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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우렁더우렁 -마7:7-14

by 【고동엽】 2022. 7. 6.

어우렁더우렁
마7:7-14
(2015/5/31)

["구하여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주실 것이다. 찾아라, 그리하면 너희가 찾을 것이다. 문을 두드려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너희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구하는 사람마다 얻을 것이요, 찾는 사람마다 찾을 것이요, 문을 두드리는 사람에게 열어 주실 것이다.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 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거라. 멸망으로 이끄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 생명으로 이끄는 문은 너무나도 좁고, 그 길이 비좁아서, 그것을 찾는 사람이 적다."]

• 사랑의 어울림 속에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삼위일체 주일입니다. 교회는 오랫동안 성령강림절 다음 주일을 삼위일체 주일로 지켜 왔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는 정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그저 성부 성자 성령이 사랑의 어울림 속에 있다는 뜻이라고 보면 될 겁니다. 초기의 공의회가 성경에도 나오지 않는 삼위일체 교리를 만든 것은 그럴 필요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4세기의 라틴 신학자인 힐라리우스는 그리스도의 부활 이후에 하나님의 단일성이 다른 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었다고 말합니다. "비록 한 분이지만 하나님은 고독한 존재가 아니며, 어떤 신비로운 방식으로 한 분 하나님의 삶이 공동체적이었다"는 것입니다(로버트 루이스 윌켄, <초기 기독교 사상의 정신>, 배덕만 옮김, 복있는 사람, p.119). '공동체적이었다'는 말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은 저 멀리 초월의 세계에 머무시는 분이 아니라 이땅에서 벌어지는 현실에 연루되기를 꺼리지 않는 분이십니다. 예수님은 바로 그러한 하나님의 뜻을 온전히 구현한 존재이십니다. 성령은 깊은 겨울잠에 빠져 있던 나무들을 깨우는 봄바람처럼 불어와 하늘의 뜻을 품고 살도록 도우십니다. 다른 듯하지만 셋은 그렇게 사랑으로 연결되어 있습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삼위일체 하나님이 이루는 사랑의 어울림 속에 우리도 동참하는 것입니다. 내 뜻을 이루기 위해 하나님의 능력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자신을 봉헌하는 것이 참 믿음입니다. 예수님은 당신이 이 세상에 오신 것은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서라고 말했습니다. 어떻게 해야 그 뜻을 받들 수 있을까요?

오늘의 본문은 낙심한 이들을 격려하기 위해 사람들이 즐겨 인용하는 말씀입니다. "구하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주실 것이요 찾으라 그리하면 찾아낼 것이요 문을 두드리라 그리하면 너희에게 열릴 것이다". '적극적 사고방식'이나 '긍정의 힘'을 강조하는 이들이 특히 이 본문을 좋아합니다. 그런 맥락에서 인용되는 구절이 몇이 더 있습니다.

"처음에는 보잘 것 없겠지만 나중에게 크게 될 것이다."(욥8:7)
"'할 수 있으면'이 무슨 말이냐? 믿는 사람에게는 모든 일이 가능하다"(막9:23)
"나에게 능력을 주시는 분 안에서, 나는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빌4:13)

• 우리가 구해야 할 것
이런 구절들을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서는 맥락을 잘 살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구하고, 찾고, 두드려야 할 것이 무엇일까요? '목적어'가 생략되어 있기에 사람들은 그것을 곧바로 자기들이 바라는 바와 연결시킵니다. 출세, 성공, 경쟁에서의 승리 등을 구하라는 것으로 생각한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본문을 그렇게 읽는 것은 철저한 왜곡입니다.

이 본문은 산상수훈의 맥락 안에서 읽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시종일관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의 의와 대조되는 제자들의 삶을 가르치셨습니다. 제자들이 염두에 두어야 할 최고의 삶의 원리는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하나님의 의를 구하여라"(마6:33)는 말 속에 다 담겨 있습니다. 바로 이어 나오는 "남을 심판하지 말라"(7:1)는 가르침도 그런 맥락에서 보아야 합니다. 그 가르침은 이웃과의 관계에서도 하나님의 나라를 추구한다는 것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를 '이렇다 저렇다' 함부로 규정하거나 정죄하지 말고, 하나님의 판단에 맡기라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구하여라', '찾아라', '문을 두드려라'는 명령의 목적어는 하나님의 뜻 혹은 하나님 자신이라고 보아야 할 것입니다. '구하라'에 해당하는 원어 '아이테인aitein'에는 '질문하다'는 뜻이 담겨 있고, '찾으라zetein'는 단어는 '탐구하다'라는 뜻이 담겨 있습니다(차정식,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포이에마, p.58).

신앙생활이란 구체적인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께 여쭙고, 또 그 뜻을 알아내기 위해 치열하게 탐구하는 과정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에 의해 발견되기를 기다리시는 분입니다. 하나님은 말씀 속에서, 우리들이 겪는 일들 속에서, 하늘과 땅과 바람 속에서, 산과 강과 계곡에서, 때로는 피어나는 꽃과 잡초들 속에서, 농부들의 땀방울 속에서, 이웃들의 눈물 속에서, 광장에서 잠을 청하는 고단한 이웃들 속에서 우리를 기다리십니다. 볼 마음이 있으면 보입니다. 하지만 분주한 이들은 주님의 곁을 그냥 스치듯 지나가버리고 맙니다. 바삐 내달리는 이들의 귀에는 세미한 음성으로 말 건네시는 그분의 음성이 들리지 않습니다. 우리가 분주한 일상을 끊고 가끔 멈추어 서야 하는 까닭은 바로 거기에 있습니다.

우리가 먼저 구해야 할 것은 하나님의 뜻과 하나님 자신이지만, 그것이 바로 된 이후에는 비로소 우리가 원하는 것을 구할 수 있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는 "하나님을 사랑하라. 그리고 나머지는 마음대로 하라"고 말했습니다. 근본이 바로 서면 나머지는 저절로 이루어지는 법입니다.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면, 우리가 구하지 않은 것까지도 주시는 분이 하나님이십니다. 이것이 세상의 셈법으로는 잘 가늠하기 어려운 하나님 나라의 이치입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살기 위해 몸부림치면서 우리가 구하는 것을 주님께서 주시지 않겠습니까?

"너희 가운데서 아들이 빵을 달라고 하는데 돌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으며, 생선을 달라고 하는데 뱀을 줄 사람이 어디에 있겠느냐? 너희가 악해도 너희 자녀에게 좋은 것을 줄 줄 알거든, 하물며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께서, 구하는 사람에게 좋은 것을 주지 아니하시겠느냐?"(9-11)

의문문의 형태로 되어 있지만 이것은 질문이 아니라 당연한 사실을 청자들에게 환기시키기 위한 수사입니다.

• 황금율
12절은 우리가 흔히 '황금율'이라고 일컫는 구절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무엇이든지, 남에게 대접을 받고자 하는 대로, 너희도 남을 대접하여라. 이것이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이다."(12) 이것은 본이 바로 선 사람의 삶의 원리를 잘 요약한 말입니다. 이 말을 오해하면 안 됩니다. 내가 좋아한다고 하여 남들도 다 좋아하지는 않기 때문입니다. 가끔 결혼식에서 들려주는 이야기가 있습니다. 숫사자와 암소가 결혼을 하였습니다. 남편인 사자는 아내를 너무도 사랑했기에 아내를 위해 늘 신선한 살코기를 구해다가 대접해주었습니다. 아내인 암소는 싫었지만 내색을 하지 않고 먹었습니다. 암소는 남편을 위해 신선한 건초를 대접했습니다. 숫사자는 싫었지만 아내를 실망시키지 않으려고 억지로 건초를 먹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일이 반복되면서 둘은 함께 살기 어렵다는 결론을 내렸습니다. 둘은 여전히 사랑했지만 헤어지리로 했습니다. 헤어지면서 그들은 이렇게 말했습니다. "나는 최선을 다했어". 상대방을 바로 알지 못하고 자기 방식으로 사랑했기에 일어난 파탄입니다. 대접하기 위해서는 상대방을 잘 알아야 합니다. 사회 심리학자인 에리히 프롬이 <사랑의 기술>에서 말하는 사랑의 속성 가운데 하나가 '지식'입니다. 서로를 잘 알아야 제대로 사랑할 수 있다는 말입니다.

사람은 저마다 취향이 다르지만 좋아하는 것과 싫어하는 것은 유사합니다. 무시 당하고 차별받고 학대받는 것은 다 싫어하지만, 존중받고 사랑받고 아낌을 받는 것은 다 좋아합니다. 성경이 하나님의 품성을 드러내기 위해 즐겨 사용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은혜로우시며 자비로우시며 노하지 않으시며 사랑이 한이 없으신 분(욘4:2)이 그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으로부터 그리고 타자들로부터 받고 싶은 것이 바로 이것이 아닐까요? 내면에 상처를 입지 않은 사람은 하나도 없습니다. 정현종 선생의 <시간의 그늘>이라는 시 가운데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시간은 항상/그늘이 깊다./그 움직임이 늘/저녁 어스름처럼/비밀스러워/그늘은/더욱 깊어진다." 우리가 거쳐온 시간을 반추해보면 정말 그늘이 깊다고 말할 수밖에 없습니다. 시인은 또 말합니다. 시간의 그림자는 그늘의 협곡과 그늘의 단층을 이루고, 거기서는 희미한 발소리 같은 것, 희미한 숨결 같은 것의 화석이 붐빈다고 말합니다. 표현이 은유적이지만 우리 기억의 갈피에 어린 수많은 이야기를 떠올리면 그 말이 함축하는 바가 무엇인지 알 수 있습니다. 세상의 모든 사람들은 '누군가 나를 사랑해 달라'고 발신음을 내고 있습니다. 그 발신음에 응답할 때 우리 사이에 평화가 깃듭니다. 그렇게 사는 것, 즉 이웃들을 소중히 여기고 그들의 시간의 그늘을 보듬어 안아 주려는 마음으로 사는 것이야말로 '율법과 예언서의 본뜻'입니다.

• 좁은 길로 간다는 것
이제 마지막 대목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고 권고하십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넓고, 그 길이 널찍하여서, 그리로 들어가는 사람이 많습니다. 넓은 문은 사람들에게 잘 알려진 길, 자명한 길, 익숙한 길입니다. 그 길은 바로 율법학자들과 바리새파 사람들이 가르치는 길입니다. 613조의 율법 조문을 지키는 것으로 하나님의 뜻을 수행한다고 믿는 길입니다. 하지만 예수는 좁은 길, 그러니까 그 시대 사람들에게 낯선 길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철저한 자기 변화의 길, 하나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루는 길입니다. 그것은 섬김의 길이고, 남을 위해 자기를 희생하는 길입니다. 한 알의 밀알처럼 썩어짐으로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길입니다. 그 길은 더 높은 곳으로 인도하는 길이 아니라 저 낮은 곳으로 인도하는 길입니다.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박사는 좁은 길과 관련하여 흥미로운 관점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그는 예수님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 하신 것은 서민들의 일상적 경험을 반영한 것이 아닌가 추측하고 있습니다. "집과 집 사이로 이어진 길, 그리고 동네와 동네 사이를 연결해주는 들판과 언덕의 길 역시 사람 한두 명 지나다니고 작은 수레 하나 통과할 정도의 좁은 길이 대부분이었다"(차정식,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포이에마, p.342)는 것입니다. 물론 넓은 길도 있었습니다. 마차가 다닐 수 있도록 포장한 대로, 즉 공공 도로, 집정관 도로, 근위대 도로, 군용 도로가 여기에 해당됩니다. "마차나 수레를 타고 이런 튼튼하고 넓은 길을 따라가다 만나는 대표적인 집이 왕궁, 관공서, 부유층의 대저택들이었다. 그리로 들어가는 대문은 당연히 크고 웅장했"(같은 책, p.343)습니다. 사람들은 줄을 대서라도 그 길을 거쳐 그런 집에 드나들고 싶어했을 겁니다. 하지만 주님은 그 길의 끝에는 멸망이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렇게 보면 좁은 문으로 들어가라는 말은 아픔의 자리, 눈물과 애환이 있는 자리, 겨자풀처럼 보잘 것 없는 이들이 연대하여 삶의 신산스러움을 이겨내는 삶의 자리로 들어가라는 말이 됩니다. 그것이 제자들이 걸어야 할 길입니다. 사람들에게 매력적으로 보이는 길, 즉 넓은 길은 오히려 덫이 되어 사람들을 사로잡습니다. 자유를 빼앗습니다. 세상은 현대사회의 우상인 성공을 가리켜 보이며 우리에게 넓은 길로 가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예수님은 그 길의 끝에 도사리고 있는 것이 멸망임을 훤히 내다보고 계셨습니다. 우리는 저마다의 삶의 자리에서 열심히 살아야 합니다. 하지만 세상이 우리에게 제시하는 가치들에 붙들리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자기의 성취에 도취되지 말아야 합니다. 돈이 많아지면서 다른 이들을 오만하게 대한다면 그 부유함은 복이 아니라 화입니다. 지위가 높아지면서 아랫사람들을 함부로 대한다면 그의 성공은 사실은 실패입니다. 히브리의 지혜자는 "가난한 사람을 조롱하는 것은 그를 지으신 분을 모욕하는 것"(잠17:5)이라고 말했습니다.

누구를 대하든 그를 아끼고 존중하고 사랑하고 보살피려는 마음이 우리 속에서 솟아나올 때 우리는 생명의 길 위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우리들이 맺는 모든 관계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는 것, 바로 그것이 아름다운 삶의 비결입니다. 삼위일체는 사랑의 어울림이 우주의 근본임을 보여줍니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깊은 신뢰와 사랑 속에서 일치를 이룬 것처럼, 우리 또한 어우렁더우렁 어울리며 살아감으로 하늘이 예비한 기쁨을 한껏 누릴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5월 31일 11시 23분 4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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