윗과 그 아들 솔로몬의 명을 좇아 행하였으니.” 당시 성전 사역자들은 최선을 다해 성전 봉사에 힘썼습니다. 그처럼 자기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너무 좋아 보였기에 백성들을 물질로 뒷받침했고, 반대로 백성들이 물질로 뒷받침을 했기에 성전 사역자들은 사는 문제에 대한 걱정 없이 최선을 다해서 사역에 전념할 수 있었습니다.

우리가 교회를 사랑한다면 남이 어떻게 하기를 바라기 전에 내게 맡겨진 직분에 충실해야 합니다. 내 약점에 대해 깊이 생각하면서 한탄하기보다는 내 장점을 가지고 현재 주어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아름답습니다.

어느 날, 산에 사는 동물들이 아름다운 동물사회를 만들려고 동물학교를 세웠습니다. 그들은 달리기, 나무 타기, 수영, 그리고 날기 과목을 만들어 모든 동물들이 전 과목을 수강하기로 했습니다. 그러자 오리는 수영은 잘했지만 날기 과목에서는 겨우 합격했고, 달리기 수업에서는 낙제점을 받아 방과 후 수업을 해야 했습니다.

토끼는 달리기에서는 늘 일인자였지만 수영 때문에 다리 근육에 경련이 생겼습니다. 다람쥐는 나무 타기에 있어서는 선수였으나 날지 못했습니다. 독수리는 날기 과목은 잘했지만 다른 과목에서는 멋대로 행동했기 때문에 문제아로 낙인 찍혔습니다. 그런 부작용을 보면서 다 잘하려고 하지 말고 자기가 잘하는 것을 선택하고 집중해서 ‘선택과 집중의 원리’를 따라 나름대로 동물사회에 기여하자고 진로 수정을 했다고 합니다.

자기의 장점이 극대화시키지 않고 자기의 약점만 찾아 계속 보완하려고 하면 결국 장점마저 쇠퇴하게 됩니다. 중요한 것은 넓은 이해심을 가지고 남의 결점을 덮어주고 자신의 장점을 살려 자기가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하는 자세입니다.

무엇보다도 직분을 가진 사람이 먼저 솔선수범해야 합니다. 부흥하는 교회일수록 중직이 솔선수범을 하고, 부흥하지 않는 교회일수록 중직이 터줏대감 노릇을 한다고 합니다. 성도가 은혜 받은 증거가 무엇입니까? 더욱 겸손해지고, 자기 맡은 자를 충실하게 지키려고 하는 것이 은혜 받은 증거입니다. 사실 은혜 받는 것보다 은혜 받은 이후의 삶을 잘 사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마가복음 1장 43-44절 말씀을 보면 주님께서 문둥병자를 치유하시고 아무에게도 그 사실을 말하지 말고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감사예물을 드리라고 했습니다. 왜 주님께서 기적에 대해서 침묵하게 하셨습니까? 그것은 은혜 받았다고 간증집회 하러 다니기 전에 꼭 먼저 해야 할 일이 있다는 것입니다. 그것이 무엇입니까? 그 몸을 제사장에게 보이고 율법에 명한 대로 감사헌금을 드리는 일입니다.

이 말은 무슨 말입니까? 은혜를 체험했다고 교만해져서 제사장이나 율법을 경시하면 안 된다는 것입니다. 우리는 은혜 받고 영성이 깊어질수록 겸손해져야 합니다. 왜 이단이 생깁니까? 그들에게도 체험은 있습니다. 그러나 체험이 신앙생활의 전부인 줄 알고 “제사장에게 보이라!”는 주님의 명령에서 실패하고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함부로 말하고 행동하다가 이단 소리를 듣게 되는 것입니다.

가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자기가 제일인 줄 알고 조금 아는 것으로 교회에서 함부로 가르치려고 합니다. 그러나 진짜 은혜를 받은 사람은 솔선수범해서 더 말씀대로 살려고 노력하고 행동합니다. 그처럼 은혜를 체험했다고 마치 혼자만 은혜 받은 것처럼 행동하지 않고 은혜 받을수록 더욱 겸손히 맡은 직분에 최선을 다할 때 교회는 아름답게 부흥될 것입니다.

4. 보수와 개혁의 조화가 필요합니다.

당시 백성들과 제사장들은 성벽 봉헌식을 성대하게 거행하면서 옛날의 전통을 따르려고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래서 45절 후반부 말씀처럼 다윗과 솔로몬의 명을 좇아 예식을 행했고, 찬양대 운영도 옛날에 하던 방식대로 했습니다. 본문 46절 말씀을 보십시오. “옛적 다윗과 아삽의 때에는 노래하는 자의 두목이 있어서 하나님께 찬송하는 노래와 감사하는 노래를 하였음이며.”

이 장면을 보면 보수적인 태도가 꼭 나쁜 것만은 아님을 깨닫게 됩니다. 물론 새로운 시대의 흐름에 따라 열린 것도 좋지만 전통을 따르는 것도 나쁜 것만은 아닙니다. 가장 좋은 것은 보수파와 개혁파가 서로를 존중하며 서로의 의견을 인정하고 가장 좋은 결론을 내리고 따르는 것입니다. 요새 개혁이라는 말이 많이 언급되지만 개혁이 모두 선만은 아닙니다. 때로는 개혁에 반대하는 보수주의자도 진보주의자만큼 가치 있는 존재들입니다.

5. 하나님의 사역자를 중시해야 합니다.

본문 47절 말씀을 보십시오.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에는 온 이스라엘이 노래하는 자들과 문지기들에게 날마다 쓸 것을 주되 그 구별한 것을 레위 사람들에게 주고 레위 사람들은 그것을 또 구별하여 아론 자손에게 주었느니라.”

이 구절에서 ‘스룹바벨과 느헤미야 때’란 포로 귀환 시대를 의미합니다. 당시 어떤 사람들은 제사장들이 세금도 안 내고, 밭일을 하지 않고 성전 일만 하니까 얄밉다고 생각하면서 성전 종사자들을 돌보지 않았습니다. 반면에 스룹바벨과 느헤미야와 같은 지도자들은 신앙갱신만이 나라가 사는 길이라고 생각하고 제사장들을 우대하고 그들의 생활 문제를 해결하는데 최선을 다했습니다.

성도들은 교회 사역자들을 존중해야 합니다. 가끔 보면 교회 사역자들에 대한 적대감을 표출하는 경우가 있습니다. 물론 그런 적대감이 생겨나게 된 가장 일차적 원인은 교회 사역자들의 부덕함 때문입니다. 가끔 보면 같은 목회자가 봐도 “저건 아닌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목회자가 잘못된 행동을 하는 경우를 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잘못된 사례 때문에 모든 목회자들을 매도하지 말아야 합니다.

성직자를 존중하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입니다. 성직자도 사람이기 때문에 부족한 점이 많이 보이고, 때로 위선적인 모습도 보이지만 그래도 존중해주어야 합니다. 사도행전 2장 43절 말씀을 보면 초대 교회 당시에 성도들은 사도들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런 경건한 두려움이 있어야 합니다. 경건한 두려움은 존경하는 마음의 표시입니다. 우리는 두려워해야 할 것은 두려워해야 합니다.

우리가 하나님 앞에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는 것은 죄책감 때문이 아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기 때문입니다. 사랑하는 사람 앞에서 행동이 조심스럽게 되고 ‘그대 앞에 서면 작아지는 마음’이 바로 경건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질 때 꼭 생기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용기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두려워하게 되면 그 외에 두려운 것이 아무 것도 없게 됩니다.

아인슈타인은 유대교 신자였습니다. 히틀러가 공포정치를 할 때 그는 교수와 학생들은 저항할 것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러나 그들은 풀어 주면 저항하는 것 같지만 강하게 핍박하면 가장 먼저 아첨했습니다. 저술가와 예술가와 언론인들도 그럭저럭 다 매수되었습니다. 그런 모습을 보고 낙심했지만 교회만은 많은 순교자를 내면서도 히틀러에게 끝까지 항거했습니다. 그 모습을 보고 아인슈타인도 교회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 교회를 사랑하는 자의 축복 >

우리는 교회를 더욱 사랑해야 합니다. 교회에 대한 경건한 두려움을 가지고 교회를 함부로 여기지 말아야 합니다. 교회를 함부로 하면 우리 인생도 망가지고 교회를 소중히 여기면 우리 인생도 높임 받게 될 것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의 필요를 채우고, 교회 구성원들을 사랑하고, 교회가 잘 되도록 최선을 다해 섬겨야 합니다. 하나님은 교회를 소중히 여기고 섬기는 자에게 가장 큰 축복의 문을 열어주십니다.

한국 초대 교회사에 최치량이란 장로님이 계셨습니다. 어느 날, 장로님은 주일 예배드리다가 예배당 지붕에서 비가 새는 것을 보고 가슴 아프게 생각했습니다. 결국 다음 날 아침, 장로님은 일찍 자기 집 기와를 뜯어 교회 지붕을 보수했다고 합니다. 하나님께서 그 마음을 얼마나 기쁘게 보셨겠습니까?

미국의 카네기는 본래 가난했고 돈이 없어서 결혼도 늦게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일성수를 해서 결국 거부가 되었습니다. 그리고 거부가 된 후에 “돈은 하나님의 뜻대로 사용해야 한다!”고 하면서 어려운 교회를 많이 도왔고 그가 어려운 교회를 위해 바친 전자 오르간만도 7천대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는 유언을 남겼습니다. “돈을 남기고 죽는 것은 수치입니다. 저의 전 재산을 하나님과 이웃을 위해 써주십시오.”

로마서 8장 28절에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하나님을 사랑하는 자 곧 그 뜻대로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합력하여 선을 이루느니라.”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는 자에게는 때로 어려운 일이 닥쳐도 염려할 것이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재료들이 되기 때문입니다. 축복의 관건은 “얼마나 하나님을 사랑하고 교회를 사랑하느냐?”에 달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닙니다.

반면에 하나님을 사랑하지 않고 교회를 섬기지 않고 자기 뜻대로 행하는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악을 이루게 될 것입니다. 이제 더욱 하나님과 교회를 사랑하고, 교회를 더 사랑하지 못했던 것을 회개하십시오. 바로 그때 우리의 삶에는 모든 일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신기한 축복의 역사가 시작이 될 것입니다. 이제 더욱 교회를 더욱 아름다운 교회로 만드는데 최선을 다하고 축복받는 분들이 되길 바랍니다.

출처/이한규목사 설교 중에서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