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제별 설교〓/설교.자료모음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시편84:1-12

by 【고동엽】 2022. 7. 6.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
시편84:1-12
(2015/1/4)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참새도 주님의 제단 곁에서 제 집을 짓고, 제비도 새끼 칠 보금자리를 얻습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 그들은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합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 뵐 것입니다. 주 만군의 하나님, 나의 기도를 들어 주십시오. 야곱의 하나님, 귀를 기울여 주십시오. 우리의 방패이신 하나님, 주님께서 기름을 부어 주신 사람을 돌보아 주십시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 주 하나님은 태양과 방패이시기에, 주님께서는 은혜와 영예를 내려 주시며, 정직한 사람에게 좋은 것을 아낌없이 내려 주십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복이 있습니다.]

• 그리움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새해를 허락하신 주님께서 쉰 두 주 내내 주님을 예배하는 기쁨을 허락하시리라 믿습니다. 삶은 순례입니다. 순례의 사전적 정의는 '종교상의 성지나 의미있는 곳을 찾아다니며 참배함'입니다. 하지만 참된 의미의 순례는 특정한 장소를 찾는 것만이 아니라 우리 마음의 중심을 찾아가는 일체의 행위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비틀거리던 팽이도 중심을 찾는 순간 마치 정지한 듯 고요하게 보입니다. 우리 삶이 말할 수 없이 곤고한 것은 그 하나의 중심을 얻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마음의 초점을 바로 하기 위해 우리 마음을 자꾸만 하나님께 비끌어매는 것이 신앙생활입니다. 올 한 해 우리의 삶이 그 중심을 향한 나아감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어지간한 풍파를 만나도 든든히 선 사람으로 살아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젊은 시절 교회에 나간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두 개의 찬양이 제 마음을 사로잡았습니다. 하나는 '어지신 목자'이고, 다른 하나는 '순례자의 노래'였습니다. "저 멀리 뵈는 나의 시온성 오 거룩한 곳 아버지 집/내 사모하는 집에 가고자 한 밤을 새웠네/저 망망한 바다 위에 이 몸이 상할지라도/오늘은 이곳 내일은 저곳 주 복음 전하리". 이 노래는 세상 어디든 가서 복음을 전하겠다는 다짐이지만 저는 가사 내용보다는 '순례자의 노래'라는 제목과 아득하게 전개되는 멜로디에 더 사로잡혔던 것 같습니다. 생각해보면 삶이 아득하고 막막하다고 느꼈던 20대 중반의 도저한 허무주의도 한 몫을 한 것 같습니다.

고향을 찾아가는 이들의 발걸음이 그러한 것처럼 가야 할 곳을 알고 가는 사람의 발걸음은 가든한 법입니다. 오늘의 시는 대표적인 순례자의 시편입니다. 지금 시인은 하나님의 집을 향해 나아가고 있습니다. 그는 들떠 있습니다. 가슴에 차오르는 감흥을 주체할 수 없어 노래합니다. "만군의 주님, 주님이 계신 곳이 얼마나 사랑스러운지요."(1) '주님이 계신 곳'은 물론 성전을 이르는 말입니다만, 그렇다고 해서 주님이 성전에만 머문다는 말로 받아들일 필요는 없습니다. 하나님은 어디에나 계십니다. 안 계신 곳이 없으십니다. 우리 이웃의 얼굴에도 계시고, 꽃 한 송이, 나무 한 그루, 흩날리는 눈송이 속에도 계십니다. 하지만 우리의 눈과 마음은 그 신비를 알아차리지 못합니다. 그래서 가끔은 하나님과의 약속을 상기시키는 장소에 가야 할 때가 있습니다. 성전은 그런 곳입니다. 시인이 어디에 사는 누구인지는 알 수 없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것은 그가 마음의 중심을 찾는 이라는 사실입니다. 그는 하나님게 소망을 두고 사는 사람입니다.

"내 영혼이 주님의 궁전 뜰을 그리워하고 사모합니다. 내 마음도 이 몸도, 살아계신 하나님께 기쁨의 노래 부릅니다."(2)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이야말로 믿음의 뿌리입니다. 보고 싶어 그리는 마음은 의도하지 않아도 저절로 일어나는 마음입니다. 우리에게 이 마음이 있는지요? 시인은 영혼, 마음, 몸 전체가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에 타오르고 있습니다. 정교회의 나라인 조지아의 사메바 교회에서 만난 한 광경이 떠오릅니다. 예배당은 거룩한 열기로 가득 차 있었습니다. 이콘 앞에 촛불을 밝히는 사람들도 있었고, 이콘에 입을 맞추고 십자성호를 긋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기둥 옆에 붙어 서서 중얼중얼 성경을 읽는 이들도 있었습니다. 그 공간을 가득 채우고 있던 것은 성경을 낭독하는 사제의 낮은 목소리였습니다. 그런데 그 낭독대 앞에 한 여인이 서 있었습니다. 그는 혼신의 힘으로 말씀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습니다. 온 몸이 귀가 되어 말씀을 듣는 그분의 모습을 보면서 나는 인간의 몸짓이 그리도 간절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울컥해졌습니다. 오늘의 시인도 하나님에 대한 그런 그리움에 사무쳐 있습니다.

• 복 있는 사람
그는 하나님을 가리키는 말을 세 번씩이나 반복합니다. '만군의 주님, 나의 왕, 나의 하나님'. 시인은 당신의 백성들을 돌보시고 버리지 않으시는 하나님 생각에 감동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은 사람 뿐 아니라 참새나 제비의 생명까지도 품어 안는 따뜻한 품이십니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움에 사로잡힌 시인은 누가 복 있는 사람인지 보여줍니다.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들은 복됩니다."(4) 주님의 집에 사는 사람이 복된 것은 그들이 영원토록 주님을 찬양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정말 그럴까요? 모처럼 산을 찾는 이들은 그 장엄한 경치에 감탄하지만 산 아래 마을에 사는 이들은 산을 잘 바라보지 않는 법입니다. 습관이 된 신앙생활에는 감격이 없습니다. 오스트리아의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의 <죽음의 수용소에서>에 나오는 한 대목이 떠오릅니다. 수감자들은 강제노역장으로 가는 트럭 위에서 몰래 목소리를 낮춰 하나님께 예배드릴 때 큰 감동을 느꼈다고 합니다. 그리움이 없으면 감동도 없습니다. 직분을 맡은 이들이 경계해야 하는 것은 타성화된 헌신입니다. 맡겨진 일을 처리해야 할 일거리로 받아들이는 한 기쁨은 없습니다. 맡겨진 일을 하나님께 바치는 예배로 생각해야 합니다. 기쁨과 감격이 없으면 당분간은 그 일로부터 벗어나는 게 좋습니다. 헌신의 자리가 의무의 지옥이 되어서는 안 되니 말입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힘을 얻고, 마음이 이미 시온의 순례길에 오른 사람들은 복이 있습니다"(5) 이 말을 좀 바꾸어 보면 자기 삶을 하나님을 향한 순례로 이해하고 자꾸만 우리를 붙드는 옛 삶을 청산하고 앞으로 나가는 사람이 복이 있다는 말일 겁니다. 우리는 대개 어딘가에 묶인 채 살아갑니다. 아브라함의 경우 그것은 '본토, 친척, 아버지 집'으로 표상되었습니다. 요한의 말로 하면 '육체의 욕망, 눈의 욕망, 세상 살림에 대한 자랑'(요일2:16)입니다. 우리의 경우 여기에 이 덧거친 세상을 사는 동안 몸과 마음에 밴 버릇 혹은 과도하게 부푼 욕망을 더해야 할 겁니다. 성 어거스틴은 우리가 어떻게 죄의 종이 되었는지를 간결한 말로 드러내 보여줍니다. "삿된 마음에서 육욕이 생기고, 육욕을 따르다 보면 버릇이 생기고, 버릇을 끊지 못하면 필연이 생기게 되는 것이옵니다."(<고백록. 최민순 번역, 제8권 4장). 우리는 자유롭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종살이를 하고 있는 것인지도 모릅니다. 어거스틴은 악의 버릇에서 벗어나려고 발버둥쳐 보았지만 몸에 익지 않는 선보다 버릇이 된 악이 오히려 더 셌다고 말합니다. 그의 고백입니다.

"내가 사귀어오던 옛날의 헛된 일, 어리석은 일들이 내 육체의 옷자락을 붙들고 소곤대는 것이었습니다. '우릴 버리고 갈텐가?' 또 '이제부터 그대와 있기는 영원히 그만이란 말이지?' '이제부턴 이것도 저것도 영영 그대에겐 당치 않단 말인가?'"(위의 책, 제8권 11장)

자꾸만 옛 삶에 속한 것들과 이별해야 합니다. 그래야 시온의 길이 열립니다. 우리 마음에 있는 시온의 대로는 오랫동안 걷지 않는 탓에 잡풀이 우거지고, 비바람에 움푹 패인 곳이 많습니다. 이제 풀은 베어내고 패인 곳은 메워야 합니다. 하나님을 향한 그리움이 이 일을 가능하게 합니다.

• 시련을 넘어
시온의 대로를 걷는 이라 해서 시련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하지만 시련은 걸림돌이 아니라 디딤돌이 됩니다.

"그들이 '눈물 골짜기'를 지나갈 때에, 샘물이 솟아서 마실 것입니다. 가을비도 샘물을 가득 채울 것입니다. 그들은 힘을 얻고 더 얻으며 올라가서, 시온에서 하나님을 우러러뵐 것입니다."(6-7)

시인은 우리 삶이 시련과 비애의 현장임을 도외시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메마른 골짜기에서도 샘물은 솟아나게 마련입니다. 신 광야를 떠나 르비딤에 진을 쳤던 출애굽 공동체는 물이 없어 절망에 빠졌습니다. 백성들은 모세를 원망했고 원망의 마음이 폭력으로 치달을 절체절명의 순간까지 내몰렸습니다. 모세가 하나님께 부르짖자 호렙산 바위에서 물이 솟아나왔습니다. 메마름의 시간을 잘 견디면 가을비가 내려 마른 대지를 적셔줄 것입니다. 오늘의 삶의 조건이 힘겹다고 낙심하지 마십시오. 하나님 없이 문제를 해결하려 하지 마십시오. 이사야 선지자는 하나님의 사랑을 이렇게 확언합니다.

"어머니가 어찌 제 젖먹이를 잊겠으며, 제 태에서 낳은 아들을 어찌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비록 어머니가 자식을 잊는다 하여도, 나는 절대로 너를 잊지 않겠다. 보아라, 예루살렘아, 내가 네 이름을 내 손바닥에 새겼고, 네 성벽을 늘 지켜보고 있다."(사49:15-16)

그렇기에 우리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은 당신을 신뢰하는 이들의 기도를 들으시고 응답하십니다. 우리가 기도할 때 주님은 우리가 필요로 하는 것을 주시기도 하시지만 당신 자신을 우리에게 주십니다. 그때 우리는 환난과 시련을 넉넉히 이겨낼 수 있습니다. 바울 사도는 그래서 믿는 이들은 환난을 자랑한다고 말합니다. "환난은 인내력을 낳고, 인내력은 단련된 인격을 낳고, 단련된 인격은 희망을 낳는 줄을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롬5:3-4) 믿는 이들에게도 환난은 쓰라린 것이지만 그것은 좌절로 귀착되는 것이 아니라 희망을 지향합니다. 주님의 영이 우리와 함께 하실 때 가능한 일입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면 우리도 시인처럼 말할 수 있습니다.

"주님의 집 뜰 안에서 지내는 하루가 다른 곳에서 지내는 천 날보다 낫기에, 악인의 장막에서 살기보다는, 하나님의 집 문지기로 있는 것이 더 좋습니다."(10)

주님의 '집 뜰'을 주님의 '현존'으로 이해하면 좋을 것입니다. 비록 소박할지라도 주님을 모시고 살아가는 삶이 악인들과 어울려 호의호식하며 사는 것보다 더 낫습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이 점에서 좀 단단해져야 합니다. 믿음의 사람들은 믿지 않는 이들과는 좀 다른 삶의 문법을 가지고 살아야 합니다. 하나님의 마음에 우리 마음을 조율하며 살 때 우리는 세상이 주는 것과 같지 않은 자유와 평화를 누릴 수 있습니다. 그렇게 살아야 세상을 꾸짖을 수 있는 내적 힘이 생깁니다. 오늘의 개신교회가 힘을 잃은 것은 신자들이 하나님의 뜻이 아닌 세상의 기준에 따라 자기 삶을 조율하기 때문입니다.

이제 우리는 새해의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시인 정호승은 <낙타>라는 시에서 "먼 산을 바라볼 때가 길 떠날 때"라고 말합니다. "낙타도 먼 길을 가기 위해서는/먼저 무릎을 꿇고 사막을 바라본다/낙타도 사막의 길을 가다가/밤이 깊으면/먼저 무릎을 꿇고/찬란한 별들을 바라본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걸어가야 할 세상은 사막과도 같은 현실입니다. 주님 앞에 자꾸만 무릎을 꿇지 않을 수 없는 것은 그 때문입니다. 무릎을 꿇고 먼 곳을 바라보아야 현실에서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세상이 어두울수록 별처럼 세상을 밝혔던 믿음의 사람들을 바라보아야 합니다. 저는 우리들의 한 해가 하나님의 마음을 향한 중단없는 순례가 되기를 원합니다. 저도 기꺼이 여러분의 동행이 되겠습니다. 가다가 넘어질 수도 있지만 다시 일어나면 됩니다. 우리 곁에서 걷고 있는 이들이 우리 손을 잡아줄 것입니다. 금년 한 해, 주님을 신뢰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복이 우리 가운데 넘치기를 빕니다. 또한 우리의 존재가 하나님의 현존의 증거가 되기를 기원합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1월 04일 12시 02분 02초

댓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