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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원 얻은 간수(사도행전 16:26~40)
이에 홀연히 큰 지진이 나서 옥터가 움직이고 문이 곧 다 열리며 모든 사람의 매인 것이 다 벗어진지라 간수가 자다가 깨어 옥문들이 열린 것을 보고 죄수들이 도망한 줄 생각하고 검을 빼어 자결하려 하거늘 바울이 크게 소리질러 가로되 네 몸을 상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하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 저희를 데리고 나가 가로되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 하거늘 가로되 주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 하고 주의 말씀을 그 사람과 그 집에 있는 모든 사람에게 전하더라 …… 이제는 나가서 평안히 가라 하거늘 바울이 이르되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 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 한대 아전들이 이 말로 상관들에게 고하니 저희가 로마사람이라 하는 말을 듣고 두려워하여 와서 권하여 데리고 나가 성에서 떠나기를 청하니 두 사람이 옥에서 나가 루디아의 집에 들어가서 형제들을 만나보고 위로하고 가니라
사도 바울은 빌립보에서 세 계층의 사람들을 구원하고 있습니다.
첫째로, 루디아라고 하는 여자와 그 가정을 구원했습니다. 두 번째로는 귀신들리고 남의 집 노예로 있는 여자입니다. 그러니까 한 사람은 신분상 상류 계층에 속하는 사람이요, 한 사람은 귀신들리고 팔려간 노예 곧인생 밑바닥의 천한 계층입니다.
그리고 세 번째로, 이제 오늘의 본문에 보듯이 옥사장이 예수를 믿게 되고, 그 집안이 구원을 받게 됩니다. 옥사장이라고 하면 신분상으로 중류 계급에 속합니다. 이렇게 볼 때에 사도 바울은 상류층과 하류층과 중류층의 세 계층 사람들을 구원한 셈입니다. 본문에 보면 기적이 있습니다. 이 기적 역시 세 가지로 나타난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기적이라고 하면 우리는 우선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만을 생각하기 쉬우나, 정리를 해보면 감옥 문이 열리기 전에 먼저 사도 바울의 마음 문이 열린 것을 봅니다. 바울의 마음 문이 하늘을 향하여 활짝 열립니다. 이것이 첫 번째 기적입니다. 찬송을 부릅니다. 기적입니다. 그 다음이 가시적인 기적―착고가 풀리면서 감옥 문이 열립니다. 그리고 또 하나의 기적이 있습니다.
간수의 마음이 열리는 기적입니다. 간수는 로마의 녹을 받으면서 죄수를 지키는 사람입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의무에 살고 무거운 책임을 지고 있습니다. 죄수를 지키는 책임을 가지고 삽니다. 이런 사람이 마음 문을 열고 구원을 받습니다. 어떻게 하면 우리가 구원을 얻겠느냐고 사도 바울에게 묻습니다. 그의 말씀을 듣게 되고 세례를 받게 됩니다. 마침내 예수를 영접하게 된 것입니다. 저러한 일련의 기적은 모두가 순간적으로 일시에 일어납니다.
먼저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을 한번 봅시다. 빌립보 감옥에 나타난 큰 기적입니다. 생각지도 않은 때에 홀연히 지진이 났어요. 기초가 흔들렸다는 것입니다. 어떤 부분적인 일이 아니고 근본적으로 감옥의 바닥이 흔들리는 지진을 경험하게 됩니다. 옥터가 흔들리고 철통같이 닫혔던 문들이 다 열립니다. 그리고 매였던 것이 다 풀립니다. 착고에 채워져 있었는데 그 착고가 절로 다 풀리고 맙니다. 이 네 가지 사건이 다 눈에 보이는 큰 기적입니다. 확실히 큰 역사입니다. 그런데 우리는 눈에 보이는 기적, 감옥 문이 열린다든가 지진이 난다던가 벼락이 떨어진다던가 하는 것들은 기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조용하게, 눈에 안보이게 이루어지는 사건에 대해서는 그 기적의 성격을 간과할 때가 있습니다. 바로 이것이 문제입니다. 벼락이 떨어지는 것은 기적인 줄 알면서 한 사람이,천하보다 귀한 한 영혼이 예수를 믿는 것, 완악하던 마음이 녹아지면서 예수를 믿게 되는 것, 이렇게 한 사람이 중생하는 엄청난 기적에는 놀라지 않습니다.
어떤 사람은 이런 얘기를 합디다. "큰 기적이 하나 있습니다. 내가 소망교회에 나와서 큰 기적을 경험했습니다." 무슨 기적인가 했더니 담배를 끊은 것이라고 합니다. 담배끊기가 굉장히 어렵다고들 해요. 담배끊는 학교에 세 번이나 갔다왔는데도 못 끊었어요. 하릴없이 하루에 세갑씩 피우면서 지냈는데, 그런데 어느 날엔가 힘 안들이고 깨끗하게 끊어지더랍니다. 웬일로 담배는 생각이 안나더래요. 담배 맛이 싹없어진 것입니다. 이건 기적입니다. 반드시 천지가 진동해야만 기적인 것이 아닙니다. 조용한 깨달음도 기적입니다. 그 깨달음과 함께 내 생활에 변화가 오고, 내 성품에 변화가 오고, 내 인격에 변화가 오는 것, 엄청난 기적입니다. 아직도 이 이적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에 나 위주의 주관적 의식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나'라고 하는 이성의 척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내가 파묻혀 있는 인간 의지의 척도, 그 단계를 넘어서면 그것이 다 기적입니다. 나로서는 불가능한 일입니다. 절대로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러나 가능합니다. 기적입니다.
감옥 문이 열리는 기적, 지진이 나는 기적, 이런 가시적 물리적인 기적 이전에 오늘 이 감옥에도 조용한 기적이 있었어요. 그것을 우리는 생각해야 됩니다. 이미 기적이 있었습니다. 깊은 감옥에서 찬송소리가 들려오는 것입니다. 음침하고 음산한, 불빛 한 점 없는 깜깜한 감옥에서 찬송이 울려나옵니다. 기적입니다. 제가 북한에 있을 때에 광산에 끌려가 몇 달 동안을 고생한 적이 있습니다. 광산이라고 하는 곳이 강제노동 수용소인데 겪어보지 않은 사람은 그 참상을 상상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하루에 두 끼, 수수밥을 줍니다. 수수밥에다 소금 국입니다. 물론 식당도 따로 없습니다. 마당에서 받아 들고 후루룩 넘기고 일터에 나가는 것입니다. 잔다고는 하지만 침구도 없습니다. 그냥 누워 자는 것입니다. 아무 데서나 누워 잡니다. 사람이 죽으면 그냥 발로 차서 묻어버리고 말아요. 장례식이고 뭐고가 없어요. 도망가다 잡히면 매로 쳐서 죽입니다.
말을 못하게 합니다. 사람 사이에 말을 못하게 되어 있어요. 입만 뻥긋하면 기합을 받아야 합니다. 입 딱 다물고 하라는 대로 일만 하는 것입니다. 게다가 책임 분량을 못 채우면 밤에도 일을 계속해야 됩니다. 아무튼 하루종일 일을 하는데, 시계는 없습니다. 시계 가진 사람이 없어요. 어두운 때에 나갔다가 어두우면 돌아옵니다. 자, 이렇게 고역을 치르고 있었는데 여기에 간간이 정말 기적 같은 희한한 기쁨이 있었습니다. 지게를 지고 다닐 때나 땅을 팔 때에 누군가가 조용히 휘파람을 붑니다.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부르는 것입니다. 그리고 어느 사이엔가 모두들 똑같이 휘파람을 불어요. 약속이나 한 듯이 똑같이 찬송가를 휘파람으로 부르는 것을 보면 그 사람들이 다 교인이거든요. 이름도 모르고 서로들 말도 못하지만 휘파람소리만 가지고 교인인 것을 압니다. 휘파람소리가나는 동안에는 온 굴속이 휘파람소리로 잔잔하게 울리는데 이 때에 보면 얼굴들이 환합니다. 누구 할 것 없이 마음이 그렇게 좋을 수가 없어요.
그 순간의 마음으로는 이대로 죽어도 좋다 싶을 정도입니다. 이대로 죽으면 천당은 직행이다 싶은 것입니다. 희한한 기쁨이 아닐 수 없었습니다.
사도 바울이 감옥에서 매를 많이 맞고 죽을 지경이 되었는데도 지금 찬송을 부릅니다. 그 마음은 무한히 자유합니다. 비록 깜깜한 데에 갇혀 있지마는 그 생각과 뜻과 영혼은 훨훨 하늘을 나는 것입니다. 참으로 억울하고 부당한 매를 맞았습니다. 정죄도 재판도 없이 맞았습니다.
기절할 때까지 맞았어요. 그렇게 많이 맞았어요. 기적은 여기에 있습니다. 매를 맞고 죽지 않은 것도 기적이지만, 그것보다 중요한 것은 맞았는데도 미워하는 마음이 없었다는 것입니다. 때리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았어요. 그게 중요한 것입니다. 이것이 가장 큰 기적입니다. 매를 맞으면서도 미워하지 않는 것―이것이야말로 기적인 것입니다.
어떤 공장에 난쟁이 하나가 들어와서 큰 일은 못해도 작은 일을 하고 심부름을 부지런히 하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점심을 먹게 되었어요.
어떤 우락부락하게 생긴 못된 청년이 있어서 점심 먹는 난쟁이를 찾아와 발길로 차면서 매도합니다. "난쟁이 주제에 뭘 할 수 있다고 여기 와서 얼쩡거리고 있어? 집에 가서 놀거나 길거리에 나가 얻어먹기나 할 것이지……" 그러는데도 난쟁이는 싱글벙글 웃으면서 천연스럽게 식사만 하는 것입니다. 청년은 계속해서 발길로 차요. 옆에서 보는 사람들이 민망하게 생각하면서도 청년에게 봉변이라도 당할까봐 끼여들지를 못해요. 난쟁이가 이윽고 웃음띤 그 얼굴로 입을 엽니다. "너희 힘센 놈들이 못하는 것 내가 하는 게 있다." 또 발길로 차는 청년을 보고 난쟁이는 말합니다. "나는 사람을 미워하지 않는다. 날 때리는 너도 나는 미워하지 않는다. 이것은 나만이 할 수 있는 것이다."―일순 모두가 숙연해지는 것이었습니다.
여러분은 발길로 채어보았습니까? 그런데도 미워하지 않아 보았습니까? 미워하지 않는 데에 위대함이 있어요. 억울한 매를 맞고 죽을 지경이 되어 가지고 바울은 아무도 미워하지 않아요. 앙심을 품지 않아요. 저주하지 않아요. 위대하지 않습니까? 이것이 먼저입니다. 이것이 있고야 기적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내 신념 속에 먼저 기적이 있어야 합니다.
엄청난 일을 당해도 당황하지 않고, 깜짝 놀랄 일을 당해도 동요하지 않는 것, 내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늘 찬송을 부르는 마음―이것이 기적입니다. 그리고, 그 엄청난, 절망적인 고난을 겪으면서도 사도 바울은 후회가 없어요. 낙심하지 않았어요. 내 어쩌다 이 꼴이 됐노, 하고 한탄하지 않았어요. 그것이 중요한 것입니다. 하나님께 기도하고 그는 온전한 자유인으로 나타납니다. 그 자유가 위대한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을 원망하는 법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기도하고 찬송을 부릅니다.
그리고 오히려 역경 중에서, 그 찬송으로 감사로 참 기쁨으로 모든 슬픔과 모든 아픔을 다 극복했어요. 주위는 어둡지만 그의 마음은 밝았어요. 몸은 상처로 아프지만 그의 마음은 기뻤어요. 모든 탄식과 증오와 고통을 다 극복하는 희한한 기적을 그 심령에서 먼저 체험하고 있었습니다. 아마도 이것은 사도 바울 자신의 마음이라고 보기 어렸습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은사입니다. 그런 기쁨, 그런 감사, 그런 능력, 그런 영적 권세를 은사로 받아들이게 되는 것입니다. 미움받으면서 미워해야 할 시간에 사랑하는 것이 내 마음이겠습니까? 내가 할 수 있는 일이겠습니까? 이렇게 매를 맞고도 하나님께 감사의 기도를 드릴 수 있다는 것입니까? 큰 은사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신 마음이었습니다. 이렇게 됨으로 마침내 감옥 문이 열리게 된 것입니다. 단테의「신곡」에 보면 지옥이 나오는데 거기 마귀가 많아요. 지옥에 끌려간 마귀들이 불 속에서 고생하는데 마귀의 새끼 하나가 눈물을 흘리는 것입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나도 예수를 믿을걸"하면서 눈물을 흘립니다. 그러니까 마귀의 괴수 사단이 뭐라고 호령하는고 하니 "이놈아, 울지 말고 이를 갈아라. 네가 눈물을 흘리면 하나님이 기뻐한다." 이게 지옥입니다. 지옥이 어디인지 아십니까? 이를 가는 곳이 지옥입니다. 원한을 품고 부드득 이를 갈아요. 미워하는 마음, 증오의 감옥에 갇힐 때에 거기가 무서운 지옥입니다. 한번 감옥에 빠지기 시작하면 걷잡기 힘들어요.
어떤 부인―남편이 꽤 잘나서 어지간히 바람도 피웠던 모양입니다.
그래 이 부인은 독수공방 할 때가 많았습니다. 그런데 그 남편이 병원에 입원을 했어요. 간암으로 죽게 되었어요. 그 병원에 들렀다가 그 내외가 서로 붙들고 우는 장면을 보게 되었습니다. 부인에게 넌지시 물어보았습니다. "그래, 남편에 대한 생각이 어떻소? 이 남편이 한창 바람피우고 돌아다닐 때, 며칠씩 집에 안 들어와 독수공방하는 때에 당신은 부인으로서 무슨 생각을 했었습니까?" 그랬더니 부인은 솔직하게 말합디다.
"차 사고라도 나서 죽어라 했지요." 이렇게 살 바에야 차라리 과부 되는 게 낫지, 했대요. 정말 이를 갈았답니다. 그런데 지금은 그랬던 것이 한스럽다고 해요. 죽으라고 했더니 정말 죽는 거예요. 이 시간이 되고 보니 이제 급해진 거예요. 그 때의 일이 생각나는 거예요. "지금은 어떻소?"하고 다시 물었더니 "한 달에 한 번만 들어와도 좋으니 죽지만 았았으면 좋겠어요"합니다.
여러분, 정말이지 마음에 티가 없이 깨끗한 마음으로 사랑한다는 것, 미움 없이 살아간다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모릅니다. 위대한 일입니다. 사도 바울의 마음속에 먼저 그 같은 큰 기적이 있었기에 이제는 옥문이 열리는 기적을 가시적으로 보게 됩니다. 그러나 이렇게 옥문이 열릴 때에 그는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이적을 자신의 정욕을 채우는 수단으로 사용하지 아니하려 한 것입니다. 세속적인 욕망을 충족하자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이 이적을 세속적 욕망을 채우는 기회로 삼으려 하지 않았습니다. 도망가지 않고 간수가 자결하려고 하는 순간에 담대하게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합니다. 참 권세 있습니다. 얼마나 당당합니까? 영적 자유인을 여기서 엿볼 수 있습니다. 문 열리자마자 얼씨구나 하고 도망가지 않았습니다. 다 풀린 상태로 그냥 앉아 있습니다. 한 사람도 도망가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합니다.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얼마나 굉장합니까? 간수는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책임이 그렇습니다. 헬라나 로마 당시에는 죄수를 책임진 사람은 죄수한 사람만 도망가도 그걸 목숨으로 바꿉니다. 간수가 대신 죽어야 합니다. 그래서 자결하려고 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잠깐 멈추고 생각을 해봅시다. 이 간수의 굳게 닫혔던 마음 문이 왜 열렸으며, 쇠사슬은 왜 풀렸는가―좀더 생각해보아야 되는 것 아닙니까? 이건 사람의 일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역사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어째서 감옥 문이 열렸는지 그것 하나를 다시 한번 생각해볼 수 있는 여유가 없었어요. 문이 열렸으니 도망갔을 거고 도망갔으니 나는 이제 죽었다―간수는 이렇게만 생각했어요. 다른 면으로는 전혀 생각할 수가 없었어요. 그만큼 강팍한 이 자기 의무에 노예가 된 사람이었습니다. 그런 일 하나 알아볼 여유를 갖지 못했습니다. 죄수를 놓쳤다는 책임과 그 결과만을 헤아리고, 책임 추궁하는 상관의 무서운 심판만 생각했던 겁니다. 그래서 차라리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설사 그 일이 이적이라고 한들 이 이적을 가지고 가서 상관에게 발명한다고 해서 설명이 되겠습니까? 상상을 해보세요. 앉아 있는데 지진이 나더니 감옥 문이 열렸습니다, 죄수가 다 도망갔습니다. 이렇게 이야기를 하면 상관이 믿겠습니까? 이 미친놈아, 하고 목을 벨 것입니다. 믿을 사람이 아무도 없는거예요. 바로 그 점이 더 어려운 점입니다. 전혀 이것이 통할 리가 없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자결하려고 했습니다. 못 본 자에게 본 자가 설명하고, 경험하지 못한 자에게 경험을 설명하는 것처럼 어려운 일도 없습니다. 결국은 이 사람은 이유야 어쨌든 결과는 이렇게 되었으니 자결할 수밖에 없다고 생각한 것 같습니다.
그러나 사도 바울이 말씀합니다. "네 몸을 상하게 하지 말라 우리가 다 여기 있노라" ― 얼마나 귀한 시간입니까? 그랬더니 "간수가 등불을 달라고 하며 뛰어들어가 무서워 떨며 바울과 실라 앞에 부복하고"―참 귀한 시간이지요. 보세요. 무서워 떨며 부복했다고 합니다. 굉장한 시간입니다. 무엇이 무서웠다는 것입니까? 죽음을 걱정한 것이 아니요, 형벌을 무서워한 것도 아닙니다. 그것이야말로 신령한 두려움입니다. 하나님의 큰 기적 앞에 꼼짝 못하는 두려움입니다. 영적 두려움입니다. 간수가 죄수를 두려워할 것 있습니까? 이러한 두려움이 바로 꼭 필요한 경건의 기초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됩니다. "선생들아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여기서 말하는 구원이 무엇이겠습니까? 그가 한번도 생각하지 못했던 세계입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겠는가, 하나님의 크신 능력 앞에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 이 큰 죄를 짓고 내가 어떻게 살아남을 수 있겠는가―아주 단순한 고백입니다. 이 때에 유명한 복음이 주어집니다. 중요한 요절입니다. "주 예수를 믿으라그 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전도지에 많이 인용되는 말씀입니다. 전도지에는 으레 이 말씀을 씁니다.
본문의 맥락에서 생각을 해보면, 여기서 말씀하는 바 주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이렇게 해석되어야 할 것입니다. 네가 지금까지 간수로 로마 황제를 섬겨왔다, 세속적으로는 로마 황제를 향하여 충성을 다하고있지마는 이제 생각을 바꾸라, 이제는 영적으로 그리스도의 왕권을 인정하고, 예수를 주로 고백하고, 그를 왕으로 영접하라― 그런 뜻입니다.
지금까지는 우상을 섬겼고, 돈을 섬겼고, 명예를 섬겼고, 세상 권세를 섬겼지만 이제는 네 양심 깊은 곳에서 예수 그리스도를 섬겨라, 예수 그리스도를 왕으로 모셔라―이것이 믿는다는 뜻입니다. 예수를 왕으로 모시고 그에게만 충성을 맹세하라, 주 예수, 왕 예수를 믿으라, 그리하면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으리라―간단하게 깊은 진리를 말씀합니다. 특별히 너와 네 집이 구원을 얻을 것이라고 말씀합니다. 간수는 이 말씀을 듣고 그대로 영접합니다. 전적으로 영접합니다. 그래서 그와 온 집이 세례를 받습니다. 당장 세례를 받습니다. 그리고 특별히 본문을 보면 상처난 자리를 다 씻어줍니다. 씻어주면서 무슨 말을 했을 것 같습니까? 죄송합니다, 미안합니다, 미련한 사람이 이렇게 했으니 용서해주세요―그리고 음식을 차려주고 후하게 대접을 하는데, 보세요. 마지막 대목이 얼마나 은혜스러운지 모릅니다. 세례를 받은 다음에 온 집이 하나님을 믿음으로 크게 기뻐했다 합니다. 마치 고넬료의 집과 같아요. 영적으로 큰잔치를 합니다. 온 집이 크게 기뻐하니라―이 기쁨은 금을 얻는 기쁨이 아닙니다. 출세하는 기쁨도 아닙니다. 권세를 얻는 기쁨도 아닙니다. 세속적인 기쁨이 아닙니다.
"내가 주는 기쁨은 세상이 주는 것과 다르다"하신 예수님 말씀대로세상이 주는 것과 다른, 정말로 훌륭한, 정말로 놀라운, 절대적인 기쁨을 맛보게 되었다는 말씀으로 본문이 마무리되는가 하는데, 여기서 더욱 중요하고도 재미있는 말씀으로 이어집니다. 본문의 맥락으로 보아 간수가 상관에게 가서 그 이야기를 다 한 것 같아요. 지진이 났고, 옥문이 열렸고, 죄수들은 하나도 도망가지 않았고, 하면서 자세하게 몇 시간 이야기했겠지요. 상관들이 사람을 보내어 바울과 실라를 놓아주라고 합니다. 그리하여 간수가 나가라고 하니까 바울은 무슨 소리냐 합니다.
"로마사람인 우리를 죄도 정치 아니하고 공중 앞에서 때리고 옥에 가두었다가 이제는 가만히 우리를 내어 보내고자 하느냐 아니라 저희가(너희 상관이)친히 와서 우리를 데리고 나가야 하리라"합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하나는, 바울이 왜 이에 이르러 큰소리를 치는가―그 점입니다. "나는 로마 시민이다"라는 카드를 그는 때릴 때에 안 맞으려고 내놓은 것이 아니거든요. 사도 바울이 애초에 매 안 맞기 위해서 "나 로마 시민이요" 한마디만 했었더라면 안 맞았습니다.
「렉스 툴리아」라고 하는 옛 문서에 보면 로마 시민은 치안 관에게나 다른 어떤 사람에 의해서도, 어떤 상황에서도 매를 맞거나 구속되거나 해서는 안 된다는 명령이 있습니다. 로마 시민은 어디에 가서 살든지 특권을 누리게 했어요. 로마 안에도 로마 시민이 3분의 1, 자유인이 3분의1, 그리고 3분의 1이 노예입니다. 로마 시민은 대단한 권리가 있었습니다. 북경에 가보면 북경 시민의 권리가 또 대단합니다. 북경 시민권 가진 사람은 북경에 그리 많지 않아요. 그리고 평양에 가면 평양 시민, 대단합니다. 대단한 권세가 있습니다. 평양 시민 한번 돼보는 것이 평생소원이라고들 합니다. 그것은 아무나 되는 것이 아닙니다.
로마시민은 어디에 가나 구속되거나 매맞거나 하지 않게끔 신분이 보장되어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바울이 매를 맞을 때에, 때리려고 할 때에 손을 들고 "삼가라. 나는 로마시민이다"했다면 매 안 맞을 수 있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 때에는 입을 다물었어요. 이리 치고 저리 치는 것 다 맞았어요. 다 맞아놓고 이제 와서야 "로마시민을 이렇게 대우하는 거냐"합니다. 바울이 자기를 편하게 하고자 해서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근본 목적은 바로 그 간수의 믿음을 확실하게 굳히기 위함이었습니다. 또 그 행정관을 예수 믿게 하려 함이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세워놓은 빌립보교회가 튼튼히 서게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로마사람을 함부로 때렸도다, 하고 세속적 권세를, dignity를 한번 내세운 것 같아요.
이 본문을 읽을 때마다 생각나는 것이 하나 있습니다. 깡패 출신 김익두 목사님이 어느 날 교회에 부흥회를 인도하러 가는 길이었습니다.
높은 산을 올라가는데 하도 더워서 옷을 벗어붙이고 바람을 쐬는 중이었습니다. 저만치 술취한 청년 하나가 비틀거리면서 올라옵니다. 이 청년, 김 목사님 앞에까지 와서는 목사님보고 다짜고짜 "너 왜 나보다 먼저 올라왔느냐"하고 한방 먹이는 것이었습니다. 술 취한 청년이 때리는데 맞을 수밖에요. 김 목사님은 한참동안이나 잠자코 때리는 대로 맞았습니다. 청년은 상대가 대항을 하지 않으니까 재미가 없었던지 제풀에 식식거리면서 털썩 주저앉고 맙니다. 김익두 목사님은 청년의 두 손을 마주잡고 "형님, 다 때렸소?"하면서 새삼 정색을 하고 말씀합니다. "내가 김익두야." 그제야 청년은 사색이 되어 살살 빕니다. '김익두'라면 천하에 소문난 왕년 '어깨'요 '주먹'이거든요. 목사님은 덧붙여 "내가 예수를 믿기 전에 이런 일을 당했으면 너는 여기에다 묘를 쓰고 마는 거다. 그런데 내가 예수믿어서 니가 산 거야. 그리니까 잘 들으라구. 예수는 내가 믿고 복은 니가 받았다." "그럼 난 이제 어떻게 해야 합니까?" "어떻게 하긴 뭘 어떻게 해? 따라와야지." 목사님은 청년을 부흥회에 데려갔고, 그 청년은 찍소리 못하고 따라갔다가 예수 믿게 되었고, 뒷날 장로까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가 김익두 목사님에게서 직접 들은 것입니다.
보십시오. 다 맞아놓고야 마지막 카드를 내놓는 것이었습니다. 바울 보세요. 다 맞고 나서 이제는 가십시오 하니까 아니다, 나 로마시민이다, 합니다. 멋있지요? 중국 선교의 아버지라고 하는 허드슨 테일러가 영국으로 돌아가 선교 보고를 했습니다. 많은 청년이 중국 선교사로 가겠다고 나섰습니다. 테일러는 그들에게 물어보았습니다. "자네는 왜 가려고 하나?" 청년들은 대답합니다. "중국의 불쌍한 사람들, 내가 가서 건져야지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가야지요. 그 무식한 사람들, 내가가서 가르치렵니다." 허드슨 테일러는 "그 마음도 좋은 마음이오. 그러나 그 마음 가지고는 그 어려운 고통을 견디어내기 어려울 것입니다"합니다. 청년들은 "그러면 당신은 무슨 마음으로 전도합니까?"하고 묻습니다. "저요? 간단하지요. 나는 중국사람을 사랑합니다. 정말로 사랑합니다. 그것뿐입니다."
오늘 사도 바울은 이 간수를 사랑했어요. 빌립보 사람들을 사랑했어요. 그런고로 그 같은 능력이 있고, 그 같은 권세가 있었던 것입니다.
세속적인 모든 권세를 다 극복한 영적 권세로 거두는 놀라운 승리가 여기에 있지 않습니까? 여기에 참 자유가 있는 것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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