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아달의 길, 사독의 길
왕상2:26-27, 35
(2015/2/1)
[솔로몬 왕은 아비아달 제사장에게 이렇게 말하였다. "제사장께서는 상속받은 땅 아나돗으로 가시오. 제사장께서는 이미 죽었어야 할 목숨이지만, 나의 아버지 다윗 앞에서 제사장으로서 주 하나님의 법궤를 메었고, 또 나의 아버지께서 고통을 받으실 때에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에, 오늘은 내가 제사장을 죽이지는 않겠소." 솔로몬은 아비아달을 주님의 제사장 직에서 파면하여 내쫓았다. 이렇게 하여서, 주님께서는 실로에 있는 엘리의 가문을 두고 하신 말씀을 이루셨다. (……) 왕은 요압 대신에 여호야다의 아들 브나야를 군사령관으로 삼고, 아비아들의 자리에는 사독 제사장을 임명하였다.]
• 어떤 변화인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별다른 추위도 없었던 것 같은 데, 벌써 입춘이 코앞으로 다가왔습니다. 우리 마음을 얼어붙게 만드는 일들이 연이어 일어나고 있지만, 인간 영혼의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일도 있습니다. 세상에는 악한 이들도 있지만 선한 뜻을 품고 살아가는 이들이 더 많습니다. 가라지의 비유는 원수들이 밤에 와서 밀밭에 가라지를 뿌리고 갔다고 말하지만, 가라지 밭에 밀을 뿌리는 이들도 있습니다. 암담했던 시절에 불렀던 노래가 떠오릅니다.
1. 이 세상 어딘가에 남이야 알든 말든/착한 일 하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마 음이 밝아진다
2. 이 세상 어딘가에 탐욕과 분심 눌러/얼굴이 빛나는 이 있는 걸 생각하라/마 음이 밝아진다
4. 이 세상 어딘가에 하늘을 예경하고/이웃을 돕는 사람 있는 걸 생각하라/기뻐 서 눈물난다
박희진 작사 한태근 작곡의 이 노래는 너무 착해서 어두운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것 같아도 저는 이 노래를 통해 고난의 시대를 건널 힘을 얻곤 했습니다. 눈에 보이지 않는다고 해서 없는 게 아닙니다. 땅에 심은 씨가 자고 깨고 하는 중에 자라는 것처럼 하나님의 나라는 그렇게 조용히 확장되고 있습니다. 어느 잡지에서 '희망의 처소는 가파른 삶'(전라도닷컴, 153호, 2015년 1월호)이라는 구절과 만났을 때 제 마음에도 희망이 유입되는 것을 느꼈습니다. 겨울 같은 세상에 봄소식으로 사는 이들이 있습니다. 지금 우리는 어떠합니까?
세월에는 장사가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만, 사람은 시간과 더불어 변하게 마련입니다. 나이가 들면서 얼굴에 주름이 잡히고 흰 머리가 느는 것이야 당연한 일이겠습니다만, 세상을 바라보고 사람들을 대하는 방식도 바뀌게 마련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변화의 방향입니다. 더 인간적이고, 따뜻하고, 품이 넓어질 수 있다면 얼마나 좋겠습니까? 세월이 갈수록 더 고집스러워지고, 탐욕스러워지고, 자기중심적으로 변해가는 이들도 있습니다. 언젠가도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만 가끔 효창 공원을 걷다보면 얼굴빛이 환하고 온유한 노인 한 분과 마주칠 때가 있습니다. 그 얼굴을 대하는 순간 저도 모르게 인사를 올리게 됩니다. 그리고 꿈 하나가 생겼습니다. 나이가 들면서 제 얼굴도 저렇게 변해갔으면 좋겠다는 꿈 말입니다. 초대교회의 순교자인 스데반은 산헤드린 공의회에 끌려가 심문을 받을 때 그 얼굴이 천사의 얼굴 같았다(행6:15)고 합니다. 죽음이 예기되는 순간에도 그의 영혼은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저는 이것을 '내적 고요함의 외적 발현'이라는 말로 요약합니다.
변화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습니다. 세월이 흘러가며 개인이든 사회든 변화의 물결을 타지 않을 수 없는 데, 그 변화의 방향을 잘 잡지 않으면 몰락의 길을 걸을 수밖에 없습니다. 저는 오늘 이스라엘 역사의 한 단락을 살펴봄으로써 우리가 지향해야 할 변화의 방향이 어디일까를 가늠해보고자 합니다.
• 두 전통을 대변하는 사람들
출애굽 공동체인 이스라엘을 이끌어간 하나의 중심이 있다면 그것은 '평등공동체의 꿈'이었을 것입니다. 제국주의의 맨 밑바닥 층을 형성한 채 인권을 박탈당하고 강제 노역에 시달리던 그들은 억압하는 사람도 억압당하는 사람도 없는 세상을 꿈꾸었습니다. 힘이 있다 하여 거들먹거리지 않고, 힘이 없다 하여 주눅들 필요가 없는 세상 말입니다. 그렇기에 이스라엘은 가나안에 정착한 이후에도 한동안은 지배자와 피지배자가 갈리는 왕정 체제를 거부했습니다. 하지만 사사 시대의 끝 무렵, 잦은 외침에 시달리던 사람들은 강력한 국가를 염원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래서 당시의 사사인 사무엘에게 왕을 세워달라고 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사무엘은 왕에 대해 아주 부정적으로 말합니다. 왕은 일반 백성들의 아들들을 군인으로 징발하거나 노역에 동원할 것이고, 딸들도 데려다가 허드렛일을 시키고, 조상에게 물려받은 토지나 농장을 빼앗아 자기 신하에게 주고, 세금도 거둬갈 것이고, 결국 백성들은 종이 되고 말 것이라는 것이었습니다(삼상8:10-17).
이런 경고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국가에 대한 꿈을 포기할 수 없었던 그들은 사울을 왕으로 삼았습니다. 이로써 이스라엘도 왕정체제에 편입되었습니다. 사울 때까지만 해도 평등 공동체의 이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습니다. 하지만 다윗대로 넘어가면서 평등 공동체의 이상과 절대 왕정에 대한 열망이 불협화음을 내기 시작했습니다. 다윗은 그 두 지향을 조화시키려고 애를 썼습니다. 오늘 설교의 제목으로 제시된 두 제사장 아비아달과 사독은 다윗의 처한 상황을 잘 드러내주는 인물들입니다.
아비아달은 엘리 가문 출신의 제사장입니다. 그의 아버지인 아히멜렉과 다른 제사장들은 다윗의 도피를 도왔다고 하여 사울에게 모두 죽임을 당했습니다(삼상21:1-6, 11-20). 다윗은 홀로 살아남은 아비아달을 지켜주었습니다. 아비아달은 평등 공동체의 이상을 대변하는 사람입니다. 그에게 가장 큰 권위는 왕이 아니라 야훼이십니다. 그에게 가장 소중한 가치는 시내산 언약을 통해 야훼께서 내려주신 토라를 지키는 것입니다. 그는 하나님의 백성인 이스라엘의 정체성을 지켜내는 것을 소중히 여깁니다.
사독이 어떻게 제사장이 되었는지는 좀 모호합니다. 학자들은 그가 가나안 성읍인 여부스의 지역 신을 섬기던 제사장이 아니었을까 추측합니다. 여부스는 나중에 다윗의 성이 된 예루살렘입니다. 다윗은 사울에게 쫓겨 다니다가 헤브론에서 왕으로 세움을 받았지만 유다 지파를 비롯한 중심 지파의 지지를 받기 위해서는 자기 나름의 세력이 꼭 필요했습니다. 난공불락으로 보였던 여부스를 정복하여 자기 이름으로 붙인 것은 정치적으로도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습니다. 그는 성과 성소를 파괴하지 않음으로써 성민들의 마음을 얻었습니다. 그리고 유력한 가문 출신의 밧세바를 아내로 맞음으로써 예루살렘에 확고히 뿌리를 내리게 되었습니다. 사독은 야훼를 섬기는 제사장이 되었습니다. 나중에 역대기 기자들은 가장 유력한 제사장이 된 사독 가문에게 정통성을 부여하기 위해 그의 족보를 아론에게까지 소급하여 설명하지만(대상6:3-8, 50-53) 그가 아론의 후손인지는 분명하지 않습니다. 아비아달이 토라를 중시하는 야훼주의자였다면 사독은 왕정 체제에 복무하는 사람이었습니다. 아비아달과 사독의 지향은 달랐지만 다윗이라는 탁월한 인물을 도우면서 조화를 이룰 수 있었습니다.
• 권력의 단맛을 경계하라
하지만 다윗 시대가 막을 내리면서 아비아달과 사독으로 대변되는 두 전통의 조화는 깨지고 맙니다. 시작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다툼이었습니다. 다윗의 장자 암논과 셋째 아들 압살롬은 갈등 끝에 비극적인 죽음을 맞이했고 둘째인 길르압은 병들어 죽었습니다. 넷째 아들인 아도니야는 왕위가 당연히 자신에게 승계되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는 다윗이 헤브론에 머물고 있을 때 만난 학깃이라는 여인에게서 태어났는데 용모가 매우 아름다웠다고 합니다. 다윗도 그를 총애했습니다. 하지만 예루살렘파 사람들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예루살렘 출신의 솔로몬이 왕이 되어야 한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헤브론으로 대변되는 야훼주의자들과 예루살렘으로 대변되는 왕정주의자들이 물밑 작업에 돌입했습니다. 다윗과 더불어 풍찬노숙을 함께 해온 대장군 요압과 아비아달 제사장이 아도니야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그러나 다윗의 예루살렘 시대의 충신들인 장군 브나야와 나단 예언자와 사독 제사장은 솔로몬의 편에 가담했습니다. 헤브론과 예루살렘, 향촌파와 도시파, 전통파와 왕정파가 갈린 것입니다.
권력 암투 끝에 승리를 거둔 것은 솔로몬이었습니다. 솔로몬은 후환을 없애기 위해 이복 형 아도니야를 죽이고 아버지의 충직한 신하이자 자기 외사촌 형인 요압도 죽입니다. 요압은 다윗의 누이인 스루야의 아들입니다. 권력은 자기 자식하고도 나눌 수 없는 것이라는 말이 맞는 것 같습니다. 살아남은 이는 오직 아비아달 제사장뿐입니다. 솔로몬은 그를 제사장직에서 파면한 후 고향인 아나돗으로 가서 머물도록 지시합니다. 일종의 가택연금입니다. 탱자나무 울타리를 두르지만 않았을 뿐 우리나라의 형벌 가운데 하나인 위리안치圍籬安置와 다를 것이 없습니다. 솔로몬이 아비아달을 처형하지 않은 이유는 두 가지입니다. 첫째는 아비아달이 주 하나님의 법궤를 메었다는 것이고, 둘째는 아버지 다윗이 어려움을 겪을 때 그 모든 고통을 함께 나누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비아달은 압살롬의 반란으로 다윗이 위기에 빠졌을 때 그는 성심으로 다윗을 위해 일했습니다.
아비아달까지 제거함으로써 솔로몬의 왕위는 든든히 서게 되었습니다. 권력 암투의 비정함에 대해서는 말할 생각이 없습니다.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 보아야 하는 것은 아비아달이 사라지면서 사독 계열 사람들이 제사장직을 독점하게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이 말의 숨은 뜻은 무엇입니까? 아비아달이 대변하던 토라의 목소리, 야훼 중심주의의 목소리가 사라졌다는 말입니다. 왕은 이제 뭐든지 거리낌 없이 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솔로몬이 후궁들을 많이 얻은 것도, 그가 화려한 생활을 하게 된 것도, 성전과 궁전을 짓고, 말과 병거를 사들이고, 이방신 숭배를 허용한 것도 말 잘 듣는 종교인들이 주변에 있었기 때문입니다. 종교가 타락하면 역사는 병이 듭니다. 왕이 예언자적 음성을 듣지 않으려고 할 때 그는 몰락의 길을 걷고 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오늘의 상황도 전혀 다를 바가 없습니다.
• 한국교회는 지금 누구의 길을 걷고 있는가?
사독 계열의 제사장들이 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중에서도 훌륭한 제사장들이 있었을 것입니다. 하지만 그들의 한계는 분명했습니다. 왕의 비위를 거스르지 않는 한에서만 문제 제기를 했을 것입니다. 그들의 가장 큰 문제는 왕권 강화를 출애굽 정신보다 앞세우는 것이었습니다. 하지만 권력자들이 잊은 것이 있습니다. 아비아달은 제거되었지만 그가 대변했던 목소리조차 제거할 수는 없다는 사실 말입니다. 아비아달의 목소리는 예언자들을 통해 터져 나왔습니다. 솔로몬의 황금 시기는 오래 가지 못했습니다. 아직 솔로몬이 세상을 떠나기도 전에 나라는 분열되기 시작했습니다. 아히야 예언자는 솔로몬의 죄를 이렇게 고발합니다.
"솔로몬은 나를 버리고, 시돈 사람의 여신인 아스다롯과 모압의 신 그모스와 암몬 자손의 신 밀곰에게 절하며, 그의 아버지 다윗과는 달리, 내 앞에서 바르게 살지도 않고, 법도와 율례를 지키지도 않았지만, 내가 택한 나의 종 다윗이 내 명령과 법규를 지킨 것을 생각해서, 솔로몬이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 온 왕국을 그의 손에서 빼앗지 아니하고, 그가 계속해서 통치하도록 할 것이다."(왕상11:33-34)
성경은 하나님께서 당신의 형상을 따라 사람을 지으셨다고 말하지만, 사람은 자기의 욕망에 따라 신을 창조합니다. 하나님을 믿는다는 것은 거래가 아닙니다. 나 좋을 대로가 아니라 하나님 좋을 대로 사는 것이 믿음입니다. 예수님의 삶이 그러했습니다. 예수님은 자신을 내려놓음으로 하나님의 뜻에 대한 '아멘'이 되셨습니다. 솔로몬은 권력과 부유함에 도취되어 하나님을 잊었습니다. 토라의 말씀을 거추장스럽게 생각했습니다. 권력자의 눈치나 보던 예언자들과 제사장들은 입을 다물었습니다. 그래서 결국 공멸의 길을 걷게 되었습니다.
르호보암 대에 이르러 나라가 두 조각이 난 것을 우리는 압니다. 남북 분단 시대가 열린 것입니다. 가장 화려한 시대에 분열의 씨가 뿌려졌다는 것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많습니다. 사독은 물론 중요합니다. 그러나 아비아달 역시 중요합니다. 아비아달이 견지하려고 했던 토라에 기반을 둔 야훼중심주의가 회복되어야 합니다. 오늘의 본문을 묵상하면서 나는 아비아달의 길과 사독의 길 가운데 어느 길을 걷고 있는가 자문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어느 때부터인지 한국교회는 사독의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비추어 왕권을 견제하고, 토라의 말씀에 따라 사회를 개혁해나가기보다는 힘 있는 이들 곁에 머물며 그들이 던져주는 것을 받아먹는 일에 익숙해진 것은 아닌지 모르겠습니다. 예언자 정신이 사라진 기독교는 맛 잃은 소금과 같습니다. 불의에 대해서는 날카롭게 비판하면서도, 연약하고 여린 이들에 대해서는 한없는 연민을 품는 것이야말로 하나님 안에 있는 이들에게 기대되는 바입니다. 이제 2월이 시작되었습니다. 사흘 후면 입춘입니다. 오늘 우리의 삶이 긴 겨울에 지친 사람들에게 역사의 봄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징표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2월 01일 11시 34분 13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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