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길마 보기 렘34:8-11 (2015/3/1) [주님께서 예레미야에게 말씀하셨는데, 그 때에는 이미 유다 왕 시드기야가 종들에게 자유를 줄 것을 선포하는 언약을 예루살렘에 있는 모든 백성과 맺은 뒤였다. 이 언약은, 누구나 자기의 남종과 여종이 히브리 남자와 히브리 여자일 경우에, 그들은 자유민으로 풀어 주어서, 어느 누구도 동족인 유다 사람을 종으로 삼는 일이 없도록 한다는 것이었다. 모든 고관과 모든 백성은 이 계약에 동의하여, 각자 자기의 남종과 여종을 자유인으로 풀어 주고, 아무도 다시는 그들을 종으로 삼지 않기로 하고, 그들을 모두 풀어 주었다. 그러나 그 뒤에 그들은 마음이 바뀌어, 그들이 이미 자유인으로 풀어 준 남녀 종들을 데려다가, 남종과 여종으로 부렸다.] • 억압에서 자유로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3.1절 96주년을 기념하는 주일입니다. 3.1절은 아무리 억압이 심해도 자유를 향한 인간의 꿈을 막을 수는 없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역사적 계시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 위대한 독립의 선언이 겨울과 봄의 교차점에서 이루어졌다는 사실이 참 의미심장합니다. 얼었던 대지를 뚫고 일어서는 풀들을 주목해 보신 적이 있습니까? 생명은 장엄합니다. 누르는 힘이 강할수록 솟구쳐 오르려는 힘도 커집니다. 생명은 일어섬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은 어떠합니까? 우리는 과연 예수의 혼에 사로잡혀 일어선 자가 되었습니까? 여전히 세상에 붙들린 채 욕망의 종노릇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까? 오늘 본문은 바빌로니아의 침공으로 위기에 처한 예루살렘에서 벌어진 한 사건을 보여줍니다. 앗시리아를 물리치고 신흥 강자로 떠오른 바빌로니아는 세력을 키우기 위해 주변의 나라들을 무력으로 복속시키기 시작했습니다. 유다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압도적인 힘을 가진 바빌로니아 군대는 파죽지세로 유다 전 지역을 유린했습니다. 유다의 요새화된 성읍들은 거의 다 무너졌고 남은 것은 라기스와 아세가뿐이었습니다. 예루살렘의 운명도 풍전등화였습니다. 주전 588년 1월 중순이었습니다. 바로 그때 하나님의 말씀이 예레미야에게 임했습니다. 예언자는 시드기야 임금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말씀을 전했습니다. 메시지는 비관적입니다. 첫째, 시드기야는 바빌로니아 왕의 손에서 벗어나지 못할 것이고 결국 포로로 잡혀갈 수밖에 없다는 것. 둘째,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드기야는 평안하게 죽음을 맞이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어떻게 보면 비운의 임금입니다. 그는 남왕국 유다의 마지막 임금입니다. 다시 말해 그의 통치 기간 중에 나라가 망해버렸다는 말입니다. 마치 백제의 마지막 왕인 의자왕과 같은 신세입니다. 의자왕은 늘 삼천궁녀와 더불어 기억되기 때문에 아주 방탕한 임금으로 취급되고 있지만 그는 어버이를 효성스럽게 섬기고 형제간의 우애가 깊어 해동증자海東曾子로 불리던 인물입니다. 그러나 나당연합군의 야욕을 막아낼 수 없었기에 그는 역사 속에서 그런 오명을 쓰고 등장하는 것입니다. 시드기야도 처지가 비슷했습니다. 그는 왕위에 올라 석 달 열흘 동안 나라를 다스리던 조카 여호야긴이 바빌로니아로 끌려간 후, 바빌로니아 왕의 지명을 받아 왕이 된 사람입니다. 그때가 주전 597년이었고 시드기야는 스물한 살이었습니다. 시드기야는 일단 바빌로니아 왕 느부갓네살에게 충성을 맹세하였지만 얼마 가지 않아 반기를 들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예루살렘에 재침공한 것이 앞서 말씀드린 대로 주전 588년입니다. 시드기야가 왕이 된지 9년이 될 무렵이었습니다. • 평등 공동체의 붕괴 그 동안 시드기야는 자기 뜻대로 정책을 펴나갈 수 없었습니다. 여호야긴을 지지하는 귀족들의 저항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입니다. 가까운 곳에서 왕을 도와야 할 고관들과 내시, 그리고 제사장들이 시드기야의 견제세력 역할을 했습니다. 특히 왕후인 느후스다 즉 여호야긴의 어머니가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느후스다'라는 이름은 '느후스단'과 밀접한 관계가 있는 것으로 보입니다. 느후스단은 병 고치는 능력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예루살렘 성전에 두고 숭배하던 구리 뱀 형상을 일컫는 말입니다. 히스기야 임금이 종교를 정화할 때 아세라 목상과 더불어 파괴했던 것이지만, 백성들 사이에 특히 궁궐의 여성들 사이에 느후스단을 숭배하는 이들이 여전히 남아 있었던 모양입니다. 왕후인 느후스다가 그 숭배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귀족들은 자기들의 이권을 지키기 위해 느후스다를 중심으로 뭉쳐 있었습니다. 어느 시대에나 권력 주변에는 이권을 중심으로 뭉치는 이들이 있는가 봅니다. 귀족들과 왕후의 세력을 견제할 필요가 있었던 시드기야는 하나님의 말씀의 대언자인 예언자 예레미야의 권위에 기대려고 했습니다. 시드기야는 긍정적인 평가를 받지 못하는 왕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예레미야를 죽을 고비에서 몇 차례 살려준 것은 그 때문입니다. 친 애굽 정책을 펼치고 있던 고관들에 의해 예레미야가 지하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왕은 그를 데려다가 근위대에 머물게 하고 먹을 것도 넉넉하게 공급해주도록 지시했습니다(37:11-21). 예레미야가 귀족들에 의해 물 없는 웅덩이에 던져졌을 때에도 군인들을 보내 그의 탈출을 도왔습니다. 귀족들과 시드기야의 힘겨루기가 절정에 다다랐을 무렵 느부갓네살이 재침공했고 예루살렘은 절체절명의 위기에 직면하게 되었습니다. 바빌로니아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파멸은 기정사실처럼 보였습니다. 위기는 때때로 서로 경쟁하던 정파도 하나로 묶어줍니다. 시드기야는 이제 믿을 구석은 하나님 밖에 없다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으려면 지난날의 잘못을 참회하고 율법의 가르침에 따라야 한다고 귀족들을 설득했습니다. 귀족들도 그 말을 거역할 명분이 없었기에 왕의 말에 동의했습니다. 왕은 하나님에 대한 순종을 가시적으로 드러내는 조치를 취하자고 했습니다. 토라가 규정한 대로 히브리 종들을 해방시키자는 것이었습니다. 평등공동체를 지향했던 이스라엘에 웬 종인가 싶지만, 왕정 국가가 되면서 종 혹은 노예가 되는 이들이 생겨났던 것 같습니다. 그 과정은 매우 단순합니다. 왕들은 우선 국방력 강화에 전념했습니다. 명분은 외적들을 막기 위한 것이었지만 실제로는 자기 권력을 강화하기 위한 조처였습니다. 막대한 국방비를 조달하는 게 문제였습니다. 그래서 왕들은 외국과의 교역에 적극 뛰어들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수출품을 조달하기 위해서 그는 촌락 공동체에 속한 사람들에게 특성화된 작물을 재배하도록 요구하거나 강제했습니다. 단일 작물이 경작되면서 농민들이 져야 하는 위험 부담도 늘어났습니다. 기후의 영향이 농민들의 삶에 고스란히 반영되었습니다. 가뭄이 계속되면 농민들은 먹고 살 길이 막연하게 되었고, 돈 많은 이들에게 빚을 얻어 살 수밖에 없었습니다. 장리(長利)빚은 눈덩이처럼 늘어났고, 빚을 갚기 위해 그들은 토지를 다른 이들에게 넘기거나 종으로 전락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신분상의 노예가 아니라 채무 노예(debt servitude)가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오늘 우리들의 상황도 이와 다르지 않습니다. 자본주의는 빚을 기반으로 작동됩니다. 자본주의는 인간의 욕망을 확대재생산함을 통해 유지됩니다. 욕망과 그것을 충족할 수 있는 경제 능력 사이에는 언제나 간극이 있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그 간극을 메우기 위해 빚을 집니다. 은행 대출을 받아 집을 사고, 신용 카드로 물건을 구매합니다. 이 과정에서 우리는 빚쟁이가 되어 삽니다. 작년에 우리나라의 가계 빚 규모는 1천조가 넘는다고 합니다. 국민 1인당 부채는 2천 150만원에 이릅니다. 주택담보대출이 가계 빚 증가의 주원인입니다. 현대인들은 어떤 의미에서는 '채무 노예들'입니다. 빚이 일상화된 세상에서 민심이 흉흉해지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며칠 전 슈퍼마켓 지분을 배분하는 문제로 다투던 한 50대 남성이 엽총으로 세 사람을 살해하고 자살한 사건이 벌어졌습니다. 돈 문제 때문에 70대 노인이 80대의 자기 형과 형수를 엽총으로 쏴 죽이는 일도 일어났습니다. 어처구니없는 일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얼마나 팍팍하게 살고 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 사건들입니다. 지난 26일은 송파구 세 모녀가 가난을 견디다 못해 자살한지 1년이 되는 날이었습니다. 빈부 격차가 좁혀지지 않는 사회는 시한폭탄과 같습니다. • 위기 속에서 그런데 히브리 노예들을 해방하자는 시드기야의 제안은 순수한 신앙심의 발로가 아니라는 데 문제가 있습니다. 그는 이런 기회를 이용해 귀족들의 세력을 약화시키고 싶어 했습니다. 종들을 내보낸다는 것은 노동력 상실을 의미하고, 노동력 상실은 생산성 약화로 이어질 것이고, 생산성 약화는 귀족들의 물적 토대를 뒤흔들고, 그러면 세도를 부리지 못할 거라는 계산이 작용했던 것일까요? 귀족들이 그 제안을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던 것은 하나님의 환심을 사서 어떻게든 그 위기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들이 정말 율법이 정한 대로 히브리 종들을 해방했는지는 알 수 없습니다. 신명기 법전에는 히브리 종들을 해방할 때 주인들이 해야 할 일이 명시되어 있습니다. 종이 여섯 해 동안 주인을 섬겼으면 일곱째 해에는 그에게 자유를 주어 내보내야 했고, 자유를 주어서 내보낼 때에는 넉넉하게 주어서 내보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습니다(신15:12-14). 역사 속에서 이 규정이 제대로 지켜진 적이 있었는지는 의문입니다. 그런데 바빌로니아의 침공이라는 절체절명의 순간에 신명기 법전의 요구가 현실 속에서 구현될 수 있는 기회가 다가온 것입니다. 유다의 지도자들과 예루살렘의 지도자들, 내시들과 제사장들, 그리고 일부 백성들은 하나님 앞에서 종들을 해방하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그들은 맹세의 징표로 송아지를 두 조각으로 갈라놓고 그 사이로 지나갔습니다. 그것은 맹세 혹은 언약을 지키지 않는 자는 두 조각으로 갈라진 송아지와 같은 운명이 되어도 좋다는 뜻을 가시적으로 드러낸 것입니다. 삶의 큰 위기에 직면한 사람들은 하나님의 도우심을 얻기 위해 서원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서원은 자기희생 혹은 헌신의 약속과 더불어 이루어집니다. '이번에 도와주시면 제가 ~을 하겠습니다'. 희생이 클수록 하나님의 응답도 신속하리라 여기는 이들도 있습니다. 이런 서원은 자칫하면 하나님을 시험하는 게 될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더 큰 문제는 생의 위기가 해소되고 나면 그 서원이 거추장스러워진다는 데 있습니다. 시편 15편은 주님의 장막에서 살 수 있는 사람들을 언급하면서 "맹세한 것은 해가 되더라도 깨뜨리지 않고 지키는 사람"도 포함시키고 있습니다. 서원을 지킨다는 것이 결코 쉬운 일이 아님을 알 수 있습니다. • 두 마음 상황이 달라지자 예루살렘의 귀족들은 하나님 앞에서 한 맹세를 철회하고 말았습니다. 애굽 왕 바로의 군대가 국경지대로 이동하고 있다는 보고를 들은 바빌로니아 군대는 일단 예루살렘에 대한 포위를 풀고 퇴각했습니다. 그러자 귀족들은 기다렸다는 듯이 맹세를 깨뜨리고, 해방했던 종들을 불러들였습니다. 다시는 그들을 종으로 삼지 않겠다는 굳은 맹세는 여지없이 깨지고 말았습니다. 자기 이익을 지키려는 마음이 하나님에 대한 신실함이라는 동기를 압도한 것입니다. 그들에게 하나님은 자기들의 어려움을 해결하기 위해 언제라도 동원할 수 있는 방편에 지나지 않았습니다. 그들로 인해 주님의 이름이 더럽혀졌습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입니다. 이사야의 탄식도 같은 사실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슬프다! 죄 지은 민족, 허물이 많은 백성, 흉악한 종자, 타락한 자식들! 너희가 주님을 버렸구나. 이스라엘의 거룩하신 분을 업신여겨서, 등을 돌리고 말았구나. 어찌하여 너희는 더 맞을 일만 하느냐? 어찌하여 여전히 배반을 일삼느냐? 머리는 온통 상처투성이고, 속은 온통 골병이 들었으며, 발바닥에서 정수리까지 성한 데가 없이, 상처 난 곳과 매 맞은 곳과 또 새로 맞아 생긴 상처뿐인데도, 그것을 짜내지도 못하고, 싸매지도 못하고, 상처가 가라앉게 기름을 바르지도 못하였구나."(사1:4-6) '거룩한 분을 업신여긴다'는 표현이 참 아프게 다가옵니다. 지켜야 할 것이 많은 사람일수록 하나님의 마음으로부터 멀어지기 쉽습니다. 하나님을 자기 이익을 위한 방편으로 삼으려는 것처럼 악마적인 것이 없습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에게 실망하셨습니다. 그래서 예레미야를 통해 심판을 예고하십니다. 백성들의 배신으로 인해 하나님과 백성 사이에 맺어졌던 언약은 해소되었고, 따라서 울타리가 되어 그 백성을 지키셨던 하나님의 보호도 철회되었다는 것입니다. 이제 백성들은 전쟁과 염병과 기근으로 죽게 될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이 예언은 그대로 현실이 되었습니다. 느부갓네살이 재침공하였을 때 예루살렘은 속절없이 무너졌고, 유다 왕국의 역사도 종언을 고하게 된 것입니다. 역사에는 가정이 없다고 합니다만, 만약 그들이 자기들의 언약에 신실했다면 어떤 일이 벌어졌을까요? 하나님께서 친히 그들을 지키는 불병거가 되지 않으셨을까요? 오늘 설교 제목인 두길마 보기(두길 보기)는 '양쪽에 다리를 걸치고 유리한 쪽을 엿보아 살피는 일'을 이르는 말입니다. 신앙은 결단이고 모험입니다. 예수님은 하나님과 재물을 겸하여 섬길 수 없다고 말씀하셨습니다. 바울도 그리스도와 벨리알이 화합할 수 없고, 주님의 몸인 성전과 우상이 일치될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고후6:15-16). 잊지 마십시오. 예수님은 로마 제국이 지배하는 세상 한복판에서 하나님 나라의 꿈을 사람들에게 심어주셨습니다. 우리는 예수를 길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예수의 꿈을 우리 꿈으로 삼은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오늘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지금 여기에서 하나님 나라를 살아내는 것입니다. 산수유가 꽃망울을 터뜨리는 모습을 저는 날마다 경이롭게 지켜보고 있습니다. 아직 찬바람이 가시지 않았지만 산수유는 봄이 멀지 않았다는 사실을 우리에게 일깨워줍니다. 주님은 믿음의 사람들을 불러 긴 겨울 추위에 지친 사람들에게 봄소식이 되라 명하십니다. 봄소식이 되기 위해서는 하늘의 빛과 온기를 우리 가슴에 모셔야 합니다. 신앙생활은 눈치 보기도 거래도 아닙니다. 신앙생활은 주님의 뜻을 이루기 위해 우리 삶을 기꺼이 주님께 내어드리는 것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는 얕은 물가에서 찰박거리며 지냈습니다. 이제는 은혜의 강물 깊은 곳으로 들어가야 합니다. 사순절 순례의 여정을 통해 우리 믿음의 키가 더욱 자라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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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5년 03월 01일 11시 58분 4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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