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아의 감옥 벗어나기
행10:44-48
(2015/5/24, 성령강림주일)
[베드로가 이런 말을 하고 있을 때에, 그 말을 듣는 모든 사람에게 성령이 내리셨다. 할례를 받은 사람들 가운데서 믿게 된 사람으로서 베드로와 함께 온 사람들은, 이방 사람들에게도 성령을 선물로 부어 주신 사실에 놀랐다. 그들은, 이방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는 것과 하나님을 높이 찬양하는 것을 들었기 때문이다. 그 때에 베드로가 말하였다. "이 사람들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성령을 받았으니, 이들에게 물로 세례를 주는 일을 누가 막을 수 있겠습니까?" 그런 다음에, 그는 그들에게 명해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게 하였다. 그들은 베드로에게 며칠 더 머물기를 청하였다.]
• 성령의 다양한 이미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에 임하시기를 빕니다. 성령강림주일인 오늘은 감리교회 운동을 시작한 존 웨슬리의 회심 기념일이기도 합니다. 한 주간 동안 찬송가 182장부터 196장에 이르는 성령강림절기 찬송을 조용히 읊조리며 지냈습니다. 찬송가 시인들이 성령을 어떤 이미지로 표상하는지 느낄 수 있는 좋은 기회였습니다. 물같이 흐르는 기쁨 혹은 마른 광야를 적시는 생명 시내(182), 가물어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183) 등이 물의 이미지라면, 헛된 것을 태우고 냉랭한 마음을 사랑에 불타는 마음으로 바꾸는 큰불(184, 194)의 이미지도 있습니다. 마음의 어둠을 몰아내고 밝게 하는 빛(186)과 어둔 성품에 찾아오는 생명 빛(188)의 이미지 또한 확고합니다. 에스겔의 골짜기에 불어닥친 생명 바람(192)과 믿음의 새싹을 움트게 하는 봄바람(193) 등 바람의 이미지도 자주 등장합니다. 순례길을 가는 이들의 손을 잡아 주시고(189), 염려 많은 인생길의 동행이 되어주시는 분(191)은 동행자 이미지입니다.
찬송 시인들에게 성령은 불처럼 헛된 것들을 태우고 차가운 것을 따뜻하게 하는 불이요, 메마른 땅에 내리는 단비이고, 어둠 가운데 걷는 이들 앞을 비추어주는 빛이고, 외로운 이들 곁에 머무시며 돌보아주시는 분인 셈입니다. 여기에 두 가지를 덧붙인다면 첫째, 성령은 우리 마음을 주님의 마음에 접속시켜주시는 분이십니다. 그래서 하나님의 마음으로 세상을 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어 살게 하시는 힘입니다. 둘째, 성령은 모든 분리의 장벽을 무너뜨리고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가 되도록 하시는 힘입니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나누고 가르는 사람이 아니라 분리된 것을 모으고 나뉘었던 것을 하나로 연결하는 사람입니다. 이런 성령을 사모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도라 말할 수 없을 것입니다.
오순절 마가의 다락방에서 기도하던 제자들은 성령의 충만함을 경험한 후 세상의 어떤 위협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든든한 반석을 마음에 마련한 사람들이 되었습니다. 죽음의 위협조차 그들을 흔들어 놓을 수 없었습니다. 앞에서도 보았던 것처럼 성령은 다양한 방법으로 일하십니다. 1738년 5월 24일 존 웨슬리에게 임한 성령은 '불'과 같이 임했다기보다는 '물'처럼 혹은 은은한 '빛'처럼 스며들었던 것 같습니다. 올더스게이트가에서 열렸던 모라비안 교도들의 집회에서 웨슬리는 어떤 사람이 루터가 쓴 로마서에 관한 글을 낭독하건 중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는 대목에 이르렀을 때 예수 그리스도의 구원을 이론이 아니라 실감으로, 다시 말해 몸의 감응으로 느낄 수 있었습니다. 은총의 경험이 머리에서 가슴으로 스며들자 그의 손과 발이 움직이기 시작했고, 바로 그것이 감리교회 운동이 되었습니다. 성령은 열정적으로 기도할 때만 임하는 것이 아니라, 말씀을 듣는 중에도 임하는 법입니다. 오늘 우리가 읽은 본문의 주인공인 고넬료도 그런 체험을 했습니다.
• 고넬료 이야기
고넬료는 로마 군인으로 이탈리아 부대에 속한 백부장이었습니다. 엘리트 군인인 셈입니다. 사도행전은 그를 대단한 호의를 가지고 소개하고 있습니다. 그는 경건했고 온 가족과 더불어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하는 사람이었고 유대 백성들에게 자선을 많이 베풀었다고 합니다. 점령군의 자세로 사람들을 강압하기보다는 식민지 백성들의 가련한 처지를 늘 헤아리는 사람이었다는 말입니다. 그는 또 늘 하나님께 기도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제 힘을 타자를 억압하는 데 사용하지 않고 늘 다른 사람들을 돕기 위해 사용한 것이야말로 그가 기도의 사람임을 증명해줍니다. 사도행전은 아주 길게 그가 주님을 영접하게 된 상황을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는 환상 가운데서 하나님의 천사를 보았습니다. 천사는 그의 기도가 하나님께 상달되었다는 전갈과 함께 욥바에 머물고 있는 베드로를 데려오라고 말합니다. 그는 바닷가에 있는 무두장이 시몬의 집에 묵고 있다는 말까지 덧붙였습니다.
베드로도 정오 기도 중에 하늘이 열리고, 큰 보자기 같은 그릇이 네 귀퉁이가 끈에 매달린 채 땅으로 드리워져 내려오는 환상을 봅니다. 그 안에는 네 발 짐승들과 땅에 기어다니는 것들과 공중의 새들이 골고루 들어 있었습니다. 그 때 "일어나서 잡아먹어라" 하는 음성이 하늘에서 들려옵니다. 베드로는 어릴 때부터 이제까지 속되고 부정한 것을 먹은 일이 없다면서 그 명령을 거절합니다. 하지만 두 번째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하나님께서 깨끗하게 하신 것을 속되다고 하지 말아라." 같은 일이 세 번 반복되자 베드로는 즉각 하나님의 마음을 알아차립니다. 바로 그 때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이 문밖에 당도했고, 베드로는 비로소 그 환상의 의미가 무엇인지를 알아차립니다.
베드로의 위대함은 자기의 견해나 입장을 수정할 수 있는 개방성에 있습니다. 스승인 예수께서 거리낌없이 이방인들과 접촉하는 것을 보았지만, 그는 당시의 유대교 세계의 통념을 거스리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에게 이방인들은 부정한 존재였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그는 환상을 통해 자기의 문화적·종교적 편견이 하나님의 마음에 합한 것이 아님을 알았을 때 즉시 자기 입장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받들었습니다. 그는 영혼이 유연한 사람입니다. 편견은 고래 힘줄보다 질긴 것이어서 벗어버리기가 결코 쉽지 않습니다. 노자는 부드러운 것은 생명에 가깝고 딱딱한 것은 죽음에 가깝다고 말했습니다. 딱딱한 몸과 마음이야말로 늙음의 징조가 아닙니까? 변화보다는 안정을 바라는 마음 말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가 보낸 사람들과 함께 가이사랴에 있던 고넬료의 집으로 갑니다. 고넬료는 자기 친척들과 가까운 친구들을 불러놓고 베드로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베드로가 오는 것을 본 그는 마중 나가서, 그의 발 앞에 엎드려서 절을 하였습니다. 로마 군대의 엘리트 군인이 갈릴리 호수에서 물고기를 낚으며 살던 어부 출신의 베드로에게 절을 합니다. 상상하기 어려운 장면입니다. 고넬료로 하여금 그런 행동을 하게 한 것은 무엇이었을까요? 목마름. 그렇습니다. 그는 목마른 사람이었습니다. 진리에 대한 목마름 말입니다. 그를 사로잡고 있던 것은 세속적인 성공과 출세가 아니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고 그 뜻대로 살아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자기가 입고 있는 권위의 의상이 허상에 지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람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엎드릴 수 있었던 것입니다. 자기가 잠시 누리고 있는 사회적 지위를 자기의 존재의 무게와 등치시키는 못난 이들은 죽었다 깨어나도 알 수 없는 경지입니다.
• 무너진 울타리
베드로는 고넬료의 말과 태도를 보고 말합니다.
"나는 참으로,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외모로 가리지 아니하시는 분이시고,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의를 행하는 사람은 그가 어느 민족에 속하여 있든지, 다 받아 주신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행10:34-35)
가르침을 청한 것은 고넬료였지만 정작 소중한 것을 배운 것은 베드로입니다. 고넬료의 존재는 영혼의 숫돌이 되어 베드로의 마음 깊은 곳에 드리워있던 종교적 편견을 갈아낸 것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의 겸허한 엎드림을 보면서 비로소 자아의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습니다. 베드로는 감동하여 예수 그리스도를 전합니다. 주님께서 이 땅에 계신 동안 하신 모든 일, 즉 병든 자들을 고쳐주고, 귀신들린 사람을 온전케 하고, 소외된 사람의 벗이 되어주신 일을 다 들려주었습니다. 저는 가끔 그 아름다운 담론의 장을 떠올리며 황홀해합니다. 차분하게 말을 이어가던 베드로도 주님이 사람들에게 배척받고 모욕과 수난을 당하시다가 십자가에 못박히시던 장면에 이르렀을 때는 자기 감정을 주체하기 어려웠을 것입니다. 하지만 죽임을 당한지 사흘 후에 일어난 부활 사건을 이야기할 땐 그의 눈이 형형하게 빛났을 것입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이 바로 세상의 주요 심판자라고 말합니다. 이 말씀의 의미가 무엇입니까? 지금까지 고넬료가 충성을 바쳤던 대상인 로마 황제가 아니라, 나사렛 예수야말로 세상의 주권자라는 말입니다. 참으로 위험한 말입니다.
고넬료가 출세에 뜻을 둔 사람이었다면 이 위험한 말 앞에서 뒷걸음질쳤을 겁니다. 하지만 그는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의 가슴에 불이 붙는 것 같았기 때문입니다. 오랫 동안 박명薄明의 어둠 속에 있던 그의 영혼에 밝은 빛이 비쳐들었습니다. 그 자리에 있는 모든 이들에게 성령이 임했던 것입니다. 베드로와 동행했던 모든 사람들이 놀랐습니다. 그들은 왜 놀랐던 것일까요? 하나님이 이방인들도 사랑하신다는 사실을 알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그 놀람은 선민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살았고, 스스로 잘 믿는 사람으로 자처했지만 그들의 믿음이 실은 하나님에 대한 오해에 근거한 편협한 믿음이었음을 보여줍니다. 이방인들도 방언으로 말하고 하나님을 찬양한다는 사실이 그들에게는 놀라운 경험이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영이 교회 밖에서도 작동하고 있다는 사실을 여전히 모르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자아의 감옥에 갇힌 이들이 참 많습니다.
존 웨슬리는 감리교인들은 광신적인 태도는 물론이고 편협한 믿음을 버려야 한다고 말했습니다. 광대하신 하나님의 역사를 교리적 틀 속에 가두려 하면 안 됩니다. 물론 어긋나지 않기 위해서는 최소한의 울타리가 필요합니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세상의 구원자이고 주님이라는 고백이면 족합니다. 고넬료는 이제 예수님의 주님되심을 확고히 받아들였습니다. 성령께서 하신 일입니다. 베드로는 고넬료와 그 가족들에게 세례를 베풀었습니다. 또 하나의 장벽이 그렇게 무너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하나가 된다는 것은 더욱 커지는 것입니다. 오늘 우리 사회에 드리운 사회적 장벽이 참으로 강고합니다. 흉허물없이 소통하기보다는 편가르기를 통해 자기 이익을 극대화하려는 이들로 인해 세상이 어지럽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성령의 바람이 이 땅에 불어오기를 기도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성령이여, 장벽을 무너뜨리는 바람으로, 굳어진 마음을 녹이는 단비로, 속된 욕심을 태우는 불로, 어둠을 밝히는 빛으로, 지친 이들 곁에 머무시는 따뜻한 손길로 오시옵소서.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5월 24일 11시 03분 51초
'◑δεδομένα 18,185편 ◑ > उपदेश सामग्री 16,731편' 카테고리의 다른 글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롬11:25-36 (0) | 2022.07.06 |
---|---|
어우렁더우렁 -마7:7-14 (0) | 2022.07.06 |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딤후1:8-14 (0) | 2022.07.06 |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창46:28-30 (0) | 2022.07.06 |
하나 됨의 용기 -엡4:1-7 (0) | 2022.07.06 |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