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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하나 됨의 용기 -엡4:1-7

by 【고동엽】 2022. 7. 6.
하나 됨의 용기
엡4:1-7
(2015/5/3, 교회 설립 기념)

[그러므로 주님 안에서 갇힌 몸이 된 내가 여러분에게 권합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 그리스도의 몸도 하나요, 성령도 하나입니다. 이와 같이 여러분도 부르심을 받았을 때에 그 부르심의 목표인 소망도 하나였습니다. 주님도 한 분이시요, 믿음도 하나요, 세례도 하나요, 하나님도 한 분이십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 그러나 하나님께서는 우리 각 사람에게, 그리스도께서 나누어 주시는 선물의 분량을 따라서, 은혜를 주셨습니다.]

• 흐르고 또 흐르는 강물처럼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또한 지진으로 말미암아 절체절명의 위기를 맞고 있는 네팔의 형제자매들과도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온 세계에 있는 이들의 마음이 따뜻하게 열려 그들의 연약함을 감싸 안아줄 수 있기를 빕니다. 교회 설립 107주년을 기념하는 오늘, 저는 집에서 나오면서 서울역 뒷편에 살고 있던 가난하고 소외된 이웃들을 섬기려는 마음을 품고 기도 모임을 시작했던 이들의 마음을 떠올려 보았습니다. 거창하게 교회를 설립한다는 생각조차 없었을 것입니다. 다만 값없이 받은 은혜의 빚을 되갚고 싶은 마음이었을 것입니다. 구한말의 혼돈 가운데서 방황하던 이들에게 복음의 빛을 전하려는 열망이야말로 이 교회의 시작이라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태백시의 검용소(檢龍沼)에서 발원한 물이 구비구비 흘러 내려 1,300리 한강을 이루듯이 우리 교회는 곡절 많은 현대사를 관통하며 오늘에 이르렀습니다. 아주 일부의 사람들만 우리의 기억 속에 남아 있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조용히 기억의 뒤안길로 스러졌습니다. 하지만 강이 흘러가며 뭇 생명들을 살려냈듯이 이 교회는 그 긴 역사를 거쳐 흐르는 동안 수많은 이들의 삶을 풍요롭게 만들어 왔습니다. 때로는 지친 이들의 품이 되어 주었고, 때로는 무뎌진 마음을 벼리는 숫돌의 역할도 감당했습니다. 지금도 이 우울한 세상에 사는 동안 심신이 다 고달파진 사람들, 그리고 참된 삶을 찾아 헤매는 이들이 모여 서로 어깨를 곁고 비록 조금 더디더라도 진리의 길을 향해 나아갈 수 있음에 감사합니다. 오늘 우리가 이 자리에 함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기적인지요.

바울 사도는 교회를 가리켜 '그리스도의 몸'이라고 말했습니다. 이보다 더 적절한 은유는 없을 것입니다. 교회의 존재 이유는 우리끼리 행복한 자족적인 모임을 이루는 것이 아니라, 주님의 손과 발이 되어 드리는 데 있습니다. 품사로 표현하자면 교회는 형용사가 아니라 동사여야 합니다. 믿음의 적실함은 삶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나는 법이 없습니다. 믿음은 우리 삶을 자꾸만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시킬 때, 그리고 자기 욕망을 내려놓고 하나님의 뜻을 성심껏 받들 때 자라납니다. 일전에도 말씀드린 바가 있습니다만 사람들은 교회를 '큰 교회'와 '작은 교회'로 나누지만, 실상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와 '죽은 교회'가 있을 뿐입니다. 주님의 손과 발이 되기 위하여 노력하는 교회는 살아있는 교회이지만, 자기 확장만 꾀하는 교회는 죽은 교회입니다.

• 부르심
오늘의 본문 말씀은 교회의 본질을 잘 일깨워주고 있습니다. 신학자들은 에베소서를 제2바울 서신 가운데 하나로 분류합니다. 이 말은 에베소서가 바울의 저작물이 아니라 그의 정신을 이어받은 사람의 글이라는 뜻입니다. 하지만 이 책의 화자가 바울로 되어 있기에 편의상 이 책의 권고를 바울의 것으로 간주하겠습니다. 바울은 지금 자신이 '주님 안에서 갇힌 몸'(3:1, 4:1)이라고 말합니다. 바울이 갇힌 곳이 로마인지 가이사랴인지 아니면 다른 곳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에베소는 지중해 동부 지역의 중심 도시였습니다. 항구를 끼고 있었고, 동서를 연결시키는 두 개의 상업도로가 지나는 곳이기도 했습니다. 아데미 여신을 섬기는 신전은 세계적으로도 유명했다고 합니다. 바울은 제2차 전도여행 때 잠시 이곳에 머물다가 떠났지만, 제3차 전도여행 때는 이곳에 2년 동안 머물면서 복음을 전파했습니다. 에베소서는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매우 장엄하게 노래하고 있습니다. 이 서신에서 예수 그리스도는 세상의 모든 막힌 담을 허시는 분으로 등장합니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평화이십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이 양쪽으로 갈라져 있는 것을 하나로 만드신 분이십니다. 그분은 유대 사람과 이방 사람 사이를 가르는 담을 자기 몸으로 허무셔서, 원수 된 것을 없애시고, 여러 가지 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하셨습니다. 그분은 이 둘을 자기 안에서 하나의 새 사람으로 만들어서 평화를 이루시고, 원수 된 것을 십자가로 소멸하시고 이 둘을 한 몸으로 만드셔서, 하나님과 화해시키셨습니다."(엡2:14-16)

바울에게 그리스도는 담을 허무는 분입니다. 담은 사람들이 '우리'와 '그들'을 나누기 위해 세우는 인위적 장벽입니다. 사람들은 유대인과 이방인, 남자와 여자, 종과 자유인, 경건과 속됨을 갈랐습니다. 그러한 가름은 누군가에게 꼭 상처를 남깁니다. 경계선의 이편과 저편으로 갈려 어떤 이들은 특권의식에 사로잡힌 채 살아가고 또 어떤 이들은 배제된 자의 쓰라림을 안고 살아갑니다. 바울은 예수께서 그러한 경계 혹은 불통의 담을 허물어 서로 소통하게 하셨다고 말합니다. 불통의 고통은 지금도 여전합니다. 오늘 우리의 현실을 돌아보십시오. 이데올로기와 정파적 입장의 차이로 인해 국민들이 사분오열되어 있습니다. 서로에게 다가서려는 노력은 이미 포기한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강박관념에 사로잡힌 사람처럼 살아갑니다. 근본의 자리에 서지 않는 한 갈라진 두 진영을 화해시키는 일은 불가능합니다. 예수 정신이 여전히 유효한 것은 그 때문입니다.

다시 본문으로 가보겠습니다. "여러분은 부르심을 받았으니, 그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4:1). 이미 이야기를 했습니다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신 까닭은 '그리스도의 몸'이 되라는 것입니다. 교회의 교회됨은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 계실 때 하셨던 일을 계속하는 데 있습니다. 병든 자를 고쳐주고, 귀신을 쫓아내고, 소외된 이들의 벗이 되어주고, 삶의 의미를 잃어버린 사람들에게 삶의 의미를 되찾게 도와주는 일이야말로 교회의 본질적 사명이라는 말입니다. 우리는 살아가는 동안 마주치는 온갖 어려운 일들을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아 해결합니다. 그래서인지 우리가 몸으로 할 수 있는 일들이 점점 줄어들고 있습니다. 탄생도 죽음의 처리도 모두 외주화하고 우리는 다만 돈만 준비하면 되는 세상입니다. 사람들이 암암리에 돈을 최고의 가치로 간주하는 것은 돈의 전능함을 학습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세상에는 돈이 해결할 수 없는 문제들이 많습니다.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기 어려운 지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삶의 의미에 관련된 문제입니다. 덧거친 세상에 사는 동안 조금씩조금씩 마음에 누적되어 우리의 일부가 되어버린 그늘과 어둠, 그리고 생의 무의미함에 대한 자각은 치유하기 참 어렵습니다. 빠르게 변하는 세상이 몰아가는 대로 숨가쁘게 질주하는 동안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 깃든 공허감은 좀처럼 해소되지 않습니다.

어느 분이 아우토반을 달리신 이야기를 하시더군요. 시속 180km로 질주하는 차에 앉아 있자니 몸은 저절로 경직되고, 주변 풍경은 고사하고 그냥 아스팔트 길만 바라보게 되더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시대에 병든 이를 고쳐준다는 말은 혹은 귀신을 쫓아낸다는 말은 어쩌면 주변 세계와 더 큰 세계에 눈길을 주며 살도록 도움으로써 그들이 자기 중심주의의 늪에서 빠져나올 수 있도록 해준다는 말이 아닐까요? 자기 중심주의라는 병이 치유되지 않는 한 인간다운 삶은 요원한 과제일 뿐입니다. 주님이 우리를 부르신 것은 이웃의 요구에 응답할 줄 아는 사람이 되라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나의 존재가 다른 이들의 삶을 더 든든하게 하고 따뜻하게 한다면 우리는 주님 안에 있다고 말해도 좋을 것입니다.

• 새로운 삶 익히기
문제는 우리가 맺는 관계의 양상입니다. 우리는 수평적인 관계보다는 수직적인 관계 맺음에 익숙합니다. 서열 의식이 강한 사람일수록 권위적입니다. 그들은 자신보다 높은 사람에게는 더할 나위없이 사근사근한 태도를 보이지만, 자기보다 낮다고 판단되면 좀 함부로 대하는 경향이 많습니다. '하게' 체로 말하는 것은 보통이고, 의사결정과정을 독점하는 경우도 많습니다. 권위적인 관계 맺음에 익숙하지 않은 사람들은 그런 이들과의 만남을 회피합니다. 굳이 그 자리에 갔다가 기분 상하기 싫다는 것이지요. 막무가내인 상사에게 시달리는 직장인들은 일쑤 딱 그만 두고 싶다는 말을 하곤 합니다. 그러고 싶지만 그럴 수 없는 현실 때문에 비애는 깊어갑니다.

오늘 우리 시대의 많은 고통은 그런 아름다운 관계의 상실에서 비롯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사람들은 다 바쁘게 살지만 근원적인 외로움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서성입니다. 헨리 뉴엔 신부는 우리 시대의 문제는 "함께 울어주고, 함께 웃어주고, 함께 걸어주고, 함께 식사하고, 함께 가만히 앉아 있을 사람이 없는 것"(<새벽으로 가는 길>, 성바오로출판사, p.80)이라고 말합니다. 그러면서 그는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나님의 사랑과 접촉할 수 있는 길이 인간적인 길과 직결되고 있음을 보여주시기 위함이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서로에게 보이는 애정과 따뜻한 관심이야말로 하나님의 무한하고 온전한 사랑과 접촉하는 길이라는 말입니다. 그것을 잘 알았기에 바울은 에베소 교인들에게 이렇게 권고합니다.

"겸손함과 온유함으로 깍듯이 대하십시오. 오래 참음으로써 사랑으로 서로 용납하십시오. 성령이 여러분을 평화의 띠로 묶어서, 하나가 되게 해 주신 것을 힘써 지키십시오."(2-3)

겸손함은 자기의 유한성과 연약함을 아는 마음입니다. 자기 또한 잘못을 저지를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마음입니다. 온유함이란 거친 것까지 품어안아 부드럽게 바꿀 수 있는 정신의 유연성과 따뜻함입니다. 오래 참음은 조급하게 상대방을 바꿔놓으려 하지 않고 기대를 품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그리스의 소설가인 니코스 카잔차키스는 산길에서 고치를 뚫고 나오는 나비를 보았습니다. 그 더딘 움직임을 지켜보고 있자니 조급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나비를 도울량으로 입김을 불어넣었습니다. 시간을 단축하고 싶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예상과 달리 끔찍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나비의 날개가 일그러져 버린 것입니다. 그는 날지 못하는 나비를 보고 창조의 리듬을 훼손하려 한 자기의 행태를 부끄럽게 돌아보았습니다. 우리가 하는 일이 그러합니다. 도무지 다른 이들을 기다려 주지 못합니다. 나와 다른 견해를 가진 이들을 사랑으로 품어줄 만한 여유가 없습니다. 교회를 이룬다는 것은 바로 이런 삶을 익히기 위해서입니다. 나의 뜻을 관철시키기 위해 다른 이들을 몰아붙이는 일을 피해야 합니다.

브니엘에서 동생 야곱을 만나 오랜 원한감정을 내려놓고 화해를 이룬 에서는 동생에게 "이제 갈 길을 서두르자"고 채근합니다. 하지만 야곱은 형이 먼저 앞서 가시라고 부탁합니다. 아이들도 어리고 새끼 딸린 짐승들도 있어서 하루만이라도 지나치게 빨리 몰고 가면 다 죽을 수도 있으니 "그들의 걸음에 맞추어 천천히" 세일로 가서 형님께 나가겠다는 것이었습니다(창33:12-14). 여전히 형을 두려워하는 야곱의 마음이 읽히기도 하지만 그의 말은 타당합니다. 지나치게 빨리 어떤 결과를 얻으려고 서둘다 보면 결국 모든 관계가 어그러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지향점을 바로 하고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나아가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궁극적인 하나 됨을 향한 순례입니다. 성도들은 조각난 세상을 깁는 소명 앞에 서 있습니다.

• 하나님의 리듬 속으로
하나님의 시간이 있습니다. 하나님의 방법이 있습니다. 우리는 하나님의 발걸음보다 앞서 달려가지 말아야 합니다. 탈출 공동체는 구름 기둥과 불기둥이 움직일 때 함께 움직였고, 멈출 때 함께 멈췄습니다. 예수님에 대한 바른 신앙고백으로 칭찬을 들었던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 예고를 들었을 때 그래선 안 된다며 주님께 항의를 했습니다. 그러나 주님은 그에게 '내 뒤로 물러서라'며 준엄하게 꾸짖으셨습니다.

현실을 바라볼 때 빛이 보이지 않아 낙심될 때가 많습니다. 무도한 이들이 의기양양하고, 악인들이 평안을 누리고, 거만한 자들이 눈을 치켜 뜨고 다니고, 악의에 찬 말을 쏟아내는 이들이 많은 세상에서 의인들조차 침묵하고 있습니다. 기초가 바닥부터 흔들리는 세상에서 의인인들 무엇을 할 수 있겠는가 절망하는 이들을 보면 가슴이 아픕니다. 세상을 보면 한숨이 나오는 게 사실입니다. 하지만 하나님이 살아계시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하나님은 모든 것의 아버지시요, 모든 것 위에 계시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고 모든 것 안에 계시는 분이십니다."(6)

하나님이 모든 것의 아버지라는 말은 세상에 무관한 것은 아무 것도 없다는 것이고, 모든 것 위에 계시다는 말은 어느 누구도 그분의 뜻을 독점할 수도 통제할 수도 없다는 뜻이고, 모든 것을 통하여 계시다는 말씀은 이 세상 모든 것 속에 그분의 숨결이 깃들어 있다는 말이고, 모든 것 안에 있다는 말은 세상에서 우리가 함부로 대해도 좋은 것은 하나도 없다는 말입니다. 이 짧막한 고백 속에 기독교인들이 취해야 할 삶의 원리가 다 들어 있습니다. 이 한 가지 사실만 알아도 우리는 쉽게 낙심할 수도 없고, 교만하게 다른 이들을 무시할 수도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경험하는 현실 하나하나가 하나님의 메시지임을 알아차릴 것입니다. 저는 이런 것을 일러 거룩한 삶이라 말하고 싶습니다. 교회는 바로 이런 삶의 가치를 세상에 공급해야 합니다. 한일장신대의 차정식 교수는 겨자씨의 비유를 풀이하면서 "절망적인 상황에서 희망을 잃지 않고 일상의 노동을 감내하는 농부의 꾸준한 삶의 자세, 그 인고의 마음가짐 속에 천국의 비밀이 숨어 있다"(차정식, <거꾸로 읽는 신약성서>, 포이에마, p.110)고 말합니다. 일상의 자리에서 우리가 그러한 천국식 삶의 방식을 내면화하고 살아갈 때, 그리고 공동체 안에서 그런 꿈을 배우고 익히고 실천할 때, 우리는 그분의 길 위에 있다 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도우심으로 우리 교회가 이런 아름다운 공동체로 발전해 갈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5월 03일 11시 07분 5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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