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혼자가 아니다 요8:21-30 (2015/2/22) [예수께서 다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유대 사람들이 말하였다.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 하니, 그가 자살하겠다는 말인가?"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 그래서 나는, 너희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라고 말하였다. '내가 곧 나'임을 너희가 믿지 않으면, 너희는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들이 예수께 물었다. "당신은 누구요?" 예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처음부터 너희에게 말하지 않았느냐? 그리고 내가 너희에 대하여 말하고 또 심판할 것이 많이 있다. 그러나 나를 보내신 분은 참되시며, 나는 그분에게서 들은 대로 세상에 말하는 것이다." 그들은 예수께서 아버지를 가리켜서 말씀하시는 줄을 깨닫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예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는, 인자가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과, 또 내가 아무것도 내 마음대로 하지 아니하고 아버지께서 나에게 가르쳐 주신 대로 말한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나를 보내신 분이 나와 함께 하신다. 그분은 나를 혼자 버려두지 않으셨다. 그것은, 내가 언제나 아버지께서 기뻐하시는 일을 하기 때문이다." 이 말씀을 듣고, 많은 사람이 예수를 믿게 되었다.] • '왜?'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설날은 절기상으로 우수雨水였습니다. 언 땅이 녹고, 눈석임물이 흘러 계곡에 활기가 돌아오는 때입니다. '우수 뒤의 얼음같이'라는 말이 있습니다. 여기에는 맺혔던 것이 풀리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겨 있습니다. 정말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저희 아파트 앞에 있는 산수유나무는 벌써 노란색 꽃망울을 머금고 있습니다. 이맘때면 수달은 물고기를 잡아 늘어놓고, 기러기는 봄기운을 피해 추운 곳으로 날아간다고 합니다. 모천으로 회귀하는 어종들이나 철새들은 어떻게 자기 때를 분별하고, 돌아갈 곳을 향해 길을 떠나는지 모르겠습니다. 때를 분별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마땅히 가야 할 길을 알지 못해 허둥거리는 것은 오직 인간밖에 없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오직 인간만이 자기 실존을 문제 삼는 존재입니다. '어떻게?'라는 질문은 고단한 생존을 이어가야 하는 모든 동물들이 묻지 않을 수 없는 질문이지만, '왜?'라는 질문은 오직 인간만이 던질 수 있습니다. '왜?'라는 질문에 스스로 답을 찾을 때 삶은 튼실해집니다. 아이들은 질문이 많습니다. 온통 궁금한 것투성이입니다. 아이들의 질문은 우리를 근본적인 것 앞에 세웁니다. 그래서 대답하기 어려울 때가 많습니다. 어른의 세계에 진입하는 순간부터 우리는 '왜?'라는 질문을 유보하고 삽니다. 어차피 인생에 정답은 없다는 사실을 어렴풋이 느끼기 때문일까요? 질문이 소거되면 삶은 납작해지게 마련입니다. 헝가리의 문예 사상가인 루카치(Lukacs, 1885-1971)는 별빛을 보고 길을 찾을 수 있던 시대가 행복했다고 말합니다. 이것은 물론 상징적인 이야기입니다. 그때는 사람들이 온 우주와의 연관 속에서 자기 삶을 파악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 영혼 속에서 타오르는 불꽃과 별들이 발하고 있는 빛이 본질적으로 동일하다는 사실을 안다면 뭐가 좀 있다고 우쭐거릴 것도 없고, 가진 게 없다고 주눅 들지도 않을 겁니다. 하지만 지금 우리는 별들을 바라보지 않습니다. 인공의 불빛에 온통 마음을 빼앗겼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길을 잃은 자들이 되었습니다. 일상 속에서 진정한 평화를 누리지 못하는 까닭은 마땅히 마음 둘 곳을 알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마땅히 가야 할 곳을 알고 있습니까? 그 길을 걷고 있습니까? • '위'와 '아래' 예수님의 말씀 가운데 제 마음을 가장 깊이 울리는 것은 "나는 내가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알고 있다"(요8:14)는 구절입니다. 이 말 한 마디 할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주님은 당신이 하나님께로부터 보냄을 받았다는 사실을 명심하고 살았습니다. 보냄을 받은 자는 보내신 분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전심전력을 다합니다. 흔들림조차 없을 수는 없겠지만 가야 할 길을 분명히 인식하고 사는 사람은 행복합니다. 주님은 아버지께로 돌아갈 때가 다가왔다는 사실을 직감적으로 파악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말합니다. "나는 가고, 너희는 나를 찾다가 너희의 죄 가운데서 죽을 것이다. 그리고 내가 가는 곳에 너희는 올 수 없다."(8:21) '가다'라는 동사와 '죽다'라는 동사가 대조되고 있습니다. 같은 현실의 다른 표현입니다. 그런데 이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습니다. 죽음을 아버지께로 돌아감으로 이해하는 사람과 존재의 소멸로 생각하는 사람의 삶이 같을 수는 없습니다. 성 어거스틴의 <고백록>에서 제가 만난 구절 가운데 가장 인상적인 것은 '진리를 피하면서 찾았다'는 구절입니다. 진리는 먼 데 있지 않습니다. 바로 우리 앞과 뒤, 위와 아래, 왼편과 오른편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알기 위해 하늘에 오를 필요는 없습니다. 바다 건너로 갈 필요도 없습니다. 신명기는 말합니다. "그 명령은 당신들에게 아주 가까운 곳에 있습니다. 당신들의 입에 있고 당신들의 마음에 있으니, 당신들이 그것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30:14) 볼 마음만 있으면 볼 수 있고, 실천할 생각만 있으면 실천할 수 있습니다. 문제는 마음입니다. '나'로 가득 찬 사람은 진리가 눈앞에 있어도 진리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예수님의 고향인 나사렛 사람들이 그러했고, 빌라도가 그러했고, 지금 예수를 함정에 빠뜨리려고 혈안이 된 바리새파 사람들이 그렇습니다. 자기가 문제임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예수를 따를 수 없습니다. 그런 이들을 향해 예수님은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고,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23) '아래'에서 왔다는 말은 '욕망이라는 이름의 전차'(테너시 윌리엄스의 희곡 이름)에 오른 채 살아간다는 말입니다. 자기중심성이라는 중력에 속절없이 끌려가며 산다는 말입니다. '위'에서 왔다는 말은 하늘 뜻에 붙들려 산다는 말입니다. 그런 이들의 삶은 어떠할까요? 그들도 땅에서 사는지라 땅의 현실에 영향을 받지 않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순간순간 하늘 뜻을 조회하며 살아갑니다. 하늘 뜻은 명백합니다. 다른 이들을 배려하며 사는 것입니다. 이웃 사랑이야말로 하늘로 통하는 문입니다. 아이러니한 것은 스스로 하늘에 속한 사람이라고 여기는 이들 가운데 다수가 자기 욕망을 하나님처럼 섬기며 산다는 사실입니다. 욕망의 특색은 독점욕과 배타성입니다. 과도한 욕망에 사로잡힌 이들에게 타인은 언제나 경계의 대상입니다. 욕망에 사로잡힐 때 사랑의 능력은 줄어들고, 나눔은 불가능하게 됩니다. 종교적 근본주의자들이 폭력적인 까닭은 자기들만 옳다고 여기기 때문입니다. 모든 독점은 타자 파괴적이기에 악마적입니다. IS(이슬람국가)라는 집단이 하는 일들을 보십시오. 자기들의 종교를 무시하는 자들을 징계한다는 명분을 내세우고 있지만 그들이 섬기는 것은 진리가 아니라 자기들의 탐욕입니다. 종교는 그저 허울일 뿐입니다. 양두구육羊頭狗肉입니다. 사는 모습을 보면 믿음과 무관한 데도 스스로 잘 믿고 있다고 착각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욕심 사납고, 무례하고, 남을 배려할 줄 모르는 신자들로 인해 주님의 영광이 가려지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런 이들을 일러 아래에서 온 사람, 세상에 속한 사람이라 말씀하십니다. • 지금 우리 곁에 계신 주님 예수님은 자신은 세상에 있지만 세상에 속하여 있지 않다(in the world, but not of the world)고 말씀하십니다. 결국 문제는 소속감입니다. 예수님은 이 땅에서 나그네처럼 순례자처럼 사셨습니다. '가야 할 곳'을 알고 계셨기 때문입니다. 아버지께로 돌아가기 위해서는 가벼워져야 합니다. 비우고, 나누고, 내려놓아야 합니다. 하지만 이게 어렵습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채우고, 독점하고, 집착하라고 우리를 채근합니다. 이미 주어진 것에 감사하며 살기보다는, 부족한 것 때문에 툴툴거리며 살도록 만듭니다. 그래서 이웃은 정과 사랑을 나누어야 할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혹시라도 내 것을 가져갈지도 모르는 잠재적 적으로 인식됩니다. 시몬느 베이유의 책 <중력과 은총>은 제목 그 자체로 상징적입니다. 중력이 아래로 잡아당기는 힘이라면 은총이란 위로 밀어 올리는 힘입니다.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 속에 불안감을 증폭시킴으로 우리를 세상에 붙들어 매두려고 합니다. 하지만 은총은 우리를 들어 올려 더 큰 뜻 앞에 서도록 만듭니다. 물 위를 걷던 베드로가 물속에 빠져든 것은 무거워졌기 때문입니다. 은총이 아니라 중력이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는 말입니다. 주님은 당신이 높이 들려 올려질 때에야 '내가 곧 나'라는 것을 알게 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 '내가 곧 나'라는 말은 범상한 말이 아닙니다. 호렙산 떨기나무 불꽃 가운데 임재하신 주님은 당신의 이름을 묻는 모세에게 '나는 나'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예수님의 말씀도 같은 맥락에서 발설되고 있습니다. 예수님은 세상의 어떤 이름으로도 규정될 수 없는 분이십니다. 주님은 땅에 붙들려 살아가는 이들에게 하늘에 속한 삶이 어떠한지를 몸으로 보여주신 분이십니다. 주님은 혼자 있을 때라도 홀로가 아니었습니다. 그를 보내신 분이 늘 함께 계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우리는 아주 중요한 진실 하나를 발견합니다. 우리가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일을 힘써 행할 때 주님은 우리와 동행하신다는 사실입니다. 임마누엘 칸트는 '주께서 나와 함께 하심이라'(시23:4)라는 시편 구절이 자기 삶을 든든히 지켜주었다고 고백했습니다. 하나님이 멀리 계시다고 느껴질 때, 그래서 삶이 고달프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 주님의 임재하심을 경험할 수 있는 길이 있습니다. 맡겨주신 일을 성심껏 감당하는 것입니다. 욕망이 잡아끄는 대로 살지 않고, 은총이 우리를 손짓하여 부르는 삶을 향하여 길을 떠나는 것입니다. 사순절은 바로 그러한 삶을 익히는 시간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하나님이 정녕 살아계신다는 증거가 될 수 있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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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 록 날 짜 | 2015년 02월 22일 12시 00분 13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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