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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려움과 용기 사이 -눅12:4-12

by 【고동엽】 2022. 7. 6.

두려움과 용기 사이
눅12:4-12
(2015/1/25)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가 누구를 두려워해야 할지를 내가 보여 주겠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 그렇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그분을 두려워하여라. 참새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지 않느냐? 그러나 그 가운데 하나라도, 하나님께서는 잊고 계시지 않는다. 하나님께서는 너희 머리카락까지도 다 세고 계신다. 두려워하지 말아라. 너희는 많은 참새보다 더 귀하다." "내가 너희에게 말한다.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 앞에서 나를 부인하는 사람은,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부인당할 것이다. 누구든지 인자를 거슬러서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거슬러서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다. 너희가 회당과 통치자와 권력자 앞에 끌려갈 때에, '어떻게 대답하고, 무엇을 대답할까' 또 '무슨 말을 할까' 하고 염려하지 말아라. 너희가 말해야 할 것을 바로 그 시각에 성령께서 가르쳐 주실 것이다."]

• 자기를 부풀리는 사람들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오늘의 본문 말씀은 바리새파 사람들의 위선을 경계하라는 가르침과 이어져 있습니다. 주님은 산상수훈에서도 위선적인 신앙의 위험에 대해 말씀하신 바 있습니다. 어떤 신심행위라 해도 '사람에게 보이려고' 하는 것이면 위선이 되기 쉽습니다. 주님은 위선을 '누룩'에 빗대 말씀하십니다. 누룩이 들어가면 반죽은 아주 빨리 그리고 조용히 부풀어 오릅니다. 위선적 태도의 숨은 동기를 잘 드러내는 데 부풀어 오름이라는 단어보다 더 나은 게 있을까요? 사람들이 위선적으로 처신하는 까닭은 자기를 그럴듯하게 포장하고 강화하기 위해서입니다. 동물들은 위험에 처할 때면 자기 몸을 크게 보이려고 애씁니다. 몸집 큰 동물들이 벌떡 일어서서 앞발을 위로 들어 올리는 것이나, 수탉이 벼슬과 목덜미의 털을 바싹 세우는 것이나, 복어가 몸을 둥글게 하는 것, 사람들이 어깨에 힘을 주고 허리에 손을 얹는 것이나 다 그렇습니다. 사람들은 자기를 커보이게 하는 문화적 장치에 관심이 많습니다. 취업을 앞둔 이들이 집착하고 있는 스펙이 그러하고, 기성세대들이 명함에 적어가지고 다니는 다양한 직함도 그러합니다. 또 어떤 이들은 자신의 구매력을 과시하기 위해 명품으로 치장하기도 합니다.

이런 행태가 비극적인 것은 언젠가는 그 실체가 드러나게 마련이기 때문입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단호합니다. "가려 놓은 것이라고 해도 벗겨지지 않을 것이 없고, 숨겨 놓은 것이라 해도 알려지지 않을 것이 없다."(눅12:2)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는 평상시에는 잘 드러나지 않습니다. 위기가 닥쳐오면 실체가 드러납니다. 자기 이익 앞에서 교양이고 지성이고 다 팽개치는 사람들을 참 많이 봤습니다. 재난 상황이 닥치면 대개 제 몸 하나 건사하기 위해 필사적인 반면, 자기 안위를 제쳐놓고 타인들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이들도 있습니다. 우리 삶은 두려움 혹은 불안을 떨쳐버리려는 안간힘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생에 대한 불안 혹은 두려움을 피하기 위해 우리가 택하는 전략은 두 가지입니다. 자기를 강화하거나, 자기보다 더 큰 힘을 갖고 있는 이 앞에 엎드리는 것입니다. 어느 경우이든 진정한 해결책은 아닙니다.

• 두려움을 넘어
예수님은 두려움 혹은 불안 때문에 자기 부풀리기를 시도하는 사람들, 특히 불의한 권력을 꾸짖기보다 행여 불이익이라도 당할세라 그 앞에 몸을 옹송그린 채 살아가는 이들을 불쌍하게 여기셨습니다.

"내 친구인 너희에게 내가 말한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12:4)

주님은 당신의 제자들을 '내 친구'라 부르십니다. 그럴만합니다. 젊은 사람도 있었겠지만 나이도 어슷비슷 했을 테니 말입니다. 친구는 어떤 사람입니까? 오랜 시간을 함께 함으로 공통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 사람입니다. 제자들은 예수와 동행하며 많은 일을 함께 겪었습니다. 그런데도 그들은 여전히 세상의 문법에 매인 채 살아갑니다.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하는 지경에 들어서지 못한 겁니다. 뿌리 없는 영혼은 파도치는 대로 이리저리 떠밀리게 마련입니다. 주님의 말씀은 지금 새가슴이 되어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우렁우렁 들려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은 끊임없이 우리의 마음에 두려움이라는 균을 주입합니다. 사람들이 만성적인 두려움 속에서 살아가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현대인들은 행여 뒤처질까, 잊혀질까, 쫓겨날까, 비난받을까 전전긍긍하며 삽니다. 다른 이들의 평가나 태도에 민감하게 반응합니다. 그들의 인정을 받으려고 필사적이 됩니다. 주체로 살기보다는 힘 있는 이들의 호감을 사기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기도 합니다. 자기 말과 행동을 검열하고, 어떤 시스템에 순응하지 않는 이들을 보면 째려보기도 합니다. 이렇게 자꾸만 길들여져 가는 동안 진실한 삶으로부터 점점 멀어져갑니다. "육신은 죽여도 그 다음에는 그 이상 아무것도 할 수 없는 자들을 두려워하지 말아라." 이 말씀은 우리를 진정한 해방의 길로 안내합니다.

그럴 수 있을까요? 예수님은 그럴 수 있다고 말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정말로 두려워해야 할 분이 누구인지를 알아야 합니다. "죽인 다음에 지옥에 던질 권세를 가지신 분을 두려워하여라."(12:5b) 사실 저는 이런 표현에 담긴 위험을 잘 압니다. 사람들을 위협해서 자기 영향력 아래 두려는 그릇된 종교인들이 잘 쓰는 말과 이미지가 '지옥'입니다. 지옥이란 죄인들이 벌 받는 장소라는 뜻으로 흔히 사용됩니다만 지옥은 하나님과의 친밀한 관계가 끊어진 상황을 일컫는 말이기도 합니다. 형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하나님을 믿는다면 그처럼 딱한 일이 없을 것입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것은 삶을 진짜배기로 살아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을 진심으로 경외하는 사람은 세상의 허튼 권력 앞에 주눅 들지 않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은 '죽음의 세력에 의해 휘둘리지 않는 든든함'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사람을 두려워하면 올무에 걸리지만, 주님을 의지하면 안전하다. 많은 사람이 통치자의 환심을 사려고 하지만, 사람의 일을 판결하시는 분은 주님이시다."(잠29:25-26)

하나님만을 두려워하는 사람은 거짓과 위선과 불의에 대해 '아니오'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사람들을 부자유하게 하는 일체의 것들의 민낯을 폭로할 수 있습니다. 마르쿠제는 기존 체제가 주입하는 욕망에 순응하며 사는 사람들을 가리켜 '일차원적 인간'이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이것을 '납작해진 인간'이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 세심한 보살핌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처벌에 대한 두려움'에 사로잡힌 채 살아간다는 말이 아닙니다. 처벌에 대한 두려움이 우리 삶을 옥죈다면 우리는 노예이지 자유인이 아닙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다는 것은 세상을 창조하시고 통치하시는 하나님의 주권을 인정한다는 말입니다. 하나님의 뜻을 헤아리며 삼가는 마음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비로소 세상이 우리에게 채워놓은 족쇄로부터 벗어나게 됩니다. 하나님은 심판하시는 분이시지만 또한 세심하게 돌보시는 분이기도 합니다. 하나님은 다섯 마리가 두 냥에 팔리는 참새조차도 잊지 않으십니다. 예수님은 들에 핀 꽃과 공중에 나는 새를 보라고 하셨습니다. 그들까지도 보살피시는 하나님의 사랑과 신비에 눈을 뜨라는 말일 겁니다. 하나님은 사람들의 머리카락 한 올까지도 세고 계십니다.

아기를 키우는 엄마를 보십시오. 온 몸이 귀가 되어 아이의 작은 소리에도 민감합니다. 울음소리의 빛깔에 따라 배가 고픈 건지, 기저귀를 갈아줄 때가 되었는지, 놀아달라는 신호인지 알아차립니다. 그리고 아기가 원하는 바를 채워주기 위해 최선을 다합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이 그런 마음으로 세상을 돌보고 계시다고 말합니다. 사라에게서 쫓겨난 하갈은 광야를 방황하다가 절망의 늪에 빠집니다. 죽는 것 이외에 다른 선택이 있을 것 같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그 때 하나님이 찾아오셨습니다. 그리고 하갈에게 삶의 용기를 불어넣으셨고, 보호를 약속하셨습니다. 하갈은 그래서 그 하나님을 '엘 로이' 즉 '보시는 하나님'이라 일컬었습니다. 그리고 하나님과 만난 그곳을 브엘라해로이(창16:14) 즉 '나를 보시는 살아 계시는 분의 샘'이라고 불렀습니다. 살면서 이런 경험을 하신 적이 있는지요? 어디에서도 희망의 불빛이 비쳐들지 않아 마음이 어둠에 잠겨 있을 때 예기치 않은 빛과 만났던 경험 말입니다. 우리 눈에 보이진 않아도 하나님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우리를 돕고 계십니다.

물론 세상에는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일들도 많이 일어납니다. 마치 하나님의 보호가 철회된 것처럼 보이는 현실도 있습니다. 얼마 전 필리핀을 방문한 프란체스코 교종은 마닐라에 있는 한 가톨릭 대학교에서 열린 집회에 참석했다가 젊은이들과 대화를 나누게 되었습니다. 그 가운데는 12살 소녀 글리젤레 팔로마도 참석하고 있었습니다. 소녀는 울먹이는 음성으로 교황에게 물었습니다. "많은 아이들이 마약과 성매매에 내몰리고 있습니다. 왜 신은 이런 일이 벌어지도록 내버려 두는 것이지요?" 뜻밖의 질문 앞에서 프란체스코는 잠시 말을 잊었습니다. 무슨 말을 할 수 있었겠습니까? 눈물을 글썽이던 그는 사람들을 향해 말했습니다. "우리는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 물어봐야 합니다. 자신이 슬퍼할 줄 알고, 눈물 흘릴 줄 아는지." 하나님을 믿는 이들은 세상에 가득 찬 슬픔을 진정으로 아파할 수 있어야 합니다. 바로 그때 우리는 하나님의 손과 발이 되는 겁니다. 지금 우리 앞에 있는 아파하는 이들의 존재는 당신의 손과 발이 되어 달라는 주님의 초대장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바울 사도는 지금 여기서 우리가 어떤 마음으로 살아야 할지를 이렇게 요약해줍니다.

"여러분은 이 시대의 풍조를 본받지 말고,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서,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완전하신 뜻이 무엇인지를 분별하도록 하십시오."(롬12:2)

• 성령에 이끌리어
예수님은 "누구든지 사람들 앞에서 나를 시인하면, 인자도 하나님의 천사들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할 것"(8)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주님을 시인한다는 것은 복음서가 기록되던 당시의 맥락에서 보면 큰 위험이 따르는 행위였습니다. 예수를 주님으로 고백하는 순간 당시 '주'로 일컬어지던 로마 황제를 부정하는 셈이 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오늘의 맥락에서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하면 우리를 뜨악한 시선으로 바라보거나 조롱하는 이들은 있을지 몰라도 박해하는 이들은 많지 않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일상 속에서 예수 정신으로 살려 하면 상황은 달라집니다. 가난하고 소외된 이들을 사유와 실천의 중심에 놓는 순간 세상은 우리를 가만히 내버려두지 않습니다. 노골적으로 경멸하거나 '좌파'라는 찌지를 붙이기도 합니다. 그러나 분명히 알아두십시오. 우리가 사람들 앞에서 주님을 시인하면, 주님도 하나님 앞에서 그 사람을 시인하실 것입니다. 그 역도 역시 마찬가지입니다. 우리는 이 갈림길 앞에 서 있습니다.

주님을 믿고 따른다는 것은 언제나 위험한 일입니다. 예수를 믿는 데도 아무런 위험이 없다면 우리의 믿음이 바른 지 돌아보아야 합니다. 주님은 당신을 거슬러 말하는 사람은 용서를 받을 것이지만, 성령을 거슬러 모독하는 말을 한 사람은 용서를 받지 못할 것이라고 말씀하십니다(10). 예수라는 한 개인을 모독하는 것은 그냥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살리고, 북돋고, 생기를 불어넣어 일으켜 세우고, 하나님의 꿈을 품게 만드는 영을 혼란스럽게 하는 일은 묵과할 수 없는 죄입니다. 20세기에 가장 큰 사랑을 받았던 교종 요한23세의 편지글 가운데는 이런 대목이 나옵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서 살고 있는 동안에는 완전한 행복은 존재하지 않는다. 장미를 얻었다고 믿고 있는데 가시가 함께 따라오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는 모든 상황에 대처할 마음의 준비를 갖추고 살아갈 필요가 있다. 그러나 마음속에 주님의 영이 있어, 기도를 사랑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며 어떤 일이 있어도 참을성을 유지할 때, 그리고 서로를 존경하며 함께 고통을 나누려는 마음의 준비가 되어 있을 때, 비로소 우리는 날카로운 가시에서도 감미로움을 맛보게 되고 고난이 곁들여진 인생을 기꺼이 참아 받게 된다. 하늘에서 누리게 될 기쁨을 매일매일 미리 맛보게 된다."(피에르 파올라 타칼리티 엮음, <말씀이 나의 두 손에>, 바오로딸, p.52)

주님의 영은 우리로 하여금 기도를 사랑하고, 선한 사람이 되고자 노력하게 하고, 어떤 일이 있어도 참을성을 유지하게 합니다. 그리고 서로 존경하게 하고, 함께 고통을 나누게 합니다. 그 마음이 있을 때 인생은 힘겨울망정 살만하게 변합니다.

오늘 우리는 성령을 모독하며 사는 것은 아닙니까? 덧정 없는 세상에 사는 동안 우리 내면에는 어느새 두려움이 자리 잡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부자유합니다. 당당하지 못합니다. 우리가 정말 두려워해야 할 분은 하나님이십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다른 것들을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보살피고 인도하시는 하나님, 고통 가운데 있다 해도 그 고통을 통해 더 깊은 세계를 향해 나아가도록 하는 하나님을 신뢰하십시오. 두려움을 넘어 우리 삶의 모든 아픔까지도 내 삶으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빛나는 것으로 바꿔낼 존재에의 용기를 발휘하며 사십시오. 아멘.
등 록 날 짜2015년 01월 25일 12시 21분 01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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