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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을 잃어버린 부자 (누가복음 12 : 13 ∼ 21)
프랑스 사람들의 존경하는 인물들 중에서 8년동안 일곱번이나 1위를 차지한 삐에르 신부라고 하는 분이 계십니다. 그분은 빈민구호 공동체인 엠마우스 공동체를 창설한 분입니다. 현재 나이 89세입니다. 그 신부님의 비망록 중에서 "단순한 기쁨"이라고 하는 그런 책이 있습니다. 그 중에 나오는 그의 경험담이 있습니다. 한 청년 신사가 자실 직전에 신부님을 찾아왔습니다. 그리고 자문을 구하게 됩니다. 자살하려고 하는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가정적인 문제, 경제의 파탄, 사회적인 지위…… 모든 상황으로 나는 지금 죽을 수밖에 없다 하는 이야기를 자세하게 설명을 했습니다. 신부님은 이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깊은 동정과 함께 이렇게 말합니다. "충분히 자살할 이유가 있구먼요. 일이 그렇게 되었으면 살수가 없겠습니다. 자살해야 되겠습니다" 라고 말씀을 하고 나서 "그리고, 죽기 전에 나를 좀 도와주시고 그리고 죽으면 안되겠습니까?" 라고 물었습니다. "뭐 어차피 죽을 건데 죽기 전에 신부님이 필요하다면 제가 얼마간 신부님을 돕도록 하지요." 합의하에서 그 요청을 수락합니다. 그리고 집 없는 사람, 불쌍한 사람들을 위해서 집을 짓는 그 신부님이 하고 있는 일을 옆에서 같이 돕게 됩니다. 얼마 후에 이 사람은 이렇게 고백하고 있습니다. "신부님께서 내게 돈을 주었든지, 내가 살 수 있는 집을 지어주었던지, 이렇게 베풀었더라면 나는 다시 자살을 했을 겁니다. 그러나 신부님은 내게 아무 것도 주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도움을 요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신부님과 같이 내가 일을 하면서 섬기면서 이제 나는 살아야 할 이유를 충분히 찾았고, 이제 나는 어떻게 하는 것이 행복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라고 말하게 됩니다.
철학자 쇼펜하우어는 그 유명한 "행복론"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여기에서 사람이 기본적으로 네가지를 가져야만 사람은 행복하다고 말했습니다. 아주 상식적이지만 이건 기본적인 것입니다. 첫째는 명랑한 정서가 있어야 한답니다. 매사를 긍정적으로 밝게 볼 줄 알고 생각할 줄 아는 정서가 먼저 필요하다. 이 정서가 없다면 누구도 행복할 수가 없다. 만사를 밝게, 긍정적으로 볼 줄 알아야 한다. 어둡게 보고 비참하게 보고 부정적으로 보는 이 사람은 행복과는 거리가 멀어요. 어떤 여건을 갖다 놓아도 그건 구제 불능이에요. 행복의 기본이 명랑한 정서, 긍정적 판단, 이것이 기본이라고 했습니다. 또한 그럴 것이 뭐냐하면은 여러분 보세요. 부(富)라고 하는 것, 물질의 부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부가 있고 상대적인 부가 있습니다. 상대적인 부가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가 꼭 가난해서가 아닙니다. 다른 사람이 부하기 때문에 내가 기분이 나빠서 못사는 것입니다. 여러분 6.25를 겪으신 분들 피난을 가서 가진 거라는 건 숟가락 하나밖에 없는데 이렇게 어렵게 어렵게 지낼 때, 제가 그 속에 끼여서 살아봤는데요. 그 피난 생활에도 낭만이 있더라고요. 그 뿐이 아니라 그 속에서 또 연예도 하더라고요. 그거 피난 기념으로 결혼한 사람들 많습니다. 다같이 못사니까 괜찮더라구요. 그런데 지금 우리가 이렇게 불편한 것이 꼭 못살아서가 아니고 상대방이 잘 살기 때문에 내 마음이 이렇게 어려운 거예요. 이게 상대적 부요. 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스스로 느끼는 부가 있습니다. 이것은 자기 가치관에서 나오는 것입니다. 내가 느끼는 거예요. 나 스스로 느끼는 거예요. 스스로 만족하고 스스로 행복하는 지혜를 말이에요. 얼마를 가졌던지 나는 나대로 스스로 행복할 줄 아는 그 지혜요. 이 명랑한 질서가 있어야만, 또 이 명랑한 정서를 가졌을 때, 비로소 그는 행복할 수가 있는 것이에요.두 번째는 건강한 몸이 있어야 합니다, 라고 말합니다. 또 역시 건강이 중요합니다. 사실로 건강하고 보면요 건강 하나만 있어도 건강한 사람은 절대로 불평할 권리가 없습니다. 또, 불행할 권리가 없습니다. 건강하고 불행을 논하는 사람은 하나님이 주신 건강에 대한 모독입니다. 왜요? 당신이 건강을 잃어버리고 덜커덕 병원에 입원해 보세요. 이제 여러분은 딱 한마디 할거예요. 아무 것도 없어도 좋으니 건강 하나만 있다면 나는 만족하겠노라고. 이것은 실질적 진리임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은 건강하면서도 왜 그렇게 불평이 많아요? 이건 사치스러운 거예요. 그건 사치스러운 불평이에요. 사치스러운 불행이라요. 참으로 건강은 소중합니다.
또 그런가 하면 정서적 평온이 있어야 합니다. 만족을 아는 정신적 자세를 말합니다. 만족을 알아야 되요. 사람은 부득불 자기 나름의 한계를 정해야 됩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 뭐 한끼의 식사를 하면서도 '이만하면 행복하다. 이만하면 넉넉하다.' 바로 그 마음이 행복인데, 바로 이만하다는 것, 그 한계를 내가 정할 줄을 몰라요. 가지면 더가지고, 더가지면 더가지고, 높아지면 더 높아지고…… 끝도 없어요. 이 사람은 영영 불행할 수 밖에요. 스스로 한계를 정할 줄 아는 만족할 줄 아는 지혜가 필요합니다. 아프리카 나이지리아에 가서 의료선교를 하고 있었던 어느 의사 선생님이 아침에 하도 바깥이 시끄러워서 창문을 열고 내다보고 많이 생각했다고 합니다. 밖에 보니까 아프리카의 가난한 아이들이 그 선교사님 집 마당에 와서 노는데 얼마나 재미있고 얼마나 행복하게 노는지 아이들이 이렇게 천진난만하게 행복하게 노는 것을 내가 미국에서 본 일이 없다 이겁니다. 너무 행복하게 뛰노는데 자세히 자세히 보았더니 그 아이들이 그 선교사들이 내버린 깡통, 쓰레기통에서 주워 가지고 그걸 엮어 가지고 장난감을 만들어 가지고 그렇게 행복해 하더랍니다. 내버린 깡통가지고 이렇게 아이들이 행복해 하는데 우리 미국에 있는 아이들은 좋은 장난감 가지고도 저런 행복을 누리는 것을 못 보았다고 그랬습니다. 무얼 말하는 것입니까? 만족할 줄 아는 정신적 자세가 중요한 것이요.
그리고 나아가서 약간의 외부 자산이 필요하다 라고 말합니다. 그는 자산에 대해서 이 재산이라고 하는 것은 세 가지가 있다고 말합니다. 먼저는 당연히 필요한 재산, 이것은 일용할 양식입니다. 꼭 필요한 재산. 두 번째는 여유 있는 재산. 그래서 남에게 베푸는 거예요. 주고 싶을 때 주고 쓰고 싶을 때 쓸 수 있는 그런 여유. 이건 꼭 필요합니다. 그래서 에베소서에 보면은 구제할 것이 있게 하기 위하여 일하라. 그랬어요. 내가 먹고 살기 위해서 일하는 것이 아니라 구제하기 위해서 일하는, 이런 여유재산이 필요합니다. 세 번째가 중요합니다. 불필요한 재산이 있다고 했어요. 불필요한 재산, 이 재산 때문에 근심도 많고, 걱정도 많고, 건강도 잃어버리고, 가정도 잃어버리고 자기 명예도 다 잃어버리는 사람이 있어요.
오늘 성경에 나타난 이야기는 바로 그 세 번째 이야기입니다. 불필요한 재산을 가진 사람의 이야기에요. 여기에 어리석은 부자가 있습니다. 그는 결코 행복하지 못했습니다. 저는 이렇게 생각해 봅니다. 이 사람이 가난했더라면 어땠을까? 자기 가난하고 병들었다면 예수님께 나와서 구원받았을는지도 몰라요. 이 사람 부자이기 때문에 나올 필요도 없었고 부자이기 때문에 어리석어졌고 부자이기 때문에 그는 불행해진 사람이에요. 불필요한 재산이 많았어요. 그 인격이 이것을 감당하지 못했어요. 관리 능력의 한계를 넘어서서 지나친 부, 참으로 문제입니다. 제가 읽은 책 가운데 Millionaire Gospel 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백만장자 복음. 거기서 강조하는 게 그것입니다. 재산은 축복입니다. 그러나 그건 인격이 감당할 수 있어야 합니다. 내 정서가 감당할 수 있어야 됩니다. 내 가치관이 그것을 충분히 주장할 수 있어야 됩니다. 관리 능력이 없는 재산, 이것이 바로 문제입니다 우리 나라에서도 보니까요, 복권이라는 게 있죠. 복권의 당첨은 국가 시책도 잘못된 거예요. 복권을 허락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복권적인 일이 너무 많아요. 자, 이렇게 해서 복권에서 당첨된 사람을 추적해서 연구해 보니까 95%가 다 망조가 들었어요. 없던 돈 생기니까 부부사이도 헤어지고, 부자간에도 문제고, 사회적 지위도 문제고…… 망조가 들었어요. 이 불필요한 재산, 내게서는 있어서는 안될 재산이 있어서 보세요, 부자지간에도 원수가 되고, 부부간에도 원수가 되고, 돈 때문에 이혼하고, 왜 이래 지는 겁니까? 돈 때문에 인격도 파탄이 나 버려요. 차라리 가난했더라면 참 좋은 사람인데 돈 몇 푼 손에 쥐면서 아주 망가지고 말았어요. 이거 남의 얘기가 아닙니다. 여러분, 깊이 생각해보세요. 불필요한 재산이 문제라니까요.
오늘 본문에 있는 사람이 바로 이런 사람이었어요. 가끔 여러분 택시를 타보십니까? 택시 기사님들이요 아는 것도 많고요 철학자예요. 정치문제 뭐 얘기하기 시작하면 그저 줄줄이 나옵니다 그냥. 말 좀 시키면 말이야 얼마나……. 그분들이 이러더만요. 가끔 참 보기 흉한 손님이 탈 때가 있데요. 뭐 돈이 얼마 있는지는 모르지만 보자 하니 얼마 좀 가진 것 같은데 뒤에 타고는 앞에 있는 기사 보고 이리 가라, 저리 가라, 뭐 기사 놈이 어떠냐 저러냐 하고. 자기 마치 종 부리듯이 이러는 것을 보면은요 그런답니다. 여러분 잘 아시잖아요. 아니꼽고 메스껍고 치사하고 더러워서 못견디겠다. 어떻게 저런 사람이 돈을 벌어 가지고 택시를 타니 이게 문제가 있다고, 그러고 한바탕 연설을 하더라구요. 사실 그래요. 여러분 택시기사 앞에 조심하세요. 그까짓거 몇 푼 주고 택시타면서 큰소리 치는 거 아니에요. 인격에 문제가 있는 거예요. 이 돈이 발광을 하는 거에요 이게. 사람 망가지는 거에요 돈 때문에.
오늘 본문에 이 부자 보세요. 이 사람은 근본적으로 문제를 파악을 잘못하고 있어요. 철학자 에리히 프롬의 저서 가운데 To Have or To Be 라고, "소유와 존재"라고 하는 책이 있습니다. 거기서 유명한 말이 있습니다. "인간의 타락 원인은 바벨탑 비전에서 비롯된다" 그랬습니다. 인간이 바벨탑을 만들 때의 일을 생각해보세요. 시날광야로 가서 바벨탑을 높이 쌓아서 하늘까지 쌓아서 흩어짐을 면하자, 안정과 번영을 누리자, 그랬습니다. 이 교만이 오늘도 세계를 망치고 있다는 것이죠. 소유한 만큼의 존재의 가치가 있다고 하는 그릇된 철학과 오해가 인간을 비참하게 만든다는 것입니다. 소유와 인격은 별개예요. 소유와 행복도 별개예요. 오늘 예수님 분명히 말씀하십니다. "사람의 생명이 그 소유의 넉넉한데 있지 아니하니라." 더 놀라운 것은요 여러분, 건강과 소유도 별개더라구요. 위생 많이 지키며 깨끗하게 정결하게 살아보려고 몸부림을 쳐도 위생이라는 '위'자도 모르고 사는 사람보다 일찍 죽어요. 왜요? 바로 이것이 문제예요. 소유와 생명은 무관합니다. 행복도 무관합니다. 이것을 일찍이 알았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사람마다 소유만큼의 가치가 있다고 착각을 하고 있어요. 이것만 가지면 모든 문제가 해결된다고 생각해요.
어느 아버지가 불의한 방법으로 돈을 많이 벌었어요. 그리고 정치적인 파동 속에서 감옥에 들락날락 하게 되는데 그 아들이 아버지보고 뭐라고 한 지 아십니까? "나는 당신의 아들이 되었다는 것 때문에 세상을 살아갈 수가 없습니다." 부끄러워서 장가도 못 가겠다고 그랬어요. 당신의 아들이기 때문에. 아버지가 기가 막혀서 "너희들 돈벌어서 잘살게 하려고 내가 좀 이렇게 한 거다." "아버지, 차라리 거지가 되어서도 정직하고 떳떳한 아버지가 되어줘야 우리가 살 거 아닙니까? 이게 뭡니까? 나는 이제 망가졌다"고 말하는 통에 아버지가 넋을 놓고 울었습니다. 그릇된 가치관, 돈만 있으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거라고, 돈만 많이 물려주면 행복해질 거라고 이 엄청난 오해가, 이 자본주의 맴먼이즘이 이 세상을 이렇게 어지럽힌다니까요. 그리고 인격도 다 망가진 거예요. 여러분, 오늘 본문에서 봅니다. 소유와 생명은 별개입니다. 예수님은 생명 문제를 말합니다. 하나님이 생명을 주셨고 하나님이 재산을 주셨고 하나님이 모든 것을 주었습니다.
또 뿐만 아니라 하나님이 심판하십니다. 주었으니 만큼 누구의 뜻대로 사용해야 합니까? 하나님의 뜻대로 쓰지 못할 때 하나님이 심판해 버립니다. 이것을 알아야지요. 또한 재산의 목적이 있습니다. 보존하는 것도 중요하고, 버는 재미도 있지만은 문제는 어떻게 쓰느냐 하는 것이 중요합니다. 사용해야 합니다. 사실 제가 농담 겸 진담으로 말합니다만은 솔직히 말해서요 먹은 것만 내 것입니다. 많이 잡수세요. 먹은 것은 틀림없이 내 것이지, 이거야 뭐. 그러나 밥상에 놓인 것도 내 것이 아니에요. 왜요? 먹을지 말지 두고봐야 아니까. 이 말은 뭐냐하면 사용한 것만 내 것입니다. 돈은 가지고 있다고 내 것이 아니에요. 사용한 것만 내 것이에요. 그것도 내가 주고 싶은 데로 주고 쓰고 싶은 대로 쓴 것만 내 것이에요. 억지로 주고 자식에게도 억지로 준 것은 강도 만난 거예요. 빼앗긴 거예요. 빼앗긴 것은 내 것이 아니요. 내가 기쁜 마음으로 준 것, 그것만 내 것입니다.
소망교회 목사, 저는요 가끔 이상한 질문을 받습니다. 예배당을 짓노라고 작은 교회, 시골 교회에서 얼마나 애를 씁니까? 무슨 좋은 일을 해도 해야겠는데 돈이 없어서 그냥 애쓰고 애쓰고. 이럴 때 저를 가끔 만나 가지고는 "그 압구정동 서울 1번지, 여기에 사는 사람들은 돈이 많다는데, 목사님은 교인도 많고 돈도 많을텐데 저 좀 도와주세요" 그런 이야기를 많이 듣습니다. 그때 제가하는 말, 여기서 해볼까요? "교인 주머니에 있는 돈은 돈이 아닙니다. 헌금한 것만 돈이지. 교인 주머니에 돈이 얼마가 있건 그게 나와 무슨 상관이냐"고. 그게 무슨 하나님의 나라와 무슨 상관이냐고. 하나님 앞에 바친 돈만 돈이요. 이걸 잊지 마세요. 자 이제 보세요. 사용해야 되는 거예요. 어떻게 쓰느냐? 이것이 문제란 말입니다.
그런데 이 부자는 행복을 몰랐습니다. 행복이란 영혼 문제와 관계되어있는 것입니다. 기본적으로 영혼 문제가 관계되고 영생이 문제가 되는 것이에요. 이 기본적인 것이 확보되기 전에는 오늘의 물질이란 아무 의미도 없는 것인데 이 사람은 영생의 문제와 오늘 자기의 재산을 맞바꾸려고 들었어요. 그게 어리석은 것이죠. 그래서 탈무드에는 이런 재미있는 얘기가 있답니다. "사람은 세상에 태어날 때 주먹을 꽉 쥐고 태어난다. 모든 것을 다 가질 수 있는 것처럼. 사람이 죽을 때는 손을 펴고 죽는다." 여러분, 죽는 사람 보세요. 손을 딱 펴더라구요. 이게 상징적 의미가 있는 거예요. 손을 딱 펴고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유명한 격언이 있지 않습니까? 수의, 죽은 사람이 입는 옷입니다. "수의에는 주머니가 없다." 잘 들어두세요. 주머니가 없습니다.
행복이란 어디에 있느냐? 오늘 본문에 보니 많이 가지고, 평안히 쉬고 먹고 마시고 즐기자. 평안히 먹고 마시고 즐기자. 즐길 수 있느냐 이거예요. 이 재산이 그를 즐길 수 있게 할 수 있었더냐구요. 오늘 본문에 자세히 읽어보면은요 "내가"라고 하는 소유격이 여섯번이나 나옵니다. 내가, 나의 것을, 내 집 창고를 짓고, 내가. 아무리 나라고 소리 질러봐도 내 것 아니에요. 하나님은 말씀하십니다. 비웃습니다. "오늘 밤 네 영혼을 내가 취할 터인데 그러면 뉘 것이 되겠느냐?" 여러분, 죽기 전에 다 쓰세요. 정말 아깝거든요 유서라도 써 놓으세요. 나 죽은 다음에는 이렇게 하라. 이것도 안 해놓고 죽으면 그 쓰지 않은 재물이 하나님 앞에 갔을 때 이게 걸림돌이 됩니다. 그걸 잊지 마세요. 다 쓰고 가세요. 깨끗하게 통장 비워놓고 가야 됩니다.
오늘 이거 보세요. 하나님이 주시고, 하나님이 소유하게 하시고, 하나님이 누리게 하십니다. 행복도 하나님이 주시는 거예요. 그래서 말씀하시기를 마태복음 6장 19절에 "네 보물을 하늘에 쌓아두라." 하늘에 쌓아두라. 오늘 본문에서 말씀합니다. "자기를 위하여 재물을 쌓아두고 하나님께 대하여 부요치 못한 자가 이와 같으니라." 이게 결론입니다.
세상에는 두가지 부자가 있습니다. 하늘나라를 위해서 하늘에 쌓아둔, 하늘에 많이 쌓아둔 그런 부자가 있는가 하면 땅에다가 쌓아두고 쌓아둘 수 있는 줄 알고 그것이 걸림돌이 되어 아주 망가져 버리는 인간이 있어요. 비참한 인간, 돈의 노예가 된 인간, 거기다가 목숨을 건 인간, 어리석은 인간. 여러분, 내게 불필요한 것이 있는가 살펴보십시다. 제발, 어리석은 부자가 되지 맙시다. 지혜로운 부자, 하늘나라에서 부한 그런 부자, 금생과 내세를 통해서 하나님의 축복을 누리는 그런 부자로서 살아갈 수 있게 되기를 바랍니다.
* 기도
하나님 아버지, 우리는 많은 물질과 함께 삽니다. 그러나 우리는 어느새 물질을 우상으로 섬긴 지 오래 되었습니다. 원컨대 이로부터 온전히 자유하게 하시고 오히려 우리에게 주신 물질을 통해서 행복을 얻고, 또 하늘나라에 많은 보화를 쌓아놓으면서 진정한 물질을 통한 하나님이 주시고저 하시는 모든 축복을 다함께 받고 누릴 수 있는 주님의 사람들 되게 하여 주시옵소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기도합니다,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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