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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스바삼 -하21:10-14

by 【고동엽】 2022. 7. 6.
리스바
삼하21:10-14
(2015/4/12)

[그 때에 아야의 딸 리스바가 굵은 베로 만든 천을 가져다가 바윗돌 위에 쳐 놓고, 그 밑에 앉아서,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하늘에서 그 주검 위로 가을 비가 쏟아질 때까지,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다. 아야의 딸이며 사울의 첩인 리스바가 이렇게 하였다는 소문이 다윗에게 전해지니, 다윗이 길르앗의 야베스로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그 주민에게서 찾아왔다. (블레셋 사람이 길보아 산에서 사울을 죽일 때에, 블레셋 사람이 사울과 요나단의 시신을 벳산의 광장에 매달아 두었는데, 거기에서 그 시신을 몰래 거두어 간 이들이 바로 길르앗의 야베스 주민이다.) 다윗이 이렇게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거기에서 가지고 올라오니, 사람들이 나무에 매달아 죽인 다른 사람들의 뼈도 모아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와 함께, 베냐민 지파의 땅인 셀라에 있는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였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

• 아비소스의 문이 열리고
주님의 은총과 평강이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부활절이 지난 후 첫번째 주일입니다. 부활절 이후에 벌어진 일들을 보도한 복음서 이야기를 요약할 수 있는 단어는 무엇일까요? 당혹감, 두려움, 놀람, 감격일 겁니다. 처음에는 제자들조차 예수가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는 소식을 믿지 못했습니다. 절망의 어둠 속에 잠겨 있던 그들의 내면이 차츰 정돈되고 하늘의 빛이 서서히 비쳐들자 그들은 주님의 부활을 현실로 받아들이게 되었습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은 사람들을 당당하게 일으켜 세웁니다. 바울 사도는 우리의 썩을 몸이 썩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하고, 죽을 몸이 죽지 않을 것을 입어야 한다(고전15:53)면서, 호세아서에 나오는 말씀을 인용하여 말합니다. "죽음아, 너의 승리가 어디에 있느냐? 죽음아, 너의 독침이 어디에 있느냐?"(고전15:55, 참조 호13:14) 우리도 이런 노래를 부르고 싶습니다. 하지만 지금도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것은 죽음의 세력처럼 보입니다.

얼마 전 우리는 케냐의 한 대학에서 알샤밥의 테러로 148명의 학생이 죽임을 당했다는 소식을 접했습니다. 희생 당한 이들 대부분은 기독교인들입니다. 이슬람 극단주의자들은 새로운 이슬람 국가를 세운다는 파시즘적 망상으로 세계 평화를 위협하고 있습니다. 생명을 함부로 다루는 종교인들은 그들이 속한 종교가 무엇이든 간에 자기 탐욕에 복무하는 이들일 뿐입니다. 분쟁을 만들어냄으로 자기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시도는 그것이 무엇이든 악마적입니다. 시리아, 이라크, 리비아에서 '이슬람 국가'(Islam State)에 의해 희생된 이들이 많습니다. 지난 2월 22일에는 리비아에 머물고 있던 이집트 콥틱 기독교인들 22명이 참수를 당하는 일이 벌어졌습니다. 자기들의 견해에 동조하지 않는 이들을 제거함으로 순수한 이슬람 국가를 만들 수 있다는 것이 저들이 내세우는 명분입니다. 그들은 인류 문화 유산들을 파괴하는 만행도 서슴치 않고 있습니다. 역사는 이렇게 속절없이 퇴행하고 있습니다.

이런 일들을 접할 때마다 요한계시록에 언급되고 있는 아비소스 곧 무저갱(밑바닥이 없는 깊은 곳)의 문이 열린 것 같아 아뜩해지곤 합니다. 그곳에 갇혀 있던 악마가 풀려나 세상을 혼돈으로 몰아가는 것 같기 때문입니다. 그 문을 연 것은 인간의 과도한 욕망입니다. 그 문을 다시 닫으려면 생명 중심적 사고로의 전환이 필요합니다. 생명보다 더 큰 가치는 없습니다. 세상의 어떤 문화, 종교, 이데올로기도 생명의 가치를 앞지를 수는 없습니다. 성서의 전통은 한 사람을 파멸시킨 사람은 온 세상을 파멸시킨 것과 같고 한 사람을 살려낸 사람은 온 세상을 살려낸 것과 같다고 가르칩니다. 이것을 아브라함 요수아 헤셸은 이렇게 설명합니다.

"그 누구도 다른 사람들을 살리기 위하여 희생당해서는 안 된다. 만일 적들이 모여 있는 여자들에게 말하기를, '너희 모두 욕보지 않으려면 너희 가운데 하나를 우리에게 보내라'고 한다면 그들이 와서 모두를 욕보이게 할지언정 어느 한 여자를 뽑아서 욕보게 해서는 안 된다"(아브라함 요수아 헤셸, <누가 사람이냐>, 종로서적, p. 137)

이런 판단의 근거는 인간이 하나님의 형상을 따라 지음받았다는 사실에 있습니다. 사람은 자신을 온 세상 만큼 값진 존재로 여겨야 합니다. 더 나아가 다른 이들을 그렇게 여겨야 합니다. 사람은 어떤 경우에도 수단이 되어서는 안됩니다.

• 정치적 보복
오늘의 본문은 다윗의 통치 시기에 벌어진 어두운 단면을 보여주고 있습니다. 21장에 배치되어 있기는 하지만 사실은 그의 통치 초기에 벌어진 일로 보입니다. 그러나 정확히 그 때를 알 수는 없기 때문에 성경의 순서를 따라 이야기를 재구성해보겠습니다. 사람들은 이 본문에 별로 주목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이 음울한 이야기가 성경에 기록된 까닭이 분명히 있을 겁니다. 블레셋과 겨뤘던 길보아 산 전투에서 사울과 그의 아들 요나단이 죽은 후, 다윗은 명실상부한 이스라엘의 왕이 될 수 있었습니다. 권력 이양기의 혼돈도 시간이 가면서 잦아들었고,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옮김으로써 다윗은 확고한 토대 위에 자기 권좌를 세울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불미스러운 일도 많이 일어났습니다. 밧세바를 취하기 위해 그의 남편 우리아를 격전이 벌어지는 곳에 보내 죽게 한 것은 다윗의 일생의 큰 오점으로 남았습니다. 아들 압살롬의 반란도 제압되었고, 세바의 반란도 진압되었습니다.

그러나 전쟁은 땅을 피폐하게 만드는 법입니다. 춘추전국시대의 참상을 보았던 노자는 "군대를 일으켰던 곳에는 가시덤불이 자라고 큰 군대가 지나간 뒤에는 반드시 흉년이 든다"(師之所處, 荊棘生焉, 大軍之後, 必有凶年, 도덕경 30장)고 말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가시덤불이 꼭 너도밤나무과의 상록 활엽 교목을 이르는 것이라고 생각할 것 없습니다. 흉흉한 인심, 척박해진 대지, 참혹한 기억 등이 모두 가시덤불입니다. 세상의 모든 전쟁은 반생명적입니다.

많은 전란을 겪은 이스라엘에도 흉년이 찾아왔습니다. 흉년이 세 해 동안이나 계속되었다고 합니다. 흉년은 인간이 어쩔 수 없이 겪어내야 할 자연재해일 수도 있지만, 어쩌면 인간이 빚어낸 참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다윗은 하나님 앞에 나아가 곡절을 여쭸습니다. 그러자 "사울과 그의 집안이 기브온 사람을 죽여 살인죄를 지은 탓"(삼하21:1)이라는 대답이 돌아왔습니다. 본래 기브온 사람들은 아모리 족 가운데서 살아남은 이들이었는데, 사울의 일족이 그들을 다 죽이려고 하였고 그들의 한이 하늘에 사무쳐 흉년이 닥쳐왔다는 것이었습니다. 다윗은 기브온 사람을 불러다가 어떻게 해야 그들의 원한이 풀려 이스라엘을 위해 복을 빌어주겠는가 묻습니다. 기브온 사람들은 사울 집안과의 갈등은 금이나 은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라면서 사울의 일족 가운데 남자 일곱 명을 넘겨주면 그들을 나무에 매달아 죽임으로 억울함을 풀겠다고 대답합니다. 다윗은 사울과 리스바 사이에서 태어난 두 아들과 사울의 딸 메랍과 아드리엘 사이에서 태어난 아들 다섯을 기브온 사람들에게 넘겨줍니다. 결국 그들은 하루 아침에 죽임을 당했고 나무에 매달린 신세가 되었습니다.

이 이야기는 제게 매우 불편하고 불쾌하게 다가옵니다. 우선 억울한 일을 풀기 위해 또 다른 폭력에 의지하는 것이 합당한가 하는 의구심이 들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그보다 내 마음이 더 혼란스러운 것은 이 일이 고도의 정치적 행위처럼 보이기 때문입니다. 다윗은 사울 가문이 권토중래를 노리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을 느꼈는지도 모릅니다. 그러던 차에 삼 년 흉년이 들었고, 다윗은 그 흉년이 기브온 사람들을 죽인 사울의 죄 때문이라는 하늘의 응답을 받았다고 선전했습니다. 심정적으로 사울 가문을 그리워하던 이들도 국가에 닥쳐온 재난 앞에서 그들을 함부로 두둔하기는 어려웠을 겁니다. 이 단락을 읽을 때마다 다윗이 기브온 사람들의 손을 빌어 사울 가문을 제거한 것이 아닐까 하는 의문이 들곤 합니다.

• 어머니의 한
그런 후에 등장하는 것이 리스바입니다. 그러지 않아도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살던 그는 졸지에 생때같은 아들 둘을 잃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을 빙자한 폭력이었습니다. 전형적인 희생양 만들기였습니다. 자식을 잃은 어머니의 마음을 뭐라 표현할 수 있겠습니까? 하지만 리스바가 할 수 있는 일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그 막강한 권력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단 말입니까? 하늘에 호소할 수밖에 없습니다. 리스바는 죽임을 당한 자기 두 아들과 메랍의 다섯 아들들의 시신을 거두어다가 너럭바위 위에 올려놓고는 굵은 베로 만든 천을 쳐 놓았습니다. 보리를 거두기 시작할 때로부터 그 주검 위로 가을 비가 쏟아질 때까지, 리스바는 그 시신들 곁에 머물렀습니다. 생각만 해도 스산한 광경입니다. 보리를 거둘 때가 대략 4월 경이고 가을 비가 내릴 때가 9-10월 경이라고 본다면 거의 반 년에 해당합니다. 리스바는 낮에는 공중의 새가 그 주검 위에 내려 앉지 못하게 하고, 밤에는 들짐승들이 얼씬도 하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어마어마한 집념입니다. 세월이 가면 아픔이 스러질 법도 하건만 리스바의 한은 스러지지 않았습니다.

리스바를 나는 '뒤집힌 안티고네'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안티고네는 그리스 비극작가인 소포클레스의 작품 제목인 동시에 주인공의 이름입니다. 테바이의 왕이었던 오이디푸스가 자기가 저지른 운명적인 죄를 자책하며 스스로 눈을 찔러 실명한 채 세상을 떠돌자, 아들 둘은 왕위를 계승하기 위해 다투었고 그 싸움 끝에 둘 다 죽고 맙니다. 그러자 삼촌인 크레온이 왕이 되었고, 그는 테베에 반역했던 왕자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들판에 버려두고 매장하지 말라는 포고령을 내립니다. 그러나 안티고네는 자기 오라비의 시신을 차마 들짐승들의 밥으로 내줄 수가 없어서 시신을 수습하여 매장해줍니다. 그 사실이 발각되어 안티고네는 왕 앞에 끌려옵니다. 크레온은 왕의 포고령을 어겼다며 안티고네를 혹독하게 몰아붙이지만 안티고네는 신의 법에 따랐을 뿐이라고 말하면 자기 운명을 받아들입니다. 안티고네는 지하 감옥에 갇힌 채 죽습니다. 안티고네가 오라비의 시신을 매장했다가 어려움을 겪었다면 리스바는 시신 매장을 거부했기에 체제를 흔들었다고 볼 수 있습니다.

리스바의 존재는 다윗은 물론이고 이 일에 연루된 모든 사람들에게 큰 부담이 되었습니다. 그의 한을 외면하고는 그 땅에 진정한 평화가 깃들 수 없음을 알았기 때문일까요? 만시지탄은 있지만 다윗은 필요한 조치를 취합니다. 그는 길르앗의 야베스로 가서 사울의 뼈와 그의 아들 요나단의 뼈를 그 주민에게서 찾아오라고 부하들에게 지시합니다. 그리고 리스바가 지키고 있던 그 무고한 자들의 뼈까지도 수습해서 사울의 아버지 기스의 무덤에 합장하도록 했습니다. 이 이야기의 마무리는 의미심장합니다.

"사람들이, 다윗이 지시한 모든 명령을 따라서 그대로 한 뒤에야, 하나님이, 그 땅을 돌보아 주시기를 비는 그들의 기도를 들어주셨다."(21:14)

무슨 이야기입니까?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한이 풀렸다는 말이 아닐까요? 그들의 죽음이 무고한 죽음임이 드러났다는 말이 아닐까요? 예수님은 땅에서 맨 것은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땅에서 푼 것은 하늘에서도 풀린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이 있는데, 그것을 모른 척 외면하거나 덮어둔다고 문제가 저절로 해결되지는 않습니다. 하나님을 두려워해야 합니다. 잘못은 바로잡아야 합니다. 억울한 이들의 한은 신원되어야 합니다. 그래야 땅도 회복됩니다. 호세아 선지자의 말은 이런 사실을 장엄하게 드러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 날에 내가 응답할 것이다. 나 주의 말이다. 나는 하늘에 응답하고, 하늘은 땅에 응답하고, 땅은 곡식과 포도주와 올리브 기름에 응답하고, 이 먹거리들은 이스르엘에 응답할 것이다."(호2:21-22)

• 긍휼히 여기소서
엘리어트는 <황무지>에서 4월은 가장 잔인한 달이라고 노래했습니다. '죽은 땅에서 라일락을 키워내고/추억과 욕정을 뒤섞고/잠든 뿌리로 봄비를 깨운다'. 우리는 이제 4월에 이 시를 낭송하기 어렵습니다.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지 벌써 일년이 되어 가지만, 진실은 드러나지 않았고, 책임자들에 대한 처벌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유가족들은 여전히 피눈물을 흘리고 있습니다. 거짓말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거짓말 하고, 도둑질 하는 사람들은 여전히 도둑질 하고, 살인을 하는 이들은 여전히 살인을 저지르고 있습니다. 불의의 공모자들은 여전히 뻔뻔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거리를 활보합니다. 봄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냉랭합니다. 우리 마음의 봄은 아직 오지 않았습니다. 사람들의 심성은 점점 메말라가고 급기야 황폐해지기에 이르렀습니다. 고통 가운데 울고 있는 이들을 조롱하는 이들이 많습니다. 다른 것 없습니다. 아무리 아프더라도 진실이 드러나야 합니다. 그래야 생명을 존귀히 여기는 새로운 세상의 문을 열 수 있습니다.

이 땅의 리스바들의 한이 신원되지 않는 한 나라의 미래는 없습니다. 외면하고 싶고, 빨리 덮어버리고 싶어도 그럴 수 없습니다. 사울 일족의 억울한 죽음의 실상이 드러나고, 그들의 주검이 정중하게 매장되었을 때 그 땅의 흉년이 그쳤습니다. 하나님이 땅의 소리에 응답하셨습니다. 우리가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라면 이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의 은총이 오늘 눈물 짓고 있는 모든 이들에게, 고통 가운데 있는 이들에게, 그리고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아멘.
등 록 날 짜 2015년 04월 12일 11시 21분 30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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