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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명과 죽음(롬7:7 ~ 13)
오늘의 본문 가운데는 계명과 죽음에 대한 말씀이 있습니다. 본문의 끝부분에 보면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해서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다고 말씀합니다. 율법이 나를 죽이는 것입니다. 계명이 나를 살리는 것이어야 하는데, 그게 원리적인 것인데, 오히려 나를 죽였다 하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은 대단히 실제적인 말씀입니다. 깊이 생각해보면 우리의 인간 실존에 있는 것이고 또 구체적인 것입니다. 어떤 분은 이 말씀을 교육학적으로 혹은 윤리학적으로 원용해서 자기 이론을 전개하기도 합니다. 어쩌면 여러분이 가정에서 가정교육을 할 때에도 이 말씀의 원리를 잘 이해하면 크게 도움이 될 것이고, 심지어는 여러분 자신의 심령을 스스로 다스려나감에 있어서도, 영적 성장을 위해서도 이 말씀을, 귀한 생명의 원리를 바로 이해하고 실생활에 적용할 수 있으면 크게 도움되고 은혜될 줄로 압니다.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먼저 살피고 나가야 할 것은 율법이라고 하는 단어의 개념입니다. 율법이라는 말은 넓게 생각할 때에는 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하고, 구약성경 전체를 가리키는 말이 되기도 합니다. 혹은 이것은 양심 속에 있는 불성문법, 문자로 기록되지 아니한 그런 율법도 다 포함하는 개념일 수도 있습니다마는 특별히 오늘의 본문에서 말씀하는 율법은 '기록된 율법'입니다. 문자로 기록된 율법입니다. 즉 십계명을 비롯하여 이에 연계된 율법 전반을 일컫는 것입니다. 직접적으로는 십계명입니다. 그 다음에 이에 관계된 모든 율법을 말씀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바로 알고 풀어야만 이 본문의 말씀이 제대로 해석될 줄로 압니다.
본문은 "율법이 죄냐"하고 토론적으로 나옵니다. 그렇게 들고 나옵니다. 율법이 잘못된 것이냐 하면 그렇지는 않아요. "그럴 수 없느니라"--율법은 항상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그 율법이 옳지 않은 것으로 되어버리게 된 원인을 제공한 것은 바로 우리 자신인 것입니다. 그 원인은 우리 자신에게 있다, 하는 말씀입니다. 대단히 역설적이면서도 아주 실제적인 교훈을 우리에게 주고 있습니다. 먼저 한번 죄를 생각해봅시다. 오늘의 본문에 암시하고 있는 죄의 개념은 이렇습니다. 일단 내가 죄를 짓습니다. 그 다음에는 죄를 거듭합니다. 잘못된 일인줄 알면서도 거듭합니다. 다시말하면 회개가 없다는 말씀입니다. 회개 없이 죄를 반복하고 있습니다. 그러는 동안에 어떤 결과가 오는고 하니, 이제는 점점 어떤 생각을 하게 되는고 하니, 이렇습니다. 처음에는 죄를 모르고 짓고, 그 다음에는 죄를 알고 짓고, 그 다음에는 죄를 반복합니다. 스스로 죄인됨을 알게 될 때에 이제는 죄에서 떠날 생각을 하지 않고 오히려 죄를 정당화하려고 합니다. 그래서는 율법을 향해서 도전하는 마음을 가집니다. 죄인이면서도 '이것은 죄가 아니라'고 변명하려고 듭니다. 그래서 '이것은 불가피했다'--그렇게 말하기도 하고 어떤 때에는 '그러나 결과는 좋았다'--결과를 가지고 정당화하기도 합니다. 좀더 무서운 것은 율법을 향하여 도전하는 것입니다. '법이 잘못됐다, 율법 자체가 근본적으로 잘못된 것이다'--이렇게 몰아가려고 듭니다. 그리고 율법에 대해서 반항을 하게 됩니다.
가만히 보세요. 대체로 아주 죄에 깊이 물든 죄인은 자기가 죄인이 아니라고 합니다. 그리고는 법이 잘못됐다는 것입니다. 법이 잘못돼 가지고 괜히 나를 죄인이라고 지금 이렇게 정죄하고 있는 것이지 사실 나 자신은 죄인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여기에 이르게 됩니다. 율법은 자체를 놓고 비판합니다. 이것은 하나님께 대한 도전입니다. 양심 자체에 대한 도전입니다. 하나님의 계명 전체에 대한 정면도전입니다.
이렇듯 아주 무서운 결과에 이르게 됩니다. 보통의 범인들만 이러는 게 압니다. 일반적인 사람들만 이러는게 아닙니다. 혹은 깊이 죄에 빠진 사람들만 이러는 게 아닙니다. 소위 지성인, 학자라는 사람들에게서 더더욱 이런 일이 일어납니다. 아주 교묘하게 하나님을 대하여 도전합니다.
역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인물의 한 사람을 들어서 이를 설명하고자 합니다. 독일에 포이에르바하라 하는 철학자가 있었습니다. 그는 기독교의 본질(Essence of Christianity)」이라고 하는 책을 썼습니다. 제가 60년대 초에 이 책을 읽으면서 상당히 충격을 많이 받았습니다.「기독교의 본질」이라니, 책 제목은 근사한데 사실은 본질을 말하고 있지 않습니다. 흔히들 이 책이 칼 마르크스가 공산주의를 정립하는 데 지대한 영향을 주었다고 말합니다. 그의 말 중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신은 단지 인간의 원형이요 이상일 뿐, 그 밖의 아무 것도 아니다. 따라서 사람은 신과 같이 되어야 하고, 또 언젠가는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 여기서 우리가 유심히 보아야 할 대목은 '신과 같이 되어야 하고' 입니다. 어디서 듣던 말 같지요? 생각납니까? 바로 에덴동산에서 뱀이 하와에게 한 말이 아닙니까? "하나님과 같이 되어"--창세기 3장 5절에 나오는 말씀이 아닙니까? 신과 같이 되어야 하며, 그렇게 되기를 희망한다--희망하는 그것, 그 이상, 앞에 있는 그 추상적인 목표, 그게 신이다--이것이 이 철학자의 말입니다.
여기서 영향을 받은 칼 마르크스는 한술 더 떠서 이렇게 말합니다. "신은 인간이다--God is man." 그리고 대놓고 호전적인 선언을 합니다. "그래서 인간은 신으로부터 자유해야 한다." 포이에르바하는 이런 소리도 했습니다. "교황청에서 교황을 몰아내기 전에 하나님의 보좌로부터 하나님을 몰아내라. 그래야 인간이 자유할 수 있다"--엄청난 소리를 합니다. 이 소리에 많은 지성인들이 따라갑니다. 초인간을 논합니다. 마르크스는 이것을 그의 정치철학 속에 구체적으로 실현하게 됩니다. 하나님으로부터 자유한 인간, 하나님 없는 인간을 만들어 보겠다 하며 소위 '혁명'을 목청껏 외쳐보았습니다. 그러나 그 결과가 어떻게 되는지를 우리는 너무나도 밝히 보는 바입니다.
오래전에 헝가리가 자유화되자마자 제가 가보았는데, 그곳 지도자들 보고 이렇게 물어보았어요. "어떻게 되어서 이 공산주의가 무너졌습니까? 그렇게도 당당하던 공산주의가 왜 무너졌습니까?" 그랬더니 "하나님을 부인했더니 인간이 없어지고, 인간의 인간성이 없어지고나니까 창의력도 없어지고, 지식도 없어지고, 도덕도 없어지고, 마지막에는 경제력도 없어졌습니다. 이래서 이렇게 비참해졌습니다"라고 말합디다. 여러분, 얼핏 생각하면 하나님이 없는 것 같지요? 뭐 잘 볼 수 없는데 있다고 해도 되고 없다고 해도 되고, 그럴 것 같지요? 그러나 하나님을 부정하는 순간에 인간 자신이 부정된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런고로 하나님의 율법, 하나님의 법은 항상 살아 있어야 됩니다. 내가 지킬 수 없다고 해서 그것을 부정한다든가 아무도 지키지 못한다고 해서 율법이 잘못됐다 하고 도전해서는 안됩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율법이 죄냐 그럴 수 없느니라(7절)."--율법은 언제나 옳습니다. 모든 사람이 다 지키지 못했어도 율법은 옳은 것입니다.
여전히 옳은 것이에요. 의로운 것이에요. 율법의 의로움을 우리는 조금도 건드려서는 안돼요. 우리가 비록 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다 하더라도 우리의 죄인됨만은 그대로 인정하고 하나님의 율법의 선하심을 항상 긍정해야 되는 것입니다. 내 주관적인 생활이나, 나의 어떤 것을 합리화하기 위해서 하나님의 율법 자체를 바꾸려고 해서는 안됩니다.
언젠가 제가 이 문제를 가지고 많은 사람으로부터 질문도 받고, 또 얘기해본 일이 있습니다. 우리나라에 6․25가 터진 지 5년, 10년, 15년, 20년이 지나갔습니다. 북한에 아내를 두고 홀홀단신 남한에 온 분들이 20여 년을 혼자 지내다보니 아무래도 어렵지 않습니까? 그분들 말대로는 마음으로도 죄를 짓게 되고 생활도 엉망이고, 도대체 마음의 균형을 잡을 수가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그래 저한테 자꾸 물어봅니다. "장가를 가긴 가야 되겠는데 목사님, 이제 한 20년쯤 지났으니까 지금은 장가가도 괜찮지 않겠습니까? 아, 남북이 언제 통일될는지도 모르는데요. 그렇지 않습니까?" 그래서 제가 이렇게 대답했습니다.
"북한에 있는 사람이 살았느니 죽었느니 그런 쓸데없는 소리는 하지 말고 '그저 죄인 줄 알지만 장가들랍니다'하고 장가갈 테면 가세요.
죄 아니라고 생각하지는 마세요." 그렇지 않아도 죄가 많은데 거기다가 플러스 알파인 거예요. 의인이 된 것처럼 말하는 것 좀 보세요. 그것은 죄가 아니라고 자꾸 말해달라는 거예요. 심지어는 총회에서 결의해달라고까지 해요. 그러나 쓸데없는 소리--어떻게 총회가 그걸 결의합니까? 말도 안되는 소리예요.
모든 일이 그래요. 율법은 율법대로 살아 있는 것이에요. 죄를 지어도 죄인 줄 알고 지으세요. 죄가 아니라고 한다든가, 혹은 이래저래 정당화하려는 생각은 마세요. 특별히 이런 소리들 많이 하지요? '인간인 고로'라든가 '하나님께서 법을 잘못 만드셨다'라든가 '아무도 이룰수 없는 율법은 왜 만드셨나?'라든가--이렇듯 하나님께 정면으로 도전하지는 마세요. 나의 주관적인 지식이나 경험에 의해서 진리에 대한 객관성에 도전하는 어리석음을 범해서는 안된다는 말씀입니다. 율법은 항상 옳고, 항상 선하고, 하나님은 옳고, 그리고 하나님의 음성은 정당하다--이 사실만은 언제든지 깨끗하고 인정하면서 살아가야 되는 것입니다. 이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러면 율법이 하는 일은 무엇입니까? 오늘의 본문은 그것을 말씀해주고 있습니다. 사람은 본래 죄를 지었지요. 일단 죄를 짓되 그 전에도 의와 불의를 알만한 능력이 있었어요. 그런데 죄를 자꾸 지어가는 가운데서 이제는 타락해버려서 마음 속에 본디 있었던 율법,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바 하나님의 형상, 하나님의 의를 판단하는 그 기능이 흐려지기 시작했어요. 처음에는 알고 죄를 지었지만 지금은 아예 모르고 짓게 되는 거예요. 점점 판단력이 흐려지니까, 몽롱해지니까 이제는 몰라요. 그러면 이렇게 계속 모르도록 인간을 내버려두실 것이냐, 하면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율법을 주신 거예요. 글로 된 율법을 딱 주셨어요. 이 율법을 우리가 읽어요.
살인하지 말라, 간음하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십계명을 외워요. 외는 동안에 그 마음속에 잠들어 있던 율법, 양심이라고 하는 율법, 영적 율법이 살아나요. 다시 깨어난다는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죄구나, 저것이 잘못된 것이구나, 하고 알게 되는 것입니다. 율법에 무엇이 죄라고 지적되어 있다는 것 자체보다도 율법이 우리 마음속에 있는 영적 율법을 일깨우는 것입니다. 그래서 넓은 의미에서 성경을 자꾸 읽어나가면, 하나님말씀을 자꾸 들으면 무엇이 죄인지 무엇이 의인지, 무엇이 하나님의 뜻인지를 밝히 알게 돼요. 영적 지각이 다시 각성되고 다시 눈을 뜨게 된다는 말입니다. 그것을 잊지 말 것입니다. 그런고로 오늘의 성경말씀에 "율법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느니(7절)"라고 합니다. 율법이 뭐냐, 율법은 죄를 알게 한다, 율법이 없이는 내가 죄를 알지 못하였더니 이제는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됐다 함입니다. 율법이 죄를 알게 한다는 말씀이에요. 이것은 대단히 중요합니다.
어떤 사람이 율법에 대하여 재미있게 표현했어요. '율법은 마치 구정물통의 막대기와 같다'라고 했어요. 요새 수돗물 쓰는 사람들은 잘 못알아들을 것입니다마는 옛날에는 집집마다 부엌에 커다란 뜨물통이 있었어요. 설겆이한 물도, 밥먹고 남은 찌꺼기도 다 거기에 넣어요. 그래 이 모아놓은 것으로 돼지를 먹이기도 하고 합니다. 그런데 한나절 가량 가만히 놓아두면 통 속의 물이 맑아져요. 그 더러운 것이 다 가라앉아서 깨끗합니다. 그런데 막대기를 가지고 한번 휘저으면 모조리 올라옵니다. 율법은 이 구정물통을 휘젓는 막대기와 같다고 한 것입니다. 율법이 없이 하나님말씀을 모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죄와 모든 더러운 것들이 다 가라앉아서 마치 맑은 것 같아요. 깨끗한 것 같아요. 그러나 율법의 막대기로 한번 휘저어놓으면 볼 수 없던 것도, 냄새조차 맡을 수 없던 것도 다 올라와 모습을 드러냅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죄를 알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언젠가 한번 책에서 보고 깜짝 놀란 것이 있습니다. 어떤 여자의 남편이 아주 술을 많이 마시는데, 전에는 그렇게 건강하던 사람이 술을 마시면서 엉망이 되어버렸어요. 그런데 이 사람은 술에서 깨어나면 술 취했을 때에 있었던 일을 하나도 몰라요. 전혀 모르는 거예요. 술 깬 다음에, 당신이 이랬지 않느냐 저랬지 않느냐 하면 내가 언제 그랬느냐고 오리발을 내미는 것입니다. 야단났지요. 그래 이 부인이 남편이 하도 술취하고, 엄청난 행동을 하고도 모른다니까 자기가 한 번 술을 먹어봤대요. 정말 기억이 안나나 하고요. 그래봤더니 말짱하게 다 생각이 나더랍니다. 그래서 "나는 술을 먹어도 정신이 말짱한데 당신은 왜 그러냐?"하고 남편한테 따졌지요. 그런데 의사의 얘기는 그렇지 않아요. 그것도 정도가 있답니다. 처음에는 다 생각이 나게 되어 있는데 술로 인해서 뇌의 기억력 세포가 파괴된다고 합니다. 알콜 중독증은 이 때부터입니다. 벌써 세포가 파괴되었어요. 그래서 술먹을 때의 일이 기억 안나는 사람이라면 알콜중독 제1기입니다. 벌써 시작이 된 거예요. 세포가 파괴됐어요. 그러니까 우리가 한두 번 술먹어보아서는 '나는 기억이 나는데 너는 왜 안난다고 하느냐' 하고 싸움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저쪽은 병신이고 이쪽은 정상이니까요. 얘기가 안되는 거예요. 저쪽은 벌써 병자인 것입니다. 어쨌든 이렇게 술을 먹고 별소리 다 하고 못되게 구는데 술만 깨면 나 모른다 하는 남편을 어떻게 하면 좋을지, 생각끝에 부인은 남편이 술먹었을 때에 한 짓을 전부 사진으로 찍었어요. 코를 드르렁드르렁 골아서 온집안 식구 잠을 못자게 한 것도 녹음을 했어요. 그래가지고 그 사진을 결혼사진 옆에다가 딱 붙여놓았어요. 아니나다를까, 남편이 아침에 일어나 그 사진을 보더니 깜짝 놀라더랍니다. "여보, 저 사람이 누구요?" "당신 아니예요?" 그리고 부인은 녹음한 것을 딱 틀어주면서 말했어요. "들어봐요. 이 정도니 우리가 잠을 자겠어요? 좀 곱게 살아요. 당신이 얼마나 무서운 가해자가 되고 있는지 알아요?" 이 남편, 자신의 모습에 스스로 경악, 마침내 회개했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이렇게 남을 괴롭히면서도 모르고 있는 거예요.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지를 몰라요. 모르고 있는 동안에는 모르는 것이지요. 본인에게는 그게 아니예요. 죄가 죄 아니고, 잘못된 일이 잘못된 일이 아닌 것으로 되고 말아요. 그러나 율법이 옴으로써 다 드러나는 것입니다. 마치 거울을 보는 것처럼 드러납니다. 거울 보기를 싫어하는 사람도 있지요?
여러분, 이 한 가지는 알아야 합니다. 젊었을 때에는 자꾸 사진찍지만 나이 좀 많은 사람들보고는 자꾸 사진 찍자고 하지 마세요. 그것 별로 좋아 안해요. 젊은 사람들 찍는데 배경 서주는 것이지, 정말로 찍고 싶지 않은 거예요. 저는 간혹 어디로 구경갔다가 사람들이 사진찍는 것을 가만히 봅니다. 젊은 사람들이 찍는 걸 보면, '아, 그것 괜찮겠다' 싶어도 나이많은 사람들이 나도나도 하고 찍는 것을 볼 때에는 '웃기고 있구만' 싶어요. 자기의 무슨 꼴 보겠다고 찍어요? 그렇지 안아요? 사실 젊었을 때에 거울도 보는 거지요. 아마 여러분도 거울 보기 싫은 사람이 많을 거예요. 그러나 어찌하겠습니까? 남에게 보일 얼굴이니까 나도 봐야지요. 남에게 보일 얼굴이니까 나도 볼 수밖에요. '접수'해야지요. 어떻게 '이것 아니접수하겠다'고 하겠어요? 그렇지 않아요? 율법을 통해서 우리가 다 노출되고 다 들통납니다. 하나님 앞에, 사람 앞에. 그런고로 나 자신 앞에도 내가 이것을 밝히 노출시켜서 받아들여야 된다는 말씀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있습니다. 율법은 죄를 알게 합니다.
두 번째로, 율법은 죄를 생산합니다. 율법으로 말미암아 내가 가책을 느끼게 되지 않습니까? 가책을 느끼고 두려움을 느끼는 순간에 그것이 반작용을 해서, 때로는 역작용을 해서 죄를 더 만들어요. 거듭 죄를 짓게 해요. 두려운 마음이 있으면 죄를 짓게 되지 않습니까? 또 한 가지는 형벌의식에 매이니까 벌받을까봐 벌벌 떠는 동안에 또 죄를 지어요. 하나님의 사랑은 보이지 않고, 하나님의 진노만 보입니다. 마지막에는 절망하게 됩니다. 절망하고보면 무슨 일이든지 해요. 이제부터는 무서운 것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은 걷잡을 수 없어요. 더 튼 죄를 짓게 되고 더 방종하게 되고 폭력적 인간이 됩니다. 참 무서운 일입니다. 그래서 율법이 죄를 생산한다, 죄를 짓게 만든다, 더 큰 죄를 짓게 만든다 합니다. 사실입니다. 대개 보면 요새 와서도 완전범죄라는 것을 시도하는 사람들이 있잖아요? 가책을 느끼니까 그 다음에 올 형벌을 생각해서 그 증거를 인멸하여 완전범죄를 꾀해요. 그러나 그렇게 될 수는 없어요. mission impossible, 그래서 이런 문제가 된다는 거예요. 율법이 죄를 더하게 만든다--이런 결과가 나왔어요. 그렇다고 율법이 나쁘냐 하면 율법 자체가 나쁜 게 아니예요. 내가 나쁜 것이지요. 또하나 있습니다. 율법은 사람을 죽입니다. 인간성을 죽입니다. 인간의 능력을 죽입니다. 창조력을 죽입니다. 지혜를 죽입니다.
율법으로 인해서 율법 앞에 선 인간은 그 존재 자체가 죽어지고 맙니다. 왜요? 이미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이미 끝났기 때문입니다. 참으로 문제가 아닙니까?
제가 창녀들이 모이는 어떤 모임에 가봤어요. 그들 가운데 상당수가 어떤 잘못된 일로 인해서 어렸을 때에 정조를 잃었어요. 심지어는 술먹고 들어온 친아버지한테 당한 사람이 있어요. 그래 이런 일로 인해서 그만 세상을 나쁘게 봤어요. 다 망했고, 다 썩었고, 다 끝났다--이렇게 절망하고나니까 이제는 무슨 짓이라도 해요. 까짓것, 사는 동안 되는대로 살다가 지옥을 가든 어딜 가든 가야지, 하고 생각해요.
그렇지 않겠어요? 아무 소망이 없다는 거예요. 절망처럼 무서운 게 없어요. 그 가책과 그 율법, 그것이 그 사람을 죽인 것입니다. 이것이 오늘의 본문이 말씀해주는 율법입니다.
오늘의 본문 8절 말씀을 다시 한번 눈여겨 보세요.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 이는 법이 없으면 죄가 죽은 것임이니라." 자, 죄가 각양 탐심을 이루었어요. 율법이 나로 하여금 탐심하게 했어요. 무제한 욕망을 이루게 했어요. 율법 때문에 나는 심판을 받아서 이미 양심적으로 죽어버렸으니까, 그 순간에 이제는 무제한 정욕에 빠지게 됩니다. 그래서 율법이 없으면 죄는 죽은 것 이예요. 죄의 의식도 죽어요. 그래서 율법이 없었다면 그런대로 뭐가 뭔지 모르고 어벙벙한 가운데서 그냥 살아갈 뻔했는데, 율법이 날카롭게 그를 심판하게 되니까 완전히 이로 인해서 각양 탐심이, 그 무제한한 욕망이 속에서 끊어오르게 됐다 함입니다.
또 9절 말씀을 보세요. "전에 법을 깨닫지 못할 때에는 내가 살았더니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아주 오묘한 말씀이예요. 전에 율법이 없을 때에는 내가 살았다-율법을 모를 때를 상상해보세요. 죄를 지으면서도 죄인 줄 모르니까, 나쁜 짓을 하면서도 나쁜 짓인 줄 모르니까, 마치 술 취했을 때에 못된 짓하고 술 깬 다음에 다 잊어버린 사람 같아요. 내가 뭐가 나쁜가, 내가 누구보다 나쁜 게 뭔가, 하고 당당하지 않아요? 이랬었는데 율법이 딱 살아나니까, 율법이 나타나고보니까 '이제는 계명이 이르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이렇게 돼요. 죄가 능력을 얻게 되어 '너는 죄인이다,' 율법이 나타나는 동안에 '너는 용서할 수 없는 죄인이다' 선언하게 되고, 그 결과로 나는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아무 자유도 없어요.
나는 죽었어요. 율법이 하자는 대로, 죄가 하자는 대로 끌려갈 수 밖에요. 선택권도 없어요. 이제는 완전히 죄의 노예가 되어버렸어요. 그래서 율법은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죄는 살아나고 나는 죽었도다 하는 것입니다. 참 중요한 얘기입니다. 여기에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그 다음에 다시 8절과 11절 말씀을 연결해보겠습니다.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내 속에서 각양 탐심을 이루었나니(8절)" "죄가 기회를 타서 계명으로 말미암아 나를 속이고 그것으로 나를 죽였는지라(11절)"--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였다 함입니다. 무서운 얘기입니다. 죄가 나를 지배함에 있어서 죄는 언제나 이렇게 작용을 합니다. 율법을 경시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은 안계시다고 말하게 합니다. 그렇게 믿게 합니다. 율법도 없다, 심판도 없다, 하고 형벌도 축소시킵니다. 그리고 죄를 짓도록 만듭니다. 걱정할 것 없다, 하나님도 안계시고, 율법도 없고, 심판도 없으니까 안심하고 죄를 지어라, 이렇게요. 일단 죄를 짓게 한 다음에는 이제 율법을 내겁니다. 너는 이제 망했다--이렇게 작용을 합니다. 그래서 죄가 기회를 타서 나를 속였다고 성경 말씀합니다. 나를 홀렸다고도 번역할 수 있습니다. 특별히 중요한 것은 어떤 것으로 나를 속이는고 하니,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너는 이제 용서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네게서 완전히 떠났다…… 그렇게 속입니다. 여기에 넘어가면 안돼요. 죄가 더한 곳에 은혜가 더한 것입니다. 그것이 은혜인데도 불구하고 죄는 항상 우리에게 하나님의 사랑을 찾지 못하게 만듭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없다, 하나님의 은혜는 너와 상관이 없다-이렇게 우리를 심판해버리는 것입니다. 여기에 속으면 안됩니다. 에덴동산에서도 뱀이 하와를 속인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이 장면을 자세히 연구해보면 뱀이 다섯 마디를 말하는데 다 그럴듯한 말이에요. 그 중 딱 한마디가 거짓말이에요. "너희는 결코 죽지 아니하리라(창 3:4)"--안죽는다고 해요. 사실은 죽지 않아요. 무서운 말입니다. 속이는 것입니다.
그리고 죄는 때로 아름다워보입니다. 아름다운 세계를 약속하기도 합니다. 여기에 사람들이 속는 거예요. 죄가 매력있어보여요. 누가 그런 얘기를 합디다. 지금은 그런 짓 못하지마는 옛날에 미국에서 텔레비전 보다가 제일 좋은 경치가 나오면 그것은 십중팔구 담배광고예요.
조용히 흐르는 물 위의 다리에 앉아서 낚시질로 물고기 한 마리 딱 잡아놓고서 담배 한대 피워요. 멋있거든요. 이것보고 젊은 사람들이 담배 피운다는 거예요. 자, 생각해보세요. 죄가 나를 속입니다. 여기에 속아서는 안됩니다. 오히려 우리는 율법 앞에 자기 모습을 분명히해야 됩니다. 그런고로 다시한번 생각합시다. "생명에 이르게 할 그 계명이 내게 대하여 도리어 사망에 이르게 하는 것이 되었도다(102절)"--율법이 나를 죽여요. 그러나 율법은 선해요. 다시 한번 생각해야 합니다.
그렇게 된 이유는 나 자신에게 있어요. 그러나 은혜 안에 있는 사람은 이 율법의 심판으로부터 자유합니다. 율법이 너는 죄인이다, 라고 말할 때에 마르틴 루터와 같이 우리는 대답합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나를 위하여 십자가에 돌아가셨다.'
율법으로부터 벗어남으로 은혜의 질서 속에, 은혜의 법 속에, 성령의 법안에 들어가서 구원의 은혜를 맛보게 되고, 찬양하게 되는 것입니다. 좀더 나아가 생각할 것은 이 율법의 심판으로 인해서 우리는 더 그리스도께로 가까이 가게 됩니다. 율법이 나를 죽이니까 이제는 그리스도가 나를 살리고, 은혜가 나를 살리는 바로 이 생명의 길로 나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듯, 철저한 죽음이 있고야 철저한 생명이 보장되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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