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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열매 (레위기 26:3~5, 9, 12 데살로니카 전서 5:16~18)

by 【고동엽】 2022. 7.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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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사의 열매  (레위기 26:3~5, 9, 12  데살로니카 전서 5:16~18)

오늘은 우리 교회가 추수감사절로 지키는 주일입니다. 한국의 더 많은 교회가 추석이 있는 주일에 추수감사 예배를 드리게 될 것입니다. 이 주간에 우리는 무엇을 감사해야 할지 한 번 생각해보는 시간을 가지시기 바랍니다.
지난 주간에는 스코틀랜드에서 스코틀랜드 교회 총회가 모였는데, 그 총회에서 "21세기를 향한 스코틀랜드 교회의 미래"라는 주제로 열띤 토론이 있었습니다.
여러분 아시는 대로 스코틀랜드는 영국의 북쪽 한 부분입니다. 그런데 종교개혁 때 대륙에서는 종교개혁의 불길이 칼빈과 루터를 통해서 일어났고, 영국에는 존 녹스라는 사람이 나와서 북쪽에서부터 종교개혁의 불길을 당겼습니다. 그때 런던을 중심으로 한 소위 지금의 잉글랜드 지역에서는 로마 카톨릭과 대립하여, 왕을 수장으로 하는 the Church of England, 우리말로 말하면 성공회입니다만, 성공회라는 국교가 등장했습니다. 정치적으로는 같은 나라지만 문화적으로는 전혀 다른 역사를 가지고 있는 북반부 스코틀랜드에서는 영국 성공회를 따라가지 않고, 종교개혁의 본산 중 하나인 장로교 전통을 따르기로 하고 존 녹스의 장로교 운동에 동참했습니다. 그런 결과, 같은 나라지만 북쪽의 스코틀랜드는 장로교의 원조가 되는 교회가 생겨졌습니다.
우리 같으면 한국기독교장로회, 예수교장로회 등으로, "장로교"라는 이름을 붙이지만, 그 교회는 장로교의 원조임에도 불구하고 "장로교"라는 것이 교회명칭에 공식적으로 없습니다. 그래서 이름하여 the Church of Scotland, 스코틀랜드 교회라고 부릅니다. 예를 들어 웨일스 지방에 가면, 성공회든 장로교회든 웨일스 교회, the Church of Wales 라고 하지, 성공회나, 장로교의 이름을 붙이지 않습니다. 영국 나름의 특징일 것 같습니다.
제가 이전에 북쪽 사람들과 만나서 이야기를 나누다가 합의문 같은 문안을 작성하 게 되면, 꼭 문제가 생깁니다. 문서를 한글과 영어로 동시에 만들 경우가 많았는데, 영어로 "Korea" 하면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말로 붙일 때 "한반도에서 전쟁이 없도록…" 이렇게 쓰면 북쪽 사람들이 꼭 시비를 겁니다. "한"자 대신에 "조선"이라고 쓰자는 것입니다. 조선반도! "한국"이라는 단어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에게는 문제가 없는데 북쪽 사람들은 반드시 "조선"이라고 해야 합니다. 대립하는 양자가 모일 때는 언어 선택을 조심해야 합니다.
저도 머릿속에서는 영국과 스코틀랜드의 갈등을 의식하면서도, 막상 가서 이야기하다가 제 입에서, "영국" 하면 항상 쉽게 "잉글랜드" 하고 나오는데, 스코틀랜드 사람들은 굉장히 싫어하고 또 분노합니다. "당신은 지금 '잉글랜드'와 '스코틀랜드'를 구분해라. '잉글리시'냐 '스코티시'냐 구분해라." 굉장한 갈등이 있는 걸 다시 확인하고 왔습니다.
스코틀랜드에 사는 많은 사람들은 천주교도 아니고 성공회도 아닌, 소위 스코틀랜드 교회, 말하자면 장로교회에 소속해 있습니다. 과거에는 거의 대부분의 인구가 이 교회에 소속해 있었는데, 지금은 인구이동도 많고 세상이 달라져서, 이 교회의 교인수가 그렇게 많지 않습니다. 자기들 말로는 600만 스코틀랜드 인구 중에 60만 명 정도가 현재 교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스코틀랜드에서는 제일 큰 교회입니다. 교인이 줄어서 60만 명인데, 지금도 1년에 평균 잡아서 2만 명 정도가 줄고 있다고 합니다. 그래서 5년이 지나면 50만명으로 줄 것이라고 합니다. 걱정이 태산 같습니다. 왜 줄어드느냐고 물었더니 매년 1만 5000명 정도는 자연 감소, 나이 드셔서 돌아가시는 등의 자연 감소가 일어나고, 또 새로 이사를 오는 사람도 있지만 이사를 떠나는 사람이 더 많고 교회를 떠나는 사람이 있어서 매년 2만 명 정도 줄어든다고 대답합니다.
우리한테 어떻게 하면 교인이 줄어드는 것을 막을 수 있느냐고 묻습니다. 이게 그들의 고민입니다. 스코틀랜드의 고민만이 아니라, 잉글랜드의 고민이요, 또 서구사회의 고민입니다. 그래서 남미에, 아프리카에, 아시아에 신생교회가 생겨서, 자기들 보기에 신생입니다만, 엄청난 열의를 가지고 신앙생활을 한다고 하는데, "어떻게 하면 우리가 21세기에 새로 신앙의 교회를 이끌어 갈 수 있겠습니까?" 하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아프리카, 남미, 아시아에서 한 분씩 모셔서 강연도 듣고 토론도 해보는 자리를 만들기로 했답니다. 그 초청 대상자들 중 하나로 제가 참여하게 되었습니다.
주일날 60만 명 중에 14%만 참석합니다. 그것도 고마운 일입니다. 그들이 말했습니다. "세속화가 진행되면 반드시 교회는 줄어듭니다. 어떻게 생각합니까?" 저는 대답했습니다. "한국은 최고로 세속화된 나라입니다. 영국만 세속화된 것이 아닙니다. 그러나 한국은 엄청난 세속화의 물결에도 불구하고 신자가 감소했다, 신앙 열기가 식었다, 그렇게 보지 않습니다. 어디가 차이가 있습니까?" 그래서 며칠동안 토론이 있었습니다.
그 많은 토론을 다 얘기해 드릴 수는 없고, 중요한 것 한 가지를 말씀드리면 바로 이것입니다. "그러면 앞으로 the Church of Scotland는 어떻게 해야 예수 믿는 교회로서, 선교하는 교회로서 살아갈 수 있습니까? 여러 이야기가 나왔습니다만, 그 가운데는 우리가 배우고자 하는 중요한 결론이 하나 있었습니다. 바로 이런 것입니다. "숫자가 줄어드는 것을 솔직히 인정합니다. 신앙의 열심이 식어 가는 것을 시인합니다. 그렇다고 주저앉아 있을 수는 없지 않습니까? 새롭게 살아 나가야 되겠습니다. 이제는 숫자에 연연해서 찌들려 있을 게 아니라, 현재 있는 숫자라도 활성화시켜서, 이들을 모두 예수의 살아있는 제자로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이런 생각은 죽어 가는 교회가 택할 수 있는 대안만이 아닙니다. 교인 숫자가 증가하고 있는 교회에서도 꼭 택하여야 할 대안입니다.
신자 수의 증가 대신 예수의 제자 수의 증가, 그 사람들 용어대로 하면 membership 이 문제가 아니라 discipleship 이 문제라는 것입니다. 진실로 중요한 것은 예수 믿는 신자의 수가 아니라,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제자 된 도리를 지키며 살아가는 사람, 그 사람이 이 세계에 꽉 차면, 설령 그 숫자가 적다 하더라도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이 진실로 온 세계의 생활 속에 퍼질 것입니다. 그분들은 이번 감사절에는 "우리로 하여금 살아있는 예수의 제자들이 되게 하옵소서." 하는 기도로 예배를 드리겠다고 했습니다. 우리가 본받아야할 하나의 교훈이라고 생각합니다.
스코틀랜드의 일을 끝나고 런던 쪽으로 내려왔습니다. 마침 토니 블레어 수상이 노동당 대집회를 갖고 연설을 하는데, 신문, TV, 라디오가 전부, 윈스턴 처칠 이후의 최고의 연설이라고 극찬하는 연설을 했습니다. 하루종일 TV로 보여주고, 신문에도 크게 났습니다. 다 인용할 수는 없는데, 우리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총리의 말에 이런 것이 있었습니다. "우리 영국에서는 영어의 발음이 좀 다른 것으로, 액센트의 차이를 가지고, 사용하는 어휘의 차이를 가지고 신분과 계층을 구분하지 않습니까? 상류층에서 쓰는 액센트가 따로 있고 하류층 따로 있고, 말만 들어 봐도 어디에 속하는지 알 수 있지 않습니까?" 수상의 이야기입니다. "우리 나라는 민주사회주의의 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이렇게 엄청난 신분계층구조가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제가 보기에 아마 노동당의 분위기가 그런 것 같습니다만) 그렇게도 질시하는 눈으로 쳐다보는 미국이라는 나라는 우리처럼 발음이나 액센트나 출신지역이나 출신학교로 인한 신분 갈등의 구조가 제도화되어 있지는 않습니다. 이 점을 솔직히 인정하십시다. 그리고 미국이라는 나라에서는, 가난한 흑인 학생이 뼈저린 고생을 하면서 공부하여 사관학교를 가고, 마침내는 합참의장이 되어 군을 지휘하다가 지금은 국무장관이 되어 미국과 세계의 운명을 걸머지고 열심히 뛰고 있습니다." 콜린 파월 군무장관을 지칭하는 것 같습니다.
총리의 이야기입니다. "미국을 욕하기 전에 이 영국 땅에 이런 일이 가능합니까? 솔직히 이 점만은 시인하십시다." 그러면서 얘기를 계속합니다. "뉴욕과 워싱턴에 테러사건이 발생해서 엉망진창입니다. 그러니 이것저것 따지지 말고 반테러, 평화운동에 하나로 뭉칩시다. 그 다음으로 지금 우리는 전세계를 휩싸고 있는 테러와의 전쟁의 분위기를 바꿔서 새로운 질서를 만들어야 합니다. 새로운 질서로 바꾸어야 합니다. 나는 이렇게 바꾸기를 제안하고 싶습니다. 더 이상 빈부의 구조적 격차가 없는 그런 질서로 바꿉시다. 가난하고 소외되고 내쫓겨서 고생하는 많은 사람들의 목소리를 언제 우리들의 목소리로 들어 봤습니까? 인간이 사는 사회에 인간의 기본적 관심이 서로 소통되는 새로운 질서를 만들자고 제창합니다."
저는 이 얘기를 들으면서 이 양반이 목사님이 되어 가지고 설교를 하시는 건가 하는 느낌을 받을 정도였습니다. 물론 정치인으로서 표도 얻어야 하고, 감동도 주어야 되고, 자기가 말한 제3의 길을 내세워야 되는 등의 여러 가지 이유가 있겠습니다만, 여느 정치인이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니었습니다. "테러는 반대합시다. 완전히 뿌리를 뽑읍시다. 그러나 새로 세워질 질서에는 테러가 생겨나게 된 원인이었던 불의와 착취의 억압, 이런 것을 책임지고 없애도록 하십시다. 그래야 새 질서가 세워지는 것 아닙니까? 하나님이 창조한 이 세계에, 하나님의 공의로 하나님이 주신 자유로 이 질서를 만들어 가십시다." 제가 여기까지만 인용을 하겠습니다.
나라마다 교회마다 사람마다 감사할 계기와 감사할 이유와 감사할 내용이 다를 겁니다. 공통점은 우리가 은혜를 받았으면 그 은혜에, 열매를 맺었으면 그 열매로 인해서 감사합니다. 오늘 여러분, 무슨 인생의 열매를 맺으셨는지? 맺으신 거 있으면 하나님께 들고 와서 감사하시기 바랍니다. 진실로 감사하십시다.
또 하나 가시나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습니다. 덤불에서 포도를 따지 못합니다. 누가복음서의 말씀입니다. 그러나 벼에서는 쌀을 추수할 수 있습니다. 사과나무에서는 사과를 딸 수 있습니다. 믿음을 심은 곳에서는 소망이라는 나무가 자라고, 그곳에서는 사랑의 열매를 딸 수 있습니다. 불신이 심어진 곳에서는 절망의 나무가 자라고, 그곳에서는 증오의 열매밖에 거두지 못합니다. 사필귀정의 이야기입니다.
오늘 우리에게서는 어떤 열매를 딸 수 있습니까? 수확된 열매를 보고 뿌려진 씨앗이 무엇인가를 다시 한번 평가하십시다. 그 씨앗을 만들어낸 나무의 이름이 뭔지 한번 생각해보십시다. 열매가 우리는 감사할 내용을 결정합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하나님께서는 믿음을 뿌린 소망의 나무에서 열린 사랑의 열매를 맺는 곳만 아니라, 불신으로 뿌려지고 증오의 열매가 맺는 곳에도 비를 주시고 햇빛을 주신다는 것입니다. 악을 하나님이 주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는 공평하셔서 악한 자에게나 선한 자에게나 똑같이 비를 주십니다. 그런데 그 비와 햇빛을 가지고 사랑의 열매를 맺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증오의 열매를 맺는 사람도 있습니다. 씨앗이 잘못되었기 때문입니다. 이 모든 과정 속에서 우리는 무슨 씨앗을 심었길래 지금의 부당한 열매를 맺는지, 씨앗부터 다시 한번 평가해 보십시다. 열매라는 결과만 중요한 게 아닙니다. 시작도 중요합니다. 잘못된 열매를 맺었으면, 오늘부터 새로운 시작을 하십시다. 그것이 감사의 한 이유가 될 겁니다.
감사란 무엇입니까. 서부 아프리카의 마치이라는 부족에서 쓰는 감사라는 말은 "내 머리가 흙 속에 있습니다."라는 어원에서 유래되었습니다. 고마워서 엎드려 머리가 땅에 닿았다는 뜻입니다. "여러분은 감사합니다." 할 때 무슨 뜻을 담을 수 있습니까? "내 머리가 숙여져 땅에 닿아 있습니다. 감사를 표할 때는 머리가 땅에 닿도록 엎드려서 하는 것이기 때문에, 내 머리가 땅에, 지금 땅에, 땅 속에, 흙 속에 있습니다."
그 부족에서는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을 "주둥아리를 닦는 사람"이라고 한답니다. 왜 그러느냐고 물어 봤다더니, 이렇게 대답합니다. 감사할 줄 모르는 사람은, 병아리가 곡식의 작은 껍질을 까먹기도 하고, 그 속에서 알맹이를 빼먹기도 합니다. 실컷 쪼아먹고 나서는 혀로 입술을 싸악 씻고는 아무 일도 없었던 듯이 행동하는 것처럼, 먹고는 주둥아리를 싹 닦고는 먹지 않은 듯이 하는 사람이라는 것입니다. 우리말에도 "입을 싹 씻는다." 하는 말이 있죠. 실컷 먹어놓고.
하나님이 은혜를 주셨는데, 주신 은혜가 감사해서 "내 머리가 흙 속에 있습니다." 하고 고백할 수 있습니까? 은혜를 받아놓고는 "난 모릅니다." 하고 입을 싸악 씻을 수 있습니까? 오늘 여러분이 택해야 합니다.
무엇으로 감사하시렵니까? 예수께서 하신 감사를 말씀드리고 제 말씀을 마치려 합니다. 예수의 감사는 이렇습니다. 떡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떼어 주셨다고 합니다. 잔을 들어 감사를 드리신 다음 나누어 마시게 하셨다고 합니다. 곧 이어 우리가 참여할 성만찬에 관련된 감사입니다. 십자가에서 얻어맞고 창에 찔려서 갈기갈기 찢겨질 자기의 몸, 그 몸을 들어서 하나님께, 죽어 가는 사람이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시고 떼어 주시면서, 나와 함께 고난에 동참하면 영원한 하나님나라 생명을 얻는다고 말씀하십니다.
먼저 감사를 드립니다. 흘러내리는 붉은 선혈의 피를 들어서 하나님께 감사한 다음 나눠 마시게 했습니다. 영원한 생명을 복으로 받으라고 했습니다. 우리는 몸과 마음과 영혼과 정성을 다 바쳐서 선교하고 봉사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좋은 감사입니다. 그런데 예수께서는 선교와 봉사를 언급하기 전에 먼저, 몸과 피를 들어서 하나님께 감사드리고 나서 나눠주셨습니다.
우리에게 주시는 예수의 교훈은 이렇습니다. "무슨 일이든지 선한 일을 하십시다. 하나님의 은혜가 고마우면 단 하나라도 이웃에게 베푸십시다. 그러나 그러기 전에 먼저 하나님께 감사하십시다."
감사한 다음에 하나님의 가슴을 담아서 나누어 먹고 마시는 이것이 감사의 은혜라고 생각합니다. 감사하는 교회, 나누면서 행복한 교회, 감사하고 나누면서 행복한 그런 사람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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