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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스도인의 자랑(야고보서 1 : 9-11)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진하리라.
야고보서는 그 내용으로 보아 공동서신(公同書信)이자 목회서신(牧會書信)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선교적 의미를 지닌 말씀들입니다.
거듭 말씀하지만 그는 삼십 년에 걸친 목회 끝에 이 편지를 쓰는데, 우리의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것부터 하나씩 하나씩 다루어나가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첫째로 문제되는 것이 '시험'이요 두 번째가 '기도'의 문제라는 것은 앞서 두 시간에 걸쳐 말씀드린 바입니다.
이제 세 번째로 들 수 있는 문제는 바로 '가치관(價値觀)'의 문제입니다. 한 마디로 말해서 우리들 예수 믿는 사람은 예수를 믿기 때문에 가치관부터 바꾸어져야 합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가치관은 여전히 낡은 그대로를 가지고 있다면 결코 신앙생활에 발전을 기할 수 없습니다. 한번도 물맛을 못보고 옅은 물가를 빙빙 돌기만 하다 마는 것과 같아질 것입니다. 줄 끝에 붙들어 매여 있음으로 하늘 가운데로 훨훨 날아오르지 못하고 있는 고무풍선과도 같이 밤낮없이 그 자리에서만 맴돌게 되는 것입니다. 내 꽁무니를 잡아당기고 있는 옛것, 나를 얽어매고 있는 세상 것, 내 덜미를 꽉 잡고 있는 갖가지 헛된 가치관-이런 끄나불을 끊어주지 않는 한 나의 신앙생활은 언제나 제자리를 맴도는 데 그치고 말 것입니다. 그러고야 신앙생활은 바로될 수가 없습니다. 가치관의 문제가 중요한 것은 그래서입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이는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오늘의 이 말씀을 잘 보면 다분히 히브리적인 세계관이 나타나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구약에서 보는 지혜론적 가치관을 말씀하였고, 야고보 자신이 목회에서 경험한 바 개인적인 세계관도 반영된 것 같습니다. 나아가서는 특별히 그것을 기독교적인 세계관으로 재해석(再解釋)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아름답고 귀한 말씀입니다. 간단해 보이는 말씀입니다 마는 우리가 이 말씀을 잘 이해하고, 이 말씀의 깊은 뜻을 확신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면 우리는 이 세상사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신앙이 무럭무럭 자라나 알찬 생활을 영위할 수 있을 것입니다. 용기 있게 진취적으로 신앙생활을 해나갈 수 있을 것입니다. 기독교를 정의할 때에, 다시 말하여 예수 믿는다고 하는 것이 무엇을 뜻하느냐 할 때에, 우리는 전도학적(傳道學的)으로나 선교학적(宣敎學的)으로, 또는 성서적(聖書的)으로, 그밖에도 여러 가지 측면에서 이것이다 저것이다 하고 말할 수 있습니다마는, 사회학적(社會學的) 측면에서는 '밸류 오리엔테이션 (value orientation)' 이라고 말합니다. 좀더 구체적으로는 'value orientation in Christ' 곧 '그리스도 안에서의 가치전환(價値轉換)'--이것이 예수 믿는다는 것입니다.
사회학적 측면에서 보면 상당히 일리가 있는 정의입니다. 말하자면 '무엇이 중요한가?'-이 관점이 달라지는 것입니다.
예수를 믿으면서도 여전히 옛날 것이 좋다고 한다면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여러분이 교회에 나오시는 것을 두고 보더라도 가령 오늘 저녁 예배에 나와야 되겠다고 생각하여 이 늦은 저녁 시간에 이 자리에 나와 앉아 있다는 것은 그 자체로서 매우 중요한 일입니다. 지금은 교회에 나가야 되니 저녁식사도 못한다. 무슨 무슨 볼일도 제쳐놓아야 한다. 무슨 무슨 모임에도 나가지 못한다-이런 마음으로 예배에 나오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그렇지를 않고, 오늘은 그 친구를 만나야 돼, 오늘은 파티가 있으니 거기 나가봐야 돼…… 이런 식으로 곁눈팔다가 예배에 빠지는 사람이라면 예수 믿는 사람이라 할 수 없습니다. 이런 사람은 아무 볼일도 없는 날에라야 '오늘은 교회에나 가볼까' 하면서, 교회를 할일 없을 때에나 찾는 정자(亭子)쯤으로 생각하고 나옵니다. 결코 예수 믿는 사람이 아닙니다. 아직도 머리 속이 변화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가치관에 변화가 오지 않은 사람입니다. 오늘의 말씀은 세상의 모든 것이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가리라, 이렇게 전제하고 있습니다. 세상의 높음, 영광-그 모든 것이 풀의 꽃과 같이 부질없는 것이니, 우리는 모름지기 그 모든 것을 눈 아래로 내려다볼 줄 알아야 합니다. 그런 것을 높이 보고 살 것이 아닙니다. 아무 것도 아닌 것, 시시한 것, 잠깐 있다 마는 것, 별것 아닌 것이다-이렇게 보고 살아야 합니다. 매우 중요한 문제입니다.
이제 우리 예수 믿는 사람으로서 가져야 할 가치관은 무엇인가, 그 기본적인 것만을 우선적으로 생각해보기로 합시다. 성경이 말씀하는 바 참 그리스도인이 되려면 우리의 가치관이 어떻게 변화하여야 하는가? 해답은 다른 데 있지 않습니다.
첫째, 철저하게 하나님 중심으로 살아갈 것입니다. 곧 하나님 중심의 가치관을 말합니다. 하나님은 창조주요, 하나님은 역사의 주관자요, 하나님은 주시는 자요, 하나님은 누리게 하시는 자요--이것을 마음속에 두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지 않으면 아무도 받을 사람이 없습니다. 하나님께서 우리로 누릴 수 있는, 즐길 수 있는 기회를 주시지 않으면 가진 것도 소용이 없습니다. 내가 아무리 많은 돈을 가졌다 해도 먹지도 못하고 맘껏 써보지도 못하고 죽고 만다면 그 돈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하나님께서 누리게 하시는 것입니다. 크건 작건 하나님께서 내게 기회를 주셔야 합니다. 그런데 알고 보면 그 기회를 받지 못하는 사람도 많은 모양입니다. 일전에 미국에 갔을 때에 전해들은 이야기입니다. 제가 인천에서 목회할 당시 집사의 직분으로 있다가 미국으로 이민을 가신 분입니다. 낯선 남의 땅에서 고생 고생하다 경제적인 기반을 잡게 되자 뉴욕 교외의 한적한 산기슭에 땅을 사서 집을 한 채 지었다고 합니다. 남은 생 보란듯이 살아보겠다는 생각으로 무려 백만불을 들여 잘 지은 집이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집에서 산 지 불과 한 달만에 부인을 자동차 사고로 잃은 것입니다. 기분도 나쁘고 마음도 아파서 끝내 그 집을 파고 말았다고 합니다. 제아무리 많은 돈을 들여서 잘 지은 집이면 무엇합니까? 오래도록 행복하게 잘살아보려고 했지만 한 달도 못살고 죽고 말았습니다. 여러분, 하나님께서 그만 두라 하시면 그 즉시로 끝난 것입니다. 세상 것이 아무 소용이 없어집니다. 내가 가졌다고 그것이 내 것 되는 것이 아닙니다. 제가 늘 우스갯소리로 하는 말입니다 마는 먹어버린 것만 내 것인 것입니다. 먹어 뱃속에 들어가 있는 것이나 틀림없는 내 것입니다. 사실 밥상에 놓인 것도 내 것이랄 수 없습니다.
먹게 될지, 못 먹게 될지 모르기 때문입니다. 내 손안에 있다고 내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께서 주시고 하나님께서 거두십니다. 주시는 자도 하나님이시요 거두시는 자도 하나님이십니다. 누리게 하시는 자도 또한 하나님이십니다. 모름지기 모든 가치의 중심을 하나님께 둘 것입니다.
둘째, 반드시 영적인 것을 우선에 둘 것입니다. 물질적인 것, 세상적인 것이 있습니다마는, 그리스도인에게는 마땅히 영적인 것, 보다 신령한 것이 먼저이어야 합니다. 언제나 더 깊은 것에 가치의 중심을 두어야 합니다.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보이지 않는 것이 더 중요합니다. 물질과 마음, 물론 마음이 중요합니다. 돈과 정성, 물론 정성이 중요합니다. 음식과 사랑, 물론 사랑이 중요합니다. 보이지 않는 것과 신령한 것, 따지자면 옳은 말이 아니지만 어쩌다 쓰기 시작해서 곧잘 쓰게 된 '마음적인 것'-이러한 정신적이고 영적인 것에 더 높은 가치를 둡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이 이러해야 합니다.
셋째, 미래지향적입니다. 현재보다 미래, 순간적인 것보다 영원한 것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오늘이 좀 고생스러우면 어떻습니까? 영원한 것을 위한 고생이라면 괜찮습니다. 천국 가기 위한 것이라면 오늘의 고생이 하등 문제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요…… 의를 위하여 핍박을 받은 자는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희 것임이라(마 5 : 3-10)." 당장 죽어야 하는데, 거기에 복이 있습니까? 천국이 저희 것이기에 복이 있는 것입니다. 모든 가치의 근거를 저 먼 미래, 특별히 영원한 세계에까지 두고 오늘을 생각합니다.
넷째, 자기중심적인 것보다 이타적이요 봉사적인 것에 가치를 둡니다.
내게 이로운 것보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운 것, 나아가 전체에게 이로운 것이라면 나 한 사람의 손해쯤은 문제되지 않습니다. 다른 사람에게 이로울 수 있다면 내가 피해 좀 입어도 괜찮습니다. 이러한 마음가짐이 바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인 것입니다. 사랑 중심적이요 봉사 위주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 모름지기 그리스도 안에 있음을 말합니다. 가치관 자체가 중생을 해야 합니다. 가치관이 그리스도 안에서 변화하지 못하면 우리의 신앙생활은 항상 제자리걸음일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스도안에서 변화하지 않으면 참 그리스도인이 아닙니다. 믿지 않는 사람과는 무엇이든 달라야 합니다. 목적이 다르고 중심이 달라야 합니다. 최우선적인 것이 무엇이냐, 가장 급한 것이 무엇이냐-예수 믿는 사람과 믿지 않는 사람의 시각은 여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다른 바가 있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소원도 다릅니다. 안 믿는 사람의 소원과 같을 수가 없습니다. 당연히 달라야 합니다. 취미도 다릅니다. 음악을 듣는 것도 그렇습니다. 안 믿는 사람들이 좋아하는 록큰롤도 좋은 것이 아닙니다. 보다 은혜스럽고 고상한 데에 있어야 합니다. 보다 신령한 데에 있어야 합니다. 일상적인 감정 표현도 다릅니다. 울고 웃고 하는 것도 예수 믿는 사람은 달라야 한다는 말입니다. 안 믿는 사람이 슬퍼하는 것을 같이 슬퍼하고, 안 믿는 사람이 기뻐하는 것을 같이 기뻐하면 되겠습니까? 예수님은 이 문제를 놓고 간단하게 말씀하십니다. "평안을 너희에게 끼치노니 곧 나의 평안을 너희에게 주노라. 내가 너희에게 주는 것은 세상이 주는 것 같지 아니하니라. 너희는 마음에 근심도 말고 두려워하지도 말라(요 14 : 27)." 예수님께서 주시는 평안은 세상이 주는 것과는 다른 평안입니다. 물질적이고 세속적인 것이 아닙니다. 그리스도인의 '밸류 오리엔테이션'은 전혀 다른 것입니다. 이제, 나 자신을 돌아보십시다. 안 믿는 사람과 다른 가치의 세계를 살아가고 있습니까? 비슷비슷합니까, 아니면 분간도 할 수 없을 만큼 똑같습니까? 그렇다면 그리스도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인은 안 믿는 사람들과 다른 가치의 세계를 살아가는 사람입니다.
오늘의 본문말씀은 앞서 서론에서 말씀드린 바와 같이 철저하게 히브리적입니다. 히브리사람들의 인생관이 잘 나타나 있습니다. 비슷한 말씀이 전도서 1장이나 시편, 잠언 같은 성경에도 나와 있습니다. "헛되고 헛되며 헛되고 헛되니 모든 것이 헛되도다…… 해 아래는 새것이 없나니 (전 1 : 29)." 또한 이사야 40장의 말씀을 그대로 인용하고 있는 베드로전서 1장 24절의 말씀도 그렇습니다. "모든 육체는 풀과 같고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으니 풀은 마르고 꽃은 떨어지되 오직 주의 말씀은 세세토록 있도다." 그렇습니다. 그 모든 영광이 풀의 꽃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가끔 인천을 내려갑니다. 오늘도 인천에서 결혼식 주례를 보느라고 다녀왔습니다마는, 오랜만에 만나서 인사를 나눌 때에는 서로 조심을 해야 되겠습니다. 10년도 더 지나, 혹은 20년만에 다시 만나는 수가 있습니다. 제가 인천에서 16년 간 목회를 하다가 73년에 떠나왔으니 그곳을 떠나온 지 17년이 되었습니다. 이리되어 간혹 17년만에 만나는 사람도 있게 되는 것입니다. 이렇게 오랜만에 만나게 되면 만나자마자 첫마디가 "아유, 목사님 많이 늙으셨네요"입니다. 그 사람들 자기 늙은 것은 생각하지 않고 제 늙은 모습만 눈에 들어오는 모양입니다. 그들도 보니 팍삭 늙었습니다. 늘 만나면 함께 변해가서 그 변한 모습이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마는, 10년 20년만에 만나니 그 모습이 낯설게 느껴지는 것입니다. "목사님, 이젠 다 늙으셨네요"라고 합니다마는, 늙을 때가 아닙니까? 인생은 풀과 같은 것입니다. 풀의 꽃과 같습니다. 이것이 히브리적인 세계관입니다. 이것만 알아도 철학자가 되는 것입니다. 철학이 별것 아닙니다. 허무, 허망을 아는 것이 철학입니다. 우리에게 젊음이 항상 그래도 있는 것이 아닙니다. 얼마 안가 늙고 꼬부라질 것입니다. 여기서 생각해야 할 것이 있습니다. 사람이 동등하다는 것입니다. 보편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부한 자도 늙고 가난한 자도 늙습니다. 또한 공평하게 무덤으로 들어갑니다. 혹 비석은 다를 수도 있겠습니다마는 속은 똑같습니다. 한낱 썩은 육체일 뿐입니다. 그래서 무덤 치장하는 것처럼 어리석은 일이 없다고 합디다. 돈푼깨나 있다고 굉장하게 꾸며놓았지만-가난하여 초라한 무덤과 무슨 차이가 있겠습니까? 다 쓸데없는 것입니다. 속은 벌써 다 썩었습니다. 너나할것없이 똑같다는 것을 왜 인정하지 않으려 합니까? 그래서 결혼식과 장례식을 구별되지 않게 똑같이 하겠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이를테면 결혼식 때, 꽃을 예배당 안에 들여놓겠다는 사람이 많습니다. 저는 절대로 안된다고 합니다. 주례를 안 하겠다고 하자 하는 수 없이 마당에 주욱 진열해놓았다가 가져갑디다. 마당에 놓아둘 것을, 크면 어떻고 작으면 어떻습니까? 대충대충 해둡시다. 그렇게 야단스레 굴 것이 무엇입니까? 어떤 사람은 "하나밖에 없는 딸인데…" 합디다마는 요새 딸 둘 있는 집이 얼마나 됩니까? 왜 남과 같다는 생각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까? 결혼식이 뭐 그리 대수입니까? 하나님 앞에 기도 드렸으면 될 일입니다. 복잡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더구나 공휴일 같은 때에 결혼식을 해서 남에게 불편을 끼칩니다. 남들 할 일도 못하게 합니다. 어디 좀 가려고 해도 갈 수가 없습니다. 가서 주례를 해주기는 해줍니다마는 참 미련한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저는 본인들한테 이러한 이야기를 합니다.
"왜 공휴일에 해서 여러 사람 불편하게 하느냐? 그 한 시간 때문에 하루를 모두 빼앗기지 않느냐?" 그러나 여전히 생각이 바뀌지 않습니다. 내 생각만 합니다.
여러분, 알고 보면 사람 사는 것에 공통적인 것이 많습니다. 사람이 나고 살고 죽는 것이 별것이 아닙니다. 잘입고 못 입은들 주름살 있기는 매한가지올시다. 몸은 중고(中古)인데 새 옷 입는다고 새사람이 됩니까? 모름지기 공통적인 것을 극대화해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같습니다. 다같이 걱정거리를 안고 살아갑니다. 다같이 늙어가고 있습니다. 종국에는 다같이 죽음을 맞을 것입니다. 그럴지니 요란스레, 남과 구별하여 살 것 아닙니다. 똑같다는 것을 잊지 마십시다. 설령 다른 것이 있다고 해도 아주 작은 것이니 아예 잊어버리고 살아가십시다. 또한 하나님 중심적이어야 합니다. 그리고 종말론적이어야 합니다. 마지막 가는 길이 같지 않습니까? 그것을 극대화하여 늘상 잊지 않고 사는 것이 지혜입니다. 어떻게 생각하면 허무주의적인 것도 같습니다마는 실인즉 하나님 중심적인 세계관을 말함입니다. 그러므로 얻어지는 플러스 알파(plus α) 가 있습니다. 곧 그리스도 안에서 엄청난 변화가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본문에 나타난 대로 '자랑하게' 됩니다. 자랑이란 들어올린다, 높인다는 뜻입니다. '자랑하라'-세상을 부정하라는 말도 아니요 자기 자신을 부정적으로 보라는 것도 아닙니다. 말 그대로 자랑하라는 것입니다. 모름지기 사람은 자랑이 있어야 합니다. 특별히 그리스도 안에서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헛되고 저것은 망했다, 다 쓸데없다- 이러고 산다면 죽은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자랑거리가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교만이 아닙니다.
아시다시피 교만과 긍지는 별개입니다. 성경은 분명하게 교만을 정죄하고 있습니다. 교만이 불 신앙에 기인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전통적으로 전해 내려오는 7대 대죄(大罪), 곧 'seven deadly sins'가 있습니다. 교회 안에서의 일곱 가지 큰 죄를 말하는 것입니다. 흔히 세상에서 말해지는. 이를테면 살인이니 도적질이니 하는 세상적인 죄를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일곱 가지의 죄는 이렇습니다. 첫째가 pride-교만입니다. 둘째가 covetousness-탐심입니다. 셋째가 lust-색욕입니다. 넷째가 envy-시기(猜忌)입니다. 다섯째가 gluttony-탐식, 먹는 것을 좋아하고 또 많이 먹는 것입니다. 여섯째가 anger-분노입니다. 일곱째가 sloth-나태한 마음, 게으른 마음입니다. 이상의 일곱 가지 죄가 모두 마음속에 있는 죄입니다. 이 가운데서 첫째가 교만입니다. 교만을 용납치 않고 있습니다. 불신앙적이기 때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이런 것쯤은 죄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믿고 살아왔습니다.
그러나 이제 생각해보십시다. 질투가 얼마나 큰 죄입니까? 살인으로까지 치닫는 것이 질투입니다. 일을 요리조리 피하며 빠지려고 하는 게으름도 큰 죄가 됩니다. 그러니 이 일곱 가지의 죄 가운데 가장 큰 죄는 교만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교만과 자랑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하겠습니다.
그리스도인이 되면서 교만을 버리게 됩니다. 교만할 이유가 없어집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부자가 되어도 부를 교만의 이유로 삼지 않습니다. 돈은 있다가도 없어지는, 돌고 도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러기에 부자는 돈으로 인하여 교만해져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물질이란 하나님께서 내게 주신 사명이요, 나는 단지 청지기적 사명을 가지고 있을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십니다.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 물질은 없으면서도 마음이 넉넉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물질은 많은데 마음이 거지같은 사람이 있습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 라고. 부하고 가난하고는 문제가 되지 않습니다. 부란 물질만의 부를 가리키는 것은 아닙니다. 남들보다 많이 공부한 지식의 부요함도 교만의 이유가 되지 않습니다. 남보다 머리가 좋고 특별한 재능이 있는 것도 자랑하지 말일입니다. 심지어 건강을 자랑하는 사람도 있습니다마는 그것도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모든 것을 자랑치 않습니다. 오히려 본문에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한다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의 의미를 '셀프 베이스먼트 (self-basement)'라고 해석한 사람이 있습니다. 스스로 맨밑바닥까지 내려앉습니다. 나 자신의 기본으로 돌아갑니다. 물질이나 지식은 생각지 않고 근본적인 것만 생각하는 것입니다. 왜 그래야 합니까? 내가 죄인으로 있다가 구원받았기 때문이요, 죄인이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거기에 근거를 두고 있는 것입니다. 그것 말고는 자랑거리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도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서 많은 것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그리스도안에 있음을 자랑하고, 그리스도를 자랑합니다. 더욱이 고린도후서 11장에서는 "나의 약한 것을 자랑하리라(30절)"라고 말씀합니다. 내가 약할 때에 그리스도를 강하게 의지하게 되며,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 안에 머물게 되기에 약한 것으로 인하여 자랑하는 것입니다. 사도 바울에게는 이러한 자랑이 있었습니다. 우리도 그리스도로 인하여 버리게 된 것을 자랑해야 하겠습니다. 전에는 돈 있음을 자랑했습니다마는 이제는 돈 자랑 하고 싶지 않습니다. 그것은 이제 자랑거리가 못됩니다. 전에는 남보다 머리가 좋고 똑똑한 것을 자랑했습니다마는, 이제는 그것이 부끄럽습니다. 예수 믿고 보니 모두 부끄러운 일이 되었습니다. 세상적인 것은 아무 것도 자랑거리가 되지를 않습니다.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할지니"-그리스도 안에서, 예수로 인하여 낮아진 것을 자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진실을 찾게 된 것을 자랑합니다. 전에는 돈 있을 때에 교만하고 없을 때에 죽겠다고 야단이었습니다. 사업이 잘되면 어깨에 힘을 주고 안되면 어깨를 축 늘어뜨리고 다녔습니다. 그러나 예수 믿고 난 지금에야 더는 그런 사람이 아닙니다. 예수 믿고 보니 그렇게 죽자 사자 매달리던 세상 것들이 별것이 아닙니다.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입니다. 어떤 집사님은 이렇게 기도한다고 합니다. "하나님, 알아서 하십시오. 많이 주시면 헌금 많이 할 것이고 안 주시면 못합니다. 어찌되든 나는 하루 세 끼니는 먹을 것입니다. 안 주시면 결국 하나님이 손해보십니다."-아주 배짱 두둑한 기도입니다. 사실이 그렇습니다. 반드시 많이 가져야 되는 것은 아닙니다. 많이 주시면 많이 하고 안 주시면 못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예수 믿는 부자가 자랑을 하는데 낮아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낮아지고 겸손해진 것을 자랑합니다. 예수님으로 인하여 물질의 시험을 받지 않고 사는 것을 자랑합니다. 예수 믿는 사람은 이러합니다.
본문에서는 '낮은 형제' '부한 형제' 라고 하여 가난한 자에게나 부한 자에게나 똑같이 '형제'라고 지칭하고 있습니다.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 부한 형제는 자기의 낮아짐을 자랑하고 있습니다. 형제란 같음을 뜻하는 것입니다. 부해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요, 가난해도 그리스도 안의 형제임을 말합니다. 그러므로 자랑은 같습니다. '낮은 형제' 의 '낮다'는 말은 헬라어로 '타페이노스' 입니다. 이 말은 경제적으로만 낮다는 것을 뜻하지는 않습니다. 물론 경제적으로도 가난하고 정신적으로도 배운 바가 없습니다. 세상의 신분으로도 낮은 사람을 가리키는 말입니다. 회사로 말해서 사장과 수위가 있다면 단연 수위에 해당되는 사람인 것입니다. 그러면 낮은 사람은 정녕 자랑이 없는 것입니까? 본문 9, 10절의 말씀을 실제적으로 생각해보십시다. 예수 믿기 전에는 이런저런 모임에 나가면 가난하고 무식하고 신분이 낮다고 아예 사람취급을 받지 못했습니다. 사람도 아니었습니다. 노예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런데 이제 예수 믿고 교회에 나가니 모든 것이 다릅니다. 교회에서는 모든 사람이 형제입니다. 그 높은 신분의 사람도 나의 형제입니다. 종보고도 '사랑하는 형제'라고 말합니다. 얼마나 좋은지 모릅니다.
죄송한 이야기입니다 마는, 서울에 소위 양반교회가 몇 군데 있습니다.
혹 시비가 일어날까 하여 어느 교회라고 지칭하지는 않겠습니다. 종로에 있는 어느 교회에 백정이 다녔습니다. 아시는 대로 백정은 이른바 상놈입니다. 그 백정은 열심으로 예수를 믿고 봉사도 많이 했습니다. 마침내 투표로 백정이 장로가 되었습니다. 일이 이쯤 되자 양반들이 몹시 불쾌하게 생각했습니다. 백정보고 '장로님'이라 할 수가 없었던 것입니다. 이렇게 해서 저들끼리 따로 나와 세운 교회가 안국동교회입니다. 윤보선씨가 나가던 그 교회가 바로 양반교회입니다. 여러분, 교회에서는 백정도 장로가 되고 양반도 집사일 수 있습니다. 사람에 따라 다를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상하가 따로 있지 않습니다. 윗사람 아랫사람이 없습니다. 본문의 말씀도 그 말씀입니다. 예수 때문에 높아진 게 어디 하나둘입니까? 특히나 여성들의 경우, 예수 때문에 많이 높아졌습니다.
밤에 외출하는 것이 가당찮았습니다. 감히 밤에 사대문 밖을 어떻게 돌아다닙니까? 말도 안 되는 일이었습니다 마는, 다 예수님 덕분인 것입니다.
예수를 믿건 안 믿건 우리가 예수 때문에 높아진 것은 사실입니다. 본디 낮은 사람이었는데 예수 덕분에 높아졌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높임을 받고 있습니다. 예수로 인하여 높아진 그것이 바로 "낮은 형제는 자기의 높음을 자랑하고"입니다. 절대로 비굴해질 것이 없습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똑같은 하나님의 자녀이기 때문입니다. 낮은 형제는 높아지고 부한 형제는 낮아지고-이렇게 하여 수평을 이룹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으로 볼 때, 99퍼센트가 같은 것입니다. 이제는 교만할 것도 비굴할 것도 없습니다. 뭣 좀 안다고 나만 아는 것처럼, 모른다고 답답하게 여길 것도 아닙니다. 할 일이 많습니다. 이것 못하면 저것하고, 저것 못하면 이것 하면 됩니다. 어떤 분이 평생 소원이 성가대에서 찬양하는 것이라고 해서 보니 나이가 일흔입디다. 이제 성가대는 틀렸습니다마는, 성가대에 못 들어가면 다른 일이 없습니까? 할 일은 얼마든지 많습니다. 할 수 없는 일을 끝까지 하겠다고 매달릴 것이 아닙니다. 내게 있는 것, 내가 할 수 있는 것으로 충분합니다. 그래서 없는 것 같은 사람도 가진 바를 자랑하고, 그리스도 안에서 그 높은 가치를 발견하고 기뻐하는 것입니다. 가진 형제나 높은 형제나 그리스도 안에서는 별반 다른 것이 없습니다. 이렇게 세속적인 가치는 낮추고, 그 낮아짐을 자랑합니다.
아마도 예수님이 아니었더라면 나는 교만한 사람이 되었을 것입니다. 기고만장해서 몹쓸 사람이 될 뻔하였습니다. 예수 밑에서 낮아지고 좋은 사람이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자랑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이제는 헛된 자랑은 버리십시다. 물질에 대한 것은 모두 헛된 것입니다.
본문은 말씀합니다. "풀의 꽃과 같이 지나감이라. 해가 돋고 뜨거운 바람이 불어 풀을 말리우면 꽃이 떨어져 그 모양의 아름다움이 없어지나니," 그렇습니다. 인생은 풀과 같고 영화는 꽃과 같은 것입니다. 다 떨어져 없어지고 말 것입니다. 그러므로 "부한 자도 그 행하는 일에 이와 같이 쇠잔하리라"-이것이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입니다. 그리스도인의 가치관은 넉넉합니다. 안달하지 않습니다. 아주 초연하게 살아갑니다. 대수롭지 않을 일로 죽네 사네 하지 않습니다. 대학입시 때가 되면 합격했다고 하늘에 올라갈 듯 좋아하고 떨어졌다고 자살할 듯 절망하는 것을 볼 수 있습니다. 그럴 아무런 이유도 없습니다. 먼 훗날이 되어야 과연 어느 쪽이 잘되었는지 알게 됩니다. 한마디로 두고봐야 압니다. 하나님 앞에 소중하게 쓰임 받을 것이므로 걱정할 것이 없습니다.
부한 자의 낮아짐을, 낮은 자의 높아짐을-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는 한 형제입니다. 그리스도 안에서 같은 가치관, 같은 자랑, 같은 종말론 신앙, 같은 기쁨을 향유해야 할 것입니다. 남는 것은 그리스도 뿐이요, 그리스도로부터 받은 은혜뿐입니다. 여기에 새 세계관이 있고 새 가치관이 있습니다. 이것을 온전히 깨닫고 사는 사람의 마음속에 늘 평안이 충만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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