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회적 모성 신15:12-18 (2015/4/19) ["당신들 동족 히브리 사람이 남자든지 여자든지, 당신들에게 팔려 와서 여섯 해 동안 당신들을 섬겼거든, 일곱째 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십시오. 자유를 주어서 내보낼 때에, 빈 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대로, 당신들의 양 떼와 타작 마당에서 거둔 것과 포도주 틀에서 짜낸 것을 그에게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합니다. 당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이러한 것을 당신들에게 명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 종이 당신들과 당신들의 가족을 사랑하고, 당신들과 함께 있는 것을 좋아하여 '나는 이 집을 떠나가지 않겠습니다' 하고 당신들에게 말하거든, 당신들은 그의 귀를 문에 대고 송곳으로 그 귓불을 뚫으십시오. 그러면 그는 영원히 당신들의 종이 될 것입니다. 여종도 그렇게 하십시오. 남녀 종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마십시오. 그들은 여섯 해 동안 품팔이꾼이 받을 품삯의 두 배는 될 만큼 당신들을 섬겼습니다. 그렇게 내보내야만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이 하는 모든 일에 복을 내려 주실 것입니다."] • 아, 고단한 세상 주님의 은총과 평화를 기원합니다. 야산마다 활짝 피어난 진달래꽃으로 인해 환합니다. 오늘은 4.19혁명이 일어난 지 55년이 되는 날입니다. 이맘 때가 되면 이영도 시인의 <진달래>가 떠오릅니다. "눈이 부시네 저기 난만히 묏등마다/그날 쓰러져간 젊음같은 꽃사태가/맺혔던 한이 터지듯 여울여울 붉었네//그렇듯 너희는 가고 욕처럼 남은 목숨/지친 가슴 위엔 하늘이 무거운데/연연히 꿈도 설워라 물이 드는 이 산하". 시인은 무리지어 피어나는 진달래꽃을 보며 4.19 때 자유를 외치다가 죽어간 젊은이들을 떠올리고 있습니다. 자연은 무심히 흘러가는 것 같지만 복잡한 인간사로 인해 피어나는 꽃들조차 유정한 겁니다. 요 며칠 광화문과 시청 앞 광장과 거리는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아, 진상규정과 세월호 특별법 시행령을 폐기하라는 시민들의 외침으로 일렁였습니다. 이스라엘 시인은 "우리의 거리에는 울부짖는 소리가 전혀 없을 것"(시144:14c)이라며 이상적인 세상을 노래했지만 세상은 여전히 혼돈 속에 있습니다. 인간 역사는 예속에서 자유로 가는 여정입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소수의 사람들만이 자유를 누렸고 다수는 예속 상태에서 살아야 했습니다. 신분제가 철폐된 지금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유로운 듯 보입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그렇지 않습니다. 새로운 신분제 사회가 도래했기 때문입니다. 신분을 가르는 척도는 재산 혹은 구매력입니다. 같은 시민이라 해도 돈의 과다에 따라 사회적 신분은 확연히 갈립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돈을 벌기 위해 정말 열심히 일합니다. 경쟁의식이 내면화되어 있기에 한시도 마음 편할 날이 없습니다. 다들 숨이 가쁩니다. 이전보다 많은 것을 누리지만 행복감은 줄어들고 있고, 늘 불안에 사로잡힌 채 살아갑니다. 공동체가 다 무너지면서 삶이 고단할 때면 잠시라도 몸을 기댈 수 있던 언덕도 다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나는 가끔 작고한 사진작가 김기찬 선생의 <골목 안 풍경>이라는 사진집을 보곤 합니다. 그는 마치 삶의 곡절처럼 구불구불한 골목 안에서 벌어지는 서민들의 정겨운 삶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골목 안에서 노는 아이들, 음식을 나눠 먹는 사람들, 의자를 내놓고 앉아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들…. 구차하지만 인정이 있던 풍경입니다. 하지만 지금 그런 풍경은 도시에서 더 이상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물질은 풍부해졌지만 정신은 빈곤해진 것입니다. 백짓장도 맞들면 낫다는 속담이 무색한 시대입니다. 저마다 자기 중심성의 덫에서 자유롭지 못합니다. 이런 시대에 성경을 읽는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요?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얻는다는 것이 아닐까요? 세상에 길들여진 우리 마음과 생각을 하늘의 뜻에 따라 조율한다는 것이 아닐까요? 하늘 뜻은 명확합니다. 세상 사람들이 서로를 귀히 여기며 형제자매로서의 우의를 다지며 살아가는 것입니다. 생명을 풍성하게 하는 것입니다. 1945년 4월 9일에 나치에 의해 처형당한 디트리히 본회퍼 목사는 기독교인들의 실존적 과제를 '타자를 위한 존재'라는 말로 요약했습니다. 성경의 용어로 하자면 이것은 '이웃 사랑'이고 도덕철학적 용어로 이야기 하자면 '배려'가 될 것입니다. 이 마음이 무너져 세상이 암담합니다. • 면제년 신명기 법전은 거룩한 백성으로 살기 위해, 그리고 '더불어 함께' 살기 위해 하나님의 백성들이 명심해야 할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그 규정이 상당히 상세합니다. 고대 이스라엘 공동체의 생생한 현실을 반영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신명기 15장은 빚을 면제해 주는 면제년 규정을 다루고 있습니다. 매 칠 년 끝에는 빚을 면제하여 주라는 말로 시작되는 이 단락은 오늘의 우리에게도 많은 것을 시사해주고 있습니다. 동족인 이웃에게 돈을 꾸어준 사람은 빚을 갚으라고 다그쳐서는 안 됩니다. 뿐만 아니라 면제년이 되면 그 빚을 삭쳐주어야 합니다. 성경은 그 땅에 가난한 사람이 없게 하는 것이 복을 받는 비결이라고 가르칩니다. 따라서 가난한 동족들을 인색한 마음으로 대해서도 안 되고, 그들에게 베풀지 않으려고 손을 움켜 쥐어서도 안 됩니다. "반드시 당신들의 손을 그에게 펴서, 그가 필요한 만큼 넉넉하게 꾸어 주십시오. 당신들은 삼가서 마음에 악한 생각을 품지 마십시오. 빚을 면제하여 주는 해인 일곱째 해가 가까이 왔다고 해서, 인색한 마음으로 가난한 동족을 냉대하며, 아무것도 꾸어 주지 않아서는 안 됩니다. 그가 당신들을 걸어 주님께 호소하면, 당신들이 죄인이 될 것입니다."(신15:8-9) '반드시'와 '넉넉하게'라는 단어가 '인색한 마음'이라는 단어와 대조되고 있습니다. 정말 어려운 처지에 빠진 사람이 일어설 수 있도록 돕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움켜쥐려는 본능을 거슬러 꼭 필요한 이들에게 나눠줄 수 있을 때 우리 마음도 자라게 마련입니다. 이런 일이 정말 가능한 것일까요? 저는 최근에 우리 사회 일각에서 시작되고 있는 두 가지 운동에 주목하고 있습니다. 하나는 성남시에서 벌어지고 있는 '빚 탕감 프로젝트'입니다. 이것은 은행이나 대부업체에서 돈을 빌렸으나 도저히 갚을 길이 없어 신용불량자가 된 사람들을 돕기 위한 것입니다. 채권자가 회수를 포기했음에도 불구하고 채권 추심 시장에 남아 있어 평생을 빚쟁이로 살아가는 시민들을 구제하기 위해 시민단체와 종교인들이 나섰습니다. 모금한 돈으로 장기 연체 부실채권을 매입하고 그것을 불태워버림으로서 채무자들에게 새로운 삶의 가능성을 열어주는 것입니다. 천태종에서 먼저 시작했고 성남시에 있는 100여 개의 교회가 동참하고 있다고 합니다. 놀라운 일입니다. 사실 이것은 미국의 롤링 쥬빌리(rolling Jubilee) 운동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라 합니다. 이것은 2012년 11월에 미국의 시민운동 단체인 '월가를 점령하라'(Occupy wall street)가 벌인 빚 탕감운동이지만 그 뿌리는 성경의 '희년 정신'입니다. 희년을 우리 사회에서 구현해내려는 노력이 결실을 보고 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또 하나는 장발장 은행입니다. 장발장은 아시다시피 빅토르 위고의 소설 <레 미제라블>의 주인공입니다. 그는 배가 고파 빵 하나를 훔쳤다가 5년 형을 언도받았는데, 여러 차례 탈옥을 시도하다가 결국 19년 옥살이를 하고 나온 사람입니다. 예나 지금이나 큰 도둑들은 잡지 않고 작은 도둑들에게 가혹한 것이 현실입니다. 경남기업 성완종 씨가 남긴 메모와 인터뷰 기사로 인해 정국이 술렁이고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들만의 리그'에서 벌어지는 일이 무엇인지 어렴풋이 짐작하고 있습니다. 장발장 은행은 단순 벌금형을 선고 받았는데 그 벌금을 낼 길이 없어 감옥에 들어가 노역하는 사람들의 수가 1년에 4만 명이 넘는다는 사실에 충격을 받은 이들에 의해 시작되었습니다. 도저히 돈을 구할 수 없어서 구치소와 교도소에서 노역을 해야 하는 이들에게 '사회적 모성'을 느끼도록 해주자는 취지입니다. 사회가 그들의 품이 되어 주자는 것입니다. 물론 파렴치범이나 상습범은 혜택을 볼 수 없습니다. 소년소녀 가장이나 차상위계층이 그 우선적 대상입니다. 최대 300만원까지 빌릴 수 있고 6개월 거치에 1년간 균등분할상환하는 조건입니다. 국가가 하기 어려운 일을 시민사회가 혹은 종교계가 시작했다는 사실이 놀랍습니다. 조금 따뜻한 사회를 만들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은 하나님의 일을 하는 사람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요? • 넉넉하게 주어서 신명기 법전이 다루는 히브리 종들에 대한 규정도 주목해 볼 필요가 있습니다. 빚에 몰려 종으로 팔려온 히브리인들은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기면 이듬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서 내보내야 했습니다. 자유를 주어 내보낼 때에 '빈 손'으로 내보내서는 안 됩니다. 토지와 가축으로부터 얻은 소득 가운데서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합니다. 그들의 수고와 땀흘림 덕분에 주인집도 복을 받았기 때문입니다. 이것은 "당신들은 주 당신들의 하나님으로부터 복을 받은 대로"(14a)라는 말을 배경으로 할 때 더욱 명확해집니다. 이스라엘 사람들은 땅의 주인은 하나님이라 고백했습니다. 사실 우리는 잠시 이 땅에 머물다 떠나는 나그네들일 뿐입니다. 우리는 떠나도 땅은 여전히 남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이 만드신 땅에서 모든 사람들이 행복하기를 원하십니다. 하지만 살다 보면 사람들의 운명은 갈리게 마련입니다. 부자와 가난한 자, 건강한 자와 약한 자, 지배자와 피지배자, 가해자와 피해자가 갈립니다. 이러한 상황이 지속되면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할 수밖에 없습니다. 특권 의식에 젖어 사는 사람들은 사람됨의 본질이 무엇인지를 잊어버림으로 죄의 길에 접어들게 되고, 사회적 약자들은 자칫 잘못하면 다른 이들을 선망의 시선으로 바라보다가 결국 내면에 냉소와 불신과 적의를 키우게 됩니다. 평화로운 삶의 꿈은 가물가물 스러지고, 세상은 전장으로 변하고 맙니다. 특히 오늘의 현실이 그러합니다. 지금의 신자유주의 경제질서는 '빚'을 매개로 하여 작동되는 체제입니다. 소비사회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욕망의 시장으로 내몹니다. 끊임없이 쏟아져 나오는 '신상품'은 매력적인 외양을 하고 사람들을 현혹합니다. 당대의 가장 '핫'한 연예인이나 스포츠 스타들이 광고 모델로 등장하여 소비 욕구를 자극합니다. 그것을 누리지 못하면 루저처럼 느껴지기에 사람들은 빚을 내서라도 그것을 소유하려 합니다. 그리고 대부업체들은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친절하게도 돈을 빌려주겠다고 스팸성 문자를 날립니다. 이제는 술 권하는 사회가 아니라 빚을 권하는 사회가 되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사는 동안 난파 당한 이들이 너무 많습니다. 아무리 살려고 발버둥을 쳐보아도 가난의 질곡에서 벗어나기 어려운 이들이 많습니다. 삶의 방편을 찾을 길 없어 낙심하는 젊은이들이 많습니다. 일하지 않고도 호사스럽게 살아가는 이들을 보면서 상실감 또한 깊어갑니다. 돈이 최고의 가치로 인정받는 사회는 위험 사회입니다. 사회학자 짐멜은 "돈은 자유를 선사하지만 연대를 앗아간다"고 말했습니다. 다른 이들과 공감하고 그들의 아픔을 덜어주려는 마음이 점점 사라진다는 말입니다. 이런 불공평한 세상에서 우리는 어려움을 겪고 있는 이들을 너그럽게 대하라는 하나님의 말씀 앞에 서 있습니다. 종이 되었던 이들이 다시 한번 자기 삶의 주인이 되어 살아갈 수 있도록 성심성의껏 도우라는 것입니다. 사회적 모성의 회복은 각박하기 이를 데 없는 우리 시대의 과제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이 앞장서서 그 일에 동참해야 하는 것은, 주님의 값없는 구원을 경험했기 때문입니다. "당신들이 이집트 땅에서 종살이한 것과 주 당신들의 하나님이 당신들을 거기에서 구속하여 주신 것을 생각하십시오. 그러므로 내가 오늘 이러한 것을 당신들에게 명하는 것입니다."(신15:15) • 새로운 세상의 향도 예수님도 더 많이 탕감받은 자의 감격에 대해 말씀하셨습니다(눅7:41-43) 우리는 모두 죄의 빚을 탕감받은 사람들입니다. 그것을 진심으로 고백한다면 우리는 이웃을 가혹하게 대할 수도 없고 인색하게 대할 수도 없습니다. 오늘 본문은 히브리 종을 내보내는 것을 언짢게 생각하지 말고, 그들에게 넉넉히 주어 보내라고 권고하고 있습니다. 우리는 그 동안 희년법이 역사 속에서 실행된 적이 있었나 회의적인 시선으로 바라보곤 했습니다. 하지만 그 희년 혹은 면제년의 꿈을 우리 현실 속에서 구현해내려는 이들이 등장하고 있습니다. 새로운 세상은 몽상가처럼 보이는 이들을 통해 유입되는 법입니다. 좋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두 가지 일이 동시에 진행되어야 합니다. 첫째는 불의한 자들과 싸우는 일입니다. 둘째는 서로 서로 힘이 되어주는 새로운 공동체를 일으켜 세우는 일입니다. 교회가 해야 할 일이 정말 많습니다. 곡우 절기가 다가옵니다. 철 따라 우로를 내리시는 주님의 은총에 감사합니다. 이제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척박한 역사의 대지를 갈아엎고 생명과 희망의 씨를 뿌리는 일입니다. 호세아 선지자를 통해 우리에게 주어진 말씀을 들으십시오. "정의를 뿌리고 사랑의 열매를 거두어라. 지금은 너희가 주를 찾을 때이다. 묵은 땅을 갈아 엎어라. 나 주가 너희에게 가서 정의를 비처럼 내려 주겠다."(호10:12) 수많은 젊은이들과 시민들의 희생 위에 세워진 이 나라가 진정으로 아름다운 나라, 따뜻한 나라가 되려면 이웃들을 향한 우리 손과 마음이 인색하지 말아야 합니다. 지금 울부짖고 있는 이들의 품이 되어주어야 합니다. 우리는 그런 세상을 열기 위한 향도로 부름받았습니다. 주님의 은총을 받은 사람답게 세상 도처에 빛의 알갱이를 흩뿌리며 사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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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5년 04월 19일 12시 06분 07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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