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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구를 본받을까? -빌3:17-21

by 【고동엽】 2022. 7. 6.
누구를 본받을까?
빌3:17-21
(2015/3/22)

[형제자매 여러분,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여러분이 우리를 본보기로 삼은 것과 같이, 우리를 본받아서 사는 사람들을 눈여겨보십시오. 내가 여러분에게 여러 번 말하였고, 지금도 눈물을 흘리면서 말하지만,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이 많이 있습니다. 그들의 마지막은 멸망입니다. 그들은 배를 자기네의 하나님으로 삼고, 자기네의 수치를 영광으로 삼고, 땅의 것만을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그분은 만물을 복종시킬 수 있는 권능으로,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자기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 본받을 사람이 있는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완연한 봄날입니다. 순례 길에서 저만치 앞서 가시는 주님의 옷자락이라도 보셨는지요? 아니면 하루하루 일상에 바빠 우리가 지금 사순절 순례 길에 있다는 사실 자체를 잊고 지내시는 것은 아닌지요? 오늘은 바울 사도를 길잡이 삼아 우리가 마땅히 가야 할 자리가 어디인지를 가늠해보고 싶습니다. 본문에서 바울은 어찌 보면 오만해 보일 수도 있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 자신의 혈과 육을 예수와 함께 십자가에 못박지 않은 사람은 차마 할 수 없는 말입니다.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갈2:20)이라고 말한 이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입니다. 혼자 생각해봅니다. 내 주위에 있는 사람들을 향해 '나를 본받으라고 할 만한 것이 있는가?' 자신 있게 말하기 어렵습니다. 그러나 바울 사도는 '나를 본받으라'고 말합니다.

우리가 본받을 만한 사람을 일러 스승이라 합니다. 예수님은 마태복음에서 사람들에게 '지도자', '아버지', '스승'이라 불리우기를 즐기지 말라 이르셨습니다. 그 이름에 합당한 분은 하나님 한 분 외에는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바울 사도는 주님의 말씀을 어기는 것입니까? 문자적으로 보면 그렇게 보일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뜻을 살피면 그렇지 않습니다. 바울은 자기를 돋보이게 하려고 혹은 자기 이익을 확보하려고 스승을 자처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그가 바라는 것은 사람들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 있는 참된 자유를 누리는 것입니다. 그의 관심의 화살표는 자기가 아니라 타인을 향해 있다는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그는 참된 스승이고 아버지입니다. 진리의 옷자락을 보기는 했지만 성큼 그 세계로 발걸음을 옮기지 못하는 성도들을 보며 바울은 매우 안타까워하며 말합니다.

"나의 자녀 여러분, 나는 여러분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어지기까지 다시 해산의 고통을 겪습니다"(갈4:19)
"그리스도 안에서 여러분에게는 일만 명의 스승이 있을지 몰라도, 아버지는 여럿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복음으로 내가 여러분을 낳았습니다"(고전4:15)

이런 사람이야말로 참된 스승이 아닙니까? 스승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 있는 사람은 어떤 이일까요? 첫째, 그는 십자가를 거친 사람이어야 합니다. 십자가란 철저한 자기 부정이요 희생입니다. 십자가를 거쳤다는 말은 자기와 싸워 이겼다는 말입니다. 무슬림들의 의무 가운데 하나는 지하드(jihad)입니다. 우리말로 '성전聖戰'이라 번역되는 말입니다. 지하드란 말에는 폭력의 그림자가 어른거리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들이 말하는 지하드는 그런 전쟁 상황 속에서만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일상 속에서 수행해야 하는 싸움입니다. 즉 자기 욕망과 분노와 싸우는 것입니다. 논어는 군자의 삶을 '극기복례克己復禮'와 '살신성인殺身成仁'이라는 말로 요약하고 있습니다. 자기를 극복하여 예로 돌아간 사람, 자기를 희생해 인을 이룬 사람이야말로 참 사람이라는 뜻일 겁니다. 예수님의 삶이 정확히 그 말에 대응이 되고 있습니다.

둘째로 스승은 부활을 경험한 사람입니다. 부활을 경험했다는 말은 자신이 진리 안에 있는 한 죽어도 죽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신한다는 말입니다. 그는 세상이 안겨주는 수모를 두려워하지 않습니다. 바울 사도는 수없이 많은 고난을 당했지만 그리스도를 향한 그의 열정은 조금도 줄어들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그는 교회를 위하여 그리스도의 남은 고난을 자기 몸에 채우는 것이 자기 소망이라고 말했습니다. 죽음으로도 무화시킬 수 없는 참 생명을 간직한 사람이라야 참 스승이라 할 수 있습니다. 바울은 그런 의미에서 빌립보 교인들이 자기를 본받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고 말한 것입니다.

•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사람들
하지만 현실은 어떠합니까? 주님의 이름으로 모이는 교회조차도 세상과 별반 다를 것이 없어 보입니다. 사람이 모인 곳은 어디나 그렇듯이 교회 역시 지리멸렬입니다. 사랑, 나눔, 돌봄, 희생은 말뿐이고 미움과 독점, 교만과 이기주의가 팽배합니다. 무엇 때문일까요? 그것은 우리가 옛 사람의 죽음을 경험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참된 회개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속절없이 죄에 이끌리며 살아가는 자신의 참상을 아파하지 않기 때문입니다. '세상이 다 그런 데 뭘' 하면서, 주님의 뜻대로 살지 못하는 자기에게 지나칠 정도로 관대한 것이 문제입니다. 그래서 습관처럼 교회를 드나들기는 하지만 말씀과 만나 자기가 깨지는 경험을 하지 못합니다. 신앙이 습관이 되면 옛 삶의 인력에 저항할 생각도 하지 않게 됩니다.

빌립보 교회에서 문제를 일으켰던 사람들은 우선은 '율법주의'를 신봉하는 유대주의자들이었지만, 믿음으로 구원함을 얻는다는 사실을 오해하여 방종하게 살아가던 이들도 그들 못지않은 악영향을 끼치고 있었습니다. 바울 사도는 이런 이들의 삶의 방식을 일러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말합니다. 너무 가혹하고 극단적인 평가가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그래도 안 믿는 것보다는 나은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하나님 나라의 진보에 실제적 걸림돌이 되는 이들은 겉으로는 믿는 것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믿지 않는 이들입니다. 인도 속담에 '표범의 줄무늬는 겉에 있지만 사람의 줄무늬는 속에 있다'는 말이 있습니다. 주님의 마음과 뜻이 우리 속에 스며들어 있지 않으면 우리는 참 신앙인이라 할 수 없습니다. 안에 있는 것이 밖으로 나오는 법입니다. 잠시 동안 우리는 믿음을 가장할 수는 있지만, 지속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을 믿는다고 하는 이들이 십자가의 원수로 사는 것일까요? 참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배를 하나님으로 삼고 살기 때문입니다. '배'는 물론 '욕망'을 이르는 은유적 표현입니다. 바울은 골로새서에서 음행, 더러움, 정욕, 악한 욕망, 탐욕이 곧 우상숭배(골3:5)라고 말했습니다. 신상 앞에 절하는 것만이 우상숭배가 아닙니다. 하나님이 아닌 다른 것들에게 자기 영혼을 갖다 바치는 것이 우상숭배입니다. 그런 이들은 수치를 영광으로 삼는 이들입니다. 땅의 것만을 생각하는 이들입니다.

송나라 때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구슬이 튀어나왔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관청으로 가져가서 자한(子罕)에게 헌상을 하려고 했지만 자한은 받지 않았습니다. 농부는 그래도 권했습니다. "이것은 저의 보배올습니다. 부디 장관님께서 거두어주십시오." 자한은 대답했습니다. "너희에게는 구슬이 보배가 되겠지만, 나에게는 받지 않는 것이 보배로다."(呂氏春秋, 孟冬紀·異寶)

농부의 보배와 자한의 보배는 서로 달랐습니다. 우리는 어디에 속합니까? 비리를 저질러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이들 가운데 기독교인들이 적지 않습니다. 최근에는 군수납품 비리로 기독교계의 꽤 유명한 장로 한분이 구속되었습니다. 교회가 불의한 돈을 세탁하는 창구로 활용되었다는 혐의도 받고 있습니다. 그들은 믿음과 사업은 별개라고 생각하는 것일까요? 부정을 저질러서 번 돈을 교회에 바치기만 하면 모든 허물을 용서받는 것일까요? 결코 그럴 수 없습니다. 이사야를 통해 하신 주님의 말씀을 들어보십시오.

"무엇하러 나에게 이 많은 제물을 바치느냐? 나는 이제 숫양의 번제물과 살진 짐승의 기름기가 지겹고, 나는 이제 수송아지와 어린 양과 숫염소의 피도 싫다. 너희가 나의 앞에 보이러 오지만, 누가 너희에게 그것을 요구하였느냐? 나의 뜰만 밟을 뿐이다!"(사1:11-12)

• 하늘에 있는 시민권
예수의 이름으로 말하면서도 십자가의 원수로 살아가는 이들이 많습니다. 우리는 어떠합니까?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자기 정체성을 분명히 알고 살라고 말합니다.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습니다". 시민권(politeuma)이라는 단어를 하나님 나라의 입장권 정도로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물론 그런 뜻이 전혀 없다고는 말할 수 없습니다. 시민권이라는 단어 속에는 '도시'를 뜻하는 '폴리스'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폴리스는 대개 성으로 둘러싸여 요새 구실을 하던 곳이었습니다. 폴리스 안에 살도록 허용된 사람들이 '시민'입니다. 하늘의 시민권이란 그러니까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는 뜻이 되겠습니다. 하지만 바울의 이 용어에 담긴 참 뜻을 알려면 당시 빌립보라는 도시가 로마의 직할 도시였다는 사실에 주목해야 합니다. 바울이 하늘에 있는 시민권이라는 말을 통해 하고 싶었던 말은 빌립보에 있는 기독교인들이 비록 로마에게 속한 도시에 살고 있지만 그들은 로마 황제가 아닌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이라는 사실이었습니다. 하늘에 있는 시민권이란 말은 그러니까 탈세계적이고 역사 초월적인 어떤 세계를 가리키는 것이 아니라, 로마의 통치 질서에 따르기보다는 하나님의 통치를 받아들이는 사람들을 가리키는 말이고, 또 그들이 살아가는 삶의 방식을 이르는 말입니다.

하늘에 속한 사람은 귀가 뚫려서 하늘의 명령을 듣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마음과 통하는 사람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는 것을 자기 소명으로 여기고 사는 사람입니다. 그는 자기의 평안과 안위만 생각하며 살지 않습니다. 제 배만 채우려 하지 않고, 남의 고통을 모른 체 하지 않습니다. 사람들을 피폐하게 만드는 악한 제도와 질서에 대해서 어떤 방식으로든 저항합니다. 모두가 다 거리와 광장으로 달려 나가 투사가 되어야 한다는 말이 아닙니다. 각자가 서 있는 삶의 자리에서 하나님의 뜻을 조금씩이나마 수행하면 됩니다. 친절한 말 한 마디, 다정한 눈빛, 섬세한 배려, 따뜻한 환대, 타인의 행복을 바라는 마음만으로도 우리는 세상에 하늘을 끌어오는 투사가 될 수 있습니다. 작은 일을 소홀히 하지 않을 때 큰일도 감당할 수 있습니다. 믿음의 분량대로 하면 됩니다. 마음이 뜨거워진 사람들은 불의와 정면으로 대결할 수도 있습니다. 이 땅에서 '하늘의 시민권자'로 살다 보면 남들에게 이용을 당할 수도 있고, 비난을 받을 수도 있습니다. 그냥 받아들이십시오. 너무 속상해 하거나 낙심하지 마십시오. 주님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사람은 복이 있다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너희가 나 때문에 모욕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터무니없는 말로 온갖 비난을 받으면, 복이 있다. 너희는 기뻐하고 즐거워하여라. 하늘에서 받을 너희의 상이 크기 때문이다. 너희보다 먼저 온 예언자들도 이와 같이 박해를 받았다."(마5:11-12)

바울 사도는 하늘의 시민권을 가진 사람들의 소망을 간결하게 설명합니다. "그곳으로부터 우리는 구주로 오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고 있습니다". 주님은 언제나 우리 삶 가운데 들어오고 계십니다. 매 순간 신뢰와 의탁의 마음으로 주님을 영접하십시오. 그리고 주님이 우리를 변화시키시도록 겸허하게 무릎을 꿇으십시오. 오실 주님은 우리의 비천한 몸을 변화시키셔서, 당신의 영광스러운 몸과 같은 모습이 되게 하실 것입니다. 과도하게 부풀려진 욕망에 순복하며 살던 우리 몸이 하나님의 거룩하신 뜻을 행하는 신령한 몸으로 변화되는 것보다 더 큰 복이 있을까요? 죄의 습성 아래 있는 우리 몸과 마음을 자꾸만 주님께 바쳐야 우리 안에 싹트고 있는 '새 사람'이 더욱 튼실하게 자라날 것입니다. "다 함께 나를 본받으십시오"라고 말했던 바울 사도처럼 우리도 누군가에게 "나를 본받으라"고 겸허하지만 분명하게 말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의 은총이 이끄시는 대로 진실의 길로 뚜벅뚜벅 걸어가는 우리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3월 22일 11시 55분 18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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