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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창46:28-30

by 【고동엽】 2022. 7. 6.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창46:28-30
(2015/5/10)

[이스라엘이 유다를 자기보다 앞세워서 요셉에게로 보내어, 야곱 일행이 고센으로 간다는 것을 알리게 하였다. 일행이 고센 땅에 이르렀을 때에, 요셉이 자기 아버지 이스라엘을 맞으려고, 병거를 갖추어서 고센으로 갔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 이스라엘이 요셉에게 말하였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

• 누구에게나 있는 옷궤 하나
어버이 주일입니다. 자식을 낳아 기르느라 애쓴 이 땅의 모든 어버이들과 그들을 통해 이 세상에 오게 된 모든 이들에게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어버이주일을 앞두고 이청준 선생의 단편 <눈길>을 읽었습니다. 소설은 자수성가하여 도시에서 살고 있던 화자 '나'가 다 쓰러져가는 시골집에 살고 있던 어머니를 찾아가면서 시작됩니다. 늙은 어머니는 단칸방에서 큰 며느리와 세 조카와 함께 살아가고 있습니다. 옷궤 때문에 발조차 뻗기 어려운 형편이었습니다. 이야기를 풀어가는 화자는 어머니를 '노인'이라고 지칭합니다. 의도적인 거리 두기입니다. 그는 혼잣소리인양 여러 차례 그 노인과 자기 사이에 갚아야 할 빚은 없다고 말합니다. 남편과 큰 아들을 일찍이 떠나보내고 근근히 삶을 이어가야 했던 어머니는 객지에서 공부하는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미안함 때문에 어머니는 아들에게 아무 것도 요구하지 않습니다. 며느리는 좁은 방에서 옷궤를 치우는 게 어떠냐는 말해보지만 노인은 들은 척도 하지 않습니다.

그 낡은 옷궤는 '나'를 옛 기억으로 인도합니다. 도시에서 학교에 다니고 있던 '나'는 술버릇 때문에 가산을 탕진한 형이 전답과 선산을 팔고, 마침내는 아버지 때부터 살아온 집까지 팔아넘겼다는 소식을 듣고 어떻게 된 일인지 알아보아야겠다는 생각에 옛 마을을 찾아갑니다. 어스름을 기다려 살던 집 골목에 들어서니 집은 괴괴하기 이를 데 없었습니다. 문간에서 한참 어정거리고 있는 데 친척 누나의 기별을 듣고 달려온 어머니가 아들을 나무라며 집안으로 잡아 끌었습니다. 살림살이를 다 드러낸 집에서 어머니는 옛날과 똑같이 저녁을 지어 내왔습니다. 언젠가 아들이 돌아오면 저녁밥 한 끼를 지어 먹이고 마지막 밤을 지내게 해주고 싶었던 어머니는 새 주인의 양해를 얻어 혼자서 아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입니다. 어머니는 매일같이 그 빈집을 드나들며 먼지를 털고 걸레질을 했고, 안방 한쪽에 이불 한 채와 옷궤 하나를 예대로 그냥 남겨두었습니다. 옷궤는 옛 집의 분위기를 되살려내 아들의 괴로운 잠자리를 위로하고 싶었던 어머니의 마음이었습니다. 또한 아들과 어머니를 이어주는 끈이기도 했습니다.

사람들마다 그런 '옷궤'가 하나쯤은 있습니다. 남들이 보기에는 구질구질해 보여도 어머니 혹은 아버지는 결코 버릴 수 없는 물건 말입니다. 그것은 또한 자식들에게는 부모님의 은은한 사랑을 드러내주는 상징물이기도 합니다. 몇 주 전 교우들과 함께 세월호 참사자들의 영정을 모신 안산분향소를 다녀왔습니다. 희생자 295명의 영정과 9명의 실종자들의 영정을 일람하면서 가슴이 시렸습니다. 저 푸릇푸릇한 젊은이들의 생명과 꿈이 소멸되기까지 그들이 겪어야 했던 공포와 아픔이 고스란히 느껴졌기 때문입니다. 영정 앞에는 가족들이 가져다 놓은 여러 가지 유품들과 선물이 놓여 있었습니다. 사진도 있고, 과자도 있고, 편지도 있고, 운동기구도 있고, 애장품도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단순한 물건이 아니었습니다. 똑같은 사물도 배치된 장소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는 법입니다. 남들에게는 사소해 보이는 그 물건들은 산 자와 죽은 자를 이어주는 기억의 통로였습니다. 소설 <눈길>에 나오는 어머니의 옷궤와 같은 것이었다는 말입니다.

• 아름다운 화해
맹자孟子 진심편盡心篇에는 군자의 세 가지 즐거움이 나옵니다. 첫째는 부모가 살아 계시고, 형제가 두루 잘 지내는 것입니다(父母俱存 兄弟無故). 둘째는 하늘을 우러러 부끄러움이 없고, 땅을 굽어보아 사람에게 부끄러움이 없는 것입니다(仰不愧於天 俯不怍於人). 셋째는 뛰어난 영재를 얻어 가르치는 것입니다(得天下英才 而敎育之). 맹자는 그 세 가지 즐거움을 말하는 앞뒤에 천하를 통일하여 왕이 되는 것은 여기에 속하지 않는다고 두 번이나 강조하고 있습니다. 사람이 되는 것이 먼저라는 이야기일 겁니다. 그런데 첫번째 즐거움이 '부모구존, 형제무고'라는 사실에 주목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토라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십계명도 부모공경을 인간관계를 가르치는 교훈의 첫 자리에 놓고 있습니다.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의 소중함을 알아차리지 못하는 것이 인간의 병통이 아닌가 싶습니다. 든 자리는 몰라도 난 자리는 안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라지거나 스러지고 난 후에야 우리가 누리던 것들이 당연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꼭 톨스토이의 가르침이 아니더라도 지금 우리 곁에 있는 이들을 귀한 존재로 여기는 것이야말로 좋은 인생을 살기 위한 비결 가운데 하나일 겁니다. 성경은 온통 잃어버린 것들을 찾는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나라를 잃어버린 것을 되찾는 것과 연관시켜 설명하시곤 했습니다. 잃은 양을 찾는 목자의 이야기, 잃어버린 드라크마를 찾는 여인의 이야기, 집을 떠났던 아들을 맞아들이는 아버지의 이야기 등이 떠오릅니다. 잃어버렸던 것을 되찾을 때 누구나 다 기뻐합니다. 기쁨이야말로 하나님 나라의 기본 정조입니다.

성경에서 가장 아름다운 장면 가운데 하나를 꼽으라 한다면 나는 야곱과 에서의 상봉 장면을 들겠습니다(창32-33장). 감정이 상한 채 헤어졌던 형제가 20년 만에 만나는 장면은 장엄하기까지 합니다. 어엿이 일가를 이룬 야곱이었지만 '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시면 야곱을 죽이겠다'고 이를 갈던 형 에서의 노기 띤 음성이 평생 그를 따라다니고 있었습니다. 형과의 대면을 앞둔 그는 귀향의 설렘보다 두려움에 사로잡혀 있었습니다. 그는 어찌할 바를 몰라 얍복강 나루에 엎드렸습니다. 엎드림은 가장 수동적인 자세입니다. 어느 순간 그는 자기 허리춤을 붙잡는 어떤 존재와 씨름을 했습니다. 그 깊은 밤 그가 붙들고 씨름했던 것은 어쩌면 자기 안의 두려움이 아니었을까요? 다친 엉덩이뼈는 속이는 자로 살아온 지난 세월에 대한 회한으로 인해 무너진 그의 중심이었을 겁니다. 그밤에 옛 사람 야곱은 죽었고, 자기의 가능성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능성을 붙들고 살아갈 새 사람 이스라엘이 태어났습니다. 날이 밝았을 때 그는 철저히 수동적인 존재가 되어 형 에서 앞으로 나아갑니다. 그런데 형은 옛날의 악감정을 다 잊고 동생을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받아들였습니다. 성경은 그곳이 브니엘이었다고 말합니다. 브니엘은 '하나님의 얼굴'이라는 뜻입니다. 지금 우리의 브니엘은 어디입니까? 형제자매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마음이 있는 곳, 즉 긍휼히 여기는 마음이 있는 곳입니다. 형제는 두 팔을 벌려 서로 목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고, 함께 울었습니다. 그리고 야곱은 형님을 얼굴을 뵙는 것이 하나님의 얼굴을 뵙는 듯하다고 말합니다. 이보다 아름다운 화해의 장면을 저는 떠올리기 어렵습니다.

• 한 노인 이야기
창세기는 온통 형제간의 갈등과 다툼, 그리고 화해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습니다. 가인과 아벨, 이스마엘과 이삭, 에서와 야곱,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이야기는 오늘 우리에게 가장 가까운 이들이 화목하게 지내기 참 어렵다는 사실을 일러줍니다. 아주 일부를 제외하고는 국경을 맞대고 있는 나라들이 사이좋은 경우를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왜 그럴까요? 이해관계가 엇갈리기 때문일 겁니다. 거리가 좀 떨어져 있으면 관대하게 대할 수 있습니다. 그래서 도스토예프스키도 기독교인들이 먼 세상 사람들은 사랑하면서도 정작 가장 가까이에 있는 이들은 사랑하지 못한다고 비웃듯 말했던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의 아름다움은 갈등 이야기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화해 이야기를 배치하고 있다는 데 있습니다. 물론 가인과 아벨 이야기는 예외입니다. 관계의 어그러짐이 빚어질 수밖에 없는 세상이지만, 그 관계를 다시 회복하는 것이야말로 우리에게 주어진 실존적 과제입니다.

오늘 우리가 주목하는 이야기는 형제간의 갈등의 여파로 인해 살맛을 잃어버린 채 살던 한 노인의 이야기입니다. 그 노인은 야곱입니다. 고향에 가까운 곳으로 이주하여 일가를 이루어 살던 그의 가정은 여전히 위기 속에 있었습니다. 외동딸이었던 디나가 히위 사람 하몰의 아들 세겜에게 겁탈을 당한 일이 벌어졌고 분기탱천한 시므온과 레위가 세겜 남자들을 죽이고 그 성읍을 약탈하는 일이 벌어졌고, 야곱은 부득이 그곳을 떠나 베델로 이주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설상가상으로 야곱이 사랑하던 아내 라헬은 베냐민을 출산하다가 죽고 말았습니다. 쓸쓸해진 야곱은 라헬을 통해 낳은 아들 요셉에 더욱 집착하게 되었습니다. 요셉을 향한 아버지 야곱의 편애는 다른 아들들의 마음에 그림자를 만들었고, 우리가 알다시피 그들은 요셉을 미디안 상인들에게 팔았습니다. 형제를 종으로 파는 참람한 일이 벌어진 것입니다. 그리고 형들은 요셉이 입고 있던 화려한 옷에 염소피를 묻혀서 아버지에게 가지고 가서는 들에서 우연히 그 옷을 발견했다고 말했습니다. 야곱은 요셉이 들짐승에게 잡아 먹힌 것이 틀림없다고 생각하면서 슬픈 나머지 옷을 찢고, 베옷을 걸치고 아들을 생각하며 여러 날을 울었습니다. 그는 위로받기를 거절했습니다.

그때 야곱의 심정이 어때 했을까요? 가슴 가득 회한이 차올랐을 겁니다. 자기가 살아온 날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가면서 자책의 심정에 사로잡혔겠지요. 형을 두 번씩이나 속였던 일이 떠올랐을 것이고, 밧단아람에서 보냈던 20년의 쓰라린 나날이 떠올랐을 것이고, 자식들을 얻었을 때의 기쁨, 특히 라헬을 통해 요셉을 얻었을 때의 기쁨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아들이었습니다. 그리고 외삼촌 라반과의 갈등 때문에 가족들을 솔가하여 고향으로 돌아오던 여정이 떠올랐을 것입니다. 고향이라고 찾아온 땅에서 딸이 겁탈을 당했을 때 하늘이 무너지던 그 느낌, 라헬이 속절없이 세상을 등졌을 때 느꼈던 아득한 절망, 그리고 요셉의 죽음. 그에게 삶은 너무 가혹했습니다. 그는 어쩌면 '하나님 나한테 왜 이러세요?' 하고 묻고 싶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오늘도 나이든 분들이 야곱 이야기를 좋아하는 까닭은 그가 겪었던 신산스런 삶의 이야기가 자신들의 경험과 오롯이 겹쳐지기 때문일 겁니다. 정도의 차이는 있을지언정 지금 머리가 희끗희끗하고 주름이 깊게 패인 분들은 야곱의 그 마음을 넉넉히 헤아릴 수 있을 것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지기도 하고, 아득바득 애써 일궈놓은 삶의 터전을 한 순간에 잃어버리기도 하고, 설상가상으로 사랑하는 이들을 잃기도 하면서 살아온 모진 세월이었습니다.

• 평범한 행복의 꿈
하지만 야곱 이야기는 그렇게 끝나지 않습니다. 하나님은 인간이 망쳐놓은 것을 고치시는 분이십니다. 오랜 가뭄으로 먹을 것을 구할 길이 없었던 야곱의 아들들이 식량을 구하기 위해 애굽에 드나들면서 새로운 이야기가 시작됩니다. 천만 뜻밖에도 그곳에서 형제들은 자기들이 팔아버렸던 요셉을 다시 만나게 됩니다. 우여곡절이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화해를 하게 됩니다. 요셉과 다른 형제들의 화해 장면도 성경에서 가장 감동적인 장면 가운데 하나입니다. 화해를 이루게 되자 비로소 요셉은 자기가 겪어야 했던 그 모진 고통이 무의미한 것이 아니었음을 알게 됩니다. 그는 두려움에 떨고 있는 형들에게 이렇게 말합니다.

"그러나 이제는 걱정하지 마십시오. 자책하지도 마십시오. 형님들이 나를 이 곳에 팔아 넘기긴 하였습니다만, 그것은 하나님이, 형님들보다 앞서서 나를 여기에 보내셔서, 우리의 목숨을 살려 주시려고 그렇게 하신 것입니다."(창45:5)

이런 인식은 계시적 깨달음입니다. 하지만 이 말을 할 수 있는 것은 오직 요셉 뿐입니다. 그 형들은 이런 말을 할 수도 없고 해서도 안 됩니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형제를 팔아버렸던 자기들의 무정한 처사에 대한 회개와 참회입니다. 가해자들이 이런 말을 전유해서 피해자들의 가슴에 피멍이 들게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하나님의 뜻'이라는 말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요셉은 형들에게 아버지를 모시고 내려오라고 부탁합니다. 아버지 야곱은 브엘세바에서 아버지 이삭의 하나님께 희생제사를 드리고 애굽으로 내려갑니다. 야곱 일행이 애굽 땅의 북동부 지역인 고센에 이르렀다는 전갈을 받은 요셉은 아버지 야곱을 맞으려고 그곳으로 갑니다. 성경은 부자 상봉 대목을 이렇게 그려 보여줍니다. "요셉이 아버지 이스라엘을 보고서, 목을 껴안고 한참 울다가는, 다시 꼭 껴안았다"(29) 아버지 야곱도 말합니다. "나는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다. 내가 너의 얼굴을 보다니, 네가 여태까지 살아 있구나!"(30)

여러분, 아십니까? 지금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 내 곁에 있다는 사실, 그의 얼굴을 볼 수 있다는 사실, 그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사실이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말입니다. 가족들은 함께 살아야 합니다. 가장 평범한 것 속에 가장 비범한 것이 들어 있습니다. 그것을 안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분명합니다. 모든 가족들이 평범한 행복을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을 만들어야 합니다. 가족이 없는 이들에게는 우리가 가족이 되고 품이 되어 주어야 합니다. 저마다 자기가 존중받고 있음을 느낄 수 있는 세상, 모두가 자기에게 주어진 생명의 몫을 온전히 누리며 살 수 있는 세상은 우리들의 꿈이기도 하지만, 주님의 꿈이기도 합니다. 교회는 바로 그런 꿈이 실현될 수 있음을 보여주는 징표가 되어야 합니다. 혈연에 바탕을 둔 가족주의를 넘어,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이들이 한 가족 되어 정겹게 살아갈 때 새로운 세상은 움터올 것입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5월 10일 11시 04분 0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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