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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생의 물 (요 4:3~14)
이 세상에는 두 가지 일이 있습니다. 하나는 살리는 일이고, 또 하나는 죽이는 일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있는가 하면, 사람을 죽이는 일도 있습니다.
1. 사람을 살리는 일
안델센의 동화 가운데 ‘성냥팔이 소녀의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동화의 내용은 다음과 같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한 가난한 소녀가 있었습니다. 그 소녀는 하루하루 성냥을 팔아 살아가고 있었는데 여기저기로 성냥을 팔러 다니다보니 너무 추워 손발이 꽁꽁 얼어붙었습니다. 추위를 견디지 못한 소녀는 팔던 성냥을 그어 불을 붙이고 바람에 불이 꺼질까봐 두 손으로 모읍니다. 불꽃 속에 돌아가신 어머니의 모습이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내 성냥불은 꺼지고 맙니다. 소녀는 다시 성냥불을 켭니다. 그렇게 소녀는 부잣집 담에 기대어 밤새도록 반복하다가 그만 얼어 죽고 맙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기상학자는 때가 겨울이기 때문에 얼어 죽었지, 만일 여름이었다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지리학자는 그곳이 유럽의 추운 곳이기에 얼어 죽었지 만일 아프리카나, 하와이 같은 지역이었다면 얼어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경제학자는 부의 분배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부가 골고루 분배되었다면 가난한 자들도 함께 따뜻한 겨울을 지냈을 것이고 소녀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해석합니다. 교육학자는 지나가던 어른이 이 소녀를 만났을 때 추운 날씨에 잠은 집에서 자야한다고 가르쳤더라면 아이는 죽지 않았을 것이라고 합니다. 물론 모두 틀린 해석은 아닙니다. 문제는 어느 누구도 이 소녀를 살리지 못했으므로 소녀가 죽고 말았다는 것입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낚시를 별로 좋아하지 않습니다. 낚시는 살아있는 고기를 낚아서 죽이기 때문에 좋지 않은 취미라고 생각합니다. 또 ‘마누라 죽이기’라는 영화가 있는데 저는 제목만 듣고 영화를 보지 못했기 때문에 내용은 잘 모르지만 마누라를 살려 두어야 양복도 다려주고, 와이셔츠도 빨아주고, 반찬도 만들어 주고, 살림도 해 주는데 왜 죽입니까? 근처의 식당에서 식사하다보면 주인이 저에게 “요즘 재미있습니까?”하고 물어봅니다. 저는 “예!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무엇을 하시는 분인데 사는 것이 재미있냐고 물으면 “저는 교회의 목사인데 사람을 살리는 일이 너무너무 재미있습니다”하고 대답합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이 얼마나 재미있고, 신바람 나는 일입니까? 성경에서 사람 살리는 재미로 살아가신 분이 예수님이십니다. 예수님은 일평생을 사람을 살리다가 가신 분입니다. 성령도 마찬가지로 사람을 살리는 영이십니다.
2. 사람을 살리려면 시간을 투자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지역에 있는 수가성의 우물가를 찾아가셨습니다. 예수님이 그곳을 찾아가신 이유는 남편 다섯이 있던 한 여인을 만나기 위해서였습니다. 18절에 “네가 남편이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라고 했는데 남편을 다섯 번이나 바꾸어 가면서 살았지만 행복하지 못하고 불행했던 한 여인을 구원하시기 위해서 그곳을 일부러 찾아가신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는 시간을 내야합니다. 4절에 “사마리아로 통행하여야 하겠는지라”고 했습니다. 유대에서 갈릴리로 가는 길은 세 가지가 있습니다. 예루살렘은 남쪽에 위치해 있고 갈릴리는 북쪽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에 예루살렘에서 서쪽으로 나가 지중해 해안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예루살렘에서 동쪽으로 여리고로 내려가서 다시 북쪽 요단강을 따라 올라가는 길이 있고, 또 한 지름길이 있습니다. 그 길이 예루살렘에서 사마리아로 지나 갈릴리로 가는 길입니다. 문제는 유대인이 사마리아 사람들과 상종치 않는 것이었습니다.
여기에서 잠깐 중앙일보 7월 28일자 신문을 보면 19면에「개미도 위험을 알릴 때 소리를 지른다」는 기사가 있습니다. 재목이 너무 재미있어서 읽어보니 개미의 허리 부분에 빨래판 같은 줄이 있어서 그 부분을 긁어서 위험을 알린다는 것입니다. 드르륵 소리를 내지만 사람들은 관심을 가지지 않기에 알아듣지 못할 뿐입니다. 자살하는 사람들도 자살하기 전에 누구에겐가 자신의 죽음에 관한 신호를 보낸다고 합니다. 가까운 친구에게나 가족들에게 “나 죽고 싶어”라든가 혹은 “살맛이 안나!”라든가 혹은 “모든 것을 정리하고 싶다”고 말하지만 주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아서 모를 뿐입니다. 문제는 아무도 관심을 가지지 않겠기에 그의 죽음을 알지 못하고, 죽고 난 후에야 깨닫게 되는 것입니다. 사람을 살리는 일에 관심을 가져야 합니다. 예수님은 남편이 다섯이 있던 사마리아 여인에게 관심을 가졌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교회가 <비전 +1 전도축제>를 선포하고 영혼 구원하는 일을 힘쓰자고 외쳤습니다. 이것은 여러분이 관심을 얼마나 기울이느냐에 달려있습니다. 관심을 가지고 시간을 투자해야 사람을 살릴 수 있습니다.
3. 사람을 살리려면 대화가 통해야 합니다
①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예수님은 사마리아 여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7절에 “예수께서 물을 좀 달라"고 하신 것입니다. 문제는 관심과 대화입니다. 대화가 통해야 사람의 영혼을 구원시킬 수 있습니다. 시간을 내고, 형편과 사정을 알아보고, 이해를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전도하는 일도 마찬가지 입니다. 그가 지금 무엇을 하는지, 어떤 고민을 가지고 있는지 관심을 가지고 대화해야 합니다. 우리교회에서는 매주 토요일 ‘사랑의 동산 부부행복학교’를 운영하고 있습니다. 많은 가정들이 대화가 없이 살고 있습니다. 남편과 아내, 부모와 자녀간에 대화가 없습니다. 우리나라 가정의 하루 평균 TV시청시간은 2시간이면서도, 부부의 대화는 42초, 자녀와 대화는 37초밖에 되지 않습니다. 전문가들의 통계에 의하면 우리나라 부부들 대화 중에 남편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56%가 “병신 육갑하고 있네.”이고, 아내들이 가장 많이 하는 말 48%가 “웃기고 있네!”입니다. 행복한 가정은 대화가 있는 가정입니다. 대화는 가정행복의 심장과도 같습니다. 심장이 멎으면 죽습니다. 대화가 끊어지면 그 가정이 위험합니다. 예수님은 물을 달라고 하시면서 이 여인과 대화를 시작했습니다. 한 영혼을 살리는 일은 대화에서부터 시작됩니다.
② 긍휼히 여겨야합니다
예수님이 물을 달라고 했더니 이 여인은 유대인 남자인 당신이 왜 사마리아 여자인 나에게 물을 달라고 하느냐며 거절했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겨 대화를 계속해 나갔습니다. 예수님은 네 남편을 불러오라고 했습니다. 17~18절에 “여자가 대답하여 가로되 나는 남편이 없나이다. 예수께서 가라사대 네가 남편이 없다 하는 말이 옳도다 네가 남편 다섯이 있었으나 지금 있는 자는 네 남편이 아니니 네 말이 참되도다.”고 했습니다.
사람들은 남편을 다섯이나 바꾸어 가면서 사는 행실이 못 된 여자라고 비방하고 욕을 했지만 예수님은 이 여인을 불쌍히 여기며 긍휼히 여겼습니다. 사람의 영혼을 구원하는 일은 영혼을 불쌍히 여겨야 가능합니다. 보통 여인들이 물을 길러가는 시간은 아침 일찍 아니면 저녁 해질 무렵입니다. 그러나 이 여인은 제6시쯤(6절) 물을 길러왔습니다. 지금의 시간으로 오후3시쯤 되는 한낮의 뜨거운 시간입니다. 이 시간에 물 길러오는 여인은 이무도 없습니다. 우물가는 동네 아낙네들이 모여 물을 길으면서 앞뒷집 이야기를 나누고 동네 모든 소문들이 우물가를 통해 전달이 되는데 사마리아 여인은 사람들의 수군거리는 소리가 듣기 싫어 뜨거운 한낮에 물 길러 온 것입니다. 모두가 비방하는 여인을 예수님은 긍휼히 여기며 불쌍히 여겨 구원하기 위해 대화를 하신 것입니다.
③ 인내해야 합니다
예수님이 사마리아 여자에게 물을 달라고 했더니 여자가 대답하길 “당신은 유대인으로서 어찌하여 사마리아 여자 나에게 물을 달라 하나이까 하니 이는 유대인이 사마리아인과 상종치 아니함이러라(9절)”고 했습니다. 예수님의 물 달라는 요구에 여인은 빈정거리면서 퉁명스럽게 거부합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인내심을 가지고 물을 달라고 하셨습니다. 11절에 “여자가 가로되 주여 물길을 그릇도 없고 이 우물은 깊은데 어디서 이 생수를 얻겠삽나이까?”하고 또 거절합니다. 우리가 복음을 전할 때에도 사람들은 온갖 이유를 찾아서 거절합니다. 이때에 인내심이 필요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우리 모두 예수님의 모습을 본받아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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