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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깊은 곳으로 -행19:1-10

by 【고동엽】 2022. 7. 6.

삶의 깊은 곳으로
행19:1-10
(2015/1/11)

[아볼로가 고린도에 있는 동안에, 바울은 높은 지역들을 거쳐서, 에베소에 이르렀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를 만나서,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하고 물었다. 그들은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하고 대답하였다. 바울이 다시 물었다. "그러면 여러분은 무슨 세례를 받았습니까?"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습니다" 하고 대답하니 바울이 말하였다. "요한은 백성들에게 자기 뒤에 오시는 이 곧 예수를 믿으라고 말하면서, 회개의 세례를 주었습니다." 이 말을 듣고,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다. 그리고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으니,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다. 그래서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는데, 모두 열두 사람쯤 되었다.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다. 그러나 몇몇 사람은, 마음이 완고하게 되어서 믿으려 하지 않고, 온 회중 앞에서 이 '도'를 비난하므로, 바울은 그들을 떠나, 제자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서, 날마다 두란노 학당에서 강론하였다. 이런 일을 이태 동안 하였다. 아시아에 사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

• 주현절의 소명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임하시기를 빕니다. 지난 1월 6일 소한은 몹시 추웠습니다. 사실 그날은 교회 절기상 주현절(主顯節, Epiphany)이었습니다. '주인 주'에 '나타날 현' 자입니다. 한국교회는 이 날을 별로 중시하지 않지만 교회 전통에서 이 날은 매우 중요합니다. 서방교회는 주현절을 동방박사가 아기 예수님을 찾아와 예물을 바친 날로 기념합니다. 동방교회는 예수님께서 요단강에서 세례자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때 성령이 비둘기 같이 내리심을 보았던 사건을 기념합니다. 세계 교회는 이 두 전통을 통합하여 주현절인 1월 6일은 서방교회 전통을 따라 동방박사의 방문을 기념하고, 주현절 첫째 주일은 동방교회의 전통을 따라 예수님의 세례일로 기념하고 있습니다. 주현절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사실이 공적으로 증언된 날입니다. 주현절기는 사순절이 시작되는 '재의 수요일'까지 계속됩니다. 주현절과 주현절 첫 번째 주일, 그리고 주현절기의 마지막 주일인 산상변화 주일의 강단색은 흰색이고, 그 나머지 약 4-6주간은 초록색입니다. 흰색은 영광과 기쁨이고 초록색은 성장을 의미합니다. 성도들은 주현절기 동안 주님의 공생애를 묵상하면서 주님과 함께 영적으로 성장해야 합니다.(<성실문화>, 81호 참고)

오늘 우리는 바울 사도의 제3차 전도여행 중에 일어난 한 일화와 마주하고 있습니다. 바울은 갈라디아와 브루기아의 고원지대를 지나 마침내 에베소에 이르렀습니다. 에베소는 지금의 터키 서남부에 있는 도시인데, 바울 당시에는 아시아주의 수도였습니다. 에게해에 면한 항구도시였는데, 위도상으로 보면 아테네와 마주보는 곳이었습니다. 그리스와는 뱃길로 멀지 않은 탓에 내왕이 잦았다고 합니다. 교통의 요지였기 때문에 판-이오니아 경기가 거행되기도 했습니다. 에베소는 한창 물 만난 도시였습니다. 지금은 일부만 남아 있지만 에베소의 도서관이나 신전 유적들, 극장과 원형 극장은 그곳이 얼마나 문화적으로나 종교적으로 발달한 곳이었는지를 잘 보여줍니다. 그곳은 아르테미스 여신 숭배의 중심지이기도 했습니다. 바울은 2차 전도여행 말미에 이곳에 잠시 들러 복음을 전한 적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그에게 더 머물러 달라고 부탁했지만 그는 하나님의 뜻이면 다시 돌아오겠다(행18:21)고 약속한 후 에베소를 떠났습니다. 그리고 마침내 약속대로 에베소로 돌아온 것입니다. 거기서 그는 몇몇 제자들을 만났습니다.

• 세례와 성령
그들은 어떤 사람들일까요? 1세기의 지중해 세계 도처에는 유대인들의 디아스포라가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어느 곳에 있든 토라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지키며 살려고 애썼습니다. 그들은 욕망에 따라 흥청망청 살아가는 이들이 보기에는 낯선 사람들이었을 것입니다. 낯설었기에 배척을 당하기도 했지만, 높은 도덕성과 거룩한 삶을 추구하는 그들의 삶의 방식에 매료된 이들도 더러 있었던 모양입니다. 그런 이들은 회당에 와서 율법을 배웠고, 친분이 쌓이면서 유대인들의 정착생활을 지원하는 협력자가 되기도 했습니다. 사도행전에서 '경건한 사람들'로 지칭되는 사람들은 대개 그런 이들입니다(행13:43, 50, 17:4).

바울이 에베소에 왔을 때 만났다는 '제자들' 역시 그런 이들을 지칭하는 말일 겁니다. 그들은 대개 알렉산드리아 출신 학자인 아볼로를 통해 유대교에 입문한 사람들이었는데, 바울을 반갑게 맞아주었습니다. 바울은 천군만마를 얻은 기분이었을 겁니다. 그런데 바울은 즉시 그들이 진리 안에 바로 서 있지 못하다는 사실을 알아차렸습니다. 바울은 망설임 없이 묻습니다. "여러분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습니까?" 이 질문은 좀 뜬금없어 보입니다. 친교를 위해서는 조금 더 부드럽고 친절하고 우회적으로 물어야 하는 법인데, 바울의 질문은 단도직입적입니다. 제자들은 당황하며 말합니다. "우리는 성령이 있다는 말을 들어보지도 못하였습니다." 대화를 통해 바울은 그들이 요한의 세례를 받았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요한의 세례가 그들의 지난날의 죄를 씻는 회개의 세례이지만, 참 사람이 되기 위해서는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합니다. 요한도 자기 뒤에 오시는 분 곧 예수를 믿으라고 했다는 사실을 일깨워줍니다. 배움에 열정이 있던 그들은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았습니다.

바울이 그들에게 손을 얹자 성령이 그들에게 내리셨고, 그들은 방언으로 말하고 예언을 했습니다. 이 장면을 머리에 그리는 순간 이스라엘의 첫 번째 임금인 사울 이야기가 떠올랐습니다. 하나님의 영이 그에게 내리자 사울은 예언자의 무리와 함께 춤추며 소리를 지르면서 예언을 하였다고 합니다(삼상10:10). 하나님의 영에 사로잡히는 체험은 그에게 반복적으로 나타납니다. 암몬 사람 나하스의 침입으로 곤경에 처한 길르앗 야베스 주민들이 도와달라고 각지에 사람을 보냈지만 누구도 선뜻 그들을 도우러 나서지 못했습니다. 사울에게 그 소식이 들려왔을 때 하나님의 영이 임했습니다. 그때 사울은 무섭게 분노를 터뜨렸습니다(삼상11:6). 성령, 곧 하나님의 영은 우리 존재 깊은 곳에 잠들어 있던 뭔가를 깨웁니다. 때로는 신명을 불러일으키고 때로는 불의에 대해 분노하도록 하기도 합니다. 하나님의 영은 새로운 삶을 가능하게 하는 권능입니다.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은 이들이 방언도 하고 예언도 했다는 말을 저는 그런 의미로 받아들이고 싶습니다.

유럽의 여러 도시에 있는 유서깊은 교회들은 세례반洗禮盤 제작에 많은 공을 들였습니다. 어떤 도시에서는 세례를 위해 별도의 세례당 건물을 짓기도 했습니다. 그만큼 세례를 중시했다는 말일 겁니다. 그런데 대개 세례반이나 세례당은 8각형 구조입니다. 왜 그럴까요? 그리스 철학자인 피타고라스 이후 숫자는 세계를 구성하고 운영하는 우주의 비밀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널리 퍼지고 있었습니다. 사실 성경에도 숫자 상징이 많습니다. 3이 하늘의 완전을 뜻한다면 4는 지상의 완전을 상징합니다. 그 결합수인 7과 12라는 수 역시 완전수로 여겨지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8은 뭘까요? 그것은 세속의 시간을 지난 이후의 시간, 곧 부활의 시간입니다. 세례반이나 세례당을 8각으로 만드는 것은 세례를 통해 옛 삶이 끝나고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는 상징입니다. 요한의 세례는 회개를 상징하지만, 예수의 세례는 회개를 넘어 부활의 삶으로 우리를 인도합니다.

• 영성이란 무엇인가?
예수의 세례가 성령과 밀접하게 연결된 것은 그 때문입니다. 성령은 할 수 없는 것을 할 수 있게 하는 힘입니다. 성령은 우리 마음을 하나님의 마음에 접속시켜줍니다. 여러 해 전부터 영성(spirituality)이라는 말이 유행하고 있습니다. 도대체 영성이란 무엇일까요? 탁월한 원로 신학자이신 김경재 박사님은 최근 한 신문에 보낸 특별 기고문에서 영성이 무엇인지를 깔끔하게 정리해주셨습니다. 그 중의 몇 가지만 인용해보겠습니다.

"영성은 지성, 감성, 덕성을 아우르면서 세계를 전일성과 상호관계성의 관점에서 이해하는 마음의 능력이다."
"영성은 하늘과 땅과 사람, 그 셋이 구별되면서도 상호 내주하고 회통관계 속에 있음을 자각하는 깨어난 의식이다."
"영성은 우주에 편만하면서 일이관지一以貫之 하는 신비한 실재가 자비, 사랑, 충서忠恕[참 마음과 용서]임을 직감적으로 느끼고 반응하는 능력이다."
(한겨레신문, 2015년 1월 9일자 30면, <생태론적 영성과 영적 치매> 중에서)

조금 어려운가요? 간단하게 말하자면 영성이란 하나님의 마음과 일치를 이루는 것이고, 그 마음으로 세상을 보니까 세상에 나와 무관한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사실을 아는 것입니다. 그런 깊음을 체험한 사람의 삶은 자비, 사랑, 참 마음과 용서일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의미에서 우리 모두 성령 충만해지기를 소원합니다. 요즘은 많이 부르지 않았는데 이전에는 즐겨 부르던 찬송가가 있습니다. 302장입니다. 주 하나님의 넓고 큰 은혜가 큰 바다보다 깊으니, 이제는 망설임을 떨치고 닻줄을 끌러 깊은 데로 가보라는 내용입니다. 3절이 기가 막힙니다.

"많은 사람이 얕은 물가에서 저 큰 바다 가려다가/찰싹거리는 작은 파도보고 마음 약하여 못가네/언덕을 떠나서 창파에 배 띄워 내 주 예수 은혜의 바다로 네 맘껏 저어가라."

우리는 정말 얕은 물가에서 자박거리기만 할 뿐 진리의 깊은 바다에 몸을 던질 생각 없이 살고 있는 것은 아닌지요? 두렵더라도 물에 몸을 담그지 않으면 수영을 배울 수 없는 것처럼, 더 큰 세계에 나를 던지지 않으면 영적으로 깊어질 수 없습니다. 하나님의 부력을 신뢰할 때 우리 삶은 든든해집니다.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자아의 감옥으로부터 벗어나와 하나님의 마음에 잇대어 살아가게 합니다. 그런데 성령 받았다고 사람들 앞에 떠벌리는 이들이 있습니다. 불순한 이들입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종교 체험을 특권으로 만들어 다른 이들에게 영향을 미치려 합니다. 종교 체험을 자기 강화 혹은 이익의 도구로 삼는 것입니다. 그들은 스스로 미혹된 자들입니다. 그들을 경계해야 합니다.

• 두란노 학당
바울은 회당에 들어가서, 석 달 동안 하나님 나라의 일을 강론하고 권면하면서 담대하게 말하였습니다. 바야흐로 하나님 나라의 꿈이 에베소에서도 영글어가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어디에나 방해는 있게 마련입니다. 마음이 완고해진 사람들은 그의 말을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고, 온 회중 앞에서 그 '도'를 비난했습니다. 아직 기독교라는 말이 정착하지 않은 탓에 사람들은 예수의 가르침을 '그 도'라고 말했고, 믿는 이들을 가리켜 '그 도를 따르는 사람들(행9:2)'로 불렀습니다. 도는 길이니까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예수가 걸어가신 길을 걷는 것과 분리될 수 없습니다. 길은 걷기 위해 있는 것이지, 고백되기 위해 존재하는 것은 아닙니다. 바울은 회당 안에 있는 적대자들과 다투기보다는 배울 마음이 있는 이들을 따로 데리고 나가는 길을 택했습니다. 그는 두란노 학당을 빌어 날마다 강론하였습니다.

사도행전은 '두란노 학당'이 어떤 곳인지 아무런 설명도 해주지 않습니다. 일설에 의하면 두란노는 원래 사람 이름이었다고 합니다. 고대 세계에서는 공공 교육 시설이 없었기에 배우려는 이들은 스승이 될 만한 이들을 찾아가서 개인교습을 받곤 했습니다. 제자들이 많이 몰리는 스승들은 학당 혹은 서원을 만들어 제자들을 양성했습니다. 제일 잘 알려진 것은 역시 플라톤의 아카데미아일 겁니다. 고대 그리스 로마 세계에서 학생들이 주로 배우려 했던 것은 철학, 수사학, 수학 등이었습니다. 두란노는 에베소에서 꽤 유명했던 철학자였다고 하는데, 그가 죽은 후 뒤를 이어갈 사람이 없어서 학당이 비어 있었던 것 같습니다. 바울은 그 학당을 빌어 제자들을 가르쳤습니다. 햇수로 이 년이나 지속되었다고 합니다. 공들여 가르치는 사람과 최선을 다해 배우는 사람들을 생각하면 가슴이 벅찹니다. 그들은 단순히 지식만을 전수한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 나라의 삶을 배우고 익혔을 것입니다. 나찌가 교회를 황폐화시키고 있을 때 디트리히 본회퍼가 운영했던 핑켄발데 신학교가 떠오릅니다. 그는 그곳에서 학생들과 함께 살면서 함께 기도하고 찬양하고 진리 공부를 하면서 엄혹한 시기의 빛을 만들어냈습니다. 지금도 이런 학당이 필요합니다.

아시아에 있는 사람들은 유대 사람이나 그리스 사람이나, 모두 주님의 말씀을 듣게 되었다고 합니다. 에베소에서는 참 놀라운 일들이 많이 일어났습니다. 바울을 통해 많은 병자들이 낫고 귀신들이 쫓겨났습니다. 사람들 앞에서 자기들의 죄를 자백하고 신도가 된 사람들도 늘어났습니다. 누가는 에베소 선교의 성과를 "이렇게 하여 주님의 말씀이 능력 있게 퍼져 나가고, 점점 힘을 떨쳤다"(행19:20)고 정리하고 있습니다. 말씀과 바로 만나야 합니다. 말씀과 만날 때 하나님의 마음을 알 수 있습니다. 말씀과 만날 때 성령이 임합니다. 말씀과 만날 때 진정한 이웃 사랑을 실천할 수 있습니다.

돈이 주인 노릇하는 세상에 사는 이들은 삶의 깊이의 차원과 만나기 참 어렵습니다. 욕망과 충족과 권태의 쳇바퀴를 돌리느라 온통 마음을 쓰는 동안 우리 영혼은 파리해집니다. 불안한 마음을 달래야 하니 늘 자극적인 것을 추구합니다. 삶을 담담하게 살아가지 못합니다. 사랑의 능력도, 공감의 능력도 줄어듭니다. 조롱과 냉소가 우리를 사로잡습니다. 상처 입은 사람들이 늘어나고, 세상은 점점 위험한 곳으로 변합니다. 이제 정말 깊은 곳을 향해야 할 때입니다. 하나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주님을 마음에 모시고 살아야 합니다. 성령의 불꽃을 꺼뜨리지 말아야 합니다. 주현절기를 지나는 동안 우리 마음에 하늘의 빛이 비쳐와 우리를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기를 기원합니다. 아멘.등 록 날 짜2015년 01월 11일 12시 05분 16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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