꼭대기
마17:1-13
(2015/2/15, 산상변화주일)
[그리고 엿새 뒤에, 예수께서는 베드로와 야고보와 그의 동생 요한을 따로 데리고서 높은 산에 올라가셨다. 그런데 그들이 보는 앞에서 그의 모습이 변하였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 그리고 모세와 엘리야가 그들에게 나타나더니, 예수와 더불어 말을 나누었다. 그 때에 베드로가 예수께 말하였다. "선생님, 우리가 여기에 있는 것이 좋습니다. 원하시면 제가 여기에다가 초막을 셋 지어서, 하나에는 선생님을, 하나에는 모세를, 하나에는 엘리야를 모시도록 하겠습니다." 베드로가 아직도 말을 하고 있는데,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었다. 그리고 구름 속에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 하는 소리가 들려 왔다. 제자들은 이 말을 듣고서,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으며, 몹시 두려워하였다. 예수께서 가까이 오셔서, 그들에게 손을 대시고 말씀하셨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 그들이 눈을 들어서 보니, 예수 밖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들이 산에서 내려올 때에, 예수께서 그들에게 명하셨다. "인자가 죽은 사람들 가운데서 살아날 때까지는, 그 광경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아라." 제자들이 예수께 물었다. "그런데 율법학자들은 어찌하여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고 합니까?" 예수께서 대답하셨다. "확실히,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 그제서야 비로소 제자들은, 예수께서 세례자 요한을 두고 하신 말씀인 줄을 깨달았다.]
• 엿새 뒤에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은 주현절 마지막 주일인 동시에 산상변화 기념주일입니다. 교회 전통은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 직전 주일을 산상변화주일로 지킵니다. 올해는 설 연휴가 시작되는 18일이 재의 수요일입니다. 수난의 어두운 골짜기로 접어들기 전에 주님은 가까운 제자 셋을 데리고 높은 산에 올라가셨습니다. 사람들은 그 산이 안티레바논 산맥의 남쪽 끝자락에 있는 해발 2814m의 헤르몬 산이 아닐까 생각하지만 근거는 없습니다. 흰 눈을 머리에 이고 있는 그 산은 신성한 느낌을 주었을 테고, 후세 사람들은 예수님의 변화 사건을 그 산과 연결시키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은 사람들이 산을 즐겨 찾습니다만 근대 이전까지만 해도 레저를 즐기기 위해 산에 오르는 사람은 거의 없었습니다. 물론 예외도 있습니다. 14세기 이탈리아 시인이며 학자인 페트라르카(Francesco Petrarca, 1304-1374)가 방투산에 오른 이야기는 유명합니다. 1336년에 그는 방투산을 오르면서 아름다운 자연풍광에 연신 감탄했습니다. 산정에 오른 그는 배낭에 넣어온 어거스틴의 <고백록>을 꺼내 읽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가 읽은 대목은 사람들이 산과 들의 아름다움에 경탄하면서도 정작 자기 속에 있는 영혼의 아름다움은 보지 못함을 비탄하는 대목이었습니다. 이후에 그는 크게 자극을 받아 인간의 내면을 치열하게 탐색하는 작가가 되었고, 르네상스 인문학을 대표하는 학자가 되었습니다.
성경에서 사람들이 산에 오르는 까닭은 자명합니다. 하나님을 만나기 위해서입니다. 모세가 시내산에 오른 것도, 이세벨을 피해 달아나던 엘리야가 호렙산에 오른 것도 그 때문입니다. 산은 일상적 삶의 공간이 아니라, 일상의 삶에 지친 이들이 바라보는 곳 혹은 찾아가는 곳입니다. "내가 눈을 들어 산을 본다. 내 도움이 어디에서 오는가?"(시121:1) 히브리 시인의 노래도 같은 사실을 가리킵니다. 비일상적인 장소라는 점에서 그곳은 광야와도 통합니다. 마태는 예수님이 오르신 산을 '높은 산'이라 특정하고 있습니다. 해발고도의 높음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상황의 비상성非常性을 강조하기 위한 표현일 것입니다.
본문에서 한 가지 더 주목해 보아야 할 것은 '엿새 뒤'라는 표현입니다. 성경에서 6은 불완전한 숫자입니다. 이레도 아니고 사흘도 아닌 엿새라는 것은 그 때가 위기의 시간임을 암시하려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마태는 예수님의 처형장면을 다루면서 "낮 열두 시부터 어둠이 온 땅을 덮어서, 오후 세 시까지 계속되었다"(27:45)고 말합니다. 원문은 '제 육시로부터'인데 새번역성경은 유대인의 육시가 낮 열두 시를 의미하기에 친절하게 '낮 열두 시'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마태복음에서 '엿새' 혹은 '육시'는 예수님과 관련된 어둠의 시간을 가리키고 있습니다. 주님은 예루살렘에 올라가서 고난을 받고 죽게 될 것이라고 제자들에게 예고하셨습니다. 제자들에게는 청천벽력과도 같은 말씀이었습니다. 그러니까 '엿새 뒤'라는 구절은 제자들 마음에 드리운 어둠을 드러내기에 적절한 표현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 빛 앞에 서다
그런데 그 어둠의 시간에 주님은 제자들이 보는 앞에서 변화되셨습니다. "그의 얼굴은 해와 같이 빛나고, 옷은 빛과 같이 희게 되었다"(17:2). 반전입니다. 어둠이 순식간에 빛으로 바뀐 것입니다. 마치 혼돈과 공허와 어둠에 잠겨 있던 세상에 하나님께서 '빛이 생겨라' 하시자 빛이 생겼다는 창세기의 기록처럼, 변화산에서 벌어진 사건은 새로운 창조의 사건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예수의 얼굴에 드러난 빛을 저는 태초의 빛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제자들이 본 것은 바로 그 태초의 빛이었습니다. 그것은 세상의 어떤 어둠도 앗아갈 수 없는 빛이었습니다. 사람들이 보이는 적대감도, 죽음의 위협도 그 빛을 막을 수는 없습니다. 그 빛은 무정한 세상을 밝히는 사랑이고 하늘로부터 도래하는 평화입니다. 그 빛과 만난 사람들은 행복합니다. 사울은 다마스커스로 가다가 그 빛과 만나 새로운 사람이 되었습니다.
신앙생활이란 어쩌면 어둠에서 빛으로의 이행과정이 아닌가 싶습니다. 그 과정을 일컫는 말은 '변화'입니다. 믿음이 들어가면 절망이 희망으로 바뀌고, 죄인이 성인으로 바뀌고, 박해하던 사람이 박해받는 사람으로 바뀌고, 높아지려고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던 사람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으로 바뀝니다. 어떤 이는 믿음의 길을 우화등선羽化登仙으로 설명하기도 합니다. 애벌레와 고치의 상태를 지나 나비로 변하는 과정이라는 말일 겁니다.
세월이 가면서 사람은 누구나 다 바뀝니다. 고대 그리스 철학자인 헤라클레이토스는 "누구도 같은 강물에 두 번 발을 들여놓을 수 없다"고 말했습니다. 강물이 끊임없이 흐르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나 또한 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변화의 방향입니다. 세월이 갈수록 맑아지고 깊어지고 넓어지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어두워지고 낮아지고 좁아지는 사람도 있습니다. 이보다 더 큰 낭비가 있을까요?
그 산 위에 모세와 엘리야가 등장했습니다. 모세와 엘리야는 각각 율법과 예언을 대표하는 인물입니다. 그들은 역사가 어둠에 잠겨 있을 때 나타나 사람들 앞에 빛을 비춘 인물들입니다. 모세는 애굽에서 종살이하던 히브리인들에게 나타나 그들에게 새로운 세상의 꿈을 심어주었습니다. 엘리야는 아합과 이세벨의 치하에서 야훼에 대한 믿음이 스러져가던 때 등장하여 백성들의 마음에 빛을 심어주던 사람입니다. 어떤 이들은 복음서 기자들이 그들을 등장시킨 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율법과 예언의 성취임을 나타내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하기도 합니다. 그렇게도 볼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놓치지 말아야 할 것은 무덤조차 남기지 않은 모세와 엘리야에 대한 민중들의 기대입니다. 사람들은 메시야의 때가 이르면 그들이 먼저 올 것이라고 믿었습니다. 복음서 기자들은 그들을 등장시킴으로써 넌지시 예수가 누구신지를 드러내고 있는 것입니다.
• 하늘의 소리
일종의 황홀경에 빠진 베드로는 초막 셋을 지어 세 분을 모시고 살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심정을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삶에 멀미를 하는 사람일수록 '다른 삶'을 그리워합니다. 민담 가운데도 이 비슷한 이야기들이 있습니다. 나무를 하러 깊은 산에 들어갔던 초부樵夫가 큰 나무 아래서 장기를 두고 있던 노인들을 보고 잠시 그 곁에 머물다 돌아왔는데 수백 년의 세월이 흘렀더라는 이야기를 들어보셨지요? 안견이 그린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꾼 꿈 이야기를 바탕으로 한 것입니다. 사람들은 언제나 이상향에 대한 그리움을 가지고 있습니다. 현실이 그만큼 각박하기 때문일 겁니다. 호메로스의 <오뒷세이아>는 트로이 전쟁을 마치고 고국인 이타카로 돌아가는 오뒷세우스 일행의 모험담입니다. 그 가운데는 오뒷세우스와 부하들이 어떤 섬에 당도했을 때 벌어진 이야기가 있습니다. 그 섬에 사는 사람들은 다 착하고 친절했습니다. 그들은 '로터스'라는 열매를 먹고 사는 사람들이었는데, 그 열매를 받아먹은 부하들은 고향으로 돌아갈 생각을 아예 잊고 말았습니다. 가끔은 그런 열매를 좀 얻어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 때도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 산정에 머물고 싶다는 베드로의 소망을 저는 나무랄 수 없습니다. 하지만 삶이 아무리 고단해도 불운을 회피하기보다는 현실을 직시하는 것이 지혜입니다. 그 직시를 통해 자기를 지키고 고난을 이겨내는 의지를 가다듬어야 합니다. 그래서 일까요? 갑자기 빛나는 구름이 그들을 뒤덮더니 하늘에서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다. 나는 그를 좋아한다. 너희는 그의 말을 들어라."(5)
어디서 많이 듣던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예수님이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고 올라가실 때 하늘에서 들려온 말씀입니다. "이는 내가 사랑하는 아들이다. 내가 그를 좋아한다." 마태복음에는 베드로의 신앙고백 말고도 예수님이 누구신지를 드러내는 선언 혹은 고백이 세 번 나옵니다. 세례 받으실 때 들려온 소리(3:17)가 그 하나이고, 변화산에서 들려온 소리가 그 둘(17:5)이고, 십자가 아래 있었던 백부장의 고백(27:54)이 그 셋입니다. 예수님이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은 수난을 통해 드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세례 때 들려온 소리가 온 세상의 고통을 당신의 몸과 마음으로 받아 안으시려는 주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다면, 십자가 아래서의 백부장의 고백은 미움과 증오를 기어코 사랑으로 바꾸어내는 주님의 거룩하고 숭고한 마음과 잇닿아 있습니다. 그리고 변화산에서 들려온 소리는 하나님의 뜻을 수행하기 위해 고난을 피하려 하지 않는 예수님의 마음과 잇닿아 있습니다.
정교회에 가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정교회에 가면 예수님의 생애의 결정적 장면을 보여주는 이콘이 그려져 있습니다. 그 가운데 하나가 탄생 장면을 그린 것인데, 유심히 보면 놀라운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예수님이 누워계신 구유의 모양이 관 모양이라는 사실이 그 하나이고, 예수님의 몸을 감싸고 있는 속싸개가 수의의 모양이라는 사실입니다. 정교회는 예수님의 탄생과 죽음을 분리해서 생각하지 않습니다. 수난과 성스러움이 서로 스며들어 있습니다.
하늘에서 들려온 소리 앞에서 제자들이 보인 반응은 무엇이었습니까? 그들은 얼굴을 땅에 대고 엎드렸습니다. 그리고 몹시 두려워했습니다. 거룩함 앞에 선 사람의 당연한 반응이겠습니다만, 이것은 아직도 고난을 받아들이기를 저어하는 제자들의 마음을 반영하고 있습니다. 주님은 그들에게 손을 대시며 말씀하셨습니다. "일어나거라. 두려워하지 말아라."(7) 여기서 사용된 '일어나거라'(rise, arise)라는 단어는 죽은 자의 일어섬을 설명하기 위해 성경에서 자주 사용되던 단어입니다. 주님은 회당장 야이로의 죽은 딸을 향해 '일어나라'(막5:41) 하셨고, 나인 성 과부의 죽은 아들을 향해서도 '일어나라'(눅7:14) 명령하셨습니다. 변화산 위에서도 주님은 제자들을 죽음의 공포로부터 일으켜 세우고 계십니다. '두려워하지 말아라'라는 구절이 뒤따라 나온 것은 자연스러운 일입니다. 여전히 제자들은 부활의 능력을 깨닫지 못하고 있지만 때가 되면 그들도 든든히 서게 될 것입니다. 주님은 인내하는 사랑으로 제자들을 돌보십니다.
• 일치를 향하여
산에서 내려오시던 주님은 제자들에게 산에서 본 것을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이르셨습니다. 말이 빚어내는 부질없는 혼란을 경계하신 말씀입니다. 제자들은 메시야가 오시기 전에 '엘리야가 먼저 와야 한다'는 율법학자들의 가르침이 신빙성이 있는지를 여쭙습니다. 주님은 엘리야가 와서 모든 것을 회복시킬 것이라면서 고요하지만 단호하게 덧붙이셨습니다. "엘리야는 이미 왔다. 그러나 사람들이 그를 알지 못하고,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 인자도 이와 같이, 그들에게 고난을 받을 것이다"(12)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제자들은 예수께서 말씀하시는 분이 세례자 요한임을 알아차렸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이 말씀 가운데서 우리 가슴을 치게 만드는 구절이 있습니다. '그를 알지 못하고'라는 구절과 '그를 함부로 대하였다'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이것은 세례자 요한에 대한 말씀이지만 예수님에게도 고스란히 적용된다는 사실을 우리는 잘 압니다. 요한복음은 이것을 아주 명료하게 드러냈습니다.
"그는 세상에 계셨다. 세상이 그로 말미암아 생겨났는데도, 세상은 그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그가 자기 땅에 오셨으나, 그의 백성은 그를 맞아들이지 않았다."(요1:10-11)
예수는 자기 땅에서 유배당한 분이었습니다. 어쩌면 이것이 진실을 추구하는 이의 운명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어둠이 깊습니다. 인공의 불빛은 휘황하지만 태초의 빛 생명을 주는 빛은 가물거리는 세대입니다. 그 빛이 없어서 사람들은 저마다 욕망의 벌판을 비틀걸음으로 걷고 있습니다. 나이가 들어도 자기가 이 세상에 온 까닭조차 모른 채 시간에 등 떠밀리며 살아갑니다. 주님과 함께 변화산에 올라야 합니다. 그 '높은 산'에 올라야 합니다. 숨이 턱까지 차오르더라도 그 산에 올라야 우리 삶의 전망이 트입니다. 그래야 우리가 꼭 붙들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다석 유영모 선생님은 '꼭대기'라는 말을 이렇게 재해석했습니다. 그 단어는 '조금도 틀림없이'를 뜻하는 '꼭'에 손을 대본다는 '대기'가 합쳐진 말이라는 것입니다. 꼭대기는 그러니까 진리가 있는 곳입니다. 사람은 그 꼭대기와 만나야 합니다. 그래야 사람답게 살 수 있습니다. 성공의 사다리 꼭대기 말고, 진리의 꼭대기를 열망해야 합니다. 이제 우리는 사순절을 향해 나아갑니다. 그 과정을 통해 우리 마음에도 주님의 빛이 깃들기를 빕니다. 그리고 주님의 마음과 깊은 일치를 이룰 수 있기를 빕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2월 15일 12시 00분 5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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