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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딤후1:8-14

by 【고동엽】 2022. 7. 6.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딤후1:8-14
(2015/5/17)

[그러므로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습니다. 그것은 우리의 행실을 따라 하신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계획과 은혜를 따라 하신 것입니다. 이 은혜는 영원 전에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에게 주신 것인데, 이제는 우리 구주 그리스도 예수께서 나타나심으로 환히 드러났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습니다. 나는 이 복음을 전하는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습니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고난을 당하면서도 부끄러워하지 않습니다.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

• 인간 디모데
주님의 은혜와 자비와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여러분은 오늘도 설교의 운을 떼는 저의 인사말을 별 생각 없이 들으셨는지 모르겠지만 사실 오늘은 한 가지 단어가 추가되었습니다. '자비'(eleos)입니다. 바울의 이름으로 되어 있는 거의 모든 서신이 서두에 '은혜'(charis)와 '평강'(eirene)을 빌고 있습니다만 유독 디모데전후서에서는 '자비'가 첨가되어 있습니다. 박해 시기를 겪고 있던 신도들에 대한 연민의 마음이 컸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하나님께서 따뜻한 품이 되어주시기를 비는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오늘의 본문은 디모데에게 보낸 서신입니다. 마틴 부버는 '모든 참된 삶은 만남'이라고 말했습니다. 인생길에서 우리가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우리 인생의 내용과 질이 달라진다는 말일 것입니다. 만남은 우연히 발생하기도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것은 운명적인 요소도 띄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온통 하나님과 만나 인생의 길을 수정해야 했던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아브라함이 그러했고 모세가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의 제자들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부활하신 주님과 바울의 만남은 극적입니다. 참된 만남은 우리로 하여금 더 이상 옛 삶을 계속할 수 없게 만듭니다. 미디안 광야의 목동이었던 모세는 히브리인들의 해방자가 되었고, 갈릴리의 어부였던 베드로는 사람 낚는 사람이 되었고, 박해자였던 바울은 박해받는 사람이 되었습니다.

디모데는 제2차 전도여행에 나섰던 바울이 루스드라에서 만난 사람입니다. 바울을 만나기 전에도 그는 이미 신실한 제자의 삶을 살고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신앙심이 돈독한 유대인이었고 아버지는 그리스 사람이었습니다. 누가는 그를 "루스드라와 이고니온에 있는 신도들에게 호평받는 사람이었다'(행16:2)고 소개합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즉시 자신의 여정에 동참시켰습니다. 디모데는 바울의 분신과도 같은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은 고린도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여러분은 나를 본받는 사람이 되십시오"라고 말한 후에 이렇게 말합니다.

"이 일 때문에 나는 디모데를 여러분에게 보냈습니다. 그는 주님 안에서 얻은 나의 사랑하는 신실한 아들입니다. 그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하는 나의 생활 방식을 여러분에게 되새겨 줄 것입니다. 어디에서나, 모든 교회에서 내가 가르치는 그대로 말입니다."(고전4:17)

이런 제자 하나가 있다면 그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이 말은 뒤집어도 의미가 통합니다. 평생을 믿고 따를 수 있는 스승 하나를 만나는 것이 인생의 큰 복입니다. 함석헌 선생님은 '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라는 시에서 "온 세상이 다 나를 버려/마음이 외로울 때에도/'저 맘이야' 하고 믿어지는/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잊지 못할 이 세상을 놓고 떠나려 할 때/'저 하나 있으니' 하며/빙긋이 눈을 감을/그 사람을 그대는 가졌는가"를 물었습니다. 바울은 이 질문에 그렇다고 대답할 겁니다. 바울 사도가 빌립보 교회에 보낸 편지에는 이런 구절이 나옵니다.

"나에게는, 디모데와 같은 마음으로 진심으로 여러분의 형편을 염려하여 줄 사람이 아무도 없습니다. 모두 다 자기의 일에만 관심이 있고, 그리스도 예수의 일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그러나 디모데의 인품은 여러분이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자식이 아버지에게 하듯이 복음을 위하여 나와 함께 봉사하였습니다."(빌2:20, 22)

• 고난을 받아들이라
디모데후서에는 바울이 디모데를 그리워하는 마음이 절절하게 표현되어 있습니다. 성경을 읽다가 "그대를 만나봄으로 나는 기쁨이 충만해지고 싶습니다"(딤후1:4)라고 말하는 바울의 마음이 느꺼워서 가슴이 뭉클해졌습니다. 바울은 그를 만나 하나님의 은사에 다시 불을 붙여주고 싶어합니다. 디모데의 믿음이 흐릿해져서가 아니라, 믿음의 아버지인 바울이 복음을 전하다가 거듭 고난을 받는 것을 보고 회의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하는 노파심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바울은 디모데를 북돋고 격려하고 싶어합니다. 그는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시는 것은 비겁함의 영이 아니라 능력과 사랑과 절제의 영이라고 말합니다. 능력의 영은 어려움을 만났을 때 감연히 맞설 수 있는 든든함을 주고, 사랑의 영은 현실의 어려움 속에서도 하나님의 뜻을 받들고자 하는 내적 힘이고, 절제는 소란스러운 외적 현실 가운데서도 자기를 제어할 줄 아는 능력을 말합니다. 바울 사도는 그런 은사가 디모데 안에서 다시 불일듯 일어나기를 기원하면서 이렇게 말합니다.

"그대는 우리 주님에 대하여 증언하는 일이나 주님을 위하여 갇힌 몸이 된 나를 부끄러워하지 말고, 하나님의 능력을 힘입어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으십시오"(8)

십자가에서 처형당하신 예수를 주님이라 고백하는 것은 바울의 말대로 기적을 구하는 유대인에게는 거리낌이고, 지혜를 구하는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어리석은 말처럼 들렸을 것입니다. 게다가 예수의 흔적을 몸에 지닌 채 지중해 세계를 떠돌며 복음을 전하던 바울은 가는 곳마다 박해를 받았습니다. 십자가는 무력해보였고, 세상을 바꿀만한 능력도 없는 것처럼 보였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런 현실이 믿음의 걸림돌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말합니다. 오히려 복음을 위하여 고난을 함께 겪자고 말합니다. 고난은 누구나 피하고 싶어하는 부정적 현실입니다. 하지만 바울은 그 고난 속으로 능동적으로 들어가자고 말합니다. 잘못을 저질러 고난을 겪는다면 부끄러운 일이겠지만, 진리를 몸으로 살아내기 위해 고난을 겪는 것은 오히려 영광이라는 것입니다. 주님도 산상수훈에서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마5:11)고 하셨습니다. 강렬한 메시지입니다. 고난을 무릅쓸 용기가 없어 우리 삶이 지지부진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 거룩한 부르심
고난까지도 마다하지 말아야 할 까닭은 무엇입니까? 하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고, 거룩한 부르심으로 불러주셨기 때문입니다. 구원받음이란 우리의 작은 개체로서의 생명을 넘어 영원히 스러질 수 없는 생명의 세계에 받아들여졌음을 이르는 말입니다. 예수를 믿어 구원을 받는다는 말을 그저 지옥의 형벌을 면하게 되고, 영원한 복락을 누리게 된다는 말로 등치시키지 마십시오. 구원 받았다는 말은 지금 이 땅에서 부활의 생명을 살아내는 사람이 되었다는 뜻입니다. 예수의 마음을 품고 그분의 손과 발이 되어 살아가는 것 말입니다. 구원을 특권으로 여기는 이들이 많습니다. 이단 종파 사람들은 자기들에게 와야만 구원받을 14만 4천 명에 속하게 된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단적으로 말해 예수 정신이 아닙니다. 이런 이기심과 편협함은 신앙과 무관합니다.

바울은 예수의 삶을 가리켜 "죽음을 폐하시고, 복음으로 생명과 썩지 않음을 환히 보이셨"(10)다고 말합니다. 죽음을 폐한다는 말은 육체적 죽음이 없다는 말이 아니라 죽음이 우리 삶을 좌지우지하지 못한다는 말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불안과 공포심을 주입합니다. 그래야 쉽게 지배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말씀대로 살려고 해도 스멀스멀 불안감이 엄습합니다. 나만 뒤쳐지는 게 아닐까 싶어 얼른 세상의 북소리에 발을 맞추곤 합니다. 정직한 이들은 신앙적 이상과 삶의 불일치 때문에 괴로워 합니다. 마음이 약한 이들은 마음에 위안을 주는 가르침에 솔깃해 합니다. 하지만 기독교인들 앞에 놓인 길은 십자가일 뿐입니다. 풀무원의 설립자인 원경선 선생님은 농담인양 예수 정신을 가리켜 '쥑이라 정신'이라 했습니다. 죽음 앞에서 물러서기는커녕 오히려 고개를 꼿꼿이 드는 사람을 누가 이길 수 있겠습니까? 히브리서는 어떤 고난이 와도 믿음의 길에서 벗어나지 않는 사람들을 가리켜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 사람들'(히11:38)이라고 말했습니다.

거룩한 삶이란 하나님의 은혜와 계획 안에서 살아가는 삶입니다. 가톨릭의 평신도 신학자인 김근수 선생은 '영성'이라는 말을 '예수 따름'이라는 말로 바꾸어 쓸 것을 제안했습니다. 영성이 깊다는 것은 남모르는 삶의 신비를 안다는 말이 아닙니다. 물론 세상에는 일반인들이 알지 못하는 깊은 층위의 삶에 접속한 채 살아가는 이들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일상 속에서 살아가는 모습이 예수와 잇대어 있는지는 별개의 문제입니다. 일상의 삶으로 번역되지 않는 신앙고백은 공허합니다. 우리가 일상적으로 만나는 사람들이나 사물들을 대하는 태도야말로 우리 영혼의 풍경을 고스란히 드러내줍니다.

감사원장을 지냈던 한승헌 변호사는 감리교 권사입니다. 그분이 몇 해 전에 하셨던 말씀이 떠오릅니다. 그는 예수 믿는다는 것이 결국은 '사서 고생하자는 것 아니냐'고 말했습니다. 소박하지만 분명한 메시지입니다. 사서 고생하면서도 그것 때문에 불퉁거리지 않고 오히려 마음 깊이 흐뭇함을 느끼는 까닭은 그런 고생을 통해 우리 마음이 예수의 마음과 접속되고 있음을 알기 때문입니다. 이것이 복음입니다. 바울은 이 복음을 전하는 '선포자와 사도와 교사로 임명을 받았다'는 사실을 기꺼워하고 있습니다. 그 복음을 전하다가 고난을 당하고, 감옥에 갇힌 것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합니다. 당당한 삶이 이런 것입니다.

"나는 내가 믿어 온 분을 잘 알고 있고, 또 내가 맡은 것을 그분이 그 날까지 지켜 주실 수 있음을 확신합니다."(12)

• 선한 것을 지키라
살라는 명령을 받았으면서도 어떻게 살라는 명령은 받지 못했기에 늘 전전긍긍하며 살아가는 우리들에 비하면 바울은 뿌리 깊은 나무처럼 든든한 사람입니다. 세상의 어떤 박해의 바람도 그를 좌절시킬 수 없습니다. 이런 확신이 있기에 바울은 믿음의 아들인 디모데에게 담담하게 그러나 열정적으로 권고합니다.

"그대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과 사랑으로 나에게서 들은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우리 안에 살고 계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그 맡은 바 선한 것을 지키십시오."(13-14)

믿음 안에서 살아가는 것은 결국 '건전한 말씀을 본보기'로 삼고 살아가는 것입니다. 어떤 말씀이냐고 묻지 마십시오.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예수님이 우리에게 가르치신 삶은 한 마디로 다른 이들을 유익하게 하는 삶입니다. '나'를 세상의 중심으로 삼고 살아가면 결국 악취 밖에 남을 것이 없습니다. 하지만 '이웃'을 유익하게 하려는 마음으로 살아가면 그리스도의 향기를 발하게 됩니다. 서울이라는 대도시는 사람들을 참 거칠게 만드는 것 같습니다. 조금도 손해보지 않겠다는 마음을 내면화하고 살기 때문인지 마음씀이 참 각박합니다. 아직 믿음이 부족해서 능동적으로 고난 속으로 들어가지는 못한다 해도, 다른 이들의 마음에 불편함을 주지 않기 위한 노력이라도 시작해야 합니다. 주변에 지옥을 만들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런 후에 필요한 것은 우리에게 주어진 소명을 이루기 위해 노력하는 것입니다. 성령은 지금도 우리 속에서 역사하고 있습니다. 세상 일에 대한 과도한 걱정 때문에 우리는 성령의 불꽃을 소멸할 때가 많습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연결시켜줍니다. 그 마음에 연결되는 순간 낯설고 적대적으로 보이던 사람들이 친밀하게 느껴집니다. 판단하고 정죄하는 마음을 내려놓고 타자의 마음 깊은 곳에 도사린 어둠을 안타까움으로 바라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 어둔 그늘을 어루만져 흰 그늘로 바꿔주고 싶어집니다. 성령께서 우리 속에 일으키시는 감동을 소멸하지 않을 때 우리 속에 있는 염려와 걱정은 스러지게 마련입니다.

산딸나무가 곱게 피었습니다. 그리고 장미꽃도 활짝 피었습니다. 이제 우리 속에 그리스도의 꽃을 피울 때입니다. 우리의 존재가 지금 울고 있는 누군가에게 희망이 되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살아계심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기를 바랍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5월 17일 11시 07분 12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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