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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롬11:25-36

by 【고동엽】 2022. 7. 6.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는다
롬11:25-36
(2015/6/7)

[형제자매 여러분, 나는 여러분이 이 신비한 비밀을 알기를 바랍니다. 그것은 여러분이 스스로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일이 없게 하려는 것입니다. 그 비밀은 이러합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 그것은 성경에 이렇게 기록되어 있는 바와 같습니다. "구원하시는 분이 시온에서 오실 것이니, 야곱에게서 경건하지 못함을 제거하실 것이다. 이것은 그들과 나 사이의 언약이니, 내가 그들의 죄를 없앨 때에 이루어 질 것이다." 복음의 관점에서 판단하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여러분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지만,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전에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여러분이, 이제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습니다. 이와 같이, 지금은 순종하지 않고 있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여러분이 받은 그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는 자비하심을 입게 될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모든 사람을 순종하지 않는 상태에 가두신 것은 그들에게 자비를 베푸시려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부유하심은 어찌 그리 크십니까?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은 어찌 그리 깊고 깊으십니까?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판단을 헤아려 알 수 있으며, 그 어느 누가 하나님의 길을 더듬어 찾아낼 수 있겠습니까? "누가 주님의 마음을 알았으며, 누가 주님의 조언자가 되었습니까?" "누가 먼저 무엇을 드렸기에 주님의 답례를 바라겠습니까?"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

• 메르스 공포
주님의 은총과 평화가 우리 가운데 함께 하시기를 빕니다. 참 곤고한 세월입니다. 순국선열들의 고귀한 희생을 기억해야 하는 이즈음에 우리는 메르스 즉 중동호흡기증후군이라는 전염병에 시달리고 있습니다. 어디를 가나 사람들은 메르스 이야기를 합니다. 엊그제 전철을 탔는데, 중년의 여인들이 마치 접선을 하듯 마스크를 건네는 모습을 보기도 했습니다. 교회에 손 세정제를 비치하려고 했지만 며칠 동안 아무 데서도 구할 수 없었습니다. 더 심각한 문제도 있습니다. 미군 부대에 탄저균이 배달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놀랐는데, 미군 기지 내에서 생화학 실험이 지속적으로 이루어졌다는 보도도 나왔습니다. 우리도 모르는 사이에 이 땅에서 죽음의 공포가 심겨지고 있었던 것입니다. 세상 어디에도 마음 둘 곳이 없습니다. 제 사는 곳에서 편안하게 지낸다는 뜻의 단어 안도安堵의 본래 의미는 '편안한 울타리 속'입니다. 지금 우리는 안도감을 누릴 여유도차 없습니다.

폴란드 출신의 사회학자 지그문트 바우만(Zigmunt Bauman, 1925~ )은 '유동하는 공포'가 현대세계의 특징이라 말했습니다. '유동하다'라는 단어는 액체를 뜻하는 'liquid'를 번역한 것입니다. 그는 인간에 대한 낙관론이 지배하던 근대 세계가 확실성의 시대였다면, 현대는 불확실성의 시대라고 말합니다. '리퀴드'라는 단어은 '여기저기 스미는', '어느새 젖어드는' 등의 의미를 거느리고 있습니다. 느낌을 아시겠지요? 공포가 스멀스멀 사람들 사이를 파고들고, 나도 모르는 사이에 그 속에 젖어드는 겁니다. 뭔가 불길한 느낌이 들기는 하는데, 그래서 공포스러운데 위험의 정체를 알 수도 없고, 형태도 불분명하기 때문에 포착할 수도 없습니다. 메르스라는 질병은 우리에게 너무도 생소한 병입니다. 게다가 이게 어떤 경로로 어떻게 퍼지는지도 잘 알지 못했습니다. 정부나 방역당국이나 언론도 우왕좌왕하고 있습니다. 그러자 이런저런 괴담까지 퍼졌습니다. 초동 대처만 잘 했더라면 이런 상황에까지 내몰리지는 않았을 것입니다. 국가가 더 이상 우리들을 지켜줄 능력도 의사도 없는 것 같아 사람들은 더욱 불안해 합니다.

어떻게 해야 이 상황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요? 정확한 실태와 실상을 파악하고, 필요한 대책이 제시되어야 합니다. 예수님은 거라사의 광인을 만났을 때 귀신에게 "네 이름이 무엇이냐?"고 물으셨습니다. 그러자 그는 '레기온'이라고 대답합니다. 이름을 안다는 것은 그 실체를 파악했다는 말입니다. 실체도 불분명하고 따라서 파악할 수 없는 유동하는 공포를 제거하기 위해서는 정확한 지식이 필요합니다. 예수님은 레기온을 꾸짖어 물리치셨습니다. 홍수로 불어난 물에 슬그머니 오폐수를 방류하는 악덕업자들처럼, 국민들이 느끼는 이 공포 뒤에 숨어 슬그머니 불의한 일들을 숨기려는 이들도 있습니다. 지금은 두루 위험한 시대이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우리 삶이 계속되어야 한다는 사실입니다. 눈 앞의 일들이 우리 시선을 온통 사로잡을 때에도 믿는 이들은 큰 세계에 자꾸 주목해야 합니다. 그래야 길을 잃지 않을 수 있습니다.

• 구원의 경륜
오늘 본문은 바울 사도의 신학적 고심의 결과물입니다.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의 교회는 이방인 신자들과 유대인 신자들이 공존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복음 안에서 하나가 되어야 했지만 물과 기름처럼 섞이지 못한 채 버성기고 있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여전히 옛 신앙의 자장 안에 머물고 있었고, 자기들의 몸과 마음에 새겨진 전통의 지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할례와 안식일 준수 등의 문제를 그들은 쉽게 포기할 수 없었고, 이방인 신자들은 그런 그들의 집착을 이해해주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러한 차이를 서로 인정하고 존중할 수 있을 만큼 성숙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같음을 지향하지만 서로 다른 것은 남겨둔다'는 뜻의 '구동존이求同存異'는 중국의 외교정책을 설명할 때 사용하는 단어입니다만, 모든 인간관계에도 적용될 수 있습니다.

로마교회 뿐만 아니라 이방인 신자와 유대교 출신의 신자들의 갈등은 교회에 심각한 위협이 되었습니다. 이방인 신자들은 유대인들의 과거 집착을 용납할 수 없었고, 유대인 신자들은 이방인 신자들의 자유로움을 용납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바울의 고민은 이 지점에서 깊어졌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하나님의 뜻하신 바가 무엇인지를 확연하게 깨닫게 되었습니다. 바울은 그것을 '신비한 비밀'(25)이라고 말합니다. 그것은 두 가지입니다.

"이방 사람의 수가 다 찰 때까지 이스라엘 사람들 가운데서 일부가 완고해진 대로 있으리라는 것과, 온 이스라엘이 구원을 받게 되리라는 것입니다."(25b-26a)

하나님은 유대인들의 완고한 마음 때문에 마음이 아프지만 그들을 아주 버리지는 않으셨다는 것입니다. 에스겔이 보았던 비전을 가지고 설명해보겠습니다. 에스겔은 성전 안에서 벌어지는 참람하기 이를 데 없는 일들을 비전을 통해 봅니다. 성전은 우상숭배와 탐욕의 전당으로 변해버리고 말았습니다. 그때 하나님의 영이 성전 문지방을 떠나셨습니다(겔10:18). 하지만 그렇다고 하여 하나님이 성전을 아주 버리신 것은 아닙니다. 시련을 통해 이스라엘 백성들을 단련하신 후에, 하나님의 영은 동문을 통해 성전으로 들어가십니다(겔43:4).

하나님의 영의 떠나심과 돌아오심 사이에 벌어지는 일은 두 가지입니다. 하나는 무도한 여러 민족들에 대한 심판입니다. 다른 하나는 시련을 통한 이스라엘의 정화입니다. 이것이 에스겔이 본 비전입니다. 그런데 바울의 비전도 이와 유사하지만 조금 다른 부분도 있습니다. 그 과정은 이러합니다. 일단 유대인들은 자기들에게 전해진 복음을 거부했습니다. 그러자 복음은 이방인들에게 넘어갔습니다. 하지만 때가 차면 완고해졌던 유대인들의 마음이 부드럽게 풀려 마침내 주님을 영접하게 될 것입니다. 그때 복음의 기쁨이 모두를 사로잡게 될 것입니다. 그 과정이 참 일목요연합니다. 마치 물이 흘러가다가 장애를 만나면 그것을 휘돌아 나가고, 움푹 패인 곳을 만나면 그곳을 가득 채워주고 흐르는 것처럼 복음은 그렇게 유장하게 전개되리라는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 속에서 벌어지는 일입니다. 그렇기에 앞서 이방인 신자들이 복음을 먼저 받아들였다 하여 교만해지면 안 된다는 것이지요.

• 희망의 뿌리
바울은 하나님의 구원 섭리를 두 가지 관점에서 설명합니다. 복음의 관점에서 보면 이스라엘 사람들은 이방인들이 잘 되라고 하나님의 원수가 되었다는 것입니다. 이 말은 참 조심스러운 말입니다. 결과적으로 그렇게 되었다는 말이지 하나님이 일부러 그렇게 만드셨다는 말이 아닙니다. 바울은 11장의 앞부분에서 이스라엘의 허물 때문에 구원이 이방 사람들에게 이르렀고, 그것이 이스라엘 사람들에게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켜 그들이 바로 서는 계기로 작용했다고 말합니다.

하나님은 인간의 죄와 허물과 실수까지도 구원을 위한 계기로 삼으십니다. 하나님이 일하시는 방식을 온전히 이해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깝습니다. 우리를 중심으로 이끌기 위해 가장 먼 우회로를 선택하기도 하십니다. 출애굽 공동체는 가장 가까운 지중해 해안길이 아니라 멀고 먼 광야길을 걸어야 했습니다. 우리가 가장 소중히 여기던 것들이 덧없이 사라지고, 삶의 버팀목이라 여기던 것들이 속절없이 무너져내릴 때, 우리 발이 깊은 수렁 속으로 빠져드는 것 같은 때야말로 하나님의 신비한 사랑과 만날 좋은 기회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놀라운 섭리를 이렇게 표현합니다.

"이스라엘의 허물이 세상의 부요함이 되고, 이스라엘의 실패가 이방 사람의 부요함이 되었다면, 이스라엘 전체가 바로 설 때에는, 그 복이 얼마나 더 엄청나겠습니까?"(11:12)

택하심을 받았다는 관점에서 판단하면, 유대인들은 조상 덕분에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사람들입니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과 맺은 언약에 신실하신 분이십니다. 죄지은 백성들을 하나님이 외면하는 것처럼 보일 때도 있지만, 자기 자식을 버릴 수 없는 부모처럼 하나님은 그의 백성을 완전히 버리지는 않으십니다. 성경에서 언약에 바탕을 둔 사랑을 일컫는 말은 '헤세드'입니다. 헤세드야말로 우리 구원의 근거입니다. 금방 이야기한 이 대목을 유진 피터슨의 '메시지 성경'은 이렇게 간결하게 번역하고 있습니다.

"메시지의 복된 소식을 듣고 받아들인 여러분의 입장에서 보면, 유대인들이 마치 하나님의 원수처럼 보일 것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전체 목적이라는 원대한 시각에서 보면, 그들은 여전히 하나님의 가장 오래된 친구입니다."(11:28, 메시지 성경)

이쯤 되면 하나님의 구원의 경륜을 조금은 눈치챌 수 있지 않습니까? 바울은 이제 결정적인 말을 합니다. "하나님께서 주시는 고마운 선물과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11:29) 철회되지 않은 부르심, 바로 이것이 우리 희망의 뿌리입니다. 종교개혁자 마틴 루터는 동료인 멜랑히톤에게 보낸 편지에서 나중까지 논란이 된 표현을 씁니다. "대담하게 죄를 지으라"(Pecca Fortiter)는 구절이 그것입니다. 죄를 부추기는 말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은총을 신뢰하면서 용감하게 살라는 것입니다. 다만 자신의 약함과 오류 가능성을 인정하라는 것입니다. 이 말은 하나님의 은총에 대한 깊은 신뢰가 전제되어 있습니다.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택하신 하나님의 부르심은 철회되지 않습니다. 탕자는 아버지의 집을 떠났지만 아버지의 마음은 늘 그와 동행하고 있었습니다. 보이지 않아도, 느낄 수 없어도, 때로는 하나님이 진노하신 듯이 보여도 하나님은 우리를 먼저 포기하시는 법이 없습니다. 이 사랑이 우리를 살게 합니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것은 그 사랑을 믿기 때문입니다.

•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
바울 사도는 지금까지 했던 말을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던 이방인들이 이스라엘 사람의 불순종 때문에 하나님의 자비를 입게 되었던 것처럼, 지금 하나님께 순종하지 않는 이스라엘 사람들도 마침내 이방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자비를 보고 회개하여 마침내 자비하심을 얻게 될 것이라는 것입니다. 이런 것을 일러 변증법적 사고라고 할 수 있을까요? 이스라엘 사람들의 불순종-->이방인에게 주어진 자비-->이스라엘 사람들에게도 주어지는 자비하심이 정반합正反合의 논리 속에서 설명되고 있습니다.

바울은 이런 사고에 능합니다. 빌립보 교회에 보내는 편지에서도 비슷한 논리 구조가 등장합니다. 바울은 감옥에서 그가 갇혔다는 소식을 들은 사람들 가운데 여럿이 하나님의 말씀을 겁 없이 담대하게 전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좋은 뜻으로 전하는 이들도 있었지만 어떤 이는 바울에 대한 경쟁심으로 곧 불순한 동기에서 그리스도를 전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바울은 전혀 염려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렇게 말합니다.

"그렇지만 어떻습니까? 거짓된 마음으로 하든지 참된 마음으로 하든지, 어떤 식으로 하든지 결국 그리스도가 전해지는 것입니다. 나는 그것을 기뻐합니다. 앞으로도 또한 기뻐할 것입니다."(빌1:18)

그들의 동기가 어찌 됐든지 전파되는 것이 그리스도라면 좋은 일 아니냐는 것입니다. 사람들은 누가 주도권을 잡느냐에 집중하고 있지만, 바울은 그리스도가 전파되는 일을 중심에 놓고 있습니다.

사도 바울은 인간의 시기심조차 하나님의 뜻을 구현하는 수단이 된다는 사실을 알아차리고 있습니다. 그렇기에 그는 하나님의 부유하심을, 하나님의 지혜와 지식을, 그리고 하나님의 판단을 찬양하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는 하나님이 역사하시는 세계의 장엄한 신비 앞에 서 있습니다. 정현종 선생님의 산문집을 읽다가 '두터운 삶'이라는 단어와 만났습니다(정현종, <두터운 삶을 위하여>, 문학과 지성사, 2015년 4월 20일, p.33-47). 두터움과 대비되는 말은 '얄팍함'입니다. 이 두 단어는 말이나 행동, 지식, 슬픔, 연민 등 어디에 적용해도 그 의미가 확연히 드러납니다. 가벼운 말과 진중한 말, 들뜬 처신과 신중한 행동, 피상적인 지식과 깊이 있는 지식, 통속적인 드라마를 보면서 흘리는 값싼 눈물과 우리를 숭고한 차원으로 인도하는 깊은 눈물, 안 됐다고 느끼는 정도의 연민과 애를 태우는 연민 등이 그것입니다. 삶의 아름다움은 고통과 슬픔이 없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통해 삶을 두텁게 할 때 빚어집니다. 신앙은 우리를 두터운 삶으로 인도합니다. 나의 이익만을 위해 사는 이기적 삶을 넘어 타자들의 행복을 지향하는 삶으로 나아가도록 하기 때문입니다. 땅의 현실을 넘어 하늘의 뜻을 받들려 할 때 우리 삶은 깊어지고 두터워집니다.

지금 우리는 불확실성의 시대를 살고 있습니다. 두려움과 공포가 일상이 된 시대입니다. 우리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자기 외피를 단단하게 만드는 일에 몰두합니다. 돈과 권력과 지위로 우리를 감싸려 합니다. 하지만 그것은 우리 삶을 더욱 얄팍하게 만드는 일임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인간의 영혼은 하나님의 지혜와 잇대어 있을 때 비로소 든든해지는 법입니다. 두려움과 공포는 자꾸만 우리 시야를 협소하게 만들지만, 믿음은 우리 시선을 더 깊은 곳으로 이끌어 갑니다. 주님의 은총이 우리를 지키시기를 빕니다. 이 모든 곤고한 시간이 우리를 하나님께로 더 가까이 이끄는 계기로 작용하기를 빕니다. 그래서 우리도 바울처럼 고백할 수 있기를 빕니다.

"만물이 그에게서 나고, 그로 말미암아 있고, 그를 위하여 있습니다. 그에게 영광이 세세에 있기를 빕니다. 아멘."(36)등 록 날 짜2015년 06월 07일 11시 16분 19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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