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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에 들어갈 의인들 (마 25:41~46)
오늘 본문은 최후의 심판에 관한 예수님 자신의 말씀 중 일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최후의 심판 때 모든 천사와 더불어 영광 가운데 오셔서 천하 만민을 양과 염소를 구분하듯이 오른편과 왼편에 두시리라 하셨습니다(마25:31-33). 그리고 그때 오른편에 있을 사람들과 왼편에 있을 자들에게 각각 하실 말씀이 어떤 것일지를 미리 알려주셨습니다. 먼저 오른편에 있을 사람들에게는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다”(마25:34-36)고 말씀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때 오른편에 선 사람들이 주님께 여쭙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을 보고 음식을 대접하였으며 목마르신 것을 보고 마시게 하였나이까? 어느 때에 나그네 되신 것을 보고 영접하였으며 헐벗으신 것을 보고 옷 입혔나이까? 어느 때에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가서 뵈었나이까?”(마25:37-39) 하면 주님께서는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가 여기 내 형제 중에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한 것이 곧 내게 한 것이라”(마25:40)고 대답하시리라 하셨습니다.
그리고 왼편에 있을 자들에게 하실 말씀이 오늘 본문의 내용입니다. 주님께서 왼편에 있을 자들에게 하실 말씀은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다”(본문 41-43절)는 것입니다. 그때 왼편에 있을 자들은 주님께 따져 묻기를 “주여, 우리가 어느 때에 주께서 주리신 것이나 목마르신 것이나 나그네 되신 것이나 헐벗으신 것이나 병드신 것이나 옥에 갇히신 것을 보고 공양하지 아니하더이까?” 할 것이며 이에 주님께서는 대답하시기를 “내가 진실로 너희에게 이르노니 이 지극히 작은 자 하나에게 하지 아니한 것이 곧 내게 하지 아니한 것이라”(본문 44-45절) 하시리라는 것입니다. 이렇게 최후의 심판은 이 세상에서 사는 동안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돌본 이들과 돌보지 않은 자들을 각각 영생과 영벌에 들어가게 하는 심판이 되리라고 주님께서는 결론적으로 말씀하셨습니다(본문 46절).
이 주님의 말씀에 우리는 곧바로 한 가지 주의사항을 덧붙여야 할 것입니다. 그것은 이 말씀이 결코 복음의 근본, 즉 “오직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얻는다”는 진리와 상치하는 말씀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영생으로 들어가느냐 영벌에 처해지느냐 하는 것은 우리의 선행여부에 달린 것이 아니라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에 달렸다는 것이 변함없는 복음의 진리이고 구원의 도입니다. 단지 우리로 하여금 의롭다 하심을 얻고 구원의 은혜를 누리도록 참으로 하나님에 의해 택하심을 받고 믿음을 갖게 된 사람은 스스로는 선을 행할 수 없는 죄인임에도 불구하고 성령의 역사로 인하여 선을 행할 수 있게 되고 사랑의 열매를 맺을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또한 자신의 행위로 의롭다 하는 인정을 받는 것이 아니라 오직 하나님의 은혜로 인한 믿음 때문에 거저 의롭다 하심을 얻은 사람은 그 하나님의 은혜에 감격하고 감사하여 선한 행실을 기뻐하시는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려고 힘쓰라는 말씀인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사람이 의롭게 되는 것은 율법의 행위로 말미암음이 아니요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된다는 사도 바울의 가르침과(롬3:28, 갈2:16)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라는 야고보서(2:17, 26)의 말씀이 모순되는 것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같은 로마서에서 사도 바울은 “하나님께서 각 사람에게 그 행한 대로 보응하시되” 선을 행하는 사람에게는 영생과 영광과 존귀와 평강이 있으리라 했음을 우리는 볼 수 있습니다(롬2:6, 7, 10). 로마서의 말씀이나 야고보서의 말씀이 모두 예수님의 말씀에 일치하는 것임을 우리는 재확인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율법의 행위나 인간적 선행의 결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율법의 행위로써는 의롭다 함을 얻을 육체가 없다고 했습니다(롬2:16).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선을 행하려고 힘써야 합니다. 왜냐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이기 때문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선행을 보시고 우리를 구원에로 택하신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거저 우리를 구원에로 택하시고는 우리에게서 선행을 보시기를 원하십니다. 우리는 구원을 받기 위해서 선행을 해야 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구원을 받은 사람은 선행을 힘써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의 구원은 우리의 선행을 조건부로 하는 구원이 아닙니다. 우리의 구원은 하나님의 무조건적인 은혜로 주어진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도 무조건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선행을 힘써야 합니다. 우리가 어려운 사람을 구제해서 구원 받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죽을 수밖에 없는 우리를 예수 그리스도께서 아무 조건 없이 살리셨으므로 우리도 우리 주변의 어려운 사람들을 조건 없이 구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가 십자가를 져서 우리 스스로를 구원하는 것 아닙니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를 지셨으므로 우리가 구원 받았고 이미 우리를 구원하신 주님께서 우리에게도 십자가를 메라 하시니 기쁨으로 메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십자가에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피땀을 흘리시며 기도하셨고 십자가에 달리셔서 우리 위해 모든 피를 다 쏟으셨습니다. 우리가 우리의 피땀을 흘려서 우리 자신의 구원을 이루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예수 그리스도의 피땀으로 구원을 얻은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전하고 실천하기 위해 피땀을 아껴서는 안 됩니다. 우리가 헌혈을 할 때가 있습니다. 헌혈해서 천당 가는 것 아닙니다. 그러나 순전히 예수님의 피를 마시고 천국백성 된 사람은 헌혈에 무관심하거나 인색해서는 안 됩니다.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를 가지고도 죄와 영원한 형벌로부터 내 생명 하나 구할 수 없습니다. 그러나 세상의 모든 금은보화보다 더 존귀하신 하나님의 아들의 몸이 내 대신 십자가에 달려 찢김으로 내가 사죄와 구원과 영생의 선물을 받았다면 내 물질 내 재산 조금 나누는 것이, 아니 다 나누어준다 한들 어찌 아깝다 하겠습니까?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시려고 십자가를 지시고 골고다의 언덕을 오르시느라 기진하셔서 쓰러지시고 또 쓰러지셨는데 교회와 내 이웃과 내가 사는 사회와 하나님의 나라 일을 위해 봉사의 손길을 보태는 것이 그렇게 힘든 일이겠습니까? 말로는 우리가 믿는다 하고,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 감사하다고 하며, 주를 위해 살자 하면서도 실제로는 배은망덕한 삶을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 깊이 생각해보아야 할 것입니다. 봉사와 헌신의 관점에서 볼 때 너무나 인색하고 이기적이고 뻔뻔스러운 삶을 살고 있는 나는 아닌지를 곰곰이 돌이켜보아야 할 것입니다. 드리고 섬기는 방법에는 여러 가지가 있습니다. 물질로도 할 수 있고 재능으로도 할 수 있으며 손발로도 할 수 있고 시간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여의치 않으면 중보기도를 열심히 하는 것만으로도 할 수 있습니다. 이것도 저것도 다 하기 싫은 사람이 결국 주님으로부터 들을 말씀이 바로 본문 41-43절의 말씀입니다: “저주를 받은 자들아, 나를 떠나 마귀와 그 사자들을 위하여 예비된 영원한 불에 들어가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지 아니하였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지 아니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지 아니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 입히지 아니하였고 병들었을 때와 옥에 갇혔을 때에 돌보지 아니하였느니라.” 반면 드리고 나누고 섬기기를 힘쓴 믿음의 사람들이 주님으로부터 들을 말씀은 “내 아버지께 복 받을 자들이여, 나아와 창세로부터 너희를 위하여 예비된 나라를 상속받으라. 내가 주릴 때에 너희가 먹을 것을 주었고 목마를 때에 마시게 하였고 나그네 되었을 때에 영접하였고 헐벗었을 때에 옷을 입혔고 병들었을 때에 돌보았고 옥에 갇혔을 때에 와서 보았느니라” 하시는 말씀입니다. 최후의 심판에 관한 본문 바로 앞에 나오는 말씀이 그 유명한 달란트 비유입니다. 모든 사람이 주님 앞에서 각각 하나님으로부터 받은 능력을 따라 결산을 해야 한다는 비유말씀은 사실상 최후의 심판에 관한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의 말씀은 그 연장선상에 있는 것입니다. 그 달란트 비유에서 주인으로부터 한 달란트를 받아 가지고 땅에 묻어두었다가 고대로 주인 앞에 내놓은 종이 주인으로부터 받은 것이 무엇이라고 했습니까? “악하고 게으르고 무익한 종”이라는 질책과 바깥 어두운 데로 쫓겨나 거기서 슬피 울며 이를 갈게 되는 것이었습니다.
종교개혁자들이 로마천주교의 마리아론이나 성자숭상의 관행에 맞서 싸우며 다시 세우고 지키려한 성경의 교리가 예수 그리스도의 절대성입니다. 사도 베드로가 성령충만하여(행4:8) “다른 이로써는 구원을 받을 수 없나니 천하 사람 중에 구원을 받을 만한 다른 이름을 우리에게 주신 일이 없음이라”(행4:12) 외친 대로 모든 사람에게 있어서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구원자시라는 진리입니다. 이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이기를 원하고 교회가 그리스도의 몸 된 교회이고자 한다면 절대로 양보하거나 타협할 수 없는 진리입니다. 생명을 걸고 지켜야 할 진리입니다. 그런데 이 진리를 수호하려고 할 때 우리가 빠지게 되는 딜레마가 있습니다. 그것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이 우리의 구원자이시고 예수 그리스도를 그렇게 고백하는 교회만이 참 교회라고 말하면 곧바로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받아야 하는 현실입니다. 개방성과 다원주의적 관용이 오늘 이 시대의 최대의 덕목이 되어버렸기 때문입니다. 다른 종교를 통해서도 구원을 얻을 수 있으며 예수만이 그리스도가 아니고 어느 종교에나 그리스도가 있다고 말해야 훌륭한 신앙인이라고 칭찬 받는 세상이기 때문입니다. 기독교신자라 하면서도 서가탄신기념일에 사찰에 가서 축하하며 같이 예불을 해야 바로 된 종교인이라고 인정을 받는 요즈음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진정한 종교인이라는 평을 듣지 못한다 할지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포기할 수는 없습니다. 아무리 개방의 시대라 해도 그것은 개방할 수 없는 것입니다. 비록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고집하다가는 선교의 어려움이 있고 교인수가 줄어드는 일이 있더라도 아닌 것은 아닌 것입니다. 교인수가 늘도록 힘쓰는 것이 우리의 본연의 사명이 아닙니다. 지키기가 힘들어도 바른 진리를 끝까지 지키는 것이 우리가 할 일입니다. 그리고 교인수가 늘고 줄고는 하나님께 맡겨야 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가 처한 딜레마를 타개할 의지를 포기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의 구원자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을 확고하게 지키면서도 폐쇄적이고 독선적이라는 비난을 극복할 수 있는 길이 무엇인지를 끝없이 모색하며 또 노력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 길이 무엇이겠습니까? 바로 사랑의 실천을 강화하는 것이며 섬김과 나눔의 삶을 더욱 힘쓰는 것입니다. 세상사람들로 하여금 “저 그리스도인들이 예수밖에 모르고 예수 그리스도만이 이 세상의 유일한 구원자라고 믿는 데는 고집불통이고 타협이 불가능한 사람들이지만, 그래도 저들이 있어서 이 사회는 따뜻하고 사랑이 넘치고 살만한 사회인 거야. 저들이 없어 봐. 누가 저 많은 고아들, 장애인들, 독거노인들, 소년소녀가장들, 불치병 환자들, 치매노인들, 재소자나 출소자들, 억울함 당하는 외국근로자들, 온갖 소외계층 사람들 돌보겠어? 예수 믿는 사람들이 있으니 그래도 이 나라가 이만큼 지탱되는 거지”라고 말할 수 있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것밖에는 우리의 딜레마를 타개할 다른 뾰족한 길이 없다고 봅니다.
평양대부흥운동 100주년을 맞아 한국교회는 지금 100년 전 그 뜨거운 부흥의 역사가 다시 일어나기를 염원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한국교회가 민족을 깨우는 진리의 빛으로 다시 서기를 바라고 있습니다. 한국교회는 차가운 진리의 빛으로 민족의 눈을 찌를 것이 아니라 따뜻한 사랑의 빛으로 민족의 눈을 뜨게 해야 할 것입니다. 진리는 사랑이 함께 할 때 진정 위대한 것입니다. 교회는 구원의 진리로서의 예수 그리스도의 유일성과 온 세상을 품는 사랑의 힘으로서의 그의 위대함을 함께 전하고 증언해야 할 것입니다. 드리고 나누며 섬기기를 더욱 힘쓰는 우리가 됩시다. 사랑으로 충만한 진리의 빛으로 민족을 깨우는 교회가 됩시다. 일생을 한결같이 그렇게 사는 우리 모두가 됩시다. 그리하여 마지막 날 주님 앞에 설 때 우리 모두 주님으로부터 “착하고 충성된 종”이라 칭찬받고 “영생에 들어갈 의인들”이라 인정받을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출처/이수영 목사 설교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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